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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마하연론 제6권釋摩訶衍論 卷第六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이제까지 갖가지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를 훈습하고
서로를 생하여 끊어짐이 없는 이치를 결택하는 내증을 설하였고,
이 아래로는 생멸문(生滅門) 가운데
세 가지 대의(大義)를 분명하게 밝히는 내용이다.
【論】 다음으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무엇인가?
모든 범부와 성문ㆍ연각ㆍ보살ㆍ제불은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어서,
앞서 생한 것도 아니고 뒤에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항상하며,
본래부터 오직 성품 자체에 모든 공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진여의 자체에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맑고 시원하고 변지 않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공덕을 지녀 불가사의한 불법을 떠나지 않고
불법을 끊지 않고 불법과 다르지 않으며 결여된 것 없이
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래의 창고[如來藏]라고 이름하며,
또는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부르기로 한다.
【문】 위에서는 진여의 체가 평등하여 모든 상(相) 떠났다고 말해 놓고
어째서 다시 진여의 제가 이러한 갖가지 공덕을 갖는다고 말하는가?
【답】 실제로 갖가지 이러한 공덕을 갖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차별된 상이 없이 동등한 한 맛이며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무분별로 분별의 상을 떠났기 때문에 무이(無二)가 된다.
그렇다면 무슨 이치로 차별을 설하는가?
업식(業識)이 생멸하는 상에 의거해서 보여 준다. 어떻게 보여 주는가?
모든 법은 본래가 마음 뿐[唯心]이라 사신은 염(念)이 없는데 망심(妄心)이 있어서
모르는 사이[不覺]에 염이 일어나서 갖가지 경계를 보므로 무명(無明)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심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대지혜광명의 뜻이다.
만일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게 되고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여읜다면 그것이 바로 법계를 빠짐없이 비춘다는 뜻이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다면 진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자성이 없다.
항상하지도 즐겁지도 아(我)이지도 청정하지도 않으며,
뜨거운 번뇌가 쇠퇴하고 변하여 자재하지 못하며,
나아가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망염(妄念)의 뜻을 갖추게 된다.
이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심성에 움직임이 없다면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갖가지 청정한 공덕의 상을 나타낸다는 뜻을 갖는다.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어서 다시 전법(前法)을 보아 염할 것이 있다면 따라서 결여되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법(淨法)은 무량한 공덕을 갖춘 일심이라서 더 이상 염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춘 것을법신이라 하며, 여래장이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진여의 작용[用]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여래가 본디 수행위[因地]에 계실 때, 큰 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다 교화하며 큰 서원을 세워 중생계를 남김없이 제도하고자 하셨는데
미래가 다할 때까지 겁수(劫數)를 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모든 중생을 자기 몸으로 삼으면서도 그렇다고 중생의 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이치로 그렇게 하셨는가?
이들은 모든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에 있어서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편지혜로 무명을 없애 본래의 법신을 보기에 불가사의한
업에서 나오는 갖가지 작용을 저절로 갖게 되므로 진여와 동등하게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그렇다 해서 작용하는 모습을 잦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여래는 오직 법신일 뿐이며 지상(智相)의 신(身)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므로
여기에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고 작위[施作]를 떠났다.
그러나 중생이 보고 듣는 바에 따라 이익을 주신다는 뜻에서 진여의 작용을 설한다.
이 진여의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작용으로서,
범부와 이승이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하며 이를 응신(應身)이라 한다.
이들은 전식(轉識)이 나타난 것인 줄 모르고 바깥으로부터 온다고 보아서
정해진 분량으로 색[色分齊]을 취하기에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응신을 설한다.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한 작용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로부터 구경지에 이른 보살이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하며 이를 보신(報身)이라 한다.
신(身)에는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좋은 모습[好]이 있고
머물고 의지하는 과(果)에도 역시 갖가지 무량한 장엄이 있다.
나타내 보이는 바에 따라 이 무량한 것들이 끝을 잦을 수 없을 정도로 한량이 없으므로
분제(分齊)의 상을 떠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항상 머물러 훼손되거나 유실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바라밀 등 무루행(無漏行)과 불가사의한 훈습을 인(因)으로 해서 성취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즐거운 공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므로 과보로 얻어진 몸[報身]이라 한다.
그런데 범부가 보는 것은 추중한 색[麤色]이다. 육도(六道) 각각이 다르게 보는 바에 따라 즐거움[樂]을
받지 않는 상이 갖가지 이류로 나타나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처음 발심한 보살이 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들은 진여법(眞如法)에 대한 깊은 믿음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 진여법을 보고,
저 색상이나 장엄 등의 일이 가고 옴이 없고 분제를 떠나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되
진여를 떠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에게는 아직 분별(分別)이 있으니,
법신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정심[淨心地]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해지며 나아가 보살지가 다 지나면 불신의 근원을 끝까지 보게 된다.
만일 업식을 떠나면 볼 만한 보신의 모습이란 없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피차(彼此)의 색상(色相)이 없어서 이 색상을 통해 저 색상을 보고
저 색상을 통해 이 색상을 보기 때문이다.
【문】 제불의 법신이 색상을 떠났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
【답】 이 법신이 바로 색상의 자체이기 때문에 색상을 나타낼 수 있다. 무슨 말인가?
본래부터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라 색의 성품이 그대로
지(智)이기 때문이다. 색의 체가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을 지혜의 몸[智身]이라고 이름하며,
지의 성품이 그대로 색이기 때문에 법신이 일체처에 두루하다고 한다. 나타난 색은 정해진 분량이나
구역[分齊]을 갖지 않고 마음에 따라 시방세계의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각각 차별되게 나타내 되이되 여기에는 정해진 분량이나 구역이 없어서 서로를 방해하는 일이 없다.
이는 심식(心識)으로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眞如)가 자재하게 작용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釋】 위 본론의 문장은 세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 자체의 대의를 밝히는 문[顯示自體大義門]이고,
둘째는 진여 자상의 대의를 밝히는 문[顯示自相大義門]이고,
셋째는 진여 자용의 대의를 밝히는 문[顯示自用大義門]이다.
첫 번째 자체대의 문은 다시 두 부문으로 나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다섯 부류로 가설된 사람이 평등함을 밝히는 문[五人平等門]이고,
둘째는 진여가 때에 의해 전변하지 않음을 밝히는 문[時不轉門]이다.
이것을 두 가지 문이라 한다.
가운데 자상대의문은 세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가 갖가지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음을 밝히는 문[圓滿功德門]이고
둘째는 문답을 시설하여 의심을 풀어 주는 문[問答決疑門]이고,
셋째는 개별적으로 해석을 내리면서 자세히 설명하는 문[別釋廣說門]이다.
이것을 세 가지라 한다.
마지막 자용대의문은 본디 여섯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본원이 끝이 없음을 밝히는 문[本願無盡門]이고,
둘째는 상을 떠나 집작하지 않음을 밝히는 문[離相不著門]이고,
셋째는 능과 소가 평등함을 밝히는 문[能所平等門]이고,
넷째는 상 없는 가운데응하는 바대로 나타남을 밝히는문[無相現應門]이고,
다섯째는 보는 바 거칠고 미세함을 따라줌을 밝히는 문[隨見麤細門]이고,
여섯째는 문답을 시설하여 의심을 풀어주는 문[問答決疑門]이다.
이상이 여섯 가지다.
이제 해석을 붙여가면서 차례대로 분명하게 이런 저런 각도에서 설명할 것이니,
매우 총명한 자라면 자세히 사유하여 갈래를 잡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진여의 자체상이란 무엇인가?’
라고 한 구절은 체(體)와 상(相) 두 가지 뜻을 총체적으로 내거는 부분이며,
이 아래로는 개별적으로 해석을 내리면서 이런 저런 각도에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첫 번째로 체대(體大)에 관한 설명이다. 무엇을 오인평등문(五人平等門)이라 하는가?
진여의 자제가 다섯 종류의 사람 모두에 공통되며 아무 차별 없이 절대 평등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다섯 종류의 가설된 사람[假人]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는 범부,
둘째는 성문,
셋째는 연각,
넷째는 보살,
다섯째는 여래, 이를 다섯 종류의 가설된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은 본디 이 다섯 가지이지만 진여는 본디 유일하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의 자체는 늘어나는 일도 줄어드는 일도 없으며,
크고 작음이나 있고 없음도 없고,
가운데 없고 가고 옴도 없다.
본래부터 하나는 하나를 이루고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이룬다.
다른 것을 싫어하고 차별을 떠나 유일한 진(眞)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법진여일상삼매계경(諸法眞如一相三昧契經)』에서
“비유하면 단단한 쇠[金剛]로 다섯 부류[五趣]의 상(像)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섯 부류의 가인이 평등하다는 이치도 그와 같아서 갖가지 사람들이란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모든 범부와 성문ㆍ연각ㆍ보살ㆍ제불은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어서’라고 하였다.
시부전문(時不轉門)이란 무엇인가?
진여의 자체는 본래 그러하고[自然]
상주하며 결정성을 가지고 변함없는 것이라서 삼제(三際)에도 움직이지 않으며
사상(四相)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으니, 적멸하고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나.
본론에서는 이것을, ‘앞서 생한 것도 아니고 뒤에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진여 자체의 대의를 밝히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는 진여 자상(自相)의 대의를 밝히는 문에 관한 내응이다.
원만공덕문(圓滿功德門)이란 어떤 상을 갖는가?
진여의 체에는 모든 공덕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아무 결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공덕을 말하는가?
