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壯節公申先生實記장절공 신선생 실기 / 申鉉求신현구
1. 해제
장절공 신선생 실기壯節公申先生實記(22×32cm) 표제는 선조 장절공 실기로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의 기록을 후손 신현구申鉉求(상주군 상주면 성하리 7번지)가 편집하여 신현대(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1110번지)의 교열을 거치고 인쇄자 강성호(경남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754번지)가 신현구의 집을 인쇄 겸 발행소로하여 대정15년(1926) 7월 21일 인쇄하여 4권 1책으로 26일 발행했다.
실기간행實紀刊行의 전말顚末에서 임술(1922)년 봄에 선조의 동수유의대시桐藪遺衣帶詩 정본正本을 얻어 보고 4월에 경성(서울) 대종중大宗中에 소장된 선조의 유묵遺墨이 필자 소장본과 동일 각본刻本임을 알았다. 진품珍品인 유시와 유묵을 오래 전하기 위해 가친에게 실기를 편수編修하려는 뜻을 세우고, 계해(1923)년에 상경上京하여 선조의 장덕문적狀德文蹟을 수집蒐集하고 참판參判인 대균大均 등 5인과 실기 간행을 상의하였다.
야수선생실기野叟先生實紀로 가친에게 보이고 대구보소에서 시어사侍御使 현대鉉大 등 10명에게 보이고 3월 27일에 당국當局에 출판신청出版申請을 하였고, 4월 26일에 지령指令 271호로써 허가許可가 있어 부사府使인 경희畊熙 등 6명의 종원宗員과 상주尙州 간행을 협의했었다. 가을에는 해주海州의 유학幼學인 정楨 등 2명과도 협의를 마치고 겨울에는 경성京城의 종약소장宗約所長 지사知事 응희應凞 등 종약소宗約所 임원任員 13명과 의논하였고, 1924년 태사사太師祠와 덕양재德陽齋와 표충재表忠齋의 각 종중宗中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다.
1926년 실기를 바로잡으며 율리사栗里祠의 사적事蹟을 넣고 목차도 수정하고 열성조列聖朝의 교지敎旨에는 야수野叟를 호號라 하고 화해사전華海師全에는 자字라 하여 ‘장절공신선생실기’로써 제목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6월 21일 다시 당국에 신청하고 인쇄자 강성호姜聖鎬가 간행토록 하였다.
이 실기實紀의 교열校閱은 후손 시어사侍御使 현대鉉大, 유학幼學 우균佑均이 감인監印도 겸했고, 현구鉉九와 후학後學인 정동철鄭東轍과 직원直員인 성대식成大植이다.
감인監印은 유학幼學인 조홍제趙弘濟와 성기환成耆煥이고 간행유사刊行有司는 후손 부사府使 좌희佐熙와 군수郡守인 우선佑善과 참봉參奉인 종균種均과 주사主事인 준희駿熙와 군수郡守인 석하錫廈와 참봉參奉인 한균漢均과 태균台均과 주사主事인 봉균鳳均과 유학幼學인 현직鉉直과 상학相鶴과 장균璋均과 주사主事인 현목鉉穆이다.
직원直員인 돈식敦植과 유학幼學인 석환錫煥과 현채鉉采와 학균鶴均과 창희昌熙와 정균正均과 태숭泰崇과 건수建洙와 종영鍾榮과 응인應仁과 옥鈺과 태용台容은 파임派任은 아니지만 실제로 간행刊行에 종사從事했다.
250질帙을 인쇄하여 각 서원書院과 단선소壇先所에 봉안奉安하고 경학원經學院과 향교鄕校와 유림제가儒林諸家에 분반分頒하고 여분餘分은 각처의 종중宗中에 반질頒帙했다고 상주간소尙州刊所의 편집자 현구가 기록하고 있다.
