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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섬김의교회(최성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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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스크랩 종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독교 종말론
고구마 추천 0 조회 109 11.01.20 1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독교 종말론

 

 

지구의 종말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일일이 나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마도 인류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통적이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 날은 언제이며, 어떤 모습으로 일어날 것인가,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종말을 막거나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등이다. 종교적인 측면이 반영된다면 아마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누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인가, 종말의 순간에 구원 받을 가능성은 있는가, 누가 그 축복을 누릴 것인가,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 대한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종말 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 등이 추가될 것이다.

 

1. 종말을 말하게 되는 다양한 이유들

1) 종말 경험

동일하지는 않지만 세계의 종교는 각각 다른 근거를 갖고 위 질문들에 대답해왔다. 종교에서 죽음과 출생의 제의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종교의 태동이 종말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마지막, 곧 종말을 생각하게 되는 중심 이유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에 있다. 특히 마지막에 대한 질문에 주어진 종교적인 대답들을 살펴보면, 종말에 대한 성찰들이 개인 종말론을 넘어서 우주의 종말로 확장되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죽음, 공동체의 멸망, 그리고 갖가지 환경 재앙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게 했다. 죽음, 이별, 사라짐, 슬픔, 아쉬움, 그리움, 그리고 회상과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지는 경험들은 마지막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만남에 대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발전된다. 결국 마지막에 대한 성찰은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으로 발전되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고대의 동굴벽화나 미술에는 그런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는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염려로부터 해방시켜줄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 문제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의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던 시기에는 현상들의 이유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종교지도자가 가장 중심적인 의미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였고, 정치지도자가 되는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과제도 함께 주어졌다. 대체로 신화의 구조 속에서 종말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종말론이라 볼 수 있다.

 

2) 정의의 실현

한편,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마지막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마지막’을 생각하게 되면서 종말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전쟁을 통해 적을 죽여야 하는 일이나, 혹은 누군가에 대해 살의를 느끼게 되는 경우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마지막이 아닌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원인은 일상을 방해하거나 혹은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것들이 작게는 개인을 위해 크게는 공동체를 위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복수에 해당되지만 당위성을 주장하게 될 경우에는 하나의 벌로 혹은 심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이유를 성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즉,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런 일들이(부정적인 일) 계속될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일들이(마지막 현상들) 언제 또 다시 일어날 것인가?’ ‘일어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하는 물음들이다. 특히 복수를 단순히 개인적인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치명적이다. 따라서 의도적인 마지막에 대한 정당성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은 좁게는 공동체의 처벌로, 넓게는 초월자의 심판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의 시기를 판단하고 집행하는 존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판자에 대한 생각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심판자에 대한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가장 명료하게 설명되었다고 본다. 즉 칸트는 초월자, 곧 도덕적 심판자의 존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개인 종말로 결코 끝날 수 없는 정의의 실현과 도덕의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되어져야 할 일이라면 개인 혹은 공동체의 종말로 인해 결코 끝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꼭 성취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심판자의 존재가 요청된 것이다.

종말에 대한 생각은 사고가 더욱 발전됨에 따라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그리고 다시 세계의 종말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좁게는 과거의 종말을 이해하려는 질문에서부터 넓게는 미래의 종말을 전망하려는 예측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처럼 마지막에 대한 경험들은 마지막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마지막 이후의 세계와 마지막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성찰로까지 발전되었다. 문제는 마지막에 대한 질문들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는 이 문제에 있어서 대답할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의미를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할 책임이 있었다. 죽음과 삶의 의미는 종교적인 세계관에 따라 주어졌고,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대한 종교적인 설명이 체계화되면서 종교적인 종말론이 태동하게 되었다. 특히 심판과 보상, 곧 권선징악의 구도가 종말론에 침투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든 종교적인 종말론들의 공통점을 형성하고 있다.

 