성품에서 나오는 여섯 가지 공덕을 말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큰 지혜의 광명을 갖는 공덕이니,
본각반야(本覺般若)는 밤같이 깜깜한 무명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광대하고 원만하고 수승한 반야실지(般若實智)에서 나오는 광명의 성품이라는뜻”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법계를 빠짐없이 비추는 공덕이니,
본각반야가 일법계의 근원을 비추고 통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일법계의 장(藏)을 빠짐 없이통달하는 자연(自然)의 성품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진실하게 아는 공덕이니,
본각반야는 헛된 이해와 사랑을 멀리떠났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이것을, “망상에서 나온 이해를 여의고 실제(實際)와 실성(實性)을 확실히 아는 성품의 뜻”이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자성청정심을 갖는 공덕이니,
본각반야의 무량한 성품공덕은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서 다른 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세간의 얽매임을 멀리 떠나 중도실상[中實]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에서는, “본유하며 명백한, 극단과중간을 다 떠난 중도성품의 뜻”이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는
항상하고[常]
즐거우며[樂]
아(我)이며
청정한[淨] 공덕이니,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는 무시이래로 네 가지 장애를 멀리 떠나
네 가지 본래적인 덕을 원만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에서는,
“여래께서 얻으신 정각(正覺)은 자연의 성품에서 나오는 공덕이라서 불꽃같은 환상(幻相)을 멀리 떠나
행을 닦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여섯 번째는 맑고 시원하고 불변하며 자재한 공덕이니,
두 가지 본각은 밝은 거울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南北]처럼,
앞면이 상을 비출 때 뒷면은 어둡게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에서는, “맞는 것[隨順]과
거스르는 것[違逆]을 구족한 무애한 다라니(陁羅尼)가 법계 전체에 두루한 성품을 갖는 뜻”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상대문(相大門)이 갖는 여섯 가지 공덕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본래부터 오직 성품 자체에 모든 공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진여의 자체에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빠짐없이 비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 청정심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밝고 시원하고 변치않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광대원만자성본덕계경(廣大圓滿自性本德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자성공덕의 본수(本數)는 열일곱 가지 명칭을 갖는다.
처음 두 가지에서 각각 두 가지가 벌어지고,
다음 두 가지에서 각각 세 가지가 벌어지며,
뒤의 두 가지에서 차례대로 열두 가지가 벌어진다.”
또 『청정심지무구다라니계경(淸淨心地無垢陀羅尼契經)』에서는
“자성공덕의 본수는 스물다섯 가지 명칭을 갖는다”고 하였으니,
마지막 하나에서 열한 가지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세 부류를 각기 차별된 상으로 설한 것은 어째서인가?
마명보살(馬鳴菩薩)이 『마하연론』에서 제시한 본수의 명자는,
명칭은 간략하지만 의미는 넓은 총지(總持)의 상(相)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기 때문에
물어진 것을 다 거두어 여섯 가지로 건립한 것이다. 또 소의(所依)는 차별되지만 근본이 되는 총지에 의거해서
총지를 설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명자의 수가 많으면 진실에 미혹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총체적인 것 여섯 가지를 건립하였다.
열일곱 가지 명칭은 무엇인가?
첫째는 큰 지혜를 갖는다는 뜻이고,
둘째는 큰 광명을 낸다는 뜻이며,
셋째는 일법계에 두루하다는 뜻이고,
넷째는 일법계를 비춘다는 뜻이며,
다섯째는 진실되다는 뜻이고,
여섯째는 식(識)의 뜻이며,
일곱째는 안다[知]는 뜻이고,
여덟째는 자성(自性)의 뜻이며,
아홉째는 정정하다는 뜻이고,
열째는 마음이라는 뜻이며,
열한째는 항상하다는 뜻이고,
열두째는 즐겁다는 뜻이고,
열셋째는 나[我]라는 뜻이고,
열넷째는 청정하다는 뜻이고,
열다섯째는 부정[不]의 뜻이고,
열여섯째는 변한다는 뜻이며,
열일곱째는 자재하다는 뜻이다.
이상이 열일곱 가지 명칭이다.
스물다섯 가지 명칭은 어떤 것들인가?
앞의 것은 다 똑같고 거기다가 부정[不]의 공덕에서 여덟 가지가 벌어지기 때문이며,
변한다는 공덕에서 두 가지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변한다는 공덕의 두 가지란
첫째는 위를 향해서 전변하는 것[上流轉變]이고,
둘째는 아래를 향해서 전변하는 것[下流轉變]이다.
부정의 여덟 가지 공덕은
『중관론(中觀論)』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
이제까지 명칭과 수량을 갖는 공덕의 부분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명칭을 갖지 않고 수량을 초월한 공덕의 부분을 설하는 내용이다.
본각의 체(體) 가운데 있는 자성의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언어를 통해 사량하는 한도를 떠났고 심행(心行)을 넘어섰다.
무슨 이치로 이와 같은 수량에 그쳤는가?
본래 갖추어진 공덕은 비록 셀 수 없이 많으나 세 가지 부류를 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것만을 든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공덕을 지녀’라고 하였다.
이렇게 무량무변한 공덕은 각기 다른 자기의 체(體)와 상(相)을 갖는가?
단 하나의 심량(心量)일 뿐, 다른 법체를 갖지 않으며 단 하나뿐인 심량은 결코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심법은 비록 하나뿐이지만 두 가지 다라니(陁羅尼)의 자재한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신[自]이 상대[彼]인 다리니를 떠나지 않는 자재한 작용이고,
둘째는 상대가 자신인 다라니를 떠나지 않는 자재한 작용이다.
이것을 두 가지라고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떠나지 않고’라 하였다.
이러한 성품의 공덕은 무시이래로 한결같은 묘유(妙有)라서
떨쳐보낼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자성은 자성일 뿐, 다른 데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불법을 끊지 않고’라 하였다. 이러한 모는 공덕은 반드시
하나가 본디 하나를 이루는 것이지 결코 다른 것이 저절로 하나가 되는법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의 법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불법과 다르지 않으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깊은 이치는 모든 보살이나 이승이나 범부의 마음으로는 사유할 수 없고 언어를 통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라서 완전히 끊겼고 완전히 심원하다.
이를 본론에서는, ‘불가사의’라 하였다. 위 세 가지 사람의 경계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말하고 사량하는 경계인가?
대각을 성취한 자라야 스스로 이러한 어김없는 길[軌則]을 밟을 수 있으니,
이를 본론에서는 ‘불법’이라 하였다. 이렇게 무량한 성품공덕은 갖가지 번뇌에 빠짐없이
얽매인 범부의 지위에서부터 위없는 대각 지혜를 성취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자라는 바 없이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이러한 갖가지 공덕은 무시이래로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라서 연(緣)의 힘을 빌려서 건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나. 이를 본론에서는‘결여된 것 없이 다 갖추었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래의 창고
[如來藏]라고 이름하며, 또는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부르기로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진여가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음을 밝힌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문답을 시설해서 의심을 풀어주는 문을 설하는 내용이다.
이 문은 다시 두 부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간략한 질문을 일으켜 모순되는 점을 따져 묻는 문[發起略問難違門]이고,
둘째는 자세한 답을 시설해서 해석하는 문[發起廣答解釋門]이다.
묻는 자가 따지는 의도는 무엇인가?
본문이 서로 상위되고 전후가 뒤섞이는 점을 들어 이치를 따져 묻는 데 그 의도가 있다.
앞뒤로 문장이 어떻게 모순된다는 말인가?
진여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부분[眞如決擇分]에서는
“심진여(心眞如)는 바로 일법계대총상법문(一法界大摠相法門)의 체(體)다.
무슨 말인가?
심성(心性)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나, 단지 망념에 의해 일체 법이 차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심념(心念)을 떠나기만 하면 경계로 나타난 모든 상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상을 떠났고 명자의 상을 떠났고 심연(心緣)의 상을 떠났다.
필경 평등하고 변이(變異)함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다.
오직 일심뿐이므로 진여(眞如)라는 명칭을 부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놓고는 진여 자상(自相)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서는 어째서
“본래부터 오직 성품 자체에 모든 공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진여의 자체에 대지혜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맑고 시원하고 변치 않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공덕을 지녀 불가사의한 불법을 떠나지 않고
불법을 끊지 않고 불법과 다르지 않으며 결여된 것 없이 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래의 창고[如來藏]라고 이름하며,
또는 여래 법신(如來法身)이라 부르기로 한다”라고 말하는가?
위와 같이 모순되기 때문에 따져 물은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묻는다. 위에서는 진여의 체가 평등하여
모든 상(相)을 떠났다고 말해놓고 어째서
다시 진여의 체가 이러한 갖가지 공덕을 갖는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간략한 질문을 일으켜 모순되는 점을 따져 묻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자세한 답을 시설해서 해석하는 문을 설하는 내용이다.
이 문을 다시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총체적으로 설하는 문이고,
두 번째는 개별적으로 설하는 문이다.
총체적으로 설하는 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眞如)를 총체적으로 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멸(生滅)을 총체적으로 설하는 것이니,
설한 내용을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갖가지 이러한 공덕을 갖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차별된 상이 없이 동등한 한맛이며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라고 대답 한 구절은 진여를 총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해당한다.
자상대의문(自相大義門)에서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갖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기는 했으나
이는 생멸문의 계량(界量)에 해당하는 것이지 진여문은 아니다.
진여문에는 차별된 상이 없어서 절대평등한 한 가지 상이며 한 가지 맛이라
진여의 청정한 법계만이 독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모순되는 오류가 없다.
이 아래로는 그렇게 되는 연유를 밝혀 의혹을 끊어 주는 내용이 이어진다.
‘무분별로 분별의 상을 떠났기 때문에 무이(無二)가 된다’고 한 이유는,
진여문에는 동일한 것만 있을 뿐 차별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아래로는 생멸을 총체적으로 설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문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물음이고 둘째는 답이다.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문답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첫 번째는 어떤 내용인가? ‘
그렇다면 무슨 이치로 차별을 설하는가?’
라고 한 구절이 바로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다.
모든 법이 본래부터 절대평등한 한 가지 맛 한 가지 모습이라서
진리만이 독존하며 두 가지 체가 없다고 한다면,
또 어떤 평등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의거해서 차별을 건립하느냐 하는 문제로,
이문(異門)을 들어서 이문을 의심한 것이다.
이 아래로는 답을 제시하여 이러한 의심을 끊어 주는 내용이니
문장을 보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업식(業識)이 생멸하는 상에 의거해서 보여 준다’고 한 구절은 총체적인 답에 해당한다.
진여문 가운데는 대치할 대상[所治]도 없고,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염법을 대치하는[能治] 것도 없으며,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정법이 상대[對量]가 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진여문에 관해서는
“일체 모든 법은 절대평등한 한 가지 맛
한 가지 모습이라 두 가지 체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멸문 가운데는 대치해야 할 염법도 무량무변하고,
대치하는 정법도 무량무변하다. 그러므로 생멸문에 관해서는
“본각의 체에는 갖가지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서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아 무량무변하다.……”고 하였다.