신현구의 서문이 있고 범례에서 의대에 남아있던 장절공의 시와 회헌 안향이 화답한 시는 화해사전華海師全에서 나왔으며 유묵遺墨은 음각陰刻인 구본舊本을 양각陽刻하여 싣고 선생先生이란 호칭呼稱은 편집인이 독단하지 않고 문정공文貞公 손순효孫舜孝가 유사遺事의 후시後詩에 “선생의 절의節義는 사람들이 감동感動함이 많네.”라고 하고, 열성列聖의 교지敎旨에도 역시 선현先賢이라고 호칭하여 선생이 됨은 명백하다고 적었다.
장절공壯節公의 호號인 야수野叟는 열성조列聖朝에서 받은 교지敎旨에 실려 있으나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자字가 ‘야수野叟’라 하여 분변分辨하기 어려워 실기實紀에 야수野叟라고 쓰지 않고 장절공신선생壯節公申先生으로 지칭指稱했다고 적었다.
권1에는 동수유의대桐藪遺衣帶 시 한수에 안회헌安晦軒 추화追和시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 준 글이 유묵으로 실렸다.
기적편에 실린 본전은 고려사의 내용이고 별전은 외후손 문순공 박세채가 1686년 지었는데 고려사, 여지승람, 태조세가, 유사, 행장, 홍유전, 신혜왕후유씨전 배현경전, 충열비, 사우중수기를 참고했다.
유적에도 성종세가, 현종세가, 예종세가, 예지, 동국통감 신라 경애왕조, 여지승람 평산인물과 대구고적, 명신행적을 참고했고 초상은 해동명신행적에서 발췌되었다. 행장은 지은이를 모른다는 좌의정 심통원의 1565년 발문과 18대손 홍문관부재학지제교 흠의 1605년 발문이 있고 예손 택경의 경술년의 발문이 있고 문열공 조헌의 행장후지가 있다.
강원도 관찰사 손순효가 1479년 쓴 유사 뒤에 시가 있다.
권2는 조두사실俎豆事實로 행사 등 제향에 따른 제문, 축문, 사우, 상량문, 중수문, 청액소, 사제문, 전교, 봉안문 등이다.
권3은 비명서술碑銘敍述편으로 대구 충렬비, 영각유허비, 신도비, 유허비, 유적비 등을 실었다.
권4는 열성수교, 병조수교, 예조 수교를 싣고 있다. 문적文蹟 가운데 당국이 출판 허가를 할 때에 제거除去한 곳이 있어 글자가 빠졌으니, 열람閱覽하는 사람은 양해 바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제는 이런 문화사업 간행에도 검열을 했다.
신숭겸申崇謙[?∼927(태조 10)] 고려 초기의 무장으로 개국공신이다. 초명은 능산能山이며 선대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 사성賜姓하여 평산平山 신씨의 시조다.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고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을 보면,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神靈한 자품資稟과 기민한 지략智略에다가 궁술弓術이 뛰어나 하늘이 내린 장수다운 인재人材였다.
자질資質로 글을 읽고 의義를 행하여 나이 겨우 13세에 문장文章을 완성完成하고 18세에 대장大將이 되었다.
신라新羅가 쇠잔해서 떼도둑이 일어났는데 견훤甄萱은 반역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고구려高句麗에 웅거하여, 태봉泰封이라 불렸으나 궁예는 의심이 많고 흉악凶虐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그 해독害毒을 견딜 수 없었다.
918년(신라 경명왕2) 6월 14일에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난 공公이 기장騎將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이튿날 태조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고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으며 대장군에 올랐다.
