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黃江』
金松培 시인의 『黃江』을 읽고
성춘복( 시인. 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 작가의 작품에는 그 작가의 표정이 깊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닌 듯 싶다. 말하자면, 그 시인의 시작품에 그 시인의 표정이 안으로 숨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시작품에서 그 시를 쓴 사람의 표정을 찾아낸다면 쉽게 그 시의 맛을 안다는 것도 된다. 그렇다면 맛을 아는 그 시는 읽는 이에 접근 될 수 있는 작품이고 나아가 이해된다는 말로 환원시켜도 좋을 것이다.
金松培시인의 『黃江』이란 네 번째 시집을 대하면서 나는 그의 표정을 확연히 그리고 낱낱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이 시집의 말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시적 출발의 모태는 그의 고향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누구에게건 고향이사 다 있기 마련이지만 구체적 시적 모티브가 그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는 않다.
막연한 상태의 고향,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그저 아름답고 고즈넉한 그리고 아득한 향수로서의 그런 곳이 아니고, 이 보편성을 넘어서 구체성으로써 출발되는 예를 이 시인은 여러 곳에서 표백하고 있다.
흙 내음 배인 고샅길에 이슬 내리고
패랭이 삘기 질경이 냉이 민들레 꽃다지 무릇
저들끼리의 사랑으로 포근한 밤
산골동네에 깨어 있는 적막은 그리움입니다
서울에도 논뚝길에도 달은 뜹니다
밤마다 창틀에 걸어둔 그리움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랑으로 흘러 보냅니다.
「黃江⋅2」 두 연이다. 사람의 삶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쓸쓸한 바다 가운데의 완성, 그 섬에 흘로 떨어진 자아를 자각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고독은 그리움이란 추상명사에 의하여 더욱 확실해 진다. 그래서 존재란 허무라는 길을 찾아가는 것에 다름 아님을 나이 들면서 사람은 깨닫게 된다.
반면에 그리움이란 말은 자기를 원하는 대상과의 일체화로 꾀하는, 그러니까 시인에 있어서는 그 노래에 다름아니다. 간절하고 애절할수록 그 대상은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서 더 멀리에 존재하는 법이다.
특히 인간에겐 생명의 모태로서의 자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돌아가야 할 본질적 장소로 생명의 시원을 나타내고 바로 고향의 의미를 지닌다.
거기엔 탄생의 육신적 뜻 뿐아니라 정신의 요소로 들어 있어서 지표와 같은 원형의 뜻을 내포한다. 이런 요소들이 金松培 시인의 이번 작품에서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냥 그대로 서 있더라
쪼무래기 몇
양지쪽에 웅크리고 조잘대던
그 모습까지 그대로 포근하더라
이십 몇 년만에 안기는
너는 품안은 여전한 온기
반백으로 찾아온 나를
지금도 반갑게 손 내밀더라
금줄을 걸꺼나
삽작 밖
붉은 황토흙 뿌려놓고
오늘은 나 혼자만 서 있더라
서울서 먼지로 떠돌다가
너를 향해 싹 틔운 시인 김송배는
이 바람, 이 산천 그리워
텅빈 골짝을 혼자 찾아 왔더니라.
「黃江 · l4」의 '공암리에서'란 부제가 붙은 작품의 전문이다. 시작 출발의 모태이기도 한 그의 정신적 원형을 찾아 시인은 귀향한다. 먼지, 티끌로 떠돌다가 자연과 합일 통일하는 양상의 귀향이 그리움을 뿌린다. 이는 자기 찾기의 존재확인에 다름아니다.
섣달 그믐날 밤
내 심연에 등불 하나 켜 들고 섰다.
「黃江· l3」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내 육신과 정신의 텃밭이다. 고향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응당 고향은 어머니의 심상에 닿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원초적인 정신의 거점인 어머니가 시인의 정서를 가장 안도하게 만드는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것은 자명한 일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 어떤 어머니도 이미 저버렸고 고향도 아득히 상실해 없어졌다. 간혹 고향과 어머니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저 그런 추상의 그리움과 추억뿐이다. 이런 추억은 그저 아름다움으로 멀리 있다. 가깝게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내용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우엔 춥다. '섣달'이기 때문이다. 그 추운 겨울날도 '그믐 밤'이다. 거기 작은 등불의 심지를 돋운 것이, 그것도 깊고 깊은 곳에 불붙여 밝고 따뜻한 것이 어머니라면 이 시인에게 아마도 가장 극명 한 의미의 고향이리라.
이런 고향에 대한 시인의 발길을 우리 모두를 어린 시절로부터 구체적 사물에까지 인도한다. 처음에 아슬한 슬픔 같은 길을 열어주고 있다.
오매요, 진짜 섧대요
첩첩산중 천수답 몇 두락에 매달린 눈망울
대추나무에 걸린 달처럼 눈물나게 서럽대요
이로부터 시작된 어린 날의 추억은 쥐불을 놓던 때로 옳아간다.
달집에 불을 붙여라
오늘은 덩실덩실 풍물춤을 추고 싶었다.
눈물 속 어린 기원
밤새도록 내 얼굴을 그을려도
재앙은 모두 태워버려라.
이런 기원은 노래로 곧 옮아가게 된다.
산새 울어울어
한 아름 사랑가 흐드러진
산천에서 놀꺼나
쪽지머리 진달래꽃 흔들면서
어절씨구 저절씨구
우리 모두 춤이나 출꺼나
맑고 투명한 추억의 이 길, 환상적인 미감은 오늘 이 시인의 그리움의 대상이고 신선하고 감각적이다. 그러나 아슬한 데로 나아간다.
저녁놀이 스스로
제 운명을 감추다가
문득 어둠으로 사그라지는 노래
눈물로 주렁주렁 추녀 끝에 걸어둔 채
「黃江 · l9」 또는「黃江 · 63」과 같은 슬픔을 우리는 또 눈여겨 보아야 한다.
외딴 눈길 주막집
밤새도록 들리는 한풀이 노래 -
휘휘한 산마을
길손의 취한 발걸음 위에 쏟아지는
새벽 별빛.
돌아다보는 일은 아름답다고 한다. 추억이 그러하고 고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우 이쯤에 이르면 아련함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고 서글퍼진다.
가 닿을 수 없음에 고향은 간절하다. 그러나 처연한 강물로 흐르고 고향에 대하여 나그네가 되어 있는 시인에게 아픔으로 다가든다.
그것은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귀향의식으로 하여 마음과 현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고향이라는 아름다운 추억 앞에 현실이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이 갈등과 고통이 시인을 시인이게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에겐 그런 구체적 고향이 고향으로 살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저 어릴 적에 강보에 싸 안겨 떠나왔다는 막연하고 상실감의 고향밖엔 없다.
가난도 구체적인 가난, 고난도 엄청나고 절실한 고난, 그래서 가난과 고난이 시인의 정신을 일깨우는 손짓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신념이고 그 신념의 언어가 시 작품이다. 김송배 시인이 그의 고향, 그의 자연, 아니 그의 정신을 단순의 연작이 아닌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네 번째 시집을 엮은 이유는 바로 이런 신념의 해석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다음 작업은 우리 모두가 유의해야 할 것 같다.('95.6.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