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연 소시집 단평
‘세월’과 존재의 복합적 시적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현대시론연구회장)
우리 현대시가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있다면 존재에 관한 문제의 심각성이 바로 시간성(혹은 세월)과 불가분의 상관을 갖는다는 점이다. 어차피 존재는 인간의 생멸(生滅)과의 범주(範疇)에서 생성하는 다변적인 삶과도 상호 대칭을 이루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 지향점을 인식하는 속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거기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하는 경우를 많이 읽을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에게 내재된 칠정(七情-희노애락애오욕)과 결부한 심리적인 발흥(發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김수연 시인이 특집으로 올리는 소시집의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감응(感應)하는 바는 존재의 인식을 위해서 다양한 시간적인 체험이 시적으로 발상하고 주제로 투영되는 시법(詩法)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가 현재 전개하는 시적상황과 독자들에게 전해야 할 결론적인 메시지의 창조를 위한 심고(審考)의 폭이 광활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걸어 온 발자취 비틀어지고 흐트러져 / 꽃길만 걸어 온 줄 알았는데 / 세월 밟고 온 흔적이라며 흙도 많이 묻어 있습니다(「나이테」중에서)’라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동행하고 있는 ‘세월’이라는 무형의 산물이 복합적으로 그의 작품에 농축되고 있다.
일찍이 로마의 대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했듯이 ‘흘러가는 세월은 우리의 재보(財寶)를 하나하나 빼앗아 간다’는 언지로 세월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약간은 부족하거나 불만스런 대칭적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하는 시간성에서 탐색하는 인간들의 진실(또는 시적 진실)이 무엇인가를 구명(究明)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고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골목과 거리를 디디면서 / 가진 것과 누릴 것 찾아 떠돌다가 / 가끔 인정도 베풀면서 / 세상사 이치 옳고 그름을 가려도 보았다 / 거짓을 핑계로 덮으며 갈수록 허망해진다 // 봄에서 겨울까지 시간을 밟으며 / 스스로 돌아가면서 버려지고 / 젖어서 무거운 상념 어디까지 닿으리라고 / 두 어깨 짐 새털구름 되어 날려 보낸다 // 외로움 슬픔 아픔 막을 시간 많지 않지 / 먼 길 떠날 때 하얀 날개 거푸 휘저어 / 서둘러 꿈길 쓸고 날아가듯이 / 세월의 무게 얹혀 내 몰린다 // 두 손에 뜬 구름 떠받들어 옮겨 놓고 / 마른 한숨소리에 잡히지만 / 저무는 저녁 창문에 밀려 사라지는 / 장엄한 노을 눈부시다 // 사람에 무너지는 그런 날 다가오는 것 알기에 / 바람소리 스쳐 지나는 흔적 / 찰나에 스치는 숨 / 학이 되어 시간의 문을 열고 날아오른다.
--「어느 날 문득」전문
이 작품에서 김수연 시인이 재생하는 상상(imagination)은 ‘봄에서 겨울까지 시간을 밟’았으나 지금은 ‘외로움 슬픔 아픔 막을 시간 많지 않’다는 ‘세월의 무게 얹혀 내 몰’리고 있어서 종내에는 ‘찰나에 스치는 숨 / 학이 되어 시간의 문을 열고 날아오른다.’는 흐름으로 시적 상황을 전개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시간이 그에게 ‘가끔 인정도 베풀면서 / 세상사 이치 옳고 그름을 가려도 보았다 / 거짓을 핑계로 덮으며 갈수록 허망해진다’는 존재의 이유는 이러한 ‘허망’이라는 시적 진실을(주제)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있을 것이며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담고 있을 것’이라는 T. S. 엘리엇의 시간개념과도 동일시되는 시간의 이미지가 명징(明澄)하게 현현되고 있다.
김수연 시인은 이러한 시간성에서 추출한 존재의 의미는 바로 자아(自我)의 성찰로 연계(連繫)되고 있는데 작품 「서 있는 나무」전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떨면서 유리창에 볼을 댄다 / 어둠에 마주 바라보는 / 검은 눈동자 거기 있어 팔을 뻗는다 // 빈 가지 끝 앓고 있는 바람받이 / 흐릿한 그림자 닮아 있는 것에 / 새삼 놀라 주저앉는다 // 달빛 가리고 뻗대는 나무 / 어쩌다 지거나 시드는 잎 밟고 / 물구나무로 섰다.’는 전개 방식이나 이미지의 창출 그리고 주제의 투영이 그가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시법이 잘 농축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의인화한 ‘나무’가 바로 자아의 생생한 이미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 자아는 작품 속에서 시인을 동행하면서 시인을 대신하여 열변(熱辯)을 토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성숙한 인격으로 잡다한 인간의 삶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변인이 삶(또는 존재)을 인식하거나 성찰하는 행위는 바로 시적 진실을 창조하는 근본적인 중심축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 빛을 옮겨 놓고 / 먼 땅 끝 부딪치며 / 장인의 손가락 눈으로 더듬다가 / 왁자하게시어(詩語) 낳는다 // 돌 틈 사이 공명하는 / 생명 에너지 / 마주쳐 불꽃을 튀기며 거침없는 / 빛의 파문 시구(詩句) 새긴다.
