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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되는 자료를 연설조 구어체로 바꾸는 형태를 보여주는 제시 모델(단, 일회성 본보기로만 제공되는 것이며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설교의 ‘본문의 구조 및 특성’ 안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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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율법주의로부터의 쉼
주제 : 복음, 은혜
성경 : 마 11:25-30
예배 :
장소 :
시간 :
※ 여기 제공되는 내용은 오직 본문에 관한 설명과 주해를 중심한 것입니다. 적용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내용은 본인이 만들어 채워야 합니다. 또한 ‘*’ 표시가 있는 문단은 내용의 핵심적인 주제이거나 또는 추천 인사이트입니다.
※ 본문의 구조 및 특성 : 이 부분의 내용은 본문의 특성이나 문맥상의 위치 또는 전체적인 배경 등의 전이해를 위한 것입니다. 참고 이해 정도로 보시되, 필요시 설교 본문 중에 설명 자료로 쓸 수도 있습니다. - 오늘 본문 28절 이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과 많은 강단에서 불행히도 매우 잘못된 관점에서 전해지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특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들의 일상적인 짐이나 또는 정서적인 짐으로 보고 전하는 말씀들은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를 외면하는 것이다. 적어도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그 ‘짐’이 마태복음 안에서 분명하게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율법의 멍에’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초점이 빗나간 설교를 막는 것이 바로 성경의 본뜻을 제대로 전하는 일이다. - 확장된 넓은 의미에서는 일상의 짐도 예수님이 져 주시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본문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온 것이며, 특별히 어떤 관점과 테두리 안에서 풀어내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 본 자료는 특별히 다른 자료들과는 달리 구어체로 바꾸고, 더 이상의 주석적 가필을 하지 않아서, 그대로 쓸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본보기로 제공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자료를 제공하게 되면 설교자가 사용하기는 더 쉬울지 몰라도 사실상 더 깊이 있는 내용은 포함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자료는 이 한 편의 본보기로만 일회적으로 제공된다(이후에도 때로는 구어체로 된 자료가 제공될 수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작성되었기 때문이고, 현재 이 자료와는 달리 주석적 가필이 되어 있는 자료로 나가게 된다). |
Structure A. 율법적 신앙으로부터 주님의 복음으로 (25-28절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B. 복음 - 쉬게 하시는 주님 (28절하-29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 율법의 멍에를 쉽게 만드시는 사랑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
Introduction
- e. g.) 미국 어느 교회에 나이 많으신 부친을 두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아버지도 은퇴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설교만 시작했다 하면, 자기 아버지 목사님이 꾸벅꾸벅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그러니...이 목사님이 교인들 보기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말씀을 드려도 잘 해결되지 않아서...이 문제가 이 목사님에게는 너무 심각한지라 그래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차에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할아버지 옆에 앉아 할아버지가 조실 때마다 잘 깨워드리면 매 주일 1달러씩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할아버지는 설교시간에 졸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어느 주일날인가는 이 할아버지 목사님이 아예 마음 놓고 푹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당황한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가서 자기 아들을 불러놓고 영문을 따졌습니다.
“얘야...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랬더니, 아들 왈....
“할아버지가 설교시간에 안 깨우고 얌전히 있으면 2달러 주신댔어요!”
― 여러분! 우리는 사실 우리의 육신 하나도 제대로 제어할 줄 모르는 인간일 뿐입니다. 육신이 피곤하면 그 눈꺼풀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입니다 !
오늘날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떻게 바르게 신앙생활할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모두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바르게 살고 싶지만 때로는 환경이, 때로는 자기 자아가 그렇게 바르게 살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 안 짓고 교회에 가보려고 하고, 이것저것을 해서 주님께 인정받고 싶지만, 그러나 내가 죄를 안 짓겠다고 죄를 안 짓게 됩니까? 내가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마음은 먹지만, 실제로는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매번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교회에 올 때에도 이런 갈등을 떨치지 못하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만 잔뜩 있는 부담스러운 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우리의 많은 일들을 잠깐 멈추고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며,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가르치시는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1st DT A. 율법적 신앙으로부터 주님의 복음으로 (25-28절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a)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Explanation
- 오늘 본문은 25절부터 끊어 읽게 됩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보기로 하고, 우선 28절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온 세상 전체를 편안히 쉬게 할 만한 이 웅대한 초청의 메시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이 말씀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조차 썩 제대로 이해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여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 지고 있는 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의 일로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서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그런 짐이 아닙니다. 자녀 문제로 한숨만 쌓이게 만드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저 훌륭한 청년과 결혼을 해야겠는데, 그 청년이 내 마음을 몰라 주어서 마음에 병이 들게 하는 그런 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세상 염려로 얻게 되는 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점의 짐입니다.
