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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제 6 장 요한 순교
[대 지]
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실(1-6)
二.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견함(7-13)
三. 헤롯의 방탕과 요한의 순교(14-29)
四. 오병이어의 이적(30-44)
五. 바다 위로 걸어오심(45-52)
六. 병자들을 고치심(53-56)
[본문강해]
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심(1-6)
. 6:1-2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않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예수님이 고향에서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 누가복음4:16-22에는 예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선지의 글을 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회당은 헬라 원어로 (쉬나고게)인데 이것은 "모아들이다, 모으다, 모이게 하다"는 뜻이 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고, 거기에서만 제사를 드렸다. 회당은 성전과는 달리 여러 동네에 분포해 있었으며 회당은 구약 성경을 읽기로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장소이었다. 예수께서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 지혜와 권능에 대단히 놀랐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씀을 가르치셨고, 신령한 지혜로써 성경의 참 뜻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6:3-4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마리아의 아들 목수 누가복음4:22에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다. 본절에서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목수가 아니냐고 한 것은 그 당시 목수의 직업을 천한 직업으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멸시하는 투로 한 말인 것 같다.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마태복음13:55에 주의 형제 네 사람을 기록할 때에 '요세 '를 '요셉 '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이 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들이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가족에 대하여도 외부적 생활 면을 많이 보고 잘 알기 때문에 그 육신적인 선입관념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신령한 면과 그가 가르치신 진리의 교훈이 가리워져 보지 못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종들을 대찰 때 그 종의 외부적인 면과 육신적인 면만을 보게 되면 그 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가 가리워져 보지 못하게 된다. 특히 그 사람과 친분이 깊고, 그의 육신적인 면을 잘 아는 경우일수록 더욱 배척하기 쉽다. 선지자들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육신적인 면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신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면과 그를 통해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만 받아서 믿었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고 영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육신적인 면을 보지 말고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만 보고 존경하며 받들어 나아가야 한다.
둘째, 그들의 그리스도관(基督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올 때에는 어디로부터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요7:27).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가르쳤으므로 진리를 잘못 깨달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과(미5:2),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과 십자간에서 고난받으실 것 등이 모두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없는 말로 잘못 가르쳤다. 일반 신자는 지도자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 크며 성도는 성경을 바로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진 자들은 하나님의 큰 권능이 나타나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예수님이 권능을 행치 않았다. 이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않은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고향 사람들이 참 진리를 받지 않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상히 여기시며 다른 동네로 가셔서 전도하셨다.
二.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견함(7-13)
. 6: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 두 제자를 둘씩 파견하였다. 둘씩 둘은 증거자의 숫자이다(계11:3). 전도하러 나갈 때에 혼자 나갈 수도 있고 여럿이 나갈 수도 있으나 둘 씩 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요 능률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보내실 때에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그들에게 주셨다 마태복음10:1에는 귀신을 좇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다. 이는 육신의 병과 약한 것을 고쳐서 굉장한 이적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복음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내며, 영적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표적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 자체에도 능력이 있고(롬1:16), 또 복음 전하는 자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면 마귀에게 붙들린 심령이 자유케 되며, 병든 심령과 연약한 심령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능력을 써서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한다.
. 6:8-9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주머니 여행할 때에 방이나 다른 것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자루와 같은 것이다. 전도자가 전도할 때에 현재 입은 옷과 신고 있는 신 외에 다른 것은 준비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사람을 통해서나 혹은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필요한 것을 주신다.
전대는 돈을 넣는 것이다. 전대의 돈을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은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나가라는 것이다. 의식주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다. 또 물질이 풍성하여 그것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며 결국 실패하고 만다. "지팡이를 가지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나가라는 것이다. 여기 지팡이는 능력의 상징으로 취급했다. 마태복음10:10에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떤 유력한 사람이나 세력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 6: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충성 되이 복음을 전하면 믿는 사람이 나오게 되고 믿는 사람이 나오면 그 중 합당한 자를 찾아서 그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전도할 때에 유력한 자나 돈 많은 사람을 찾아 들어가지 말고 합당한 자를 찾아서 그 집에 머물러야 한다.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전도자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협력하고 받드는 사람이다. 어느 곳에서나 전도자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일심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영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나오게된다.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자연히 전도자를 영접하여 그에게 협력하고 도와주게 된다. 그가 곧 합당한 자이다.
전도자가 합당한 자를 만나 그 집에 머물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다가 더 좋은 곳이 있다고 그 곳으로 옮기면 안 된다. 또 조금 불편하거나 섭섭한 일이 생겼다고 하여 다른 데로 옮겨도 안 된다. 복음 안에서 사귀고 복음 안에서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참고 변함이 없이 나아가야 한다.
.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복음을 전할 때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난다.