이상이 진여의 자체(自體) 및 자상(自相)의 대의를 설한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업식의 생멸상에 의거해서 보여준다[以依業識生滅相示]’는
문장의 각 구절을 따로따로 해석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의거한다[依]’는 말은 근본이 되는 무명주지(無明住地)를 뜻한다.
모든 염법에게 근거[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업(業)’이란
업상(業相)을 뜻하며,
‘식(識)’이란
전식(轉識) 등 갖가지 식을 뜻한다.
‘생멸상(生滅相)’이란
이 문(門)의 총칭이다.
‘보여준다[示]’는 말은
상반되는 이치를 통해 드러낸다는 뜻이다.
맨 앞의 ‘써 이(以) 자’는 멀리 뒤의 세 글자까지 걸린다.
이 세 가지 법은 공덕이 일어나는 연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간략히 설한 부분을 설했고, 다음으로 자세히 설한 부분을 설할 차례다.
이 광설분(廣說分)도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질문이고
두 번째는 답이다.
이 대목에서는 질문은 간략하고 답은 자세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보여주는가?’라고 한 구절은
따져 묻는 부분에 해당하고,
이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답이다.
대답하면서 설명하는 부분은 세 가지길 나뉜다.
첫째는 자기 종지에서 나온 바른 이치[自宗正理]이고,
둘째는 그릇된 도와 삿된 행[非道邪行]이며,
셋째는 상대가 되는 법을 함께 거론하는 것[具擧對量]이다.
이것이 세 가지니, 차례에 따라 설한 내용을 잘 관찰해야 한다.
‘모든 법은 본래가 마음뿐[唯心]이라 사실은 염(念)이 없는데’라고
한구절은 첫 번째 ‘자종정리’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법성은 무시이래로 오직 일심뿐이어서
어느 한 법도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망심(妄心)이 있어서 모르는 사이[不覺]에 염이 일어나서
갖가지 경계를 보므로 무명(無明)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구절은
두 번째 ‘비도사행’에 해당한다.
근본이 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갖가지 무명주지를 총체적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래로는 ‘구거대량’의 차별을 직선적으로 밝히는 내용이다.
이상에서 설한, 본각의 체가 갖는 여섯 가지 공덕[六相功德]은
각각 어떤 허물을 상대적으로 관하기에 그것을 개념상으로 건립해서 보여 주는가?
근본무명은 일심의 바다를 훈습해서 업식 등 갖가지 식을 일으켜
밝은 반야의 실다운 지혜를 드러나지 않도록 가림으로써
어리석고 미혹하고 혼란스러운 어둠을 불려 가는데,
이것이 바로 불각무명(不覺無明)의 계량(界量)이다.
‘본각지혜는 이 근본무명을 상대로 삼는다.
즉, 일심의 성품이 적멸(寂滅)이라 일어남이 없어
이것이 바로 본각혜명(本覺慧明)에서 안립하는 덕이므로 건립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심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대지혜광명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두 번째 덕을 밝히는 내용이니 문장을 보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망심이 견해를 일으켜 경계에 이르면 여지없이 허망한 경계
속에 떠돌아 진실된 경계를 통달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실과 허위는 서로 어긋나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만일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게 되고’라 하였다.
이 아래로는 관(觀)이 어디에나 보편하다는 뜻을 밝히는 대목이다.
진실한 마음은 전변하는 견해를 떠났기에 제법을 통달하여
어디든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무엇에든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무엇이든 각지를 다하지 않음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진실한 지혜에서 나온 견해는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치우진 견해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심성이 견을 떠난다면 그것이 바로 법계를 빠짐없이 비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세 번째 덕을 밝히는 내용이다.
마음에 움직이고 전변하는 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명이 훈습한 습기(習氣)이므로 허망하게 전변하는 것이다.
본각지혜는 이를 상대로 삼는다. 즉, 심성은 고요하여 시끄러움과 움직임이 없으며 곧고 정확해서 전도된
이해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실다운 지혜에서 나온 비춤이 도리를 순순히 따라 전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건립하여 보여준다. 이를 본론에서는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다면 진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며’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네 번째 덕을 밝히는 내용이다.
무시이래로 망법(妄法)에는 자체가 없다. 이를 상대로 해서 밝힌다. 즉, 자성이 청정한 본유(本有)의
공덕을 건립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거기에는 자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다섯 번째 공덕을 밝히는 내용이다.
망법이란 네 가지 상[四相]에 의해 변하므로 항상하지 않고, 세 가지 고통[三苦]이 동시에 움직이므로
즐겁지도 않으며, 두 가지 자재함이 없으므로 아(我)도 아니며, 청정한 하나의 도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지도 않다. 이 네 가지 허물을 상대로 삼기 때문에 네 가지 공덕을 건립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항상하지도 즐겁지도 아(我)이지도 청정하지도 않으며’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여섯 번째 공덕을 밝히는 내용이다.
망법이 진심(眞心)을 불살라버리기 때문에 ‘뜨겁다[熱]’ 하고 모든 중생을 번거롭고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번뇌[惱]’라 하며, 덕을 파멸시키고 변천시켜 작용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쇠퇴하고 변한다[裏變]’ 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중생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다[不自在]’고 한다.
이러한 일을 마주 관하여 상대로 삼기 때문에 ‘맑고 서늘하고 변치 않고 지재한 덕’을 건립하여 보여주는 것이나.
이를 본론에서는, ‘뜨거운 번뇌가 쇠퇴하고 변하여 자재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끝없는 공덕상의 의미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대치해야 할 염법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면 대치하는 정법도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나아가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추게 된다. 이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심성에 움직임이 없다면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갖가지 청정한 공덕의 상을 나타낸다는 뜻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원만한 덕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내용이다.
만일 일심법에 움직이거나 전변하는 상이 있어서 앞에 연(緣)할 바의 경계를 본다면 보는 마음과 보이는
경계가 두 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에 본각의 공덕이 원만해질 수가 없다. 그런데 본성의 공덕은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긴 하지만 하나의 심량(心量)일 뿐이라서 결코 두 가지 체는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 갖가지 덕은 어느 것이나 각각 자신의 체를 분할하는 것이 아니며 일법계 어디에나 그 양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만한 자성의 공덕은 속박되어 있을 때나 해탈한 때나 두 가지 지위[位] 모두에 항상 구족되어 있으니, 이를 법신(法身)이라 하며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만일 마음에 움직임이 있어서 다시 전법(前法)을 보아 염한 것이 있다면 따라서
결여되는 것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법(淨法)은 무량한 공덕을 갖춘 일심이라서 더 이상 염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춘 것을 법신이라 하며, 여래장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염법과 정법의 평등한 수량(數量)에 관해서는 어떤 경에 근거해서 해석하는가?
『문수사리선교방편상사비유대다라니경(文殊師利善巧方便相似譬喩大陀羅尼經)』에 근거한다.
저 계경에서는 어떻게 설하는가?
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올타남(嗢拖南)을 송하였다.
비유하면 아지다차나시제(阿只多遮那尸帝)라는나무와 같아서 그 열매가 무수히 많지만열매의 씨[實]와 과육[表]은 열 가지 면에서 동등하다네.염법과 정법의 수량(數量) 등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하니수행자는 이 비유를 통해 진(眞)과 망(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리.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거짓[假]은 반드시 진실[實]에 의존하며 진실은 반드시 망법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스스로 존립하는 단독적인 법은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과육’이라고 한 것은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망법(妄法)을 비유한다. 마치 열매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망법인 거짓에는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씨’는 어떤 법을 비유하는가?
진법(眞法)을 비유한다. 마치 열매 속처럼, 진실에는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열 가지 동등함’이란 어떤 것들을 말하는가?
첫 번째는 과육과 씨가 수(數)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그 수의 동등함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과육과 씨가 진(塵)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과육과 씨를 곱게 가루 내서 그 수량에
배달해 볼 때 차별 없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과육과 씨가 양(量)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그 양을 재어보면 차별 없이
가볍고 무거움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과육과 씨가 색(色)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비교해 보면 흰색으로 동등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과육과 씨가 향기[香]에 있 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그것들에 밴[熏習] 냄새가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과육과 씨가 맛[味]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씹어서 먹어 보면 맛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는 과육과 씨가 촉감[觸]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몸에 닿을 때 촉감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는 과육과 씨가 뿌리[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그것들이 동등하게 한 나무에 의지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는 과육과 씨가 때[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한꺼번에 열려 있어서 전후가 없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과육과 씨가 한맛[同]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니, 언제까지나 한 가지 맛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열 가지 동등함’이다.
비유를 법에 배대 시켜 맞춰 되는 일은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해석하지 않겠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의 비유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는 자매지간인데,
공덕천은 가는 곳마다 길상을 만들어 내고 흑암녀는 가는 곳마다 재앙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자매는 항상 붙어다닌다. 진(眞)과 망(妄)의 불이(不離)관계를 이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 것이다.
(通玄 卷4, 卍續藏經 73, 245하)비추어 보면 여기서 말하는 ‘동등하다’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진여 자상의 대의를 밝힌 문[顯示自相大義門]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진여 자용의 대의를 밝힌 문[顯示自用大義門]을 설하겠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문이 있으니 차례에 따라 자세히 살펴야 한다.
본원이 끝이 없음을 밝히는 문[本願無盡門者]이란
청정한 승나아세야[僧那阿世耶] 광대하고 원만하여 끝이 없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무슨 말인가?
모든 여래는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하며 헤아릴 수 없는 티끌 겁 동안
시방세계의 티끌만큼이나 많은 대자비심의 바다를 일으켜 시방세계 티끌만큼 크고
원만한 수행[因]의 바다를 닦아서 시방 세계 티끌만큼 많은 모든 중생을 거두어들이셨고,
시방세계 티끌만큼 넓은 서원(誓願)의 바다를 세워 시방세계 티끌만큼의 크게 자재로운
과(果)의 바다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셨는가?
