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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
무진의보살경 제1권--2
송(宋)나라 양주(涼州) 사문 지엄(智嚴) 보운(寶雲) 공역
정관유 번역
그때 모여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저 보살 대중의 공덕과 지혜에 대하여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하늘의 우담바라꽃과 구물두(拘物頭)꽃과 파두마(波頭摩)꽃과 분다리(分陀利)꽃과 만다라(曼陀利)꽃을
무진의 보살과 여러 보살들에게 뿌리고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오늘 쾌히 좋은 이익을 얻어 이러한 여러 보살들을 보고 예배 공양하며 공경히 에워쌀 수 있었으니,
만약 어떤 중생이 그 이름을 듣는다면 이와 같이 한량없는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며,
그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는다면 다 위없는 도(道)의 마음을 일으키리라.”
이 법을 말씀하실 때에 그 법회에 모인 360만의 중생들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阿耨多羅三邈三菩提]의 마음을 내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저 부처님 세계에는 세 가지 나쁜 갈래[三惡道]나 혹은 그 이름조차도 없고,
또한 삿된 행과 계율에 어긋나는 이름도 없으며,
또 여자나 간탐(慳貪)과 질투와 파계(破戒)와 성냄과 게으름이나 산란한 마음과 어리석음이라는 이름도 없고,
걸림과 덮임[蔭盖]과 쌓임[集]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중생의 근기가 평등하여 상∙중∙하가 없이 순전히 일승(一乘)이어서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이름이 없으며,
불국토에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이름이 없고,
또 삼보(三寶)를 차별하는 명칭도 없고,
음식에 굶주리거나 목말라 하는 소리와 ‘나’와 ‘내 것’을 막거나 보호한다는 이름도 들리지 않으며,
모든 마구니 그물과 망령된 소견으로 쌓은 이름도 없으며,
저 부처님의 세계는 평탄하고 광대해서 하나의 해와 달이 60억 백천 나유타 유순을 두루 비추니,
이런 보기 드문 일은 저 보살의 본원(本願)으로 이루어진 것이니라.
그 국토는 평평하고 고르기가 마치 손바닥 같으며 유리 같은 뭇 보배들로 뒤섞여 이루어졌고,
그 땅은 부드럽고 연하기가 마치 하늘 옷 같아서 이것에 몸이 닿은 이는 미묘한 즐거움을 느끼니,
보배 나무로 장엄하여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보배 끈으로 연결하여 여덟 길의 경계를 구분했으며
펼쳐져 있는 모든 꽃들은 언제나 저절로 피고 돌과 모래와 가시와 더러운 것이 없으며
모든 산은 순전히 보배 꾸러미로만 섞여 이루어졌느니라.
또 사람이나 하늘이나 다름이 없이 법의 기쁨과 선정의 맛으로 음식을 삼고,
오직 보현여래 법왕 말고는 그 불국토에 왕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그 부처님과 보살들은 문자를 쓰지 않고서도 설법하고,
보살들은 오직 부처님 뵙기만을 생각하면서 자세히 보아 싫증내지 않으며,
눈을 잠시도 깜박이지 않았으므로 곧 염불삼매를 얻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으니,
그러므로 저 불국토의 이름을 불순(不眴)이라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느냐면, 물질의 모양이나 타고난 종성(種性) 또는 과거의 깨끗한 업까지도 관찰하지 않는 것이니
이때에는 마음에 자기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현재의 5음(陰)∙18계(界)∙6입(入)과 보고[見] 들음[聞]과 깨달아[覺] 아는 것[知]과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 등을
관찰하지 않으며, 희론(戱論)과 나고[生] 머물다[住] 사라진다[滅]는 생각이 없고,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으며, 염(念)하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思想]과 생각 아닌 것을 관찰하지 않으며,
다르다는 생각[別想]과 법이라는 생각[法想]과 자기라는 생각[己想]을 나누지 않고,
경계와 공덕과 안과 밖과 중간에서 같다거나 다르다는 생각이 없으며,
각관(覺觀)과 처음과 끝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생긴 모양이나 위의나 법식(法式)을 관찰하지 않으며,
계(戒)∙정(定)∙지혜(智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地見)과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18불공법(不共法)을 관찰하지 않느니라.