첫째, 일꾼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다. 둘째, 복음을 반대하고 전도자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이 둘째 사람에 대하여는 작은 것 한 가지라도 얻거나 신세지지 말고 먼지까지 떨어버리라는 뜻이다. 전도자가 양심을 쓰지 않고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하면 복음이 가리워 진다. 전도자는 특히 물질 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한다. 먹어서 안될 것은 주어도 먹지 말고, 받아서 안될 것은 주어도 받지 말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 진다.
이에 대한 또한 가지 뜻은 복음을 거절하므로 멸망하는 책임을 그들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전도자는 복음 전하는 책임을 다했으므로 그들이 멸망하는 일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행13:51, 18:6참조).
. 6: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 할 때에 주님이 주신 권능을 써서 많은 귀신을 좇아내며 병을 고쳐주었다.
기름을 발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 당시에는 기름과 포도주를 약(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약5:14, 딤전5:23참조). 따라서 이것은 약을 사용하며 기도하라는 뜻이 있다. 히스기야왕이 병들어 기도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무화과 반죽을 종처에 놓으라고 했다(왕하20:7). 그러므로 성도가 병들었을 때 약을 사용하며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 한 가지 신령한 뜻은 기름이 성령의 은혜를 상징하므로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이다.
三. 헤롯의 방탕과 요한의 순교(14-29)
. 6:14-15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예수님의 능력 있는 역사와 큰 표적들이 나타나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또 제자들의 전도에 의해서도 많은 사람에게 주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전해들은 헤롯은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 살아나 그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 라고도 했다(마16:14 참조).
. 6: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헤롯이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를 듣고 자기가 목베어 죽인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하며 두려워했다. 헤롯은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하여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싸여서 다른 사건이라도 자기와 연관시켜 생각하므로 놀란 것이다.
. 6:17-1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말림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본절에서 29절까지는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내용이다.
헤롯은 대헤롯의 아들인 헤롯 안디바스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이복(異腹)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데리고 살았다. 헤로디아는 대헤롯 왕의 아들 아리스토보르의 딸로 빌립과 헤롯 안디바스 왕의 조카딸이다. 그녀는 처음에 자기 삼촌 빌립에게 시집갔고, 다음에 다른 삼촌인 헤롯 안디바스 왕에게 시집갔다. 헤롯 집안의 혼인 관계는 불륜과 추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내놓고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헤롯왕을 면책했다. 그 일로 인하여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감옥은 사해 동편 베뢰아의 남단 마케루스 성중의 감옥이라고 한다.
. 6:19-20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헤로디아는 음란하고 잔인한 여자였다.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아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게 되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세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헤롯은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여겨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하면서도 달게 들었다. 헤롯왕은 그때가 회개할 좋은 기회였으나 오히려 그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여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은 그가 죄의 종과 마귀의 종이 된 증거이다. 누구든지 옳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길을 버리고 죄의 길로 걸어가는 자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노선과 헤롯의 노선이 나타나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의만 세워 나가다가 순교했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서 괴로워하면서도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범했다. 세례 요한은 의를 위해서 생명 내어놓고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마태복음11:7-8에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했다.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사람의 의견이나 풍조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며 또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안일한 생활을 하기 위해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고 의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고 나가는 극강 담대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헤롯이 요한에게 책망을 받은 것은 어두운 가운데에 빛이 비추어 들어간 것과 같다. 에베소서5:13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빛(생명의 빛)이 비추어 들어가는 것이다.
헤롯왕이 요한의 책망을 받아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빛을 마음에 받아들여 그 여자를 내어버렸다면 생명의 빛 가운데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왕은 그 빛을 버리고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자신은 영적 감옥에 더 깊이 갇힌 것이다. 요한복음8:34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고 하였다. 헤롯왕은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 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롯이 자기의 생일을 당하여 음식을 많이 준비하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호화로이 연락하며 방탕했다. 이와 같이 연락주의에 빠져 방탕하는 것이 헤롯의 노선이다. 다니엘5:1-9에 벨사살왕이 귀인들과 여러 사람을 불러모아 잔치하다가 망했다. 디모데전서5:5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다. 헤롯이 이렇게 잔치하고 연락하고 방탕할 때에 마귀가 헤로디아의 딸을 통해서 들어왔다. 마귀는 이렇게 복잡하고 마음이 뒤숭숭할 때에 잘 들어온다. 그와 반면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순교할 때가 가까운 줄 알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따라서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영적 생명이 사는 길로 나아간 것이 세례 요한의 신앙 노선이다. 그때에 영의 자유, 영의 생명, 영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6:22-25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이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네가 구하는 것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요한을 원수로 여기는 헤로디아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헤로디아는 자기 딸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시켰다. 헤롯이 나라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맹세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 여아가 일시적으로 즐겁게 해준다고 해서 어떻게 나라절반을 줄 수 있겠는가! 또 그 여아 뒤에는 그 어미 헤로디아가 있고 헤로디아의 마음에는 요한을 죽이려는 앙심(마귀)이 있지 않은가! 방심 방탕하는 중에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허황된 맹세를 하였고 그로 인하여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 6:26-28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 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헤롯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심히 근심했으나 자기의 맹세한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여아가구한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여아에게 주게 했다. 이로 인하여 헤롯은 영원히 큰 죄인이 된 것이다. 그는 그 자신과 자기 지위가 우상이 되어 옳은 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잘못된 줄 알면서도 양심을 속이긴 세례 요한을 죽였다. 헤롯은 죄의 종이 되어 옳은 것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도 성경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양심을 어기며 나아가는 것은 다 죄의 종이 된 증거이다. 헤롯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했다하더라도 세례 요한을 죽이지 않을 수 있다. 자기가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를 세워 나가고자 했다면 세례 요한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자신의 명예가 떨어지고 낮아져도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므로 헤롯이 하나님께 영원한 복을 받았을 것이요 또 하나님이 높여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세례 요한을 죽여 불의의 길로 나아가다가 멸망했다.
