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가 만난 문인들 / 11
오학영 희곡작가
김 송 배
1980년대 초, 소위 문협 4인방(김시철 황 명 성춘복 오학영)이 예총과 문협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87년 조경희 예총회장이 재선에 성공하자 오학영 (吳學榮-희곡작가) 당시 문협 상임이사가 예총 사무총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내가 사업간사로 들어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희곡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단체의 경영에도 야심찬 면모를 보여주면서 문협과 예총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었다. 얼마후 조경희 회장이 노태우 정부 정무제2장관으로 영전하고 후임에 전봉초 전 서울대 음대학장이 예총회장을 맡았으나 그는 계속해서 사무총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철저한 조직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는 당시 김동리 문협 이사장을 비롯하여 문협 4인방 외에도 홍성유(소설) 김양수(평론) 홍윤기(시) 김해성(시조) 홍승주(희곡) 윤병로(평론) 등 문단의 기라성들과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월간문학』출신의 젊은 문인들이 항상 포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예총 사무처에도 오찬식 소설가가 기획실장으로 계간 『예술계』와 『예총신보』의 편집을 맡아 있었고 내가 예총 사업을 총괄하고 있어서 예하 직원들이 문인으로 구성될 정도로 문인들의 위상이 높게 평가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약간 어렵다고 여긴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목은 ‘유럽 문화예술 탐방’이었다. 오찬식 소설가와 필자도 동참하게 되었다. 외국이라곤 대만과 일본 도오쿄를 가 본 것이 전부라서 설레기는 했으나 우리는 목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여행경비를 1년간 활부로 하고 참가하여 이탈리아(로마, 피사), 바티칸, 스페인(마드리드, 톨레도), 프랑스(파리, 베르사이유), 스위스(쮜리히, 필라투스), 네덜란드(암스텔담, 잔담) 등을 여행하면서 입사초기의 서먹함도 많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와 나는 근무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문서 작성이나 사업 수행에서 어쩐 일인지 나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필자는 추석이나 설 명절때는 혼잡해서 고향을 가지 않는 습성이 있었는데 추석날 고향 선배가 귀향표를 예매했다가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가지 못하겠으니 표를 구하지 못했으면 무상으로 준다는 말에 귀향을 하게 되었다.
웬걸. 귀경표가 없다는 것은 추석을 잘 보내고 난 뒤에 알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부득이 하루를 결근하게 되었다. 그는 ‘하루 결근’을 직무태만으로 몰아붙이고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소용이 없어서 연말까지 말미를 얻고 퇴직준비를 하면서 당시 ‘기업과 문화(현재 ‘기업메세나’ 전신)’ 설립 등기준비 업무를 도우면서 새해부터 근무하기로 약속까지 해 두었다.
그해 11월인가, 아침 9시에 출근을 했더니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내용인즉, 상대방이 몇 가지 확인을 하고 ‘오학영 총장 교통사고 사망’을 통보하는 것이다. 급히 문협으로 달려갔으나 아직 직원이 출근도 하지 않았기에 혼자 그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달려가서 시체안치실에 누워있는 그를 확인한 후 문협과 예총에 공중전화로 알렸다.
얼마후 문협 직원들과 지인들이 왔다. 신분증과 명함을 보고 집으로도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는다는 병원 담당자의 말이 의아했다. 누군가 가족이 집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부인은 외국어 학원에, 아들과 딸은 학교에 가면서 출근할 때 함께 태워서 각 목적지에 내려주고 사무실로 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가족들도 함께 사고를 당했으리라. 그러나 부인과 자녀의 이름을 몰라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난 뒤 찾아온 한 지인이 가족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응급실로 향했으나 부인은 운명직전이었고 딸은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었다. 다행히 아들은 그차를 타지 않고 그날 일찍 학교로 가서 화를 면했다. 집에는 그의 부친이 있었으나 고령인데다가 아침 산책차 출타하고 없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한 잎 낙엽의 숨소리로 / 지워져 간 / 한 우수주의자를 만난다 / 상현달이 희미하게 밤을 적시는 / 바람소리 우우 예총회관을 돌아 / 이 가을을 사랑하고 / 진실로 사랑의 향기 가득찬 / 가을 대학로를 쓸쓸하게 할 때 / 봄을 기다리는 나는 / 그의 먼 여로에 깔리는 저녘놀을 / 이제사 볼 구 있다 // -慟哭 吳學榮 / 낙엽은 그 울음을 감추면서 / 하나씩 우수주의자의 노래로 쌓이는데 / 嗚呼哀哉라, 가녀린 선율들이 / 차거운 비문 하나로 응축된 삶 / -오, 가시미로.
그 당시 연작 졸시 「대학로 片片 . 11」을 썼다. 그와 나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조문객 안내며 장례절차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는 그 시기에 희곡작가가 쓴 시집『한 우수주의자의 노래』발간을 앞두고 책이 출간하기 바로 전날 비운을 맞았던 것이다. 이 시집을 두고 ‘우수주의자’와 ‘우수(憂愁)’에 대한 해석을 그는 이미 죽음을 예감했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이 시집을 그의 관속에 넣어 주었다.)
그는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서 1957년, 약관으로『현대문학』에 희곡 「닭의 의미」「생명은 합창처럼」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와 창작집 『침묵의 소리』와 희곡집『꽃과 십자가』, 수필집『앉아서 꿈꾸는 산』등을 발간하고 대한민국문학상 희곡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50세의 짧은 인생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마감하고 부인과 함께 용인 카톨릭공원묘지에 나란히 잠들었다. 이듬해(1989)에 그의 문학비를 지인들이 묘지에 세우고 그의 희곡문학을 기렸다.
이처럼 인생이 길지도 않으면서 어떤 야망의 관철을 위해서 문단을 장악하고 거기에 순응하지 않거나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면 가차없이 제거하는 풍토가 현대 사회의 병폐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그렇게 순탄한 만남은 아닌 것 같다. 그와의 약속대로 연말에 전봉초 회장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사의를 표했으나 회장은 금시초문이라며 극구 만류했다.
당시 기업문화 쪽과의 위약(違約)에 대해서는 해명할 길이 없으나 내가 예총에서 19년간이나 근속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가 만약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면 그의 문학성이나 지략(智略)적인 측면에서 문협 이사장과 예총회장까지도 역임했을 인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후 몇 년이 흐르고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그와 친밀도가 깊어지는 것을 시샘해서 누군가가 나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믿고 싶지 않다. 다만, 완쾌된 그의 딸과 성장한 아들의 요즘 생활이 궁금할 뿐이다. 그가 앉았던 문협 사무국장 그 자리에 내가 사무처장으로 3년간 앉아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와의 순탄치 않은 만남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