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형같이 생각해라
정봉교 명예교수(사회과학대 심리학과)
명예교수회에서 ‘사제동행’을 주제로 하는 글을 청탁받고, 그동안 내가 성장하는 데 길잡이가 되셨던 스승들과 내가 지도했던 제자들을 추억해 보는 보람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나에게 師弟와 兄弟가 아우 ‘弟’를 같이 사용하는 의미를 알게해주신 장현갑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글로 쓰기로 했다. 장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에서 시작하여 심리학과를 거쳐 영남대학교 심리학과로 그 후 선생님이 타계하실 때까지 48년간 이어졌다.
공릉동 교양과정부에서
나는 1972년 서울대 심리학과를 입학하였는데, 그때 신입생은 서울 공릉동 공대 옆에 있는 교양과정부에서 1년간 수업을 받았다. 그 당시의 정치 상황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을 공고히 하려고 시도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내가 교양과정부에서 수업을 했던 72년도 전반기는 시국이 비교적 조용하였으므로, 희망찬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2학기는 10월 유신 사태로 인해 수강 신청을 한 후 즉시 휴업사태가 발생했다. 따라서 출석 수업이 없이 기말에 레포트 제출만으로 성적이 평가되었다. 나는 장선생님이 강의하시는 교양심리학을 수강 신청했고, 이것이 장선생님과 처음 만날 기회였지만,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레포트도 간접적으로 제출하였으므로 직접 대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이듬해 나는 2학년이 되어서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 진입하여 장선생님이 강의하시는 생리심리학을 수강함으로써 처음으로 직접 만남을 가졌다. 당시 문리대의 다수 강의는 휴강이 빈번했고, 보통 3학점의 경우에도 2시간만 수업을 했다. 특히 2학기에는 대학의 휴업사태로 인해 정상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장선생님의 생리심리학 강의는 토요일 오전에 3시간 동안 이루어졌고, 휴강이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이 내가 장선생님에게 호감을 품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때 장선생님은 교양과정부 소속이어서 심리학과에 실험실이 없었는데, 심리학과의 배려로 심리학과 가장 안쪽에 있던 기존 실험실을 변경하여 생리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하셨다. 장선생님은 실험실에서 실험동물을 사육하고 동물실험을 실시하기 위해서 실험실원을 구하였고, 나는 실험실원으로 지원하여 장선생님과 처음으로 강의를 넘어서 개인적 인연을 맺었다.
생리심리학 실험실은 전공과 무관하게 자원했던 한 명의 대학원생과 나를 포함한 학부생 4명으로 출발했다. 실험실에서는 세미나, 동물사육, 실험, 식사 등이 동시에 이루어졌고, ISO 표준을 충족하는 최신 설비가 갖추어진 동물사육실이 필수 조건인 요즘과 비교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때 생쥐와 흰쥐를 사용하여 인삼과 향성신성약물이 동물학습에 미치는 효과를 알아보는 실험이 주로 수행되었다. 장선생님도 심리학과에 연구실이 없었으므로 실험실에서 우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다. 실험은 가끔 이루어지지만, 휴일이 없이 계속 실험동물을 돌보아야만 했다. 같이 자원했던 학부생 실험실원은 동물사육과 실험수행이 부담스러워서 서서히 실험실을 떠났고, 결국 실험실 관리는 거의 나의 몫이었다. 생쥐는 크기가 작아서 관리 실수로 사육상자를 탈출하여 다른 연구실과 실험실에 돌아다니면서 책상 서랍에 들어가서 배변과 배뇨를 해서, 심리학과 선생님과 학생의 원성을 샀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장선생님과 나의 인연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깊게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다른 선생님들의 신망도 동시에 얻도록 만들었다. 장선생님과 개인적 접촉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개인적 사정을 털어놓을 기회가 많아졌다. 장선생님은 과거 한일협정 비준 반대 데모에 참여했던 결과로 인해 서울대 심리학과를 떠나 고대 심리학과 대학원을 진학했고, 그후 장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리심리학을 전공하면서 겪었던 애로사항을 극복했던 이야기를 하셨다. 장선생님은 사석에서 “봉교야, 나를 형같이 생각해라.”라는 말을 하셨고, 이런 관계는 영남대학교 교수 시절까지 유지되었다. 평소 장선생님은 자신을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저돌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여 개척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시는 반면에, 나에 대해서 총명하고,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지만,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여서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셨다. 이런 소개는 내가 영남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을 때 학생들이 나에 대한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신림동 관악캠퍼스에서
서울대학교는 1975년에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이전했고, 분리된 캠퍼스를 가졌던 단과대학들은 관악캠퍼스에 모이게 되었다. 문리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등으로 재편되었다. 심리학과는 사회과학대학으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학과 교수는 수는 기존 4명에서 10명으로 증원되었다. 장선생님도 이때 막내 교수로 심리학과에 합류하셨다. 이전 초기에는 심리학과 실험실이 완비되지 않아 1학기 동안 장선생님 연구실에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실험공간과 동물사육실이 분리된 새로운 생리실험실이 완성된 후에 나는 실험실에 머물면서 실험장비의 제작, 동물사육, 실험 등에 참여했다. 4학년 말에 학부 졸업논문을 작성했는데, 과거 실험실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심리학과 학생들의 진로는 행정고시 혹은 외무고시를 준비하거나, 빨리 병역 의무를 마치고 취업 준비를 하여 당시에 인기 있었던 종합상사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일부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해외 유학을 계획했다. 나는 생리심리학 실험실 경험으로 인해 대학원 진학에 뜻을 품었다. 4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병역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당연히 장선생님을 지도교수로 하여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러나 장선생님은 즉시 허락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학기 중간이 되어서 장선생님은 그동안 나와의 관계로 봐서 당연히 석사과정 지도학생으로 받고 싶은 감정이 앞서지만, 대학에서 생리심리학 전공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의 진로가 너무 험난하므로 응용심리학 분야인 산업심리학을 전공하는 것이 어떻겠다고 말하셨다. 