Illustration
- 이 말씀의 배경을 보자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적으로 잘 살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 나오는 12장의 내용 같은 것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성경에 장절이 매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문단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늘 본문과 12장의 이야기는 하나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2장에 보면, 안식일에 이런 것, 저런 것들을 행하면 아니 된다는 바리새인들의 시비 내용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그런 것들을 하게 되면, 그것이 모두 죄가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 나올 때 모든 죄와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필요에 국한되게 하고, 해야 하는 것은 최대로 하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법인데도, 그럼에도 이들은 최대한의 제한조치를 하고 반대로 허가조치는 최소한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백성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요구들은 하나님께 나오는데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곤하고 지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게 해주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 - 마태복음 23장 1-4절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주는 랍비가 않는 회당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메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유대교에서는 ‘율법의 멍에’라고 일컬었습니다.
➜ 그러니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멍에란 우리의 일상적인 짐이 아니라 바로 이 율법 때문에 메게 된 율법의 멍에를 말하는 것입니다.
Application
-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바로 율법의 많은 요구 때문에 지고 있던 멍에였습니다. 이것이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짐과 멍에를 지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 너희는 먼저 내게로 나아오라. 변화를 이루고 난 뒤에 나아오려고 하지 마라. 먼저 내게 나아오라. 그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 그러면 너희는 그 많은 율법적 요구, 곧 멍에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율법주의적 신앙으로부터 주님의 복음으로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의 다른 비유 말씀에서 세리가 주님께 나아올 때 어떻게 나아왔습니까? 주님 제가 세리인데. 이제 모든 것을 회개하고, 율법대로 다 행한 후에 주께 나아가겠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모두 이행했으므로 주께 나아옵니다∼ 이러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세리는 자기의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그대로 나아와서 주님을 만나 뵈옵고 그 다음에 변화되었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꾸미지 말고 위장하지 말고 외식하지 말고 내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됩니다. 열 두해 혈루증 앓던 여인은 그 병든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여러분, 병자가 병을 고친 다음에 병원에 갑니까? 아닙니다.
병원은 병자가 그 모습 그대로 오는 곳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여러분의 영적인 병을 모두 고치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사 되신 주님께서 그 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 나의 됨됨이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범죄하고 있어서 심중에 괴롭습니까? 내가 직분맡은 자로서 성경의 말씀을 다 따르지 못하여 그 직분의 짐을 무거워하고 있습니까? 그 일로 수고하는 것이 버겁습니까? 그대로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여러분의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Transition
이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와 짐이 바로 율법의 멍에와 짐이라면, 주님이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시는 분이신지 들어봅시다.
2nd DT B. 복음 - 쉬게 하시는 주님 (28절하-29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b)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Explanation
- 28절 하반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가 누구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께 나아오기만 하면 쉬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내가 쉬운 멍에 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멍에를 내 어깨 위에 올려놓지만 실제로 그 멍에를 가볍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은혜란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 힘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으로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서 물 위로 걷게 된 것은 주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 주의 명령이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베드로는 ‘내가 주께로 가겠습니다’ 하지 않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내 모습 이대로 나아온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면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Illustration
- 여러분 제가 내는 질문 하나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었습니까, 아니면 믿고 알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안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랬고,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랬고,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게 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의 내적인 발로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외부에서 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내미신 손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Application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논리에 맞는 순서입니까?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은 이 논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기초해서 선택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문제도 알고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알게 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믿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믿음조차 우리 밖, 곧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자기 눈꺼풀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믿음이 생기기 위하여 무슨 노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에 예수께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믿음도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라, 주님께로 오라, 그 모습 그대로 오라!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들은 결국 변화되었습니다.
-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율법주의는 변화된 후에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이지만, 복음은 먼저 나아와서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존재를 진정으로 만나서 체험하게 되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쉬게 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라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께로 먼저 나아와서 이렇게 주님을 만나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모든 짐을 가볍게 만들어 주시는 그 복음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Transition
이제, 그 율법의 멍에를 주님을 만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해 주시는 지도 봅시다.
3rd DT C. 율법의 멍에를 쉽게 만드시는 사랑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Explanation
- 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여기서 내 멍에는 쉽다라는 말에는 헬라말(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로 이런 뜻이 있습니다.
“잘 들어맞는다.”
멍에가 무엇입니까? 소의 어깨에 두어 쟁기질하려는 무거운 도구입니다. 이것이 잘 맞으면, 편안하고 일하기 쉽지만, 잘 맞지 않으면 어깨에 멍이 들고 쓸데없는 힘만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팔레스틴에서 멍에를 잘 만드는 목수의 집에는 이런 선전 문구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내 멍에는 잘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생활의 내용을 소재로 오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 곧 종교적 책무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죄책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주님께서 지게 하는 멍에가 복음의 방식으로 쉽고, 가볍게 질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이라는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 율법의 멍에를 쉽게 만드시는 방법은 바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Illustration
- 그 “잘 맞아서 편안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희생제물로 바쳐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는 우리가 져야 할 죄짐을 해결해 주신 사랑의 은혜입니다.
- 저희 사택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한 청년이 술에 만취해서는 주차장에 있는 외제차를 발로 세게 차서 손상을 시킨 사건입니다.
