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류 교회들의 목회자들 대부분은 설교단에서 가운을 입고 설교를 한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 통합만 하더라도 교회 절기에 맞춰 빨강색, 초록색, 보라색, 흰색 등의 스톨까지 착용하고, 절기에 맞는 제목의 설교를 한다. 이쯤 되면 목사들의 복장이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목사의 복장 문제가 작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작은 차이들이 모여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는가? 아래의 오피츠 교수의 글이 개혁을 지향하는 분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위선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 앞에서 거짓되게 자신을 과시하는 모든 것은 커다란 위선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따라서 성직자의 예복과 종교적 표식들은 불필요하다." 1523년 츠빙글리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의 배경에 놓인 생각은 간단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개혁적 입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야만인이나 노예들만이 바지를 입던 시절에 고대 로마 시대의 정무관 같은 복장과 외투를 입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수녀들과 수사들의 복식은 그나마 소박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이 입는 사제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가령 16세기의 한 목격자에 따르면 상갈렌(St. Gallen) 수도원장의 제례복은 금과 은으로 과도하게 치장되어서 미사를 집전할 때는 제례복의 구멍 아래에서 누군가가 받쳐 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었고, 사제로서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른바 “영적 계급", 곧 수녀와 수사, 수도원장과 사제의 직제를 폐지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다만 봉사자일 뿐입니다. 이제 이들 "말씀의 봉사자”는 “목사”라고 불립니다. 신적 권능을 매개하며 인간적 계획을 축도해 주는 대신에, 목사들은 이제 성서를 해석하며 예언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또한 사목적이고 치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목사란 이러한 특정 과업을 맡은 교구의 보통 신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인리히 불링거가 곧이 곧대로 표현하듯 “구약성서의 레위 지파 제사장처럼" 옷을 입고 예배를 집전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주일에 입던 것과 같이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 수립된 이 원칙은 이후 프로이센 관료들이 입던 법복이 스위스에서도 목사의 의복으로 대체되어 자리 잡으면서 사라집니다.
19세기 목사들에게 권위와 품격을 부여했던 이 복장은 시장경제체제의 오늘날의 시대에 일종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디자인(Corporate Design)같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 모두가 같은 옷을 맞춰 입는 개념이지요. 가령 취리히 교회는 목사가 “원칙적으로” 목회자 가운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와 울리히 츠빙글리는 말씀 선포의 내용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목사들이 종교적인 대제사장이 아니라,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던 하나님 말씀의 봉사자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의복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쨌든 취리히 교회법은 정기적이지는 않더라도 그 사람들이 가끔씩이라도 설교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페터 오피츠·정미현·한스 스투룹 지음, 정미현 옮김,『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서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20), pp.13~14.
첫댓글 카톨릭 사제와 같이 계급을 암시하는 복장을 종교개혁자들은 당연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 개신교에서 특히 자유주의 경향의 교단들은 카톨릭과 비슷한 까운을 입고 스톨을 착용하며 종교개혁 본연의 모습에서 이탈해 있습니다.
위 포스팅을 통해서 좋은 분별을 제공받습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복장 논쟁의 불을 지핀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 존 후퍼
불링거는 1531년 12월에 27세의 나이에 츠빙글리의 후계자가 되어 취리히 교회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스위스를 신앙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스위스 신앙고백을 만들고 설교 운동을 통해 교회개혁을 주도했다. 후퍼는 취리히에서 불링거와 교제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제복 착용에 대한 완강한 거부는 불링거의 영향이었다. 그는 불링거를 통해 사제복의 착용이 가톨릭의 사제주의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취리히에서 안정을 찾은 그는 ‘그리스도의 선포와 그의 공직’(1547), ‘거룩한 십계명의 선포’ (1548) 등의 책을 집필해 출간했다.
불링거는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개혁가였다. 헨리 8세 시절 그리고 피의 메리 시절 종교 박해 때문에 영국을 떠나 취리히로 온 영국의 난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또 종교 박해가 끝나고 영국의 난민들이 귀국할 때 고마운 불링거의 책들을 가져가 영국에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550년에서 1560년까지 영국에서 불링거의 설교집 ‘열 가지 설교들(Decades)’은 77쇄를 찍었고, 그의 가정생활서는 137쇄를 찍었다.
이 시기에 영어로 출간된 칼뱅의 책은 2쇄밖에 나가지 못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후퍼의 영향도 컸다. 에드워드 6세 시절 영국으로 귀국한 후퍼는 불링거의 종교개혁 사상을 틈 있을 때마다 전파했기 때문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964597
@장코뱅 후퍼와 불링거 소개 글 잘 보았습니다. 츠빙글리와 불링거, 후퍼 모두 강직한 성품이 느껴집니다.