장선생님은 그동안 흥미 삼아 기업 직원을 대상으로 성공 동기와 긍정적 사고를 주제로 강의했고, 이런 인연으로 취업을 추천해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 및 조직심리학 전공을 지도해줄 교수가 마땅치 않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결국 나는 장선생님의 중재로 사회심리학 교수인 차재호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석사과정에서 산업심리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차선생님은 원칙주의자로 소문이 나서 다른 전공을 하는 학생의 지도교수를 맡아줄 가능성이 매우 낮았는데, 흔쾌하게 석사과정 지도를 허락하셨고, 나중에 박사과정에서 생리심리학을 전공할 때도 지도해주셨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심리학과 조교로 임용되었고, 생리실험실에서 사회심리학 대학원생 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석사과정을 다니는 동안 틈틈이 장선생님 연구실을 찾아가 커피를 마시면서 흥미로운 연구 주제나 서적, 실험 결과, 외부 강연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한 신상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장선생님은 건강문제, 학과내 막내 교수로서의 고충, 연구 인력과 설비의 미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속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고, 내가 그 점에서 조금 위로가 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심리학과 분위기에서 대학원생이 지도교수가 아닌 다른 교수를 자주 찾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한 처신이 될 수 있었지만, 주변에서 장선생님과 나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4. 직장에서
나는 석사과정 2년 차가 되었을 때,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진학할 것인지 아니면 해외로 유학하여 박사과정을 진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 당시 국내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직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시간적 여유와 기회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진학했던 대학원생들도 중도에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형편상 선뜻 해외 유학을 결정하기 곤란했으므로 진로에 대해 상당히 고민했고, 따라서 장선생님과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장선생님은 대한전선 주식회사 종합조정실 인사과 과장으로 근무하는 심리학과 동기에게 그동안 만날 때마다 심리학 전공자의 채용 필요성을 설득해서 긍정적인 답을 얻었으니 내가 그곳에 취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으셨다.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나는 일주일 동안 고민하다가 취직을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석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지 않은 채로 급히 심리학과 대학원생 특채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내가 취업한 다음 해에는 대한전선 사원공채 공고에서 전공 자격요건에 국내 최초로 심리학 전공을 포함했다.
나는 입사 후 2년 동안 인력 및 조직개발 분야에서 심리학 지식을 응용하면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하였다. 특별한 일이 없었으면 대학교에서 맺은 장선생님과 학연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에는 제2차 오일 쇼크가 닥쳐와서 상당한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겪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도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생산과 영업 부서 이외에는 비용을 대폭 절감하였으므로 회사에서 내가 할 업무가 줄었다.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선배와 동료들의 협조와 지원을 바탕으로 논문을 완성하여 1980년 2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때는 전두환 군부 구테타로 인해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웠지만, 대학입시문제 해결 대책으로 대학 정원이 대폭 증원되었고 많은 대학에서 새로운 학과들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심리학과도 신설되기 시작하여 그후 30여 대학에서 신규 설립되었다. 장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하시고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다가, 1978년에 교육 및 연구설비를 충분히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영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하셨다. 이때 장선생님은 상경할 때마다 몇 번이나 회사를 방문하여 나를 만나고 가셨는데, 특히 내가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을 격려해주셨다.
5. 영남대에서
장선생님은 1981년에 심리학과에 심리학 연구방법론 교수 채용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수락되면 나에게 지원을 해보라는 정보를 주셨다. 나는 1981년에 영남대학교에 채용되어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장선생님과 스승과 제자 관계로 보낸 5년을 넘어서 2007년 장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실 때까지 26년간 영남대 심리학과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장선생님은 교육, 연구 및 생활에서 나의 여러 부족한 면을 채워주시는 멘토로 역할을 충분히 해주셨다. 내가 영남대학교에 부임한 초기에 장선생님이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셨는데, 나는 연구방법론 지식으로 논문 작성을 조금이나마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를 갚았던 기억이다. 장선생님이 학교에 요청하여 마련한 동물실험실과 동물실험 장비가 나에게 연구방법론에서 생리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남대학교에서 보낸 시간 동안에도 항상 나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장선생님은 2020년 4월에 78세 생일을 열흘 앞두고 타계하셨는데, 얼마 동안 나는 삶에서 중요한 가족 동반자를 상실한 허전함을 느꼈다. 요즘도 어쩌다 장선생님과 공통 추억의 공간이었던 심리학과 실험실에서 생시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꾼다.
첫댓글 교수님, 옥고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장현갑 교수님도 눈에 선합니다. 학과 동료 교수를 넘어서 '이런 관계'가 있었구나 하면서 따뜻한 온기를 느낍니다. 신뢰와 사랑 속에서 학문도 개척하고, 새 제자도 교육하고, 참 복받은 삶이시구나!!!!!
오늘 새벽에는 눈을 뜨면서, 우리가 살면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 글을 올릴 수 있는 '따뜻한 정원'을 만들면 좋겠다 싶었는데, 오늘 이 글을 읽게 되리라는 느낌이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