바른 염불이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행으로 짓는 것도 아니며,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같은 것이 없으면서 같으므로 골똘한 생각을 여의어 염하는 바도 생각하는 대상도 없으며,
5음∙6입∙18계와 나고 머물다 사라진다는 생각이 없고, 처소(處所)가 없지만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며,
움직임도 그침도 아니고 빛깔도 의식도 아니며, 생각도 느낌도 아니고 지어감도 아니며,
앎[識]에 대하여 알음알이를 내지 않고, 땅∙물∙불∙바람에 대해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며,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혀에 대한 맛과 몸에 대한 감촉과 마음에 대한 법에서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이와 같이 일체 경계에 반연하지 않으며,
모든 모양과 ‘나’와 ‘내 것’을 내지 않고, 보고 들음과 깨달아 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마침내 일체를 해탈하는 데 이르며,
심(心)과 심수(心數) 법을 멸하여 이어가지 않고, 모든 억상(憶想)과 억상 아닌 것 등을 깨끗이 하며,
사랑함과 성냄을 잘 제거하여 인연상(因緣想)을 없애고, 이것과 저것과 중간을 모두 남김없이 끊어버리느니라.
이 법이 깨끗한 것은 문자가 없기 때문이고, 법에 대해 기뻐함이 없는 것은 움직이거나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며,
법에 괴로움이 없는 것은 맛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법에 열뇌(熱惱)가 없는 것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이며,
법에 벗어남이 없는 것은 성품을 버리고 여의었기 때문이고, 법에 형체가 없는 것은 물질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 느낌이 없는 것은 ‘나’가 없기 때문이고, 법에 얽매임이 없는 것은 고요하여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법의 모양을 짓지 않는 것은 조작함이 없기 때문이고, 법에 언교(言敎)가 없는 것은 알음알이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법에 편히 머무름이 없는 것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 지음이 없는 것은 받는 이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법에 소멸함이 없는 것은 본래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심수(心數)의 생각으로 반연하여 머무는 법에 그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분별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느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타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니,
법성의 평등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눈에 있어서 빛깔과 귀에 있어서 소리와 코에 있어서 냄새와 혀에 있어서
맛과 몸에 있어서 감촉과 마음에 있어서 법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염불삼매라 하느니라.
보살이 이 염불삼매를 얻는다면 일체의 법 가운데서 자재한 지혜의 다라니문을 얻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다 받아 지녀서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며,
또 모든 중생들의 말과 음성을 분명하게 알아서 걸림 없는 변재로 모자람이 없이 매우 잘 할 것이니라.
사리불아, 저 보현여래는 이 국토에서처럼 두 가지 인연으로써 바른 소견을 연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는 것과 안으로 바르게 억념(憶念)하는 것이니라.
저 여러 보살들은 부처님을 뵐 때에 곧 모든 깊고 미묘한 이치를 분별하여 6바라밀(波羅密)을 원만히 갖추어 성취하니,
왜 그런가 하면 색상(色相)을 취하지 않으므로 보시바라밀[檀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제거하므로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이 다함을 관찰하므로 인욕바라밀[羼提婆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의 고요함을 보므로 정진바라밀[毘梨耶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행하지 않으므로 선정바라밀[禪那波羅密]을 원만히 갖추고,
색상을 희론하지 않으므로 지혜바라밀[般若波羅密]을 원만히 갖추느니라.
이 여러 보살들은 부처님을 뵙자마자 바로 이러한 6바라밀을 갖추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지혜를 얻느니라.
사리불아,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장엄 청정하고 미묘하지만 저 보현여래의 불순세계와 같은 세계는 드무니라.”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기쁘시겠습니다.
그대 어진 대사들은 저 불국토에서 보현부처님을 뵙고 한량없는 이익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무진의 보살이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대덕이시여, 지금 불순세계의 보현부처님과 그 대중들을 꼭 뵙고 싶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보현부처님을 뵙고 이 대중들로 하여금 선근이 더욱더 늘어나게 하고 싶습니다.”
그때 무진의 보살은 곧 보살의 온갖 불국토를 나타내 보이는 삼매에 들어갔다.