서기 919년(고려 태조 2년) 태조를 따라 사냥을 갔다가 삼탄三灘에 이르러 세 마리의 기러기가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데 태조의 명대로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명중 시켜 태조가 탄복하며 평산을 본관으로 삼고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하사하여 별업別業(농장農莊 또는 장원莊園과 같음)을 삼게 하고 궁위전弓位田이라 이름 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이를 지켜 오고 있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9월(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10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11월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일삼고 김부를 왕(경순왕)으로 세우고 철군하는 중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먼 길을 달려온 고려군은 지쳤고 큰 전과를 올리고 돌아가는 후백제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니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그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공公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공公이 대사代死(대신 죽음)할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를 애수에 숨기고. 어거御車를 타고,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태조로 알고 머리를 잘라 달아나니,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포위망을 벗어나 위기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공公의 시신을 찾아 얼굴頭面을 생시 모습 같이 만들고 조복朝服을 갖추어 자리에 앉히고 친히 제례祭禮를 행하였다.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공훈功勳을 올리자, 벽상 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과 시諡 장절壯節을 재가裁可하여 어필御筆로 대서大書하였으며, 치제致祭의 전교傳敎에는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을 더했다. 한나라 고조를 대신한 기신紀信의 죽음이나 당나라 태종을 대신한 울지경덕尉遲敬德의 죽음이상으로 천고千古에 뛰어난 열장부烈丈夫라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광해주光海州 비방동悲方洞에 예장禮葬하였다. 제토祭土 9천보九千步를 하사하고 수묘군守墓軍 30호戶를 두어 초화樵火(땔나무와 산불山火)를 금하였으며 묘소 곁에 원당願堂을 두어 명복을 빌게 하고 전사했던 곳에도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을 원윤元尹(태봉 및 고려의 벼슬이름)으로 삼으니 공公의 공훈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태조는 팔관회八關會 때마다 전사戰死한 공신들이 함께하지 못함을 측은히 여기고, 공公과 김락金樂의 상像을 만들어, 조복朝服을 입혀서 반열에 두니 기적이 일어나고 상례常例가 되었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조묘정太祖廟庭에 배향하였다.
1120년(예종 15 서기) 예종이 서도西都에 순행하여 팔관회에서도 가상假象의 기적이 일어나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대사 공신代死功臣인 대장군大將軍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임을 알고 고손高孫인 경勁을 불러 보문각寶文閣에 들게 하고 선물을 하사하며 율시律詩 일절一節과 단가短歌 이장二章을 지어서 오늘에 전한다.
1452년(조선 문종 2)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제향祭享하고, 1796년(정조 20)에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에 있는 태사사太師祠에 사액賜額하고, 곡성谷城의 덕양사德陽祠, 대구大邱의 표충사表忠祠, 평산平山의 동양사東陽祠, 춘천春川의 도포사道浦祠, 비인庇仁의 율리사栗里祠에서도 배향되었는데 1871년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철거당하였으나 덕양사德陽祠 표충사表忠祠 율리사栗里祠 경백사景白祠가 복원되어 향사하고 순절단殉節壇 용산단龍山壇 영각유허影閣遺墟 춘천방동영당春川芳洞影堂 장군단將軍壇에서 향사享祀한다.
탄생지誕生地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용산단龍山壇 경내境內, 순절지殉節地인 대구 동구 봉무동 파군재破軍峴 삼거리,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경내에 동상銅像이 최근에 건립됐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파군재破軍峴 일원의 신숭겸장군유적申崇謙將軍遺蹟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었다.
신숭겸 대장군이 대구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태조가 위기에 빠지게 되자 위왕대사爲王代死하여 태조는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1607년(선조 40) 유영순柳永詢 경상도 관찰사가 그 터에 표충사와 충렬비를 건립하고 1670년(현종顯宗 11)에 중건하고, 1672년(현종顯宗 13)에 표충사表忠祠의 사액이 있었고 1676년(숙종肅宗 2) 장절공壯節公과 함께 순절한 김락金樂을 배향配享하였고 1726년(영조英祖 2)에는 임란시壬亂時 순절한 신길원申吉元 현감을 추향追享했다. 1819년(순조純祖, 19) 28세손 의직義直이 표충단表忠壇을 쌓고 순절지비殉節地之碑를 세웠다.
표충사는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888년 재사齋舍가 중건되고 표충사表忠祠도 근래에 중건되었다. 동구東區 평광동坪廣洞 108(대비촌大悲村)에는 1832년(순조純祖, 32) 공公의 후손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신정위申正緯가 비문碑文을 찬撰한 유허비遺墟碑, 모영재慕影齋가 있다.
