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11
ㅡ 잊혀진 우리 고대국가 부여 2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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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는 참 재미가 없습니다. 학문적으로 정설도 없습니다.
그래서 논쟁도 아주 심합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환단고기'로 인한 내부논쟁 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공정', 일본 '임나본부설' 같은 국가 간 논쟁도 심합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 논문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용어들도 생소한 단어가 많아 한 번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 번 말했지만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역사전문가가 아닙니다.
지금 쓰고 있는 고대사도 여러 자료들을 찾아가며 저도 공부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웠거나 소설 드라마 등에서 보았던 수준보다는 한 단계 위 수준으로 쓰려고는 하지만 일반상식 수준은 크게 넘지 않으려 합니다.
그나마 내 글이 길다고 불평(?)들이 많은데 여기에 어렵기까지 하며는 아마 내 글을 읽어주실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끔 저보다 훨씬 더 고대사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지신 분들은 댓글로 제가 쓴 글 중 빠진 부분을 지적해주시기도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깊게 들어 가면 앞서 말한대로 제 글을 아예 안 읽으신 분들이 속출할 것이라 가능한 간략하고 쉽게 쓰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이 솔직히 정리하기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럼 '잊혀진 고대국가 부여 2편'으로 들어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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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자체 일원적인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이처럼 당시는 '위만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가 동시대에 개별국가로서 존재했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이다.
'동부여'는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부여'만 있었다.
'동부여'는 고구려후기 고구려 정계에 깊숙히 파고든 부여계 귀족들이 선조를 미화하기 위해 지어냈거나 신화를 조작했는데 그게 고구려 자체기록과 '구삼국사'를 거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남부여'는 백제 제26대 성왕 시기에 일시 사용한 국호이다.
'졸본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갈사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북부여'는 이후 국력이 점차 약화되고, 선비족이 발흥하면서 동쪽 연길지방과 서쪽 농안지방 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북부여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일대로 파악된다.
'진서'(중국 진대(晉代)의 정사)따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기에 부여는 80,000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0,000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고 기록했다.
고대국가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 전부였기 때문이다.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이다.
[실제 부여는 건국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대국이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ㅡ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ㅡ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 이었는데도 그러했다. 부여는 최대 융성기 때 영토가 2,00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285년 '선비족 모용부'에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모용외의 침공에 타격을 받은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 지린성일대에서 서쪽 농안 지역으로 옮겼으나, 346년, 전연 태조 문명제 모용황(333~348 재위)의 대공격에 참패해 부여왕 현을 포함한 무려 50,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미천왕(제15대, 300~331 재위)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전에 부여를 침공했던
'모용선비'(훗날의 전연)가 요동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고구려 속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346년 부여 멸망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 명맥을 이어 갔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동부여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것마저 맥이 끊기게 되었다.
후기부여 중심지였던 농안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북부여'는 이후 452년 신라와 고구려가 전쟁상태에 돌입할 때쯤 뜬금없이 북위로 사신을 보내고는 다음 기록이 없다가, 고구려가 전쟁하는 틈을 타 독립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자세한건 알 수 없다. 그러다가 이후 494년에 '물길'의 침입을 받고, 도저히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고구려제21대 문자명왕(491~519 재위)에게 투항했다(494).
일부 세력은 북부여가 멸망하기 이전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했다는 설이 있다. '두막루'는 과거 만주 북단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이 보다 부여에 대해 여러 복잡한 학설들이 있지만 이 정도만 알아 두자.
물론 500년이 훨씬 넘은 '부여'라는 고대국가를 단 두 편으로 마무리 한다는 게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밝히겠다.
부여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고주몽) 건국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우리 한반도 고대국가 건국설화는 대부분 '난생설화'이다. '고조선'과 '백제'만 아니다.
'난생설화'는 나라시조나 영웅탄생을 신비화하고 초인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시조나 영웅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민족설화를 말한다.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모두 건국시조가 난생설화로 태어났다.