--「꿈인지도 모른다」전문
다시 김수연 시인은 이러한 존재의 근원에서 성찰하거나 기원의 의식이 포괄하는 과정을 지나오면서 발현하는 중대한 사유의 향방이 위의 작품 「꿈인지도 모른다」에서 명민(明敏)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상당한 갈등과 고뇌가 여과(濾過)된 후에 수확한 것이 ‘돌 틈 사이 공명하는 / 생명 에너지’이다. 이것이 바로 ‘시어’이며 ‘시구’이다. 참으로 성스럽다. 이것을 그는 ‘꿈인지도 모른다’고 의아하고 있다.
영국의 대시인 P. B. 셸리는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라는 말처럼 김수연 시인이 꿈꾸었던 ‘시’에의 형상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동안 자아의 인식을 위해 많은 시간과 존재의 충돌을 다듬고 다스리는 행보가 계속되었는가를 예측하게 하는 시적 상황이다.
우리 시인들의 현실적인 존재의 갈증이나 정서적인 번민은 창작 과정에서 여실히 보여지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상상력의 발현이 없이는 한 편의 작품을 창조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의 극복을 위한 열정이 궁극적으로 인간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는 사명이 시인들에게는 오늘도 무겁게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작품 「욕망」에서도 이러한 갈망과 기원의식이 현현되고 있는데 ‘어두운 밤 달빛 끌어 온다 / 별빛도 나뉘어 대리고 와서 / 밤하늘에 언어를 엮는다 // 가슴과 머리가 실랑이 하다가 / 손으로 던져 놓은 낱말 찾아 펼쳐 놓고 / 이리 보내고 앞뒤로 옮겨놓는다’는 ‘달빛’과 ‘별빛’에서 ‘언어를 엮’거나 ‘가슴과 머리가 실랑이 하다가 / 손으로 던져 놓은 낱말 찾’는 고충은 바로 시인들의 숙명이다.
다시 ‘완전하지 못한 낱말들이 갸웃 거린다 / 멀리 보냈다 다가놓고 / 단락을 지어 이름 하면 언어로 들어 누워 / 용케 자리 잡은 행과 연에 / 행운인 듯 도드라져 / 눈길 끌고 꼼지락 댄다’는 상황에서 그가 설정하는 시적 전개의 과정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신춘문예에 보내 볼까 / 베스트셀러 출판물에 올려놓을까’라는 ‘욕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 시인들이 희망하는 당연한 사유의 지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위대한 시인은 홀연히 나타나는 천재가 아니라, 오랜 결과라는 것만큼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것도 시 한 편의 창작은 그 시인의 열정과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김수연 시인도 그가 간직한 과거 또는 현재의 시간성에서 체득(體得)한 회억(回憶)들이 그의 정서와 사유에서 지적(知的)인 진통을 흡인하고 진정한 진실만 추출해낸 그의 독특한 심안(心眼)이 우리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풍(詩風)은 서정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작품 「꽃은 사랑이다」에서 ‘아픔 다독거리는 / 어머니 손길로 오는 그런 한 사람 곁에 / 내쳤다 싶으면 다시 돌이켜 / 향수 일깨우는 울림이 되고 싶다 / 비 오는 날 이슬 맺힌 고요 / 가깝고도 먼 그리움에서 / 꽃 한 송이 은밀히 피워 / 기척을 알리고 손 내미는 순간 / 향기에 전율하는 사랑 가득하다.’는 어조와 전개는 그의 심중(心中)에 충만한 미적(美的) 서정이 넘쳐 흐르고 있음을 공감하게 된다.
그가 심취하는 ‘아픔 다독거리는 / 어머니 손길’과 ‘향수 일깨우는 울림’과 ‘가깝고도 먼 그리움’ 등의 내면 정서가 바로 ‘향기에 전율하는 사랑’이라는 은유의 시적 미감(美感)으로 화해함으로써 그의 서정시학은 더욱 의미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광활한 시세계에서 고차원의 주제를 창조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