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오월은 늘 똑같이 찾아왔다. 세상은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이고, 나무들은 그 푸름을 더해가며 생명력을 뽐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늘 배고팠다. 오월은 보릿고개였고, 쌀이 떨어진 집에는 빈 솥만 걸려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려지는 하루 속에서, 나는 늘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깊게 팬 주름과 고단한 숨소리는 어린 나에게 가난이 무엇인지, 무거운 책임이 무엇인지 서서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형, 오늘 뭐 먹을 수 있을까?”
두 동생의 말에 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저녁 한 끼를 기대하며, 나는 남의 집 소 풀을 베러 갔다가 보리밭으로 향하곤 했다. 그곳은 내게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숨통 같은 공간이었다. 넓게 펼쳐진 보리밭은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파도를 일으켰고, 나는 그 속에서 보리 피리를 꺾어 입에 물었다. “필릴리, 필릴리.” 작고도 여린 소리였다. 내 마음 속에서는 그 소리가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보리 피리를 부는 순간마다 내 작은 기도가 담겼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아버지가 더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지 않게 해 주세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고, 나는 그 소리가 언젠가는 우리 가족에게도 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길고도 험했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날 때면, 나는 가족의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여전히 힘겨운 숨을 내쉬며 누워 계셨고,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지친 얼굴로 앉아 계셨다. 동생들은 언제나 그렇듯 배고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 보답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보리밭에서의 피리 소리만큼은 그들의 허기진 마음을 잠시나마 채워주길 바랐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날따라 무거운 발걸음이 유난히 느리셨다. 아버지는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말없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셨다. 그것은 오래된 소의 멍에였다. 아무리 닦아도 그 쇳덩이엔 묵은 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말씀하셨다.
“언젠가 우리 집에도 소가 생기면, 이 멍에를 쓰게 될 거야.”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컸다. 소 한 마리만 있어도 우리 가족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 한 마리가 희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린 나조차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리를 불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소가 있을 거야. 그 소 한 마리만 있으면, 우리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나는 오월의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때의 보리밭을 떠올린다. 그 작은 피리 소리에 모든 희망을 담았던 순수한 나. 아무것도 가질 수 없던 어린 시절, 그때의 나에게 피리 소리는 유일한 기도였다. 그 기도가 세상에 닿아,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오월이 오면, 나는 다시 피리를 꺼내 불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