3)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

종말론의 발전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은 심판과 보상의 맥락이나 권선징악의 윤리체계를 벗어나는 종말론의 출현이다. 소위 종말예언의 현상이다. 임박한 종말 현상들을 묵시적으로(이미지적으로) 소개하면서 좁게는 개인의 종말에 대해, 넓게는 세계의 종말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다. 대체로 초월자의 계시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겨졌지만, 역사 속에 숱하게 등장했던 종말 예언들은 언제나 예언의 진위, 혹은 계시의 진위 문제로 인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종말 예언에 관련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종말예언의 의도가 무엇인가?’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을 예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경고적인 것인가?’ ‘변화가 일어난다면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변화와 상관없이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종말을 예언하는 것인가?’ ‘종말 예언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등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종말 예언들 가운데는 건전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해 그것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광신적인 삶을 살도록 한다. 건강하지 못한 종말론은 흔히 사이비나 이단 종교에서 발견된다.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종말론들의 공통점 가운데 두 가지만 지적하면, 대체로 현실의 변화에 대한 경고가 대부분이었고, 사후 세계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권선징악의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후세계의 삶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적인 종말론이 새롭게 대두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의 불만족이 투영되어 유토피아가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는 유토피아가 되기도 했다. 후자는 사후 세계 혹은 세계 이후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종말론이라 할 수 없는 것인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구성되는 신세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적인 추리 속에서 고도로 발전된 외계인의 침입에 의한 지구의 멸망과 그 이후 건설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종말을 단순히 마지막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관점도 나타날 수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종말에 대한 경고는 단지 신화적인 사고일 뿐이며, 종교지도자들이 기득권 획득을 위해 조작되고 과장된 사기로 폭로되었고, 사후 세계는 공상 혹은 허구로 여겨졌다. 특히 진화론을 사상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은 지구촌에서 이상 세계가 건설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개인 종말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만 해석되었고, 세계종말과 관련된 생각은 낙관적인 미래상으로 대체되었으며, 이에 따라 신화적이고 또 종교적인 종말에 대한 생각은 구시대 유물로 간주되었다. 이런 낙관적인 생각은 19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과학기술의 발전이 보장되는 한 종말은 더 이상의 화두가 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4)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 인류는 발달된 과학 기술에 대한 인간들의 무책임한 본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또한 무분별한 개발과 무절제한 소비행위에 기인하는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해 종말에 대한 생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지구촌을 뒤흔들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종말을 실존의 한계 상황으로 이해하였고, 한계 상황에 직면해서 실존의 의미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와 같은 유신론적인 입장과 사르트르 같은 무신론적인 입장이 있어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순히 통과의례로만 여겨졌던 종말에 대한 생각이 수정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냉전의 상태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핵 기술 개발로 인해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핵전쟁의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지면서 인류의 불안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미소 냉전시대는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의 묵시적인 예언이 특별하게 주목을 받게 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소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은 1555년에 출판된 운을 맞춘 4행시를 백 편 단위(Centuries)로 모은 《예언집(Les Propheties)》에 기인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들이 적중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찾아내어 사례들을 나열하기에 열을 올렸지만,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했을 뿐이지 예방 혹은 경고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그의 수많은 예언들 가운데서 종말과 관련해 관심을 모은 것은 “1900,90의 9년 , 7의 달”로 표현된 것인데, 이것을 1999년 7월로 해석한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시기에 지구 종말을 예언한 것으로 보았다. 그 후 1999년은 그야말로 인류에게 하나의 신기루였다. 1999년 예언은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갖가지 형태로 굴절되고 변형되어 등장했다. 소설과 영화에서 1999년 직전과 그 후의 삶과 세계에 대한 수많은 가상 시나리오들도 등장했다. 1999년은 반드시 올 것이지만 그 해와 그 이후의 해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실제가 아닌 가상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향한 인류의 역사에서 지대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이라는 시나리오는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 곧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 이후로 종말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와 더불어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면서 그의 지구 종말론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아니, 지구 종말론이 사라진 듯 했다.

 

5) 과학기술의 발견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실용적인 응용은 현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고 또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갖도록 했다. 과학기술이 가져온 인류의 재앙을 결코 떠올릴 수가 없었는데 더 이상 냉전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역적으로 국소전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종말을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인류의 종말은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인류는 종말을 망각한 것인가, 아니면 종말에 대한 생각을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 것인가?’

