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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는 신앙적 방법 빌4:10-20
행복하게 살려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 삶을 살려면 상대적 박탈감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우리의 만족감을 좀먹고, 우리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1. 소극적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들을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한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박탈되었다는 것은 기대되거나 필요한 가치가 현재 결핍되어 있다는 말이다. 마땅히 누려야 할 재물이나 권리, 자격 따위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박탈감이다. 이런 박탈감은 크게 상대적 박탈과 절대적 박탈감이 있다. 절대적 박탈이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최소 수준의 가치충족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똑같이 학교를 나왔는데 다른 사람은 월급을 5백만원 받는데 자신은 50만원 받는 것이다. 수치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절대빈곤의 상태이다. 느낌이 아닌 상태이다. 상대적 박탈은 기대와 충족간의 주관적으로 인지된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박탈의 상태이다. 모두 가치 결핍에서 발생하지만 초점이 다르다. 절대적 박탈감은 객관적인 상태에, 상대적 박탈감은 주관적인 느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하는 준거기준이 중요하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해방되려면 준거 집단(누구를 기준으로 삼느냐)이 중요하다.
잘 나가는 이웃집 아저씨를 늘 기준으로 삼으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옆집 남편은 돈도 잘 벌어오고 인간성도 좋고, 게다가 아이들 교육에다 처가 일도 꼼꼼히 챙겨주지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방법은 100평에 사나 10평에 사나 비슷하다. 다 세끼 먹고 사는 것이다. 아무리 비싼 음식 먹어도 다 똥 된다. 그래도 내 아내 내 남편 내 딸 내 아들이 최고라고 살아야 한다. 준거 기준이 중요합니다. 개하고 달리기 하면서 개한테 지면은 개보다 못한 놈이 되는 것이고, 개한테 비기면 개같은 놈이 되는 것이고, 개를 이겨도 개보다 더한 놈이 되는 것이다. 준거 기준이 중요하다.
오늘 성경에 보십시오. 준거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상대적 박탈감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며 일부 귀족들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노예를 거느리며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하며 살았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노예로 살았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명문대생)이고,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고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율법과 학문에 능한 사람이다. 인기 있는 종교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돈을 번다면 경제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노년에 아무것도 없다. 집도, 가족도, 따르는 사람도 없다. 4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다. 상대적 박탈감은 심각했을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10절을 보면 슬퍼하지 않고, 우울해 하지 않는다. 크게 기뻐한다. 11절을 보면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 환경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12절에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배부름과 배고픔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란다. 기준이 누구에게 있기 때문인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모든 환경을 주시는 주님에게 있다.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즉 예수님 안에서 풍부해 처하는 것이나 비천에 처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을 비교하여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끝없이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조금 고상한 방법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욕심을 물리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인생은 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상대적 박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 3의 방법이 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로,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실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만족한 삶을 누리 수 있는 비법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기준이 주님이다.
2.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은 서로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해야 한다.
왜 사람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되나? 다른 집단과 비교해서 불평등한 가치분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1시간 일하는데 저 사람은 1백만 원을 받는데 나는 1만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자신도 정당하게 가질 자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분배되는, 기대되는 성과물이 없으면 박탈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회사가 좋아지고 나라가 좋아지면 자신에게도 마땅히 혜택이 와야 하는데 사장 아들만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한 분배로 발생되는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적 박탈감과 집단적 박탈감으로 나타난다.
경제 규모는 커졌는데 상대적 발탈감은 점점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박탈감에서 어떻게 우리가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런 박탈감에서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사회 구조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격어야 했을 바울의 괴로움에 누가 참여했습니까? 너희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다. 바울과 고통을 함께 나눈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입니까? 15, 16절을 보십시오. 마게도냐를 떠날 때 사도바울을 헌금으로 도와주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쓸 것을 보내어 주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가?
① 주님 안에서 기뻐하였다(10) ②그들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도하였다.(17)
③ 바울이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다.(18) ④하나님이 기쁘시게 받는 제물이 되었다.(18)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리 신앙인은 서로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만족하는 삶의 규범을 만들어 놓았다. “오리를 가고자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고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까지 대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말씀하고 있다. 쌓아 놓는다고 참 만족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 없는 사람에 비해 모든 것 놓고 가려면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각한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시지 않는가?
예수 믿으면서도 너무나 인색하게 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참 만족한 삶을 살고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성도님 보면 매주 밑반찬이나 반찬거리등을 가져온다. 행사 때가 되면 후원금을 내는 분들도 있다.
남으로부터 도움만 받고 사는 것 같고 자신에게는 남을 도울 만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남을 도울 만한 것이 많이 있다. 주는 삶은 자신과 이웃을 함께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 모든 것을 주고 가신 예수님은 말씀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나눔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시켜 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이 비록 많지 않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는 조그마한 것부터 나누는 삶이 참 만족을 누리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3. 항구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삶으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게 되나? 기대가치와 성취능력의 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기대와 현실의 차이 때문이다. 내 책임 때문에 기대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현실은 기대한 만큼 좋은 결과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박탈감을 갖게 될 때가 많이 발생합니다. 항상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에 잘다니다가도 어느 날 실직자가 됩니다. 항상 사장으로 돈을 잘 버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회사를 접어야 합니다. 항상 건강한 것 아니다. 다 병들고 늙게 되어 있다. 그런데 기대가치는 높고 능력은 없어지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인생의 맛을 잃어버리고,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나고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인도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들이 사업이 잘 안되고 어려움이 오면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혀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잘 나갈 때는 bmw를 타고 다녔는데 티코 타고 어떻게 교회에 나가냐는 것이다. 잘 나갈 때 헌금 많이 했는데 헌금도 못하면서 교회에 어떻게 나가냐는 것이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을 보라.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상태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것이다. 예전의 자신을 비교할 때 얼마나 초라했겠는가? 잘 나갈 때는 따르는 사람도 많았는데 따르는 사람도 없다. 큰 교회를 하는 것도 아니다.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내가 풍족하다고 고백한다. 내게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고백한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다. 풍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풍요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바울 사도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통해 풍성한 인생을 살았다.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였으며,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였고,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였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고후 6:10). 어떤 분이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백지수표"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풍성한 공급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받지 못함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었다.(요 14:12-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면 인간은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시편 127편에 보면 ① 집을 세우는 일(1). 노력만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다(창11: 1-9). ②성을 지키는 일(1)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파수군이 밤새워 지키지만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시면 허사라고 말씀합니다.
③ 돈버는 일(2)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려고 남보다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워도 하나님이 부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④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합니다.(3-5) 내 힘과 노력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라고 살면 언제 어디서나 만족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