. 6: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요한이 영광스러운 순교를 당하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장사했다. 이로써 세례 요한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간 것이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운 바 된 것이다(고후5:4). 그러므로 그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四. 오병이어의 이적(30-44)
.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께 낱낱이 보고 할 때 세례 요한이 순교 당한 것도 보고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일을 예수님께 바로 고하는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한다.
. 6:31-32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고 하셨다.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며 쉬는 생활은 영적 활력을 주입하는 것이다(막1:35, 눅5:16). 복잡하고 뒤숭숭한 곳에서는 마귀가 들어오기 쉬우므로 예수님 자신이 복잡한 곳을 피해 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마태복음6:6에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다. 우리는 언제나 한적한 곳, 은밀한 골방을 찾아서 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 6:33-34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것을 볼 때에 불쌍히 여기셨다. 우리도 이세 대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양 떼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거기에 대한 사명감을 깨달아야 한다.
. 6:35-36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큰 무리가 예수께 나아와 도(道)를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저녁이 되니 제자들은 이 큰 무리들의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라고 말씀드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들을 먹일 것은 전연 생각하지 못했다.
. 6: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때제자들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하고 반문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이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되므로 이백 데나리온은 상당히 많은 돈이었다. 따라서 이 대답은 우리에게는 그러한 돈이 없는데 어떻게 떡을 사다가 이 무리를 먹이겠읍니까 하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은 줄 수 있기 때문에 주라고 하신 것이다.
.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예수께서 너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도록 하셨다. 그때에 무리 중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자가 있어 그 사실을 예수님께 보고하니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적다 하시지 않고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고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다. 아무리 적고 보잘것없는 보리떡일지라도 현재에 네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 6:39-40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가져 오라 할 때 그 아이는 자기도 먹지 않고 예수께 바쳤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앉게 하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이 순종하여 백 명씩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히었다. 언제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 6:41-44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보리떡은 떡 중에 좋지 못한 하급 떡이요 물고기도 작은 것(큰 멸치 만한 것 )이지만, 예수님이 가져 오라 하실 때에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여 바쳤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면서 무리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순종하였고 무리들도 순종하여 백명씩 오십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그때에 큰 이적이 나타나 그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나 되었다.
남은 조각을 거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부스러기 하나라도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부스러기라도 필요하게 쓸 때가 있다. 먹은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아이가 한 끼 먹을 분량이었으나 예수님께 바치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어 크게도 하시고 많게도 하셔서 큰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열 두 바구니나 거두었다.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의 일을 잘 하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자기가 아무리 부족해도 현재 가진 그것을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께 바쳐서 충성을 다 하는 것이 귀한 믿음이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부족하고 적더라도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바치고 충성하여 일할 때 하나님의 만능의 역사가 나타나고, 큰 일이 성취되어 나아간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인간 지각에 지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일이 성공되어 나가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좋은 떡을 구하여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보리떡 같이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능력으로 일하셔서 그것으로 많은 죽어 가는 생명들을 살려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자기의 적은 정성, 적은 물질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난다.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하고, 자기 먹을 것은 제해 놓고 남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께 바칠 수도 없고, 바쳐도 하나님의 일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에게 있는 것을 가져 오라" 그리고 "나눠 주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현재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 바칠 것을 바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치 오병이어의 표적의 참 뜻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영적 양식으로 주셔서 우리 영혼을 살려나가실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영적 양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주셨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몸을 바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하면 우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어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운동의 비결은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같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바치는데 있다. 순종하고 바치면 여기에 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 희 바구니에 차게 된 것은 생명의 역사는 모자람이 없고 언제나 차고 넘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항상 이기고 계속해서 장성해 나가는 것이 영적 생명의 역사이다. 이사야 54:2에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창성해 나아가므로 좁지 않도록 장막 터를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널리 펴고 줄을 길게 하고 말뚝을 견고히 하라는 것이다.