비록 냉전 시대는 지나갔지만 종말론과 관련해서 볼 때 20세기 말부터 주목할 만한 특징이 나타났다. 종말론이 더 이상 종교나 신학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의 핵심 주제로 다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빗나갔지만, 자연 환경의 변화가 가져오는 암울한 결과에 대한 과학적인 예측과 예고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이후에 대두되는 가장 강력한 종말론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과학적인 종말론이 될 것이다. 과학적인 종말론이란 종말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로 설명하는 것이다.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인 방법과 종말 이후의 생존을 위한 과학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종말론은 주로 생명복제와 인간복제(만일 시행된다면)의 결과에 따른 재앙과 지구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자연 재앙을 예고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대책을 촉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과학적 종말론은 지구가 사라지게 되는 지구 종말을 말하기보다는 인류가 겪게 될 위기들에 대한 경고에 집중한다. 인간복제로 인권이 어떻게 침해받을 것인지, 무분별한 개발로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또 그것이 어떻게 인류에게 위기로 나타날 것인지, 화석연료의 과용에서 비롯되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의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게 되면서 일어나는 각종 기후이상들이 가져올 지구 재앙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며 경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기를 사전에 막거나 위기 이후의 삶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과학적인 종말론의 매력은 종교적인 종말론과 달리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어서 핵전쟁, 유전자 변형에 따른 기형의 출현, 기후의 변화, 쓰나미, 각종 이유에 따른 지구 환경의 변화 같은 종말 현상들에 대한 설명과 예측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 있다. 과학적 종말론은 현실인식을 바르게 하고 또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6) 영화적 종말론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될 수 있는 재앙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적인 종말론에 종교들 역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만 가장 빠르고 또 실감나게 반응하는 것은 영화적인 종말론이다. 최근에 종말에 대한 담론이 이뤄지는 배경에는 영화적 종말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근 들어 과학적인 근거를 갖거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지구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워터월드’(1995), ‘인디펜던스 데이’(1996), ‘코어’(2003), ‘투모로우’(2004), ‘불편한 진실’(2006), ‘나는 전설이다’(2007), ‘지구 최후의 날-둠스데이’(2008), ‘지구’(2007), ‘지구가 멈추는 날’(2008), ‘월-E’(2008), ‘노잉’(2009), ‘9'(2009), '2012'(2009) 등이다. 영화적인 종말론이 종교적인 종말론과 비교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하고 있어 설득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상상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는 영상미학에 있다. 영화적인 종말론에 있어서 단연코 돋보이는 감독이 있다면 독일계 할리우드 감독인 롤랜드 에머리히이다. 그는 다른 감독들에 비해 비록 지구 종말은 아니라 해도 지구 재앙을 다룬 영화들에 많은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질라‘, ’인디펜던스 데이‘, ’프릭스‘, ’투모로우‘, ’2012‘ 등.

최근에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설명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종말론은 소위 “2012 지구 종말론”이다. 사람들이 2012 지구 종말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 역시 에머리히 감독의 작품 ‘2012’이다. 이미 2004년에 개봉된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가 지구의 기후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결과들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였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종말이 온다면 그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를 묵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에머리히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재앙을 막을 수 있기 위해서 인류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에머리히는 이 영화를 통해서 특히 환경문제에 소극적인 미국을 겨냥하며 지구의 종말을 불러오는 원인이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있음을 폭로하고 이를 경고하였다. 내일이라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인류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이 모든 관계(자연과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 등, 그러나 신과의 관계는 빠져 있다. 이점에서 투모로우는 생태적 종말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에서 기본에 충실해지는 것과 친환경적인 삶을 사는 것임을 역설했다. 결국 경고적인 성격을 가진 에머리히 특유의 종말론이었다. 이 영화가 환경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영화적인 종말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재앙을 동반하는 지구의 종말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우연이면서도 운명적인 사건에 직면해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종말의 순간에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종말을 예견하면서, 혹은 직면해서 소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종말론의 과제라 한다면,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다시 한 번 인류가 구원받을 가능성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경재앙을 동반한 종말에도 인류가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삶을 소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에머리히는 그 이유를 바로 인간이 서로 협력하며 사는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다.

 

7) “2012 지구 종말론”

지구의 종말을 보여줌에 있어서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환경문제에서 소극적이었던 미국에 대한 심판만으로 부족했던 것일까? ‘2012’에서 에머리히는 종말의 범위를 지구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CG 기반의 비쥬얼한 측면에서나 재앙의 범위에서, 그리고 제작비 차원에서 비교해볼 때 ‘투모로우’는 ‘2012’와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2012”를 제작하게 된 배경에는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2012 지구 종말론”에 자극을 받은 것이리라 생각된다. 에이드리언 길버트의『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고솔, 강민영 공역, 말글빛냄, 2007)은 B.C. 3114에 나왔다는 마야 문명의 예언을 다룬 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2012 지구 종말론’의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영성연구가이자 컴퓨터과학자이며,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저자인 그렉 브레이든의 『2012 아마겟돈인가, 제2의 에덴인가?』(김형준 역, 물병자리, 2009)가 아닐까 생각한다. 브레이븐의 책은 다분히 뉴에이지적인 성격이 짙은 글이다.