이 유적 주변에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는 독좌암, 표충사 뒤의 왕산王山, 공산싸움에서 유래된 안심安心․해안解顔․반야월半夜月 등 지명이 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1리에 있는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墓域은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의 묘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21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구 공산公山 전투에서 위왕대사 하자 태조는 두상頭像을 금으로 제작하여 매장하고, 도굴에 대비하여 봉분 셋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사당인 장절사壯節祠와 4동棟의 재실齋室과 기념관이 있고 묘장墓墻을 두른 묘에는 묘비가 있으며 1805년에 건립된 신도비 비문은 김조순金祖淳이 짓고, 신위申緯가 썼으며, 서매수徐邁修가 전篆하였다.
편집자 신현구申鉉求는 세무견습에 선발되어 각종 과목을 수업하여 1907년 7월 13일 9품인 탁지부 세무주사로 창원재무서에 근무하게 됐다. 8월 20일에는 국채보상의무금 1환을 내기도 했다. 1910년 경북 기장군 서기, 이듬해 도서기가 되고 1912년 9월 24일 고등관 8등으로 평안북도 운산군수에 서임 됐다. 1920년까지 운산구수를 지내면서 1917년 10월 20일 운산토지위원회 임시위원에 임명됐다.
1921년부터 의성군수를 역임하고 1923년 상주군수로 전임하여 1926년 10월 15일 달성군수로 전임됐다.
1939년 8월에서 이듬해까지 대일본소화연맹大日本昭和聯盟 경북지부장으로 조선군 참모부에 참여했고 도의회 의원 일본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하고 1945년 11월 3일 군정청이 이동사령 29호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장으로 파면한 사령이 있다. (厚)
2. 장절공신선생실기서壯節公申先生實紀序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는 자者는 의혹되지 아니하고 어진 자는 걱정하지 아니하며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아니 한다.”고 하셨으니, 나의 선조先祖이신 장절선생壯節先生같은 분은 참으로 가히 이 세 가지 덕德을 겸비兼備하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선생은 하늘이 내린 자질資質로써 글을 읽고 의義를 행하여 나이 겨우 13세에 문장文章을 완성完成하셨고 15세에는 유과儒科에 장원壯元을 하셨으며 18세에 대장大將이 되셨다.
신라의 정치가 쇠약衰弱하여짐을 만나 여러 도적盜賊들이 나누어 관할하였으니, 견훤甄萱이 동남東南을 점거하고 반란하자 선생은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곳이 있음을 알고 고려태조高麗太祖(왕건王建)를 받들어 추대하고 공경하면서 삼한三韓을 통합하셨다.
일찍이 태조를 따르며 사냥을 하다가 평주平州의 삼탄三灘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더니 때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그 위를 날고 있었다. 태조가 “누가 능히 저것을 쏠 수 있을까?”라고 하자, 선생이 “신臣이 시험 삼아 쏘아보겠습니다.”라고 하자, 태조가 활과 화살과 안장을 얹은 말을 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몇 번째 기러기를 쏠까요?”라고 하니, 태조가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보라.”고 하자, 선생이 명命에 따라 활을 쏘아 과연 명중하였다. 태조께서 기뻐하고 감탄하며 인하여 평주平州를 하사下賜하여 선생의 본향本鄕으로 삼았고, 아울러 기러기가 맴돌던 전답田畓 3백결結도 하사하여 세세世世로 그 조곡租穀을 받아쓰라 하고는 그 땅의 이름을 궁위弓位라고 하였다.
천성天成 12년인 정해丁亥(927) 9월에 견훤이 신라의 수도首都에 침입하자 태조가 친히 매우 강한 기병騎兵 5천명을 거느리고 대구大邱 공산公山(팔공산八公山)의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이하여 크게 싸웠으나 불리하여 견훤의 병사兵士가 왕王(왕건王建)을 매우 위급하게 포위包圍하였다.
선생은 당시에 대장이었는데 그 형세가 곤궁困窮함을 헤아리고 자신의 용모容貌가 태조와 같았음으로써 자신自身이 어거御車를 탈 것을 요청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고, 태조는 겨우 몸만 탈출하게 되었다. 태조는 몸소 제사祭祀의 술잔을 올리면서 매우 슬퍼하고,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에 예장禮葬하며,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과 장절壯節이라는 시호諡號를 추봉追封하고 어필御筆로 크게 써서 주었다. 후에 신성神聖의 묘정廟庭에 배식配食하여 고려高麗의 세대世代까지 이르렀다.