동일하여 아무 차이 없이 상속(相續)한다는 이치를 여실하게 아셨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다음으로 진여의 작용[用]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여래가 본디 수행위[因地]에 계실 때, 큰 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다 교화하며 큰 서원을 세워 중생계를 남김없이 제도하고자 하셨는데
미래가 다할 때까지 겁수(劫數)를 정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모든 중생을 자기 몸으로 삼았기 때문이며’라고 하였다.
이상에서는 본원무진문을 설명했고 다음으로 상을 떠나
집착하지 않음을 밝히는 문[離相不着門]을 설하겠다.
이상불착문이란, 작업을 하면서도 작업한다는 생각을 멀리 떠나 집착을
내지 않는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무슨 말인가?
모든 여래께서 한량없는 대비를 일으켜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모든 중생을 섭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래가 낱낱의 부처가 되어 중생을 섭화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여래는 모든 중생과 자신이 유일한 진여(眞如)이며 유일한 법신(法身)일 뿐이어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으며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으셨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중생의 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이치로 그렇게 하셨는가?
이들은 모든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에 있어서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이상불착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능과 소가 평등함을 밝히는 문(能所平等門)을 설하겠다.
능소평등문은 인(人)과 법(法), 체(體)와 용(用), 이(理)와 지(智)가
차별 없이 평등하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무슨 말인가?
법신과 응화신의 삼신(三身), 그리고 실제[實]과 방편[假]의 두 가지 이치가 평등한 하나의 체라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자성이 되는 본신(本身)과 지엽이 되는 말신(末身)이 평등한 하나의 체라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능히 증득하는[能證] 바른 지혜와 증득되는[所證] 진여의 이치가
평등한 하나의 체라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이기 때문에 두 가지 체가 없으며,
두 가지 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체도 있을 수 없다. 둘도 없고 하나도 없어서, 없다는 것조차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본래적[自然]인 성품은 공덕을 다 갖추어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심심극교계경(甚深極妙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갖가지 차별된 상[異異異相]이라 하며,
무엇을 동일한 하나의 상[異異異相]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갖가지 차별된 상이란 다름 아닌 무명(無明)을
말하며, 동일한 하나의 상이란 다름 아닌 명(明)의 법을 말한다.
이 두가지 법은 소의 두 뿔과 같아서 그것을 대치하는 행상도 제를 녹여 없애는 것이 아니며,
두 가지는 공하여 끊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을 상대와 작위를 떠난 법[非觀僞法]이라고 한다.’
그러자 문수사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상대와 작위를 떠난 법이라고 합니까?
그 특성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무엇을 방편으로 삼아 깨달아야 합니까?’
이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바다같이 많은 경에서,
다르다[異]고 하는 것은 무명을 말하며
같다[同]고 하는 것은 명을 말한다고 설한 바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범부를 제도하여 해탈케 하기 위해 방편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대를 위해 진실한 언설을 베풀겠다.
문수사리여, 상대와 작위를 떠난 법이란 다른 것을 같게 하여 동일함으로 귀속시키고
같은 것을 같게 하여 공으로 귀결시키며 공을 공하게 하여 끊김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러한 방편지혜로 무명을 없애 본래의 법신을 보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업에서 나오는 갖가지 작용을 저절로 갖게 되므로 진여와 동등하게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이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능소평등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상 없는 가운데
응하는 바대로 나타남을 밝히는 문[無相現應門]을 설하겠다.
무상현응문이란 자성신(自性身)의 체(體)가 아무런 상을 갖지 않는 공적(空寂)한 것이되 갖가지 상을
나타내는 공능을 갖는 것이, 마치 토끼 뿔이 자체가 없지만 모든 뿔을 생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무슨 말인가?
법신불(法身佛)은 단일하고 적적하며, 한편 단일한 것도 적적한 것도 아니다.
심행의 처소가 멸하고 언어의 도가 끊겨서 없어진다는 것도 없앴고 끊는다는 것도 끊었다.
아(阿) 자는 오직 아(阿) 자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여래는 오직 자신(自身)에서 나올 뿐 타신(他身)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보고 들음으로써 이익을 얻고 자신의 마음의 크기에 따라 이익을 찾아가지만
법신의 체에서 보면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렇다 해서 작용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여래는 오직 법신일 뿐이며 지상(智相)의 신(身)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므로
여기에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고 작위[施作]를 떠났다. 그러나 중생이 보고 듣는 바에 따라
이익을 주신다는 뜻에서 진여의 작용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무상현응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보는 바
거칠고 미세함을 따라줌을 밝히는 문[隨見麤細門]을 설하겠다.
이 문은 다시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 문인가?
첫째는 응신응상차별문(應身用相差別門)이고,
둘째는 보신용상차별문(報身用相差別門)이다.
첫 번째 문은 어떤 내용인가?
모든 범부와 이승은 일체법이 오직 일심의 양(量)이라는 깊은 뜻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루두루 분별하는 망상의 사식(事識)에 의지하여 응화신(應化身)을 보아서 외부적으로
헤아려 이해를 내며, 구분이나 한계가 없음을 통달하지 못하여 분량에 따라 전전한다는 뜻에서
이 문을 시설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 진여의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작용으로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하며
이를 응신(應身)이라 한다. 이들은 전식(轉識)이 나타난 것인 줄 모르고 바깥으로부터 온다고 보아서
정해진 분량으로 색[色分齊]을 취하기에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라고 하였다.
두 번째 문은 어떤 내용인가?
처음 신해(信解)를 내서부터 금강지(金剛地)에 이르기까지에 있는 모든 보살은 일체법이
오직 일심의 양이라는 깊은 뜻을 명료하게 통달했기 때문에, 저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보신(報身)을 보고 오직 식일 뿐[唯識]이라는 이해를 내어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에 아무런
구분이 없음을 통달한다는 뜻에서 이 문을 시설하는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한 작용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로부터 구경지에 이른 보살이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하며 이를 보신(報身)이라 한다.
신(身)에는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좋은 모습[好]이 있고 머물고 의지하는 과(果)에도 역시 갖가지
무량한 장엄이 있다. 나타내 보이는 바에 따라 이 무량한 것들이 끝을
찾을 수 없을 정토로 한량이 없으므로 분제(分齊)의 상을 떠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항상 머물러 훼손되거나 유실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보신과 화신의 차별상을 밝히는 내용이다.
‘과보[報]’라는 표현을 쓴 것은 수승하고 묘한 인(因)을 갖추어 극락의 과(果)를 받음으로써,
본래적이고 자재하며 결정하고 안락하여 괴로운 강을 멀리 떠났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러한 공덕은 모두가 바라밀 등 무루행(無漏行)과 불가사의한 훈습을 인(因)으로 해서
성취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즐거운 공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므로 과보로 얻어진 몸[報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응(應)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착오 없이 근기에 따라. 즉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취생(趣生)에 따라 안락하지 않은 상을 출현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를 본론에서는,‘그런데 범부가 보는 것은 추중한 색[麤色]이다. 육도(六道) 각각이 다르게
보는 바에 따라 즐거움[樂]을 받지 않는 상이 갖가지 이류로 나타나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앞서 설한 내용을 중복해서 해석하는 부분이다. 즉, 부처를 보는 데 있어서
지위마다 각각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다는 뜻을 밝힌다. 무슨 뜻인가?
삼현위(三賢位)에 있는 많은 보살은 진여(眞如)를 믿기 때문에 보신(報身)을 부분적으로 보고
부처의 색신(色身)에 정해진 한계나 분량이 없음을 관찰하여 안다. 그러나 이 보살들은 분별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아직은 진여위(眞如位)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그런가 하면 처음 발심한 보살이 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들은 진여법(眞如法)에 대한 깊은 믿음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 진여법을 보고,
저 색상이나 장엄 등의 일이 가고 음이 없고 분제를 떠나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되
진여를 떠나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에게는 아직 분변이 있으니,
법신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십지(十地)를 얻은 보살들의 경우는 차례에 따라 점점 수승해져서 구경(究竟)에 이른다.
이를 본론에서는, ‘정심[淨心地]’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해지며
나아가 보살지가 다 지나면 불신의 근원을 끝까지 보게 된다’라고 하였다. 불과위(佛果位)에는
업식(業識)의 근본 종자가 없기 때문에 능견(能見)과 소견(所見) 역시 공무(空無)하다.어째서 그런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진여라는 면에서
절대 평등하며 법신이라는 면에서 절대 평등하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이 없으며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도 없으며
없음도 없고 있음도 없다.
희론이란 희론은 완전히 없어지고
사려를 통한 앎도 공하여
오직 마나의 큰 공인 진여의 본지(本智)뿐이다.
차가리사나제(遮伽利娑那提) 옷을 입고 건시다타마(鍵尸多陀摩) 궁전에서 자성신(自性身)만이 앉아 독존하므로 둘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업식을 떠나면 볼 만한 보신의 모습이란 없다.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피차(彼此)의 색상(色相)이 없어서 이 색상을 통해 저 색상을 보고 저 색상을 통해 이 색상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째서 응신(應身)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지하여 저 부처를 본다 하고,
보신(報身)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저 부처를 본다고 하는가?
식(識)이 거칠고 미세하므로 그에 따라서 보는 바의 불신도 거칠고 미세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이제까지 수견추세문(隨見麤細門)을 밝혔고, 다음으로 문답을
시설하여 의심을 풀어주는 문(問答決疑門)을 설할 차례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질문이고
두 번째는 답이다.
답은 다섯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법신출현색상문(法身出現色相門),
둘째는 현시지신형상문(顯示智身形相門),
셋째는 현시법신형상문(顯示法身形相門),
넷째는 광대원만무제문(廣大圓滿無際門),
다섯째는 불가사의수승문(不可思議殊勝門)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다.
부문의 순서대로 살펴본다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묻는 자가 마음속에서 묻고 싶었던 내용이 무엇인가?
묻는 자는 다음과 같은 의심을 냈을 것이다.
“법신의 진실한 자체를 따져보면, 담담하고 사려가 끊겨 적적하다.
그래서 끊었다[斷]는 표현을 쓰는 것인데,
그렇다면 색상(色相)의 작업(作業)은 무엇으로부터 있게 되는가?