제가 어쩌다가 그 자초지종을 다 듣게 되었는데, 상황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외제차주가 CCTV를 확인하고는 가해 청년을 찾아 그 집에 연락을 하였는데, 그 아버지에게 연락이 되어서 사정을 들어보니, 그 청년은 몇 차례 술취한 상태에서 비슷한 범죄가 경찰서에 기록되어 있어서 결국 구속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피해 차주에게 와서 자기 자식을 대신하여 속죄를 하고, 연신 굽신거리면서 차량 피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서야 합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 가해 청년의 아버지도 장애등급을 받은 분이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렵사리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제가 그때 합의하는 현장에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자식 잘못 키운 죄가 크니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이 합의금이 부족하시다면 이거는 따로 받으시고, 제가 대신 구속이라도 될 수 있게, 제가 가해자인 걸로 처리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절차상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짐을 대신 져주시겠다고 우리가 매달려야 할 십자가에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Application
- 죄의 문제는, 그리고 그 죄짐의 문제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부터 갉아먹는 가장 큰 파괴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방법은 바로 그 깊은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거기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에게 재판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이 자기 주인은 우리를 재판해서 십자가에 매다는 일을 상상이나 해 보셨습니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대신하여 감옥에 가겠다는 것은 자기 명예와 자기 존재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일이며, 그만큼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뒤로 물리고 감옥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죄짐의 멍에를 가볍게 만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율법의 조문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받게 될 죄책과 죄의 부담, 죄의 짐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 그 사랑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율법적인 책무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책무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아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멍에를 쉽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이 모든 의무를 가볍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많은 일을 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반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비유입니다. 내가 누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할 입장인데 그 사람이 내가 평소에 좋게 보던 사람이면 그 하는 일이 얼마나 기꺼운 일이 되겠습니까? 만일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하는 일이 얼마나 쉽고 가볍겠습니까? 예.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 하는 일이 정말 쉽고 가벼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분이 그 일을 밑에서 받쳐주어서 쉽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 일을 하면서도 고마움이 넘칠 것입니다.
― 이렇게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먹이라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평생에 세 번 고백을 하는데 첫 번째가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얼마 동안 주님을 믿고 따르던 베드로는 두 번째로 “주님이 우리가 조상 적부터 기다리는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마 16:16).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 대화를 칭찬으로 끝냈습니다.
세 번째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요 21:15).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고백을 할 때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맡기신 교회를 목양하는 일은 오늘날과는 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은 모두에게 짐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게 된 다음에는 그 짐을 기꺼이 가벼운 마음으로 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뜻은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의 양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님의 양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 이렇게 주를 배반하기까지 하던 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만든 것은 그가 성령강림 이후에 크게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무슨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3년간 곁에 있었던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 것 바로 그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그를 위대한 사도와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입니다.
Conclusion
- 오늘 우리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주께 나아오기 위하여 종교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잘 되지 않아서 괴롭지는 않습니까? 주께 나오려고 하지만 상처를 주고 받던 내 모습, 아직도 연약하여 범죄하는 내 모습이 나에게 무거운 죄짐이 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 비록 부족하고 상처받아 갈갈이 찢긴 모습일지라도 그대로 주께 나아옵시다. 죄많은 세리같이 번민과 괴로움에 쌓여 성전 한 구석에 무릎꿇고 처박힐 수 밖에 없는 나의 모습이 있습니까?
그 모습 그대로 주께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그 모습 그대로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감싸안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서 펼쳐 있던 그 두 팔을 그대로 펼치고 계십니다.
그 한없이 넓고 따뜻한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하실 때에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평안한 쉼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오늘도 여러분을 지키시며, 힘주시고 용기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율법의 멍에와 짐으로부터 평안과 안위의 쉬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내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참고 : 이 부분은 해당 성경 본문과 관련된 추가 이해나, 또는 설교 본문의 방향을 보강하거나, 또는 다른 방향의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의 초점이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 - 29절의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구절은 구약에 기록되어 내려오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사 42:2-3, 53:1-2, 슥 9:9 등). 따라서 이 표현은 바로 메시야의 고난, 곧 십자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라는 표현은 당시 유대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관용어였다. 예수님의 멍에는 바리새인이 지운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십자가의 멍에이니, 이 길을 따라오라는 말씀인 것이다. - 초대교회의 전승 중 하나는 목수였던 요셉의 집에서 예수님이 만드신 멍에가 딱 ‘들어맞고 가벼워서’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신화화된 이야기이지만,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 본문 살피기 : 이번 주는 잘 알려진 주님의 초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본디 어떤 의미인지는 우리네 강단에서 조금 빗나간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 본의에 대하여 듣기 전에 다음의 질문들을 통하여 본문을 미리 살펴보시지요. - 본문 바로 앞의 27절에는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 본문 바로 다음의 12장에는 주님이나 그 제자들에 대하 어떤 사람들의 어떤 시비가 있었습니까? -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로부터 쉬게 하시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 주님께서 ‘멍에’는 누구의 멍에라 하였습니까? - 주님께서 ‘멍에’를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러면 그 멍에가 아닌 다른 멍에는 어떤 멍에이겠습니까? - 28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어떤 짐이라고 생각해 오셨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