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부자는 에고의 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던져진 나사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2)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밖을 향해 있어서 오는 병으로 나사로의 헌데를 돌아보지 않아서 온 병이다.
3) 밖으로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에 들리는 가난한 나사로 곧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다.
2) 본론
1) 부자는 에고의 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던져진 나사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눅 16:20)”
‘거지’로 번역한 ‘푸토코스’는 거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갈구하는 자, 오직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으로 가난한 자다. ‘푸토코스’는 세상적인 가난한 자들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와 같은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 부자의 대문은, 에고의 벽으로 쌓여진 부자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말씀하고 있다. 에고가 허물어지면 이 문이 열려서 자유하게 되어 고난의 과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자신의 에고의 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던져진 나사로를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마음을 밖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색 옷(겉 사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2)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밖을 향해 있어서 오는 병으로 나사로의 헌데를 돌아보지 않아서 온 병이다.
문을 열고 가난한 자 나사로를 영접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푸토코스) 나사로는 헌데를 앓고(분사, 완료, 수동태) 있다고 나오고 있다. 이 헌데는 부자가 자색 옷을 입고 밖을 향하여 있는 결과로 오는 병이다.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이 병이 온다.
자색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해 있는 가난한 자(푸토코스)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와 세상의 개념과 풍류로 인한 마음이 밖을 향하고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래서 속사람이 문에서 신음 소리를 내어도 별 관심이 없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병든 나사로의 신음 소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3) 밖으로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에 들리는 가난한 나사로 곧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내용이 핵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중요하다. 제자들은 음성이 들리는 밖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더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제자들 안의 가난한 자, 나사로 곧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상태다.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자신들의 에고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그 때서야 비로소 이 말씀의 핵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교적 모든 행위를 오락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유다. 오락이 주는 기쁨은 대단하다. 천국에 대한 소망,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속이는 행위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