무상현응결택분(無相現應決擇分)에서 ‘법신은 상이 없지만 색상을 나타내는 공능을 가진다’고 하였는데,
만일 갖가지 색상을 출현할 수 있다면, 법신을 두고 공적해서 색상의 영역을 떠났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이렇게 의심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제불의 법신이 색상을 떠났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가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이러한 의심을 결택해 주는 내용이다. 법신이 색상을 출현해낸다고 한 말은,
자성법신이 색상에게 의지처가 되어 색상을 내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능의(能依)인 색법(色法)과 소의(所依)가 되는 심법(心法)이 무시이래로
본래 평등하여 두 가지 세가 없이 유일한 심량(心量)이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 법신이 바로 색상의 자체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지신(智身)의 형상을 밝히는 문이란, 지(智)로써 색(色)을 다 거두어들여서
그 어떤 색도 지 아닌 것이 없다는 뜻에서 ‘지신’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색의 성품이 그대로 지(智)이기 때문이다.
색의 체가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을 지혜의 몸[智身]이라고 이름하며’라고 하였다.
법신의 형상을 밝히는 문이란,
색으로써 지를 다 거두어들여 그 어느 지도 색 아닌 것이 없다는 뜻에서 ‘법신’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지의 성품이 그대로 색이기 때문에 법신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광대원만무제문은 어떤 뜻에서 시설했는가?
이 두 가지 신이 나타내는 색상이 모든 중생계와 모든 비정계(非情計)와
모든 허공계와 모든 열반계와 모든 여래계에 동등하게 빠짐없이 두루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고 만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짓지 않는 일이 없다. 제한된 구역도 없고 장애도 없으려 아무것도 섞인 것 없이 순일하다.
이를 본론에서는, ‘법신이 일체처에 두루하다고 한다. 나타난 색은 정해진 분량이나 구역[分齊]을 갖지 않고
마음에 따라 시방세계의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각각 차별되게 나타내 보이되 여기에는
정해진 분량이나 구역이 없어서 서로를 방해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불가사의수승문이란, 불신의 업용(業用)이 매우 깊고 미묘하고 독존적으로
뛰어나 범부나 이승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이는 심식(心識)으로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眞如)가 자재하게 작용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깊은 대의를 두 가지 문에서는 어떻게 안립(安立)하는가?
진여문(眞如門)에서는 세 가지 대의를 하나씩만 건립한다. 진여문에서 그것들은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멸문에서는 세 가지 대의가 구족하게 병존한다. 전후가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대의는 진여문과 생멸문에서 위와 같이 구별된다.
그러므로 『대인다라망비유계경(大印陀羅網譬喩契經)』에서는다음과 같이 설한다.
“체대(體大)의 뜻만이 있을 경우에는 상대(相大)와 용대(用大)는 없다.
상대의 뜻만 있을 경우에는 체대와 용대의 뜻이 없다.
용대의 뜻만 있을 경우에는 체대와 상대가 없다.
이러한 삼대는 근본적인 것[第一] 하나만 가질 뿐
부차적인 것[第二] 하나는 없다.
한편 체대의 뜻이 있을 경우 상대와 용대가 있기 마련이고,
상대가 있을 경우에는 체대와 용대가 있기 마련이며,
용대가 있을 경우에는 체대와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삼대는 근본적인 것 하나가 있으면 그에 따라 부차적인
하나도 있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 갖가지 상은 결총지결택분(結摠持決擇分)에 가면
그 이치가 자명해질 것이다.
이제까지 세 가지 대[三大]의 뜻을 밝히는 문을 설했다.
다음으로 문자입문파이문(結摠持決擇分)을 설하겠다.
【論】 다음으로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가는 이지를 밝히겠다.
이른바 오음(五陰)을 추구해 보니 색법과 심법일 뿐이나,
육진경계(六塵境界)란 어니까지나[畢竟] 무념(無念)이다.
마음은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시방을 다 찾아도 얻을 수 없다.
마치 길 잃은 사람이 동쪽을 서쪽으로 알고 있어도 방향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와 같다. 중생도 마찬가지로,
무명에 미혹해서 진심을 망념이라고 잘못 알지만 마음은 실제로
움직인 적이 없다. 만일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잘 관찰하면
진여문(眞如門)에 수순(隨順)하고 득입(得入)할 수 있다.
【釋】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문장을 썼는가?
넓다거나 좁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갖가지 다른 집작들을
대치하기 위함이다. 다른 집착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예컨대 어떤 중생은, “일법계(一法界)의 심(心)은 근본이 되는 법이라서 넓고 큰 반면,
진망(眞妄)의 두 가지 문은 지말적인 법이라서 좁고도 작다”고 고집한다.
이러한 집착을 대치해 주기 위해서,
문(門)도 역시 소입(所入)이 되는 것으로서
근본법과 그 앙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설한다.
또한 진여문에는 유위법(有爲法)의 차별된 상이 없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또한 오음(五陰)을 공하게 하는 지혜도 소공(所空)이 되는 음(陰)처럼 그 자체가 공하다.
능공(能空)과 소공(所空)이 다 같이 공함으로써 평등한 진여문에 들어간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위 문장을 썼다.
또한 생멸문은 가설된 것이고 진여문은 진실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다음으로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으로 들어가는 이치를 밝히겠다.
이른바 오음(五陰)을 추구해 보니 색법과 심법일 뿐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란 어디까지나[畢竟]
무념(無念)이다. 마음은 형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시방을 다 찾아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무슨 이유로 비유를 들면서 동쪽을 각(覺)에, 서쪽을 망념에 비유했는가?
본각반야(本覺般若)가 청정한 지혜의 광명을 내서 깊숙하고 어두운 생사의 밤을 밝히는 것을,
바퀴살 같은 해가 완전히 솟아오르면 맑은 광명을 내서 세간의 어둠을 깨뜨리는 것에 비유한다.
반면 무명주지(無明住地)가 갖가지 염법의 권속들을 내서 무량한 무루성품에서 나오는 청정한 지혜의 자음을
덮어 가리는 것을,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깜깜한 밤이 나와서 분별하고 깨닫는 청정한 밝음을 덮어 가리는 것에 비유한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마치 길 잃은 사람이 동쪽을 서쪽으로 알고 있어도 방향을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와 같다. 중생도 마찬가지로, 무명에 미혹해서 마음을 망념이라고 잘못알지만 마음은 실제로 움직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이익을 얻는 양상을 밝힌 내용이다. 무슨 말인가?
어떤 중생이 심법에 능기(能起)와 소기(所起)의 차별된 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진여에 수순(隨順)함을 성취하고 진여에 득입(得入)함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수순함도 없고,
득입함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만일 미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잘 관찰하면 진여문에 수순하고 득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문자입문파이문을 설했다. 다음으로 그릇된 집착을 대치하여
바른 이해를 내게 하는 문[對治邪執正解門]을 설하겠다.
【論】 그릇된 집착을 대치한다는 것[對治邪執]은 무슨 뜻인가?
그릇된 집착은 모두가 아견(我見)에 의지하므로 아견만 떠나면
그릇된 집착이란 없다. 이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두 번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인아견은 범부를 기준으로 다섯 가지를 설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에서 “여래의 법신은 어디까지나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라고 한 말씀을 듣고,
집착을 깨주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줄을 알지 못해서허공이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의 모습은 망법이라서 그 체(體)가 전혀 실유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색을 대하는 데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생겨나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한다.
모든 색법은 본래가 마음이며 사실상 마음 밖에 실재하는 색이란 없다. 만일 색이 없다면 허공이라는 모습도
있을 수 없다. 무슨 말인가?
일체 경계란 마음이 망령되이 일어났기 때문에 있게 된 것뿐이니, 만일 마음에서 망령된 요동을 떠난다면 모든
경계가 멸하여 하나뿐인 진심이 어디든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된다. 이것을 두고 여래의 광대한 성품에서
나오는 궁극의 지혜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는 허공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에서 “세간의 모든 법은 어디까지나 그 체가 공(空)하며, 내지는 열반과 진여의 법도 필경 공하다.
본래부터 자체가 공하여 모든 상(相)을 떠났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집착을 깨주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줄을 알지 못해서 진여와 열반의 성품도 공일뿐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않아서[不空]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대치한다.
셋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늘어나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이 공덕이 되는 모든 법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알지 못해서 여래장에 색법과 심법 등 자상(自相)이 차별되는 법이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眞如)의 입장에서 설하기 때문에, 생멸(生滅)이라는
염법의 이지를 통해 차별을 설하는 모습을보여줄 뿐이다.
넷째는 경에서 “일체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은 모두 여래상에 의지하여 있게 된다.
일체법은 진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여 여래장 자체에 세간의
모든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오직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청정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분리되지도 않고
끊지도 않으며 진여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은
단지 허망하게 있는 것이라 성품 자체가 본래 없으며, 무시이래로 여래상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상의 체에 망법이 있어서 그것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영원히 망법을 쉬게 한다고 주장한다면
옳지 않다.
다섯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고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해서, 중생에게 시작이 있다고 여기며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여래가 얻으신
열반에도 끝이 있어서 다하고 나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여긴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에는 전제(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無明)의 상도 역시 시작이 없다. 만일 삼계 밖에 중생의 시초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외도의 경전에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래장에는 후제(後際)가 없는데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열반도 그와 상응하여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법아견(法我見)이란 근기가 둔한 이승(二乘)을 대상으로 하신 설법이다.
여래께서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셨는데, 그것이 궁극의 설이 아니므로 이승은 오음법(五陰法)에 생멸이
있음을 보고는 생멸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내서 망령되게 열반을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은 자성이 생하는 일이 없으므로 멸하는 일도 없다. 본래가 열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망령된 집착을 완전히 떠난 자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서
자상(自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다.
지(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결코 말을 통해 설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설을 시설하는 이유는 여래께서 훌륭한 방편으로언설을 빌어서
중생을 이끌어 주시기 위한 것일 뿐,그 취지는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을 염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여 실다운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釋】 위 본문은 네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 번째는 그릇된 집착의 근본총상을 밝히는 문[顯示根本摠相門],
두 번째는 인아견을 대치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人見對治門],
세 번째는 법아견을 대치하는 것을 밝히는 문[顯示法見對治門],
네 번째는 두 가지를 다 끊고 떠난 상을 밝히는 문[顯示俱非絶離門]이다.
이상이 네 가지다.