우리나라 문종조文宗朝에 이르러 특별히 선생을 천거하여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올려서 제향祭享하고, 정묘조正廟朝에는 태사사太師祠에 사액賜額 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제사祭祀를 모시며 오직 곡성谷城의 덕양사德陽祠와 대구大邱의 표충사表忠祠와 평산平山의 동양사東陽祠와 춘천春川의 도포사道浦祠와 비인庇仁의 율리사栗里祠에서도 모두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곳이었는데 지난 신미辛未(1871)년 사이에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인하여 철거를 당하였다. 그러나 후학들은 오히려 우모寓慕(사모思慕하는 마음을 붙임)하며 그 유허지遺墟地에 나아가 부지런히 쉬지 않고 공부하며 강송講誦하였다.
아! 전후로 조가朝家(조정朝廷)에서 높이 보답報答하였고 원근遠近의 사림士林들도 크게 우러러 보았으니 거룩하고 그야말로 성대盛大하구나. 가만히 생각하니 천명天命이 진왕眞王에게 돌아갈 것을 알고 혼주昏主(궁예弓裔)를 폐위시키고 명주明主(태조太祖)를 옹립擁立하셨음은 바로 지혜로운 일이요 매번 정벌征伐하는 전투에 따르면서 반드시 승리勝利하고 반드시 쟁취爭取하였음은 실제로 용감한 자者의 일이었으며 위태함에 임하여 피하지 아니하고 절의節義를 세우고 인仁을 이루었음은 어찌 인자仁者의 일이 아니랴! 그렇다면 선생은 즉 덕德을 이룩한 대현大賢이시며 정확하게 부자夫子(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의혹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자者이리라
문종대왕文宗大王께서 교지敎旨를 내려 말씀하셨기를 “장절공壯節公이 임금을 위하여 대신 죽은 크나큰 충절忠節은 비록 고려조高麗朝 5백년의 공덕功德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토東土에 천백대千百代의 강상綱常을 여셨네.”라고 하셨고, 회헌晦軒 안선생安先生(휘諱 향珦)도 시詩를 지음이 있으셨기를 “설공薛公(휘諱 총聰)의 발자취가 없어지자 신공申公(휘諱 숭겸崇謙)이 일어나셨네.”라고 하셨으며, 현석玄石 박선생朴先生(휘諱 세채世采)도 찬양하며 말씀하셨기를 “소중화(小中華 : 동방東方)의 근저根柢와 긍계肯綮는 공公(장절공壯節公)보다 가히 우선한다고 칭송할 자는 있지 않다.”라고 하셨고, 칠휴七休 손선생孫先生(휘諱 순효舜孝)도 시詩를 지어 말씀하셨기를 “선생의 절의는 사람을 감동시킴이 많네.”라고 하셨으니, 선생先生(장절공壯節公)이 선생이 되신 것은 여기에 구비具備되었다.
선생의 도학道學이나 문장文章이 비록 그야말로 수전壽傳(오래 전傳해짐)을 얻지 못하였으나 저술著述하신 것이 반드시 풍부하였을 터인데도 천년의 후에 전傳하는 것이 많지 않고 다만 유시遺詩 2수二首와 유묵遺墨 1간一簡(간찰簡札 1점一點)이 있을 뿐이며, 언지言志(시詩)는 간사한 도를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부지扶持하여 화려함과 착실함이 겸비하였고, 필법筆法(유묵遺墨)은 전아典雅하고 해정楷正하여 덕성德性에서 나왔으니 읽으면서 이해하면 실제로 오랜 세상의 드문 보배이었다. 한 점의 고깃덩어리나 한 개의 깃털로써도 가히 솥 안에 전체의 맛과 다섯 가지의 색채인 봉황의 깃털임을 알 수 있는데 무엇 하려고 반드시 많아야만 하랴!