삼매에 들어서는 이 대중과 사리불로 하여금 이내 저 불국토의 보현여래와 그 대중을 보게 하니,
이 일을 보고 나서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멀리서 그 부처님과 대중에게 예배하였다.
여기에 모인 대중들은 부처님과 무진의 보살의 신통한 도력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묘한 꽃을 얻었으니,
예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꽃의 향기와 빛깔이 손바닥에 자연히 가득하게 되어,
그것을 멀리 동쪽에 뿌려 보현부처님께 공양하였다.
꽃이 곧 저 불국토의 보현부처님과 그 법회의 대중들에게 까지 두루 이르니,
저 여러 보살들이 이 꽃을 보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화려하게 장엄된 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꽃인데, 어느 곳으로부터 여기에 온 것입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바세계에 있는 무진의 보살과 시방에서 온 보살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신 곳에 함께 모여서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세존께서 『대집경』을 연설하시는 것을 듣고 있는데,
이것은 그 대중들이 뿌린 꽃이니라.”
저 여러 보살들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부처님의 세계는 어느 쪽에 있으며, 여기에서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선남자들아, 여기에서 서방으로 열 개의 항하강 모래처럼 많은 세계에 있는 작은 티끌과 같은 나라를 지나면
그 사바세계가 있느니라.”
여러 보살들이 말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대중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때 보현여래가 곧 큰 광명을 놓으시자, 그 광명이 석가모니부처님 세계를 밝게 비추었다.
저 여러 대중들은 보현부처님의 광명으로 인하여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부처님과 여러 대중들을 모두 보게 되었으며,
보고서는 기뻐하여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저 국토의 보살과 모든 대중들은 어느 곳에서 와서 여기에 모였기에 그 세계를 빈 곳이 없이 두루 가득 차게 하였습니까?”
보현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선남자들아, 그 대중들은 다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로부터 와서 거기에 모여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묻고 그 법을 듣느니라.”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물었다.
“누가 그대의 이름을 무진의라고 하였습니까?”
무진의 보살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모든 법의 인연과 과보를 무진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바라건대 그대가 다함없는 법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처음에 위없는 보리심을 낼 때부터 이미 다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보리심을 내는 것은 번뇌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발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여타의 승(乘)을 바리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견고한 것은 외도나 삿된 논의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악마도 저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항상 순조로운 것은 선근을 더욱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발심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것은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덧없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도닥이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이며,
발심이 수승하고 미묘한 것은 손상됨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하여 편안히 머무는 것은 희론(戱論)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을 그 무엇에도 비유할 수 없는 것은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발심이 금강처럼 단단한 것은 모든 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며,
발심이 끝없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평등한 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널리 덮어주는 것은 분별하거나 다르게 여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이 선명한 것은 성품이 항상 깨끗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더러움이 없는 것은 지혜가 해맑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잘 이해하는 것은 끝내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드넓고 쾌활한 것은 자비로움이 허공처럼 넓기 때문이며,
발심이 광대한 것은 모든 중생을 다 용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걸림이 없음은 지혜를 통달했기 때문이며, 발
심하여 두루 이르는 것은 대비심(大悲心)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잘 이해하여 원력을 세우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귀의하는 것은 여러 부처님의 칭찬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이 뛰어남은 이승(二乘)이 높이 우러르기 때문이며, 발심이 심원한 것은 중생들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무너지지 않음은 불법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며, 발심이 편안한 것은 중생들에게 모든 쾌락을 잘 주기 때문이며,
발심이 장엄한 것은 모든 공덕을 다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잘 관찰함은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발심이 더 자라나게 하는 것은 뜻대로 베풀어 주기 때문이며, 발심이 바람과 같은 것은 계율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보리심을 내어 원수나 친한 이까지 널리 미치는 것은 인욕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발심을 파괴하기 어려움은 정진을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고요한 것은 선정을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헐뜯음이 없음은 지혜를 갖추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바람이 없는 것은 대자심(大慈心)을 더욱더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내어 근본에 머무르기를 굳게 함은 대비심(大悲心)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온화하고 즐거운 것은 큰 희심(喜心)을 더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은 큰 평등한 마음[捨心]을 더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발심하여 책임이 중요한 것은 여러 부처님께 받았기 때문이며, 발심하되 끊지 않음은 삼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지혜를 위하여 보리심을 내니,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마치 허공이 끝이 없는 것처럼 모든 지혜를 위해 보리심을 내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이 끝이 없습니다.”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부처님 계율을 다할 수 없음도 계율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부처님 선정의 다함이 없음도 선정으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으며,