현시근본총상문은 한량없고 끝없는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사도(邪道)와 한량없고 끝없는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고정된 집착이 다 아견(我見)을 자신의 근거[所依]로 삼아 생겨나서 불어나는 것이지
아견 외에 다른 것은없으므로, 이 아집이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그러므로 『무명주지무변제계경(無明住地無邊際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바다와 같이 한량없는 갖가지 허망하고 그릇된 주장은 모두가 큰 바위산 같은 아견을 의지처로 삼아
발전해 나간다. 비유하자면 한량없고 끝없는 갖가지 수풀과 갖가지 초목들이 모두 다 산을 의지처로 삼아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이를 본론에서는, ‘그릇된 집착을 대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릇된 집착은 모두가 아견(我見)에 의지하므로 아견만 떠나면 그릇된 집착이란 없다.
이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현시근본총상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현시인견대치문을 설하겠다.
현시인견대치문은 사정취(邪定聚)와 부정취(不定聚)에 속하는 모든 범부들의 그릇된 집착을 정면으로 대치하여 수승하고 오묘한 이해를 내게 하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다섯 종류의 범부가 갖는 인아견과 그 장애를 대치하는 차별상은 본론의 문장에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으므로 중복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또 한편으로는 크게 요점
이 될 만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인아견은 범부를 기준으로 다섯 가지를 설한다’로 시작하여 자세히 설하고, 계속해서 ‘또한 여래장에는 후제(後際)가 없는데, 모든 부처님께서 얻으신 열반도 그와 상응하여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현시인견대치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현시법견대치문을 설하는 내용이다.
현시법견대치문은 이승 중생이 범하는 실유견(實有見)에 대한 과실을 정면으로 대치하여 법공(法空)의 커다란 이치를 성취하게 하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두 가지 법아견과 그 장애를 대치하는 차별상은 본론의 문장에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으므로 중복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겠다. 이를 본론에서는 ‘법아견이란 근기가 둔한 이승을 대상으로 하신 설법이다. 여래께서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셨는데,……’로 시작하여 자세히 설하고, 계속해서
‘멸하는 일도 없다. 본래가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현시법견대치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현시구비절리문을 설하겠다.
현시구비절리문은, 어떤 중생이 두 가지 집착을 떨쳐버리고
두 가지 공을 증득한다면 제법을 통달하여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 갈 곳이 멸하여, 끊는다는 것도 끊겨 비추는 작용이 적적하고
멸한다는 것도 멸하여 사려가 쉬므로 통달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한 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또한 망령된 집작을 완전히 떠난 자는 염법과 정법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서 자상(自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다.
지(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결코 말을 통해
설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설을 시설하는 이유는 여래께서 훌륭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서 중생을 이끌어 주시기 위한 것일 뿐,
그 취지는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을 염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여
실다운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從上已來,染淨諸法相熏相生,不斷絕義決擇分已焉。自此已下,分明顯示生滅門中,三種大義。
本曰:‘復次,眞如自體相者,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非前際生,非後際滅,
畢竟常恒,從本已來,唯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
自性淸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淸涼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問曰: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荅曰:雖實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眞如。此義云何?以無分別,離分別相。
是故無二。復以何義,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於念,
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卽有不見之相,
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眞識知,無有自性,非常非樂,非我,非淨,熱惱衰變,
則不自在,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無動,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
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如是淨法無量功德,卽是一心,更無所念。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
復次,眞如用者,所謂諸佛如來本在因地,發大慈悲,修諸波羅蜜,攝化衆生,立大誓願,盡欲度脫等衆生界,亦不限劫數,盡於未來,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而亦不取衆生相。此以何義?謂如實知一切衆生,
及與己身眞如平等無別異故。以有如是大方便智,除滅無明,見本法身,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
卽與眞如等,遍一切處。又亦無有用相可得。
何以故?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離於施作,但隨衆生見聞,
得益故,說爲用。
此用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凡夫、
二乘心所見者,名爲應身。以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取色分齊,不能盡知故;二者依於業識,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
名爲報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量好,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隨所示現,卽無有邊,
不可窮盡,離分齊相,隨其所應,常能住持,不毀不失,如是功德,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就,具足無量樂相故,說爲報。又凡夫所見者,是其麤色,
隨於六道各見不同,種種異類,非受樂相,故,說爲應。復次,初發意菩薩所見者,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知彼色相莊嚴等事,無去,無來,離於分齊,唯依心現,不離眞如。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若離業識,則無見相,
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問曰: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
云何能現色相?荅曰:卽此法身是色體故,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色心不二,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
說名智身,以智性卽色故,說名法身。遍一切處,所現之色,無有分齊,隨心能示十方世界無量菩薩、
無量報身、無量莊嚴,各各差別,皆無分齊,而不相妨。此非心識分別能知,以眞如自在用義故。
’論曰:卽此文中,自有三門。云何爲三?
一者顯示自體大義門,
二者顯示自相大義門,
三者顯示自用大義門。
初大義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五人平等門,
二者時不轉門。是名爲二。
中大義中,卽有三門。云何爲三?
一者圓滿功德門,
二者問荅決疑門,
三者別釋廣說門。是名爲三。
後大義中,自有六門。云何爲六?
一者本願無盡門,
二者離相不著門,
三者能所平等門,
四者無相現應門,
五者隨見麤細門,
六者問荅決疑門。是名爲六。
今當作釋,如其次第,分明散說。大聰明者,應審思擇。
復次,眞如自體相者者,卽是摠標體相二義。自此已下,別釋散說。
初說體大,云何名爲五人平等門?謂眞如自體通於五人,平等平等,無差別故。
云何名爲五種假人?
一者凡夫,
二者聲聞,
三者緣覺,
四者菩薩,
五者如來。是名爲五。
如是五名,人自是五,眞自唯一。所以者何,眞如自體無有增減,亦無大小,亦無有無,亦無中邊,
亦無去來,從本已來,一自成一,同自作同,厭異捨別,唯一眞故。是故諸法眞如一相。三昧契經中,
作如是說:譬如金剛作五趣像,五人平等亦復如是。於諸人中,無有增減故。如本‘一切凡夫、聲聞、
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故。云何名爲時不轉門?謂眞如自體,自然常住,決定不變,三際不動,
四相不遷,寂滅又寂滅,眞實又眞實故。如本‘非前際生,非後際滅,畢竟常恒故。’已說顯示自體大義門,
次說顯示自相大義門。圓滿功德門者,其相云何?謂眞體中,圓滿一切功德,無所少故。
何等功德?
所謂六種性義功德。云何爲六?
一者大智慧光明義,本覺般若能除無明之闇夜故,於契經中名廣大圓滿殊勝般若實智光明性義;
二者遍照法界義,本覺般若照達一法界之源故。於契經中,名周遍通達一法界藏自然性義;
三者眞實識知義,本覺般若遠離虛假之解量故,於契經中,名離妄想解,決定了知實際實性性義;
四者自性淸淨心義,本覺般若無量性功德,自然本有,非得他力,
遠離塵累,契中實故,於契經中,名本有明白離邊中中性義;
五者常樂我淨義,本始二覺從無始來,遠離四障,
圓滿四種自然德故,於契經中,名如來正覺自然性德遠離炎幻不修行性義;
六者淸涼不變自在義,二種本覺譬如明鏡之南北相,具隨違故,於契經中,
名具足隨順逆違無㝵陁羅尼全遍性義。是名爲六。如本‘從本已來,唯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自性淸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
淸涼不變自在義故。’廣大圓滿自性本德契經中,
作如是說:自性功德本數之名有十七者,於初二中,各開二種,於次二中,各開三種,於後二中,
如其次第,開四三故。復次,淸淨心地無垢陁羅尼契經中,
作如是說:自性功德本數之名,有二十五者,最後一中,開十一故,如是三數別相云何?
馬鳴菩薩摩訶衍論本數名字,爲欲顯示名略義廣摠持相故。是故攝散摠立爲六。
復次,所依別本摠持說故。
復次,名字數多,迷眞實故,
以此義故,摠立爲六。言十七者,名字云何?
一者大智慧義,
二者大光明義,
三者遍一法界義,
四者照一法界義,
五者眞實義,
六者識義,
七者知義,
八者自性義,
九者淸淨義,
十者心義,
十一者常義,
十二者樂義,
十三者我義,
十四者淨義,
十五者不義,
十六者變義,
十七者自在義。是名十七。
言二十五者,名字云何?所謂前數不功德中,開八種故,變功德中,開二種故,言二變者,
一者上流轉變,
二者下流轉變。言八不者,中觀論中,如分明說。已說有名數量功德分,次說無名過量功德分。本覺體中,
自性功德無量無邊,離於言量,過於心行,以何義故,止於數量,作如是部?本有功德雖無有量,
不出三數故,擧本耳。如本‘具足如是過於恒沙故。’如是無量無邊功德,各各別別,有體相耶?唯一心量,
無別法體,唯一心量,終不離心。所以者何?
心法雖一,而有二種陁羅尼自在用故。云何爲二?
一者自不離彼陁羅尼自在,
二者彼不離自陁羅尼自在。是名爲二。
如本‘不離’故,如是性德從無始來,一向妙有,非遣除法。
所以者何?自性自性,非他俱故。如本‘不斷’故,
如是一切功德唯一,自作一,終異,自不能作一。所以者何?一法界故。
如本‘不異’故,如是深理,一切菩薩、一切二乘、一切凡夫,心不思惟,言不論量,
絕之又絕,遠之又遠。如本‘不思議’故,三人非境,當何人之言思境界?唯大覺者,乃自軌則。
如本‘佛法’故如是無量性之功德,從具縛地,乃至無上大覺智地,具足圓滿,無所少闕。
所以者何?如是諸德從無始來,自然本有,非假緣力而建立故。
如本‘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故,已說圓滿功德門,次說問荅決疑門。
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發起略問難違門,
二者發起廣荅解釋門。
問者難意其相云何?謂擧說文相違,前後雜亂,審其理故,
前後之文云何相違?所謂眞如決擇分中,
作如是說:心眞如者,卽是一法界大摠相法門體。所謂心性不生不滅,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則無一切境界之相。是故一切法從本已來,離言說相,離名字相,
離心緣相,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唯是一心故,名眞如。自相大義決擇分中,
作如是說: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自性淸淨心義故,
常樂我淨義故,淸涼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
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如是相違故,以爲難。
如本:‘問曰: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故。已說發起略問難違門,次說發起廣荅解釋門。就此門中,卽有二門。
云何爲二?