불초不肖가 그것이 더욱 오래되면 사라져 없어질까 두려워서 감히 고루孤陋함도 잊고 실기實紀를 편찬하여 5년을 거쳐서야 비로소 한 권卷의 책冊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가군家君(부친父親)에게 여쭈었고 경향京鄕의 제종諸宗과 그리고 사림士林들과 도모圖謀하여 인쇄에 부쳐서 오랫동안 전傳하고자 함이었다.
아! 선생의 정대正大하신 절의節義는 이미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남을 다투겠고 천지天地와 함께 존재存在한다면 이 실기의 제작과는 진실로 관련됨이 없겠으나 가령 저 후손들이 시들지 않고 욕辱되게 함이 없겠다는 뜻과 후현後賢들이 덕德을 고찰考察하고 의義를 본받는 처지處地에는 또한 혹 하나의 자료資料가 된다고 하리라.
병인丙寅(1926)년 중하仲夏에 후손後孫 현구鉉求 삼가 서문을 지음
3. 목록目錄
卷之一권1
詩시
桐藪遺衣帶 附安晦軒追和동수 유의대 부안회헌 추화
書서
與或人여 혹인 遺墨유묵
紀蹟기적
本傳본전 / 別傳별전 / 遺蹟유적 / 草像초상 / 行狀행장 / 遺事유사
卷之二권2
俎豆事實조두사실
太師祠事實태사사 사실 以下太師祠文蹟이하 태사사 문적
祠宇上樑文사우 상량문 / 春秋享祝文춘추향 축문 / 祠宇重修祭文사우 중수제문 / 與平山士林單子여 평산 사림 단자 / 謁山城祠志感八韻알 산성사 지감 8운 / 致祭時傳敎 치제시 전교 / 御製三太師祠致祭文어제 3태사 치제문 / 賜額祭文사액 제문
德陽書院事實덕양서원 사실 以下德陽書院文蹟이하 덕양서원 문적 / 請額疏청액소 / 賜額祭文사액 제문 / 講堂重建上樑文강당중건 상량문 / 祠宇重修記사우 중수기 / 書院重修記서원 중수기 / 春秋享祝文춘추향 축문
表忠祠事實표충사 사실 以下表忠祠文蹟이하 표충사 문적 / 賜額祭文사액 제문 / 左承旨諱吉元奉安祭文좌승지 휘 길원 봉안제문
殉節壇齋舍上樑文순절단 재사 상량문 以下殉節壇文蹟이하 순절단 문적 / 齋舍重修記재사 중수기 / 壇享祝文단향 축문
東陽書院事實동양서원 사실 以下東陽書院文蹟이하 동양서원 문적 / 書院重修上樑文서원 중수상량문 / 書院重修記서원 중수기 / 請額疏청액소 / 賜額祭文사액 제문 / 書院重修記서원 중수기 / 春秋享祝文춘추향 축문
栗里祠事實율리사 사실 以下栗里祠文蹟이하 율리사 문적 / 奉安文봉안문 / 春秋享祝文춘추향 축문 / 奉安告辭봉안고사 / 書院重建上樑文서원중건 상량문
卷之三권3
碑銘敍述비명서술
大邱公山忠烈碑銘대구공산 충렬비명 / 忠烈碑閣重修記충렬비각 중수기 / 大邱大悲洞影閣遺虛碑文대구대비동 영각유허 비문 / 影閣遺虛碑閣重修記영각유허비각 중수기 / 春川方洞神道碑銘춘천방동 신도비명 / 附墓享祝文부 묘향 축문 / 栗里世德祠遺虛碑銘율리 세덕사유허 비명 / 射鴈遺蹟碑銘사안 유적비명
卷之四권4
列聖受敎열성 수교 / 兵曹受敎병조 수교 / 禮曹受敎예조 수교
4. 고려高麗 벽상壁上 호기위虎騎衛 태사太師 개국공開國公 삼중대광三重大匡 의경익대毅景翊戴 광위이보匡衛怡輔 지절저정砥節底定 공신功臣 광익효절匡翊效節 헌양獻襄 시諡 장절壯節 신공申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춘천부春川府의 북쪽에 소양강昭陽江이 있고 소양강의 북쪽 6~7리 쯤에 비방동悲方洞이 있으니 곧 고려高麗의 대사 공신代死功臣(임금을 대신하여 죽은 공신)인 태사太師(고려 때 삼사三師의 하나이며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 신공申公의 체백體魄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높다랗게 솟은 봉분 셋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태사가 전사戰死한 때에 그의 머리를 잃은지라 고려태조高麗太祖가 태사의 얼굴을 금으로 불리어 만들고 시체에 합쳐서 장사 지내면서 혹시 몰래 이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봉분을 셋으로 하여 잘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라고도 하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없으므로 매양 제향 할 적에는 한가운데 봉분에 나아가 성배하고 행사行事하니 이는 그저 소중함을 헤아릴 뿐이요 혹은 왼쪽인지 바른쪽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살피건 데, 공公의 휘諱(돌아간 조상이나 존귀한 이의 이름)는 숭겸崇謙이요 처음 휘는 능산能山이라 하였으며, 그 선대는 백제百濟 욕내군欲乃郡에서 비롯하였는데 사서史書에는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 하였다. 욕내군은 곧 지금 곡성현谷城縣이요 광해주는 바로 춘천부春川府이니 아마도 곡성에서 춘천으로 옮겼던 것이리라.