부처님 지혜의 다함이 없음도 지혜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부처님의 해탈이 다함이 없음도 해탈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으며,
부처님 해탈지견의 다함이 없음도 해탈지견으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여래의 계율∙선정∙지혜∙해탈∙해탈지견은 그 성품이 다 함 없으니,
이 다섯 가지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는 것인데 어찌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래의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열여덟 가지 같지 않은 법[十八不共法]의 다함이 없음도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다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요약하여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다함이 없음은 이로 인하여 발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고,
삼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의 성품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실다운 지혜가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들의 한량없는 마음과 행을 따르는 지혜가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가장 훌륭한 것에 회향함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중생을 교화함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다함없는 지혜는 생겨남[生]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으며, 성품을 여의어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고,
모든 법의 본성을 앎이 다함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보리심을 내어 다함이 없음이라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이것은 보살의 마음이 청정하여 다함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아첨하지 않기 때문이고, 아첨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사함이 없기 때문이며,
간사함이 없음은 잘 분별하기 때문이고, 잘 분별한다는 것은 삿된 방법으로 생활을 꾸려가지 않기 때문이며,
삿된 방법으로 생활을 꾸려가지 않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늘 바르고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항상 바르고 한결같다는 것은 그 성품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성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깔보거나 헐뜯음이 없기 때문이며,
깔보거나 헐뜯음이 없다는 것은 모든 왜곡된 것들을 없앴기 때문이고, 모든 왜곡된 것들을 없앰은 마음의 바탕이 곧기 때문이며,
마음의 바탕이 곧다는 것은 평정(平正)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평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견고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견고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성품이 굳건하기 때문이고, 성품이 굳건하다는 것은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며,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의지하는 곳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마음을 제거했기 때문이며,
‘나’라는 마음을 제거했다는 것은 상대가 없기 때문이고, 상대가 없다는 것은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업을 짓기 때문이고, 선업을 짓는다는 것은 꾸짖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꾸짖음이 없다는 것은 잘못이 없기 때문이고, 잘못이 없다는 것은 불타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며,
불타는 번뇌가 없다는 것은 성품이 진실하기 때문이고, 성품이 진실하다는 것은 헛되거나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며,
헛되거나 거짓됨이 없다는 것은 말한 대로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고, 말한 대로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일을 잘 하기 때문이며,
일을 잘한다는 것은 흠이 없기 때문이고, 흠이 없다는 것은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며,
그릇됨이 없다는 것은 막힘이 없기 때문이고, 막힘이 없다는 것은 물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중생을 관찰한다는 것은 대비(大悲)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며,
대비의 뿌리가 깊다는 것은 중생을 잘 교화하되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기 때문이고,
중생을 잘 교화하되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안락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기의 안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익을 탐내지 않기 때문이고, 이익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애욕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애욕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고, 모든 법을 반연한다는 것은 연약함과 모자람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연약함과 모자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중생을 보기 때문이고, 중생을 본다는 것은 항상 옹호하기 때문이며,
항상 옹호한다는 것은 귀의처가 되기 때문이고, 귀의처가 된다는 것은 번뇌에 끄달림이 없기 때문이며,
번뇌에 끄달림이 없다는 것은 잘 관찰하기 때문이고, 잘 관찰한다는 것은 비난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며,
비난하는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훌륭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며,
훌륭하게 청정하다는 것은 언제나 정진하기 때문이고, 언제나 정진 한다는 것은 안으로 청정하기 때문이며,
안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항상 선명하기 때문이고, 항상 선명하다는 것은 더럽혀지거나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그 청정한 마음은 인색함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인색함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파계를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파계를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성냄과 미움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성냄과 미움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게으름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게으름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어지러운 마음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끊게 하며,
그 청정한 마음은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어리석음을 끊게 합니다.
