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외 1편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 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 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 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 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 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소반에 만산홍엽을 내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순간을 풀어 주다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자
하늘엔 별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물을 자르고 들려면 세 명은 필요하다
물의 광장에 노을이 지고
모닥불이 피워지고
우리는 옥수수 가루로 죽을 쑤어 날랐다
울지 말라고 해도 물은
괜찬을 거야라고 해도 물은
노래를 깨물었다
물의 지문은 흩어져
그의 다잉 메시지는 프랙탈로 공중에 새겨졌다
순간을 움켜쥔
나무를 베어 내 옮기던 임도林道에
묶여 있던 순간을 풀어 준다
순간은 순식간에 뛰쳐나간다
복제
해적판
불법 다운로드
물의 꿈이 복제되어 해적판으로 나가도
물은 행복하다
가난한 아이들 배고픈 새벽에
허리를 움켜쥐고
별을 다운로드한다
물고기 비늘 같은 은하수를 만난다
땅 속이나 공중이나 하늘에서
물의 꿈은 행복하다
아이들 생피 같은
이슬 같은 물의 심장은 행복하다
나금숙
전남 나주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 나무 아래로』 『레일라 바래다주기』, 공동 시집 『12시인의 노래』 4, 5, 6, 7권이 있음. 2002년 문예진흥기금, 2017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서울시 공무원 역임. 현재 현대시학회 회장. 『시인하우스』 부주간.
책 소개
단연 “서늘하도록 임박한 그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는 “청동 여자” 나금숙의 시 속엔 “가장 오래 살아남는 땅”에 감자를 파종하는 농부나 상한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드는 악사의 모습이 살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는 흰 마음”으로 “하늘의 심장”을 받기 위한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며 기꺼이 영적 변환의 “먼 길”을 떠나는 수행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언제부턴가 “신성”을 잃어버린 우리 앞에 지금 “궁창의 푸른 갈비뼈”로 만든 하프를 켠 채 한 가닥 촛불 같은 “최초의 감정”으로 “신탁”의 언어를 기다리는 자의 기록이다.
― 임동확 (시인, 한신대 국문과 겸임교수)
나금숙은 세계가 숨긴 “기호”를 찾는 유목민이자 탐색자다. 그는 “물의 지문”을 만지거나, ‘흰 꽃의 정박지’를 걱정하고, ‘고등어의 길’을 되밟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한다. 젖은 부호를 발굴하고 직조하는 데 탁월한, 그의 루트를 따라 ‘길거리의 가수’가 되고, “모란” 속에 잠들며, “하늘의 심장”을 받는 일은 내게, 신선한 아침을 수혈하고 고독한 저녁의 마성을 깨우는 의식이었다. “동굴”과 “석비”에서 시작된 그의 발자국은 ‘AI’ 텍스트가 흉내 낼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불태우지 못한 말들은 새로운 노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매한 내 눈과 귀는 “물결에 쓸려가다 먼 바닷가에 멈”춘 아이들과, “반짝이는 바깥으로 달아난” 존재들에 대한 물음표만 낳았지만, 다시 한 편을 손에 올려 본다. 시인의 최초의 감정에 가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 유미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