@장코뱅 청교도 신학도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츠빙글리의 신학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16세기 중반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청교도운동의 시작일 것이다. 청교도 운동은 복장 논쟁과 함께 일어났는데, 복장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이다. 그는 1945년 영국 소머셋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시토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런던으로 가서 대륙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와 불링거에 대해 연구하던 중 종교개혁운동들 지지하게 되었다. 다시 옥스퍼드에 돌아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전하던 후퍼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추방당했다. 몇 해 동안 유럽을 여행하면서 1547년에서1549년 사이 취리히에서 불링거(H. Bullinger), 마틴 부처(M. Bucer), 존 아 라스코(J. A Laski)등과 교제를 나누고 1549
후퍼는 교회 안에 남아있는 로마천주교회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재건함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회개혁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설교라고 여겼고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감회를 끼쳤다. 결국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어 에드워드 6세 앞에서 설교할 정도였다. 이러한 후퍼의 영적 자질을 높이 평가한 교회 당국은
1550년에 그를 글로스터(Gloucester)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교 임직에 앞서 성직자의 예복착용이 로마천주교회의 잔재임을 내세워 주교복 입는 것을 거부함으로 복장 논쟁을 일으켰다.
후퍼는 성직자의 복장이 아론의 에봇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로마천주교회의 전통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운동의 봉화를 든 후퍼의 순교", <목회와 신학>(1998년2월호)
@장코뱅 후퍼는 저토록 교황주의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애를 썼는데, 지금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다시 교황주의자들의 행태를 답습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장코뱅 예복 논쟁과 개혁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군요. 교회사의 섭리는 오묘한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하인리히 불링거
개혁주의 교회의 한 아버지
칼뱅의 신학과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불링거의 신학은 직접적으로 스위스 제2신조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개혁주의 교회의 초기정통주의의 길을 예비하였다. 불링거와 칼뱅 신학의 차이는 그들의 신학적인 원리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학적-교리적 의도의 차이에 있다 : 두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각자가 강조하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들이 선명하게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특징적으로 불링거가 구속사와 언약신학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면, 칼뱅은 신학의 논리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교회-교리사적으로 Fritz Buesser의 언급과 연결된다: "16세기에 칼뱅주의자들은 이단으로 명칭되었다. 따라서 츠빙글리, 외콜람파디우스, 부처, 페어미글리, 베즈 그리고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칼뱅과 불링거는 자신들을 스스로 거룩한 사도적이고 또 보편적인 교회의 종교개혁자들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자들로 간주하였다." 개혁 교회 안에서 칼뱅은 루터 교회 안에서의 루터와 동일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1580년 6월 25일에 출판된 루터 교회 신앙고백들의 모음집인《Konkordienbuch》이 루터 사상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면, 반대로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안에서는 칼뱅이라는 신학자에게 한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그 기원에서부터 교회의 정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존종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 상호간의 교류 속에서 협의되고 절충되어 몇몇 인물들이나 공적인 회집을 통해서 정리된 것이다. 특별히 이의 입장은 개혁주의 신앙내용이 종교개혁 당시에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서 표명되고 또 그들 상호적인 신학적 교류들과 영향들 속에서 뿌리잡고 발전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위와 관련하여 17세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의 내용 역시 그 안에 진술된 요소들이 한 인물 칼뱅과만 연결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개혁신학 안에서 칼뱅신학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교회와 신학을 위해 헌신하고 기여했던 다른 개혁파 종교개혁자들 역시도 같은 신앙고백을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개혁교회 안에 그 교회를 이루기 위해 온 정열을 쏟았던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불링거 역시도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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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를 읽어보면 불링거에 대해 비교적 잘 나오고 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9D%B8%EB%A6%AC%ED%9E%88_%EB%B6%88%EB%A7%81%EA%B1%B0
@장코뱅 불링거에 대해서 짧게나마 잘 읽고 더 이해를 했습니다. o.k.
리고니어 미니스트리(우리는 R.C. 스프로울의 티칭 사역 공동체입니다.)에 나오는 불링거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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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신학자: 하인리히 불링거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가장 영향력 있는 2세대 종교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후계자로서 전임자가 시작한 스위스 종교 개혁을 통합하고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글에 의하면 블링거(Bullinger)는 “확고한 믿음, 용기, 절제, 인내와 지구력을 가진 사람… 역사의 어려운 시기에 진리를 보존하고 진척시키기 위해 섭리 속에서 준비되었던 사람”이었다. 취리히의 대표 사역자로 있었던 44년 동안 불링거의 문학 작품은 양적인 면에 있어 마틴 루터, 존 칼빈, 츠빙글리의 작품을 능가했다. 그는 종교 개혁 전반에 걸쳐 개혁주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다. 불링거의 영향력은 유럽과 영국 전역에까지 너무 광범위해서
베자(Theodore Beza)는 그를 “모든 기독교 교회의 공통 목자”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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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길고 자세한 나머지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더 읽으세요.
https://ko.ligonier.org/articles/covenant-theologian-heinrich-bullinger/
@장코뱅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 스프로울이 운영했던 사이트군요. 잘 읽어 보았습니다.
@노베 저도 잘 읽어 보았습니다. 불링거가 기독교회 공통의 목자라는 칭찬에 공감합니다.
@장코뱅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포스팅을 통해서 안목을 넓히고 분별을 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