사리불이여, 그 청정한 마음이 이와 같이 모든 불선법(不善法)을 끊고 중생들을 선법(善法) 가운데 안주하게 하니,
그러므로 이것을 보살의 청정한 마음은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의 심행(心行)이 청정함도 다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보살이 보시를 행할 적에 일체를 다 보아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계율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모든 금계(禁戒)를 지니고 두타(頭陀)의 바른 행으로써 위의를 범하는 것이 없으며,
보살이 인욕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에 미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으며,
보살이 정진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모든 선법(善法)을 부지런히 닦으며,
보살이 선정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모든 선정에서 그릇되거나 산란함이 없으며,
보살이 지혜를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많이 듣고 아는 것을 닦아 익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살이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행하고 인욕을 행하고 정진을 행하고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행한다고 합니다.
보살이 사랑함[慈]과 가엾이 여김[悲]과 기뻐함[喜]과 버림[捨]을 행함도 다할 수 없으니,
일체를 다 보아서 이익 되게 하고 괴로움에서 건져 기뻐 날뛰게 하여 애욕과 성냄을 잘 끊어 버리므로
이것을 보살의 사랑함과 가엾이 여김과 기뻐함과 버림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행하는 삼업(三業)은 청정하니, 몸으로 짓는 세 가지[身三]나쁜 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口四]의 허물을 여의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意三]나쁜 업 이른바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를 여의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많이 들음을 닦아 익혀서 다함이 없는 것은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고,
보살이 인색함이 없음을 수행하는 것은 온갖 지혜를 모으기 때문이며,
보살이 온갖 지혜를 닦아 모으는 것은 다른 보살에게 권하여 도의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이고,
다른 보살에게 권하여 도의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은 선근(善根)에 수행하여 편안히 머물기 때문이며,
선근에 수행하여 편안히 머무른다는 것은 최상의 보리도(菩提道)에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보리도를 원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을 거두어 갖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거두어 갖는다는 것은 네 가지 일[四事]을 거두어 갖기 때문이며,
보살이 네 가지 일을 거두어 가짐[四事攝:四攝法]을 수행하는 것은 모든 죄를 참회하기 때문이고,
보살이 참회하는 법을 수행하는 것은 모든 악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보살이 모든 악을 드러냄을 수행하는 것은 모든 공덕을 회향하기 때문이고,
보살이 모든 공덕을 회향한다는 것은 한량없는 진귀한 보배를 모으기 때문입니다.
한량없는 진귀한 보배를 모으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하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께 권청하는 것은 모든 법을 거두어 갖기 때문이며, 모든 법을 거두어 갖는 것은 보살의 법을 행하기 때문이고,
보살의 법을 행하는 것은 중생을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갖가지 장엄을 굳게 지녀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이 여러 장엄을 굳게 지녀 버리지 않는 것은 중생의 모든 착한 일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 있습니다.
그 네 가지 행이란 보살의 심행(心行)이 다함없음과 법보시의 다함없음, 교화의 다함없음, 선근의 다함없음이니,
이것을 보살의 다함이 없는 네 가지 행이라 합니다.
보살에게 다시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비어 한가한 곳에 있기를 즐거워하고 위의(威儀)를 거두어 가지되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며,
항상 한량없는 공덕 모으기를 즐거워하되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고,
학문을 많이 구하여 모든 이치를 널리 알되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며,
항상 위없는 보리의 지혜를 원하되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또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교계(校計)를 깨달음이 다함없고, 칭량(稱量)을 깨달음이 다함없으며,
생각[思惟]을 깨달음이 다함없고, 법 관찰함[觀法]을 깨달음이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또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번뇌[垢]의 원인을 깨달음이 다함없고,
깨끗한 법을 깨달음이 다함없으며, 모든 번뇌를 꾸짖음이 다함없고, 깨끗한 법을 찬탄함이 다함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또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5온(蘊)을 끝까지 관찰함이 다함없고, 18계(界)를 끝까지 관찰함이 다함없으며,
모든 감관[六入]을 끝까지 관찰함이 다함없고, 12인연(因緣)을 끝까지 관찰함이 다함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또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덧없는 행을 말함이 다함없고, 고행(苦行)을 말함이 다함없으며,
무아(無我)의 행을 말함이 다함없고, 적정(寂靜)과 열반을 말함이 다함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행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보살이 행하는 것은 모두 다함이 없습니다.