그러나 '백제' 건국설화는 특이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거나 알에서 태어난 신비한 영웅이 아니다. 그저 고구려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다. 아주 현실적인 건국설화이다. 아마 고주몽 설화가 있는데 아들들에게 까지 탄생설화를 덧 붙이기는 그러했을 것이다.
부여시조 '동명왕' 탄생설화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고주몽) 탄생설화와 흡사한 이유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부여시조 탄생설화를 고구려가 베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부여시조 '동명왕' 탄생설화이다.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이 설화는 중국사서 '논형'에 나온다 '논형'은 한나라의 '왕충'이라는 역사덕후가 쓴 엄청난 책이다. 한 명의 개인이 백 명 보고 쓰라 해도 못 쓸 만한 양, 세상 소문까지 다 모은 듯 거의 백과사전 저리가라할 수준의 엄청난 양의 역사 이야기를 써놨기 때문에 현대에도 세계 동양사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자료로 쓰이고 있다. 물론 모든 내용이 팩트일 수는 없으나, 한반도나 만주 이야기까지 저렇게 열심히 써놓는 성의를 보였기에 역사학자들도 크게 인정하는 책이다
고구려 동명성왕(고주몽) 탄생설화는 고구려 편에 쓰겠다.
후한시절 '논형'에 처음 부여시조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원형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대에 <주몽 신화>를 만들고 고구려 초기역사를 정비하면서 <동명왕 신화>를 베껴 <주몽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동명왕을 천제아들로 설정한 해모수로 바꾸거나 교체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 천제혈통이란 설정을 부여해 주몽의 고귀함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부여역사에 관해 마치지만 혹시 국사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리나라 국사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대목이다. 부여 특산물과 사회제도이다. 부여는 만주 쪽에 자리해 유목민족 같지만 전형적인 '농경사회'였다
<부여 특산물>로는 말, 모피. 주옥 등이 있다.
<부여는 사회제도>로는
'형사취수제' 우리 중고등시절 국사시간에 가장 충격 받은 용어였다.^^'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는 말이다. 고구려도 같은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성적인 의미보다 나이먹은 여성을 보호하려는 하나의 여성복지제도 일종이라 생각되어진다.
'사출도'는 부여의 지방지배구조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아래 설명을 보니 기억이 조금있다.
고시같은 수준 높은 시험에는 자주 나온다 한다. 부여는 왕도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크게 4개의 지역단위로 나누어 지배했는데, 각 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마가·우가·구가·저가 등 각기 수천 호의 대부족집단을 다스리는 부족장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사출도'라 한다
'1책12법'은 부여시대의 법.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부여전'에 의하면, 당시 부여시대의 법이 엄하여서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여는 '순장'을 하고 '옥갑' (왕이나 귀족들에게 입혔던 수의)도 했다.
아래는 '부여'와 비교하여 시험에 잘 나오니 참고하라 적어 놓는다.
<동예 특산물> 단궁, 과하마, 반어피
<동예 사회제도> 읍군, 삼로
<고구려 사회제도> 형사취수제, 서옥제, 약탈경제, 부경,
<옥저> 거수, 삼로, 민며느리제, 골장제, 고구려에 공납
<삼한> 제정분리, 신지, 읍차. 천군, 소도
<마한> 목지국
<변한> 철 수출, 벼농사활발
모르는 용어도 많겠지만 우리 학창시절 배웠던 대로 그냥 외워야 한다.
다음 기회에 자세한 용어설명을 하겠다.
오늘 글은 길기도 길었지만 별 재미도 없고 골치만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국사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시험에는 중요한대목이기도 하다.
잘 참고 바란다.
다음 편은 '고구려와 한사군' 편으로 들어 가야 하는데 그 전에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와 목적등을 알아야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다음 편은 '동북공정'을 따로 다루려 한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