一者是摠,
二者是別。於摠門中,卽有二種。
云何爲二?
一者眞如摠,
二者生滅摠。
如其次第,說相可見。
荅曰:雖實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眞如者,卽是眞如摠。謂雖自相大義門中,
作如是說,具種種德,過於恒沙,而是生滅門之界量。非眞如門,眞如門中,無差別相,平等平等,
一相一味,獨存眞如淨法界故。以此義故,無相違過。自此已下,作其緣由,決斷疑惑。
以無分別,離分別相。是故無二者,眞如門中,唯有同同,無異異故。
自此已下,釋生滅摠,於此文中,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是問,
二者是荅。有廣略故,二重問荅不同應知。
初重問荅其相云何?復以何義,得說差別者,卽是開問。謂若諸法從本已來,平等平等,一味一相,獨存眞理,無二體者,復有何法,而非平等以之爲依,建立差別,卽是擧異門,以疑異門焉。自此已下,發起荅說,
決斷此疑。文相可見,以依業識,生滅相示者,卽是摠荅。謂眞如門中,
無過恒沙一切染法,以爲所治,無能治之過於恒沙一切淨法,以爲對量。是故眞如門中,
作如是說:一切諸法平等平等,一味一相,無有二體等焉。而此生滅門中,所治染法無量無邊,
能治之淨法亦無量無邊。是故生滅門中,作如是說:本覺體中,具種種德,無量無邊過恒沙等焉。卽是大意。
次當作釋,別別散說。所言依者,卽是根本無明住地,一切染法之所依故。所言業者,卽是業相。所言識者,
轉等諸識。生滅相者,門之摠稱。所言示者,相反顯示。此中以字遠流,應至於三字。如是三法功德之起,
當緣由故,已說略說分,次說廣說分。就此分中,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是問,
二者是荅。
此中,問略荅廣,應知此云何示者,卽是詰問,所謂詰問其所由故,
自此已下,直荅此問。此荅釋中,卽有三種。云何爲三?
一者自宗正理,
二者非道邪行,
三者具擧對量。是名爲三。
如其次第,說相應觀。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於念者,卽是第一自宗正理。
所謂法性,從無始來,唯是一心,無一一法而非心故,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者,
卽是第二非道邪行,所謂摠擧本上之諸無明住地故。自此已下,直顯具擧對量差別,如上所說本覺體中,
六相功德各各待觀,何等過患,以之爲對,建立顯示?所謂根本無明熏習一心之海,發起業等種種諸識,
隱覆般若實智之明,增長愚癡迷亂之闇,卽是不覺無明之界量,明以之爲對,一心之性寂滅無起,
卽是本覺慧明之安立德故,建立顯示,如本‘心性無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故。
自此已下,顯第二德,文相可見,如是妄心起見,達境,一向唯轉虛妄境中,不能通達眞實境界。
所以者何?眞僞相違,不契當故。
如本‘若心起見,則有不見之相’故。
自此已下,明遍觀義,而眞實心離轉見故,通達諸法,無所不至,無所不當,無所不盡。
所以者何?眞實智見離能見、所見之邊見故,如本‘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故。
自此已下,明第三德。所謂若心有動轉相,卽是無明熏習氣故,虛妄轉明,以之爲對,心性寂靜,無有喧動,
正直無有顚倒之解,卽是實智之照,隨順道理,無倒建立顯示。如本‘若心有動,非眞識知故。
’自此已下,顯第四德,所謂妄法從無始來,無自體明,以之爲對。自性淸淨,本有功德建立顯示,
如本‘無有自性故,自此已下,顯第五德。所謂妄法四相之所遷故,非常三種苦俱轉故,非樂二種自在無故
非我一道淸淨無故非淨此四種過,以爲對量本覺體中四種功德建立顯示如本非常,非樂,非我,非淨故。
’自此已下,顯第六德。所謂妄法燒眞心故。是故名熱。又是惱亂諸衆生故。是故名惱,破滅變德,令不作故。
是故衰變,由此事故,一切衆生不得自在,是故亦名爲不自在,待觀此事,以爲對故。
淸涼不變自在之德建立顯示。如本‘熱惱衰變則不自在故。’自此已下,顯示無邊功德相義。所謂若所對治染法,
無量無數,以能治之。淨法亦無量無邊故。如本‘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無動,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故。自此已下,結圓滿德。所謂若一心法,有動轉相,更前見境界,有可緣者,能見之心,所見之境,二差別故。本覺功德則不圓滿,而本性德雖過恒沙,唯一心量,終無二體。
所以者何?如是諸德;悉皆各各不分其體,於一法界,其量等故。是故圓滿自性功德,結縛解脫之二位中,
常恒具足,名爲法身,名如來藏。如本‘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如是淨法無量功德,
卽是一心,更無所念。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故。
染淨數量平等決擇,依何契經,所解釋耶?所謂文殊師利善巧方便相似譬喩大陁羅尼經。
彼契經中,如何說耶?謂彼經中,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承佛神力,
卽說嗢拕南頌曰:譬如阿只多 遮那尸帝樹 其果多無數表實有十等。
染淨數量等 亦應如是知行者依此喩 可了眞妄理。今此經文爲明何義?爲欲顯示假當待實,
眞定賴妄無有獨孤自立法故。所言表者,喩於何法?謂喩妄法。妄假無實,如果外故,所言實者,
喩於何法?謂喩眞法。眞實無假,如果中故。
云何名爲十種等耶?
一者數等,表實契當,其數等故;
二者塵等,表實細末,配其數量等,無差別故;
三者量等,表實稱量,終無差別,輕重等故;
四者色等,表實挍量,同白色故;
五者香等,表實熏習,其香等故;
六者味等,表實噉食,無差別故;
七者觸等,表實觸身,等無差別故;
八者本等,表實同依,樹木出故;
九者俱等,表實一時,無前後故;
十者同等,終一味故。是名十等。
擧喩合法,說相明故,不須重釋。復次,若鈍根者,不達此事。依功德黑闇之譬喩,應知等意。
已說顯示自相大義門,次說顯示自用大義門。此中六門,如其次第,應審觀察。言本願無盡門者,
淸淨僧那阿世耶廣大圓滿,無邊際故。謂諸如來無量無邊,不可思議,不可稱量微塵數劫中,
興十方世界之微塵數量大慈悲心海,
修十方世界之微塵數量大圓滿因海,
攝十方世界之微塵數量一切衆生海,
立十方世界之微塵數量廣大誓願海,
成十方世界之微塵數量大自在果海故。
所以者何?以如實知同一無異相續義故。如本‘復次,眞如用者,所謂諸佛如來本在因地,
發大慈悲修諸波羅蜜攝化衆生立大誓願盡欲度脫等衆生界亦不限劫數盡於未來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故
已說本願無盡門,次說離相不著門。言離相不著門者,於所作中,遠離所作,不生著故,
謂諸如來雖發無量無邊大悲攝化一切恒沙衆生而諸如來無一一佛而攝生故。所以者何?
如實了知一切衆生及與自身唯一眞如、唯一法身,無有增減,無差別故。
如本‘而亦不取衆生相,此以何義?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眞如平等故。
已說離相不著門,次說能所平等門。言能所平等門者,人法體用理智平等,無差別故。
謂法身應化之三身,及實實假假之二理平等一體,無差別故,自性本身及枝末身一等一體,
無差別故,能證正智,所證如理平等一體,無差別故。
以一體故,無有二體。無二體故,亦無一體。無二無一,亦無無耳。
以此義故,自然本性具足功德,不假他力,甚深極妙。
契經中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卽白佛言:云何名爲異異異相,云何名爲同同同相?
佛言:所言異異異相者,卽是無明。所言同同同相者,卽是明法。如是二法,如牛兩角,
對治之相,非消融體,如兩空絕。是故此二法名曰爲非觀僞法。於此文殊師利卽承佛神力,卽從坐起,
白佛言:世尊,云何名爲非觀僞法?其相可說耶?不可說耶?以何爲門,應覺知耶?
爾時,世尊卽告文殊師利言:我諸一切契經海中,作如是說:異者無明,同者明者,爲欲度脫愚癡凡夫,
權作此說,而今日爲汝眞實言說。文殊師利,所言非觀僞法者,同異歸同,同同歸空,空空歸絕,
乃至廣說故。如本‘以有如是大方便智,除滅無明,見本法身,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
卽與眞如等遍一切處故。’已說能所平等門,次說無相現應門。言無相現應門者,自性身體空寂無像,
能現諸像。譬如兔角,自體空無,善能出生,一切角故。謂法身佛,唯是一一,唯是寂寂,亦非一一,
亦非寂寂。心行處滅,言語道斷,滅滅斷斷,唯阿作阿,故。所以者何?諸佛如來唯自自身,無他身故。
而諸衆生見聞得益,自心量中,獲得利益,法身體中,無有關故。如本‘又亦無有用相可得。
何以故?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離於施作,
但隨衆生,見聞得益故,說爲用’故。已說無相現應門,次說隨見麤細門。
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應身用相差別門,
二者報身用相差別門。
初門云何?所謂一切凡夫、二乘不能了達一切諸法,唯一心之量,甚深宗故,依遍分別妄想事識,見應化身,
作外量解,不能通達無有分界,分分轉故。如本‘此用有二種。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凡夫二乘心所見者,名爲應身, 以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取色分齊,不能盡知故’故。
次門云何?所謂從初信解,乃至金剛,一切菩薩明了通達一切諸法,唯一心量,甚深宗故,依彼業識,
見報身佛,作唯識解,通達依、正,無分齊故。如本‘二者依於業識。謂諸菩薩從初發意,乃至菩薩究竟地,
心所見者,名爲報身。身有無量色,色有無量相,相有無量好,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隨所示現,
卽無有邊,不可窮盡,離分齊相,隨其所應,常能住持,不毀不失’故。自此已下,顯示報應之差別相。
所言報者,具勝妙因,受極樂果,自然自在,決定安樂,遠離苦相故,名爲報。如本‘如是功德,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及不思議熏之所成就。具足無量樂相故,說爲報’故。所言應者,隨順機根,
而不相違。隨時,隨處,隨趣出現,非安樂相故,名爲應。如本‘又凡夫所見者,是其麤色,隨於六道,
各見不同,種種異類,非受樂相故,說爲應’故。自此已下更作重釋,明前所說。所謂位位各各、見佛增減別故。
此義云何?若三賢位諸菩薩者,信眞如故,分見報身,觀知色相無分際量,而此菩薩不能離脫分別之心。
所以者何?以未得入眞如位故。如本‘復次,初發意菩薩所見者,以深樂信眞如法故,
少分而見知彼色相莊嚴等事,無來無去,離於分齊,唯依心現,不離眞如,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故。若得十地,諸菩薩者,如其次第,轉勝究竟。如本‘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故。若佛果中,業識本種無所有故,能見、所見亦復空無。
所以者何?一切諸佛眞如眞如,平等平等,法身法身,平等平等,無此無彼,無我無他,無大無小,無高無下,無無無有,戲論都盡,慮知亦空,唯一大空,眞如本智,服遮伽利娑那提衣,於鍵尸多陁摩宮,自性身坐,
獨存無二故。如本‘若離業識,則無見相,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何故應身章中,
作如是說?依分別事識,而見彼佛,報身章中作如是說:依於業識,而見彼佛,爲欲顯示隨識麤細,
所見佛身,隨麤細故。已說隨見麤細門,次說問荅決疑門。於此有二。云何爲二?