五. 바다 위로 걸어오심(45-52)
. 6:45-47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 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예수님은 큰 역사를 나타내며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에는 자신의 영적 수입(靈的收入)을 위하여 홀로 고요히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곤 하셨다. 요한복음6:15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난 다음에는 마귀의 시험도 크게 온다. 많은 사람이 따르면서 높여 주는 일은 마귀의 시험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한 것도 큰 시험이었다.
예수님이 세상나라의 왕이 되면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세상 명예와 영광주의로 나아가고, 세상의 권세를 잡아 세상일을 하면 영적 일을 하지 못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시험을 이기려고 산으로 올라가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일하시고 초 일이 끝난 다음에도 기도하셨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그 일을 하고, 일을 마친 다음에도 기도해야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다. 마귀는 언제나 성도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세상적으로 높여주고 명예 영광심을 넣어주어 망하게 하려고 한다.
성도는 고난 당할 때보다 세상적으로 높아질 때가 더 위험한 때인 줄 알아야 한다. 벳새다는 가버나움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
. 6:48-49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그 밤에 제자들이 배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괴로이 노를 저으며 고난 당하는 상태를 예수님이 산에서 보셨다. 예수님이 그것을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영으로 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도 보셨다고 했다(요1:48 참조).
물결이 거세게 배에 부딪혀 올 때에 제자들이 죽을까봐 두려워한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이용하여 구원(생명)운동을 해나가시려고 하시는데 왜 죽게 내버려두시겠는가! 제자들이 죽으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나가는 구원 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 아닌가 ! 제자들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가치가있고 결코 죽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도 돌봐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에 살다가 사명에 죽어야 한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할지라도 아무 가치가 없다. 사명에 살다가 사명에 죽으신 예수님은 삼십 삼 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으나 영원히 가치 있는 삶을 사셨고, 영원히 가치가 있는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도와주시려고 바다 위로 걸어 오셨으나 제자들은 자기들을 죽이려고 오는 유령인 줄 알고 전리를 지르면서 무서워하였다. 살려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살려주려고 오신다. 예수님은 모든 시험, 모든 환난,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살펴주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이다.
밤 사경 그 당시 밤을 사경으로 나누어서 오후 육시부터 구시를 일경, 구시부터 십이시를 이경, 십이시부터 삼시를 삼경, 상시부터 육시를 사경이라고 했다. 유령의 헬라 원어 (판타스마)는 변화한 자란 뜻이 있는데 실체의 몸이 아닌 환상 혹은 영물 같은 것이다.
. 6: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고 안심을 주셨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을 주는 것은 급선무였다. 그때 제자들은 평소에 듣던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이신 줄을 깨달았으며 그 말씀을 받아 안심하게 되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마음에 안식과 평안이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을 때에 평안하고 마음이 안정되고, 감사가 나온다. 그때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낙원으로 변화된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으면 그 말씀치 우리 속에서 사실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히11:1).
. 6:51-52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요한복음6:21에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다. 예수님을 배에 모시면 바람과 물결도 문제가 없다. 바람과 물결이 주님 말씀에 즉시로 복종하여 바람이 그치고 물결은 잔잔해지고 배는 목적지까지 쉽게 갔다. 예수님을 모시기 전에는 아무리 힘을 써도 그 배가 가지 못하고 고생만 했으나 이제 주님을 모시고 나니 배는 홀연히 건너편까지 가게 된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을 모시고 주의 뜻대로 해야 형통한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오시고 바람과 물결도 주장하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심히 놀란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하면 놀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고도 마음이 둔하여져서 믿음에 서 있지 못한 것이다.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음이 둔하여지면 믿음에서 떠나게된다. 누가복음21:34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하였다.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은 방탕함과 술 취함 때문이요 또 생활의 염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3:8에는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했다. 강퍅이란 굳어졌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마음을 강퍅케 했으므로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제자들이 얼마 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을 직접 보았을 때에, 만물을 주관하시고 운행 (運行)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깨달았더라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조금도 놀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심히 놀란 것을 보면 마음이 둔하여져서 예수님을 바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마음이 둔해진 이유는 주의 역사와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경흘히 여겼기 때문이며, 말씀을 착념치 않고 흘러 떠내려보내고, 믿음으로 화합치 않고 육신 중심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六. 병자들을 고치심(53-56)
. 6:53-56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 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 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예수님이 탄 배는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다. 게네사렛 땅은 갈릴리 바다 서안,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평야이다. 그 지방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병자들을 침상채 메고 와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고 많은 병자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의 옷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받았다. 이는 예수님이 육신의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심령의 병을 고쳐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