“2012 지구 종말론”이란 B.C. 3114년 마야 문명에서 살던 사람들의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로 멈춰져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예언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마야인은 고대의 어느 문명보다 수학과 천문학 등에서 뛰어 났다. 그런데 고대 마야 문명에는 6개의 태양에 관한 전설이 전해졌는데, 마야인은 인류의 운명이 태양과 지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예언한 4번째 태양이 없어진 시기에 멸망을 하였지만 6번째 태양이 사라지는 날, 곧 2012년 12월 21로 해가 지고 나서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결국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이다.

“2012 지구 종말론”은 어떤 종교적인 이유나 인간의 죄에 의한 종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의 예언들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과학적이라고 해서 환경침해적인 삶에서-물론 그것이 원인일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인과관계를 밝힐만한 과학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지도 않는다. 권선징악의 구조도 보이지 않고, 또 경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순전히 태양계의 순환운동과 이상적인 태양폭풍이 미친 지구의 변화로 인한 재앙에서 비롯되는 종말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2012 지구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지나치다 할 정도다. 급기야 NASA가 진화에 나설 정도가 되었는데, NASA는 10일 홈페이지에 올린 “2012년 지구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에서 일문일답 형식을 취해 지구멸망설이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 즉, NASA는 “2012년 멸망설은 고대 마야의 달력이 2012년 겨울 태양이 태양이 적도에서 가장 멀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끝나고 그때 종말이 온다는 설에 근거했다”면서, “하지만 마야의 달력이 그 해 12월 21일에 끝난 것은 우리의 부엌에 걸린 달력이 매년 12월 31일로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마야의 달력 셈법에서 장기적 기간이 끝난 것일 뿐이고, 우리 달력이 1월 1일 새로 시작되듯 마야의 달력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행성들이 일렬로 늘어서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향후 수십 년간 그런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2. 기독교 종말론

 

그렇다면 종말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종말은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종말은 존재 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우주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종말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반드시 종말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종말론의 과제는 ‘어떻게 또 어떤 근거를 갖고 종말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영화가 근거하고 있는 “2012년 지구 종말론”은 단지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기기에는 기독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 현대문명에 취해 노아의 시대처럼 살아감으로 인해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종말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준 것은 참으로 다행 중의 하나다. 또한 종말론이 아무리 과학적이라 해도 종교적인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해준다. 종말을 말하면서 모든 종교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개종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적인 자연현상이나 과학적인 새로운 발견에 대한 종교인들의 광신적인 열광은 ‘콘택트’(로버트 저메키스)라는 영화에서 잘 표현된 것 같다. 특히 영화 ‘2012’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경, 특히 노아의 홍수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아들의 이름이 노아인 것이나, 산꼭대기에 방주와 같은 구조선을 만든 것이나, 종말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그 안에 동물들과 4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탑승하게 된 사실 등이 그렇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사건과 방주는 ‘2012’와는 성격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서 구조선에 탑승하게 되는 조건이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 그리고 10억 유로를 지불할 만한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 설정한 것이다. 종교적인 종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어떤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인 힘을 가진 자들과 능력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부자들이 구원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은 에머리히가 말하는 휴머니즘적 종말론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의 생존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의미를 갖지만, 지구위기의 책임을 말함에 있어서 정치가와 재력가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종말을 말함에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언급은 기독교 종말론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옛 모습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마지막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시대적인 위기에 직면한 인류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제시된 것도 아니다. 인류의 이상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학기술의 위대함을 긍정하면서 지구촌 위에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동기나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의 상호 협력으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마지막은 결코 오지 않고, 또 설령 온다고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염려와는 다른 염려를 갖고 살고, 세상이 바라는 이상과는 다른 이상을 품고 살며, 마지막에 대한 생각을 한다 해도 기꺼이 마지막을 각오하는(순교하는) 태도를 갖도록 한다. 또한 기독교 종말론은 소망의 이유를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을 말하게 되는 것과 또 마지막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지, 시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입증한 사건이다. 따라서 “2012”에서와 같은 환경재앙이든, 아니면 인류의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든, 어떤 형태의 종말이 오든 우리가 구원을 기대하고 또 소망하는 가운데 종말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구원받을 사람은 재물을 가진 자나 권력을 가진 자, 혹은 지식과 명예를 가진 자나 빼어난 외모를 가진 자도 아니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뤄진다고 믿으며,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구원의 결정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구원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되심(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삶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제를 가지며(벧전3:15), 또한 이를 근거로 해서 인간의 본성상 생각하거나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종말론들을 비판하는 과제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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