一者是問,
二者是荅。
荅說分中,卽有五門。云何爲五?
一者法身出現色相門,
二者顯示智身形相門,
三者顯示法身形相門,
四者廣大圓滿無際門,
五者不可思議殊勝門。是名爲五。
如其次第,說相可觀,問者意樂其相云何?所謂問者,作如是疑,剋其法身,眞實自體,湛湛慮絕,
寂寂名斷,色相作業,由誰而有。無相現應決擇分中,
作如是說:法身無相能現色相,若能出現種種色相,不可言說法身空寂,離色像域。如是疑故,
發起此問。如本‘問曰: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云何能現色相’故。
自此已下,卽決此疑,言法身出現色相門者,自性法身能爲色相,作所依止。善出色相無障㝵故。
所以者何?能依色法,所依心法,從無始來,平等平等,無有二體,唯一心量故。
如本‘荅曰:卽此法身,是色體故,能現於色。’所謂從本已來,色心不二,
故言顯示智身形相門者,以智攝色,無一一色而非智故,說名智身。
如本‘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說名智身故,言顯示法身形相門者,以色攝智,無一一智,而非色故,
說名法身。如本‘以智性卽色故,說名法身’故。言廣大圓滿無際門者,如是二身所現色相,等遍一切衆生、
一切非情界、
一切虛空界、
一切涅盤界、
一切如來界中,
無所不通,
無所不至,
無所不當,
無所不會,
無所不作,
亦無分際,
亦無障㝵,
純純一一,無相亂故。
如本‘遍一切處所現之色,無有分際,隨心能示十方世界無量菩薩、無量報身、無量莊嚴,各各差別,
皆無分際,而不相妨故。’言不可思議殊勝門者,如是業用甚深極妙,獨尊殊勝,非凡夫、二乘之所能知故。
如本此非心識分別能知以眞如自在用義故故如是三種甚深大義,
二種門中,云何安立?謂眞如門中三種大義者,唯各立一,無雙立故。若生滅門中,三種大義者,
三種大義具足,雙立無前後故,以之爲別。是故大印陁羅網譬喩契經中,
作如是說:有體大義,無相及用,有相大義,無體及用,有用大義,無體及相。
如是三大,有第一一,無第二一。
復次,有體大義,當有相用,有相大義,當有體用,有用大義,當有體相。
如是三大,隨有第一一,有第二一,不相捨離故,餘種種相,結摠持決擇分中,自當理明。
已說顯示三種大義門,次說門自入門。破異門
本曰:‘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六塵境界畢竟無念。以心無形相,
十方求之,終不可得。如人迷故,謂東爲西,方實不轉,衆生亦爾。無明迷故,謂心爲念,心實不動。
若能觀察,知心無起,卽得隨順入眞如門故。
’ 論曰:今此論文,爲明何義?爲欲對治廣狹大小、諸異執故。
云何異執?謂有衆生作如是執,一法界心是其本法,亦廣亦大,眞妄二門是其末法,亦狹亦小,
爲欲對治此執著故,作如是說:門亦所入,與本量等。復次,爲欲顯示眞如門中,無有爲法差別相故。
復次,爲欲顯示空五陰智,如所空陰自體空無,以此能空、所空皆空,爲入眞如平等門故。
復次,爲欲顯示生滅門,假眞如門實故。如本‘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
六塵境界畢竟無念,以心無形相,十方求之,終不可得故。以何義故,譬喩門中,東方喩覺,西方喩念,
爲欲顯示本覺般若出現淸淨智慧光明,照耀幽冥生死闇夜,譬如日輪出現已訖,發淨光明,破世閒闇,
無明住地出生種種染法眷屬,隱覆無量無漏之性淸淨慧明,譬如日輪隱沒已訖,發大闇夜障,覆分別了知淸淨明故。如本‘如人迷故,謂東爲西,方實不轉,衆生亦爾。
無明迷故,謂心爲念,心實不動。’故,自此已下,明得益相。謂有衆生了知心法,
無有能起所起別相,卽得成就眞如隨順,卽得成就眞如得入,無有隨順,無得入故。
如本‘若能觀察知心無起,卽得隨順入眞如門故’故。已說門自入門破異門,次說對治邪執正解門。
本曰:‘ 對治邪執者,一切邪執皆依我見,若離於我,則無邪執。’是我見有二種。云何爲二?
一者人我見,
二者法我見。
人我見者,依諸凡夫說有五種。云何爲五?
一者聞修多羅,說如來法身,畢竟寂寞,猶如虛空,
以其不知爲破著故,卽謂虛空是如來性。
云何對治?明虛空相是其妄法,體無不實,以對色故,有是可見相,令心生滅,以一切色法,
本來是心,實無外色,若無色者,則無虛空之相。所謂一切境界唯心,妄起故有。
若心離於妄動,則一切境界滅,唯一眞心,無所不遍。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非如虛空相故。
二者聞修多羅,說世閒諸法畢竟體空,乃至涅盤、眞如之法,亦畢竟空。從本已來,自空離一切相,
以不知爲破著故,卽謂眞如、涅盤之性唯是其空。云何對治?明眞如法身自體不空,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聞修多羅,說如來之藏無有增減,體備一切功德之法,以不解故,卽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
云何對治?以唯依眞如義說故,因生滅染義,示現說差別故。
四者聞修多羅,說一切世閒生死染法,皆依如來藏,而有一切諸法,
不離眞如,以不解故。謂如來藏自體具有一切世閒生死等法。
云何對治?以如來藏從本已來,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不離不斷,不異,
眞如義故,以過恒沙等煩惱染法,唯是妄有,性自本無,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
若如來藏體有妄法,而使證會,永息妄者,則無是處故。
五者聞修多羅,說依如來藏故,有生死,依如來藏故,
得涅盤;以不解故,謂衆生有始;以見始故,
復謂如來所得涅盤有其終盡,還作衆生。云何對治?以如來藏無前際故,
無明之相亦無有始。
若說三界外,更有衆生,始起者,卽是外道經說。又如來藏無有後際,諸佛所得涅盤與之相應,
則無後際故。法我見者,依二乘鈍根故,如來但爲說人無我,以說不究竟,見有五陰生滅之法,怖畏生死,
妄取涅盤。云何對治?以五陰法,自性不生,則無有滅,本來涅盤故。復次,究竟離妄執者,當知染法
淨法,皆悉相待,無有自相可說。是故一切法從本已來,非色非心,非智非識,非有非無,畢竟不可說相,
而有言說者,當知如來善巧方便。假以言說,引導衆生,其旨趣者,皆爲離念,歸於眞如,以念一切法,
不入實智故。
論曰:卽此文中,自有四門。云何爲四?
一者顯示根本摠相門,
二者顯示人見對治門,
三者顯示法見對治門,
四者顯示俱非絕離門。是名爲四。
言顯示根本摠相門者,無量無邊,過恒沙數,一切邪道無量無邊,過恒沙數,一切定執皆以我見,
爲自所依,出生增長,更無有餘,爲此邪執,作根本故。是故無明住地無邊際契經中,
作如是說:一切無量種種虛妄邪論之海,以我見嶽爲依而轉,譬如一切無量無邊種種林樹、種種草木,
皆悉以山爲依而轉故。如本‘對治邪執者,一切邪執皆依我見,若離於我,則無邪執。
是我見有二種。云何爲二?
一者人我見,
二者法我見故。’已說顯示根本摠相門,次說顯示人見對治門。言顯示人見對治門者,
直爲對治邪定聚及不定聚一切凡夫謬執過失,生勝妙解故。五種人見治障別相,文相明故,
不須重釋。復次,無大要故。如本‘人我見者,依諸凡夫說有五種,乃至廣說。又如來藏無有後際,
諸佛所得涅盤與之相應,則無後際故’故。
已說顯示人見對治門,
次說顯示法見對治門。
言顯示法見對治門者,
直爲對治二乘衆生實有過失,令得成就法空大理故,
二種法見治障別相,文相明故,不須重釋。如本‘法我見者,依二乘鈍根故,
如來但爲說人無,我乃至廣說,則無有滅,本來涅盤故’故。
已說顯示法見對治門,次說顯示俱非絕離門。言顯示俱非絕離門者,
若有衆生除遣二執,證得二空,通達諸法,言語道斷,心行處滅,斷斷照寂,滅滅慮止,無所達故。
如本‘復次,究竟離妄執者,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無有自相可說。是故一切法從本已來,
非色非心,非智非識,非有非無,畢竟不可說相,乃至廣說。令心生滅,不入實智故’故。
釋摩訶衍論卷第六丁未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석마하연론』 6권(ABC, K1397 v37, p.1044a01-1051b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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