모든 지혜에 나아가고 모든 지혜를 높이며 모든 지혜를 우러르니,
모든 지혜가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연으로 보살이 행하는 일이 모두 다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심행(心行)이 다함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이 보살의 마음은 끝내 다함이 없으니,
왜냐하면 그 생각하는 것이 한 찰나 동안에도 항상 보리를 인연하여 마음에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자리[地]에 나아가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이고, 끝내 키우고 자라게 하여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이며,
끝내 본행(本行)을 더욱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끝내 짐을 벗어버리고 훌륭한 법을 거두기 때문이며,
끝내 견줄 것 없이 모든 불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끝내 선법(善法)을 반연하여 키우고 자라게 하기 때문이며,
끝내 마음이 작용하는 곳을 넘어서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내 장엄하여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며,
끝내 길상(吉祥)한 보리를 수행하여 갖가지 고행(苦行)을 다 성취하기 때문이며,
끝내 자기의 안락을 바라지 않고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며, 끝내 수순(隨順)하여 모든 악을 없애기 때문이며,
끝내 조복하여 성인의 법에 머물기 때문이며, 끝내 잡되지 않아 번뇌를 여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보시를 끝까지 하여 머리와 눈조차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어려운 계율을 끝까지 지녀 금계 범하는 것으로부터 지켜내기 때문이며,
힘든 인욕을 끝까지 하여 인욕으로 모든 허물과 악의 세력을 없애기 때문이며,
힘든 정진을 끝까지 하여 오로지 고행을 닦아 이승(二乘)을 버리기 때문이며,
힘든 선정을 끝까지 닦되 마음은 모든 선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어려운 지혜를 끝까지 행하되 모든 선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심 수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다 성취하는데 이르기 때문이며,
끝내 만만(慢慢)과 증상만(增上慢)과 승만(勝慢)과 아만(我慢)과 하만(下慢)과 교만(憍慢)과 사만(邪慢)을 멀리 여의고
잘 분별하기 때문이며, 끝내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되 보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끝내 놀라지 않고 깊은 불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끝내 더욱 정진하여 중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끝내 다함이 없이 항상 정진하기 때문이며, 끝내 속이지 않고 중생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또 ‘끝내’는 중생을 조복하여 부드럽게 하고, 모든 어질고 착한 사람을 사랑으로 덮어 이익 되게 하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모든 악을 행하는 자를 구원하고, 높은 어른을 공경하고, 보호하는 이 없는 이를 보호하며,
돌아갈 곳이 없는 이에게 돌아갈 곳이 되어 주고, 비춤이 없는 이를 비추어 주며, 의지할 데 없는 이의 의지가 되어 주고,
짝이 없는 이에게는 짝이 되어 주며, 굽은 것들은 곧게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게 하며, 간악한 자는 간악함을 없게 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邪命]하는 자는 깨끗하게 하며, 은혜 있는 이나 은혜 없는 이나 은혜를 모르는 이까지도 다 은혜롭게 하고,
이롭지 않은 이를 이롭게 하며, 헛되이 비방하는 자를 진실 되게 하고, 교만한 자를 교만하지 않게 하며,
죄 지은 자라도 헐뜯지 않고, 모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와 삿된 행을 수호하는 자를 고운 말씨로 가르치며,
방편을 행하는 것을 보고서 허물로 여기지 않고, 모든 받는 이들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다른 보살들을 항상 이끌어 주어 부드럽고 고운 말로써 가르쳐 훈계하고,
비고 한가한 곳에 있기를 즐겨하여 선법(善法)을 수행하며, 모든 이익을 여의어 신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이고,
말할 때에 삿되거나 아첨하지 않는 것은 입으로 짓는 허물을 거두었기 때문이며,
삿된 업을 가지고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에 욕심이 적어 항상 만족할 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이 고르고 부드럽고 온화함은 번뇌의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며, 생사로 돌아감은 선근을 갖추기 때문이며,
모든 고통을 참아내는 것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보살이 모든 것을 끝까지 하여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생사의 번뇌가 영원히 파괴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모든 공덕을 증장하기 때문이고,
일체 중생을 포용하고 거두기 때문이며, 끝없는 묘한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대덕이시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끝내 다함이 없음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