신라新羅의 정치가 쇠잔해질 무렵,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도읍하여 태봉泰封이라 불리었는데, 공公은 맨 처음 궁예에게 종사하여 기장騎將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궁예가 흉포 무도凶暴無道하여 사람 죽이기를 날로 일삼게 되자 그의 처 강씨康氏가 이를 말리다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 아들에까지 미치니 백성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그 해독을 참을 수 없었더니, 고려태조 신성왕神聖王이 송악松嶽에서 일어나자 너그럽고 어진 도량으로 난세亂世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에 뜻을 두고서 자주 큰 공을 세워 시중侍中,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됨에 따라 그의 위엄과 덕망德望이 날로 높아지고 인심도 흡연洽然히 기울게 되었다.
이에 공公이 천명天命의 소재所在를 살피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그를 임금으로 추대推戴할 것을 은밀히 도모하니 이들 삼三인 또한 모두 기장들이었다. 이들이 야반에 태조의 집에 찾아 가서 고하기를 “삼한三韓이 분열됨으로부터 지금 임금이 크게 분발하고 활동하여 초야草野의 도둑을 쓸어 없애고 한반도韓半島를 삼분하여 그 태반을 가졌으되 마침내 유종의 미美를 거두지 못하고 음란하고 포학한 일을 함부로 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하들을 업신여겨 멸망시키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그를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니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같은 포악한 자도 어찌 이 보다 더 했겠습니까. 어리석은 임금을 몰아내고 어진 임금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대 공公은 은나라의 탕왕湯王이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처럼 의義로운 일을 행하소서” 하였다.
태조가 얼굴을 붉히면서 굳이 거절하자 이들이 또 말하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인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어 백성들에게 배반당한 필부匹夫의 손에서 죽겠습니까?” 하였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가 장막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오면서 태조에게 말하기를 “의로움을 일으키고 사나움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인데 지금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건대 여자의 마음이라도 오히려 분발되거든, 항차 대장부이리요” 하면서 금으로 장식한 갑옷을 손수 들어 태조에게 입히었다.
이에 공公이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태조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새벽녘에 노적가리積穀 위에 앉힌 다음, 모두 늘어서서 일제히 절하며 만세를 외치고 기병騎兵들을 시켜 달리면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王公이 거의擧義하였다” 하니 백성들의 따르는 자가 곧 수만명數萬名이나 되었다. 궁예는 놀래어 바위골짜기 사이로 도망쳤다가 평강 고을 백성斧壤民에게 살해 당 한 바 되니 이는 실로 후량後梁 정명 4년(서기西紀 918) 여름 6월의 일이었다.
태조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뒤이어 추대推戴한 공을 기록한 때에 공公과 홍유 배현경 복지겸으로 모두 일등공신一等功臣을 삼고 조서詔書를 내리어 포상하면서 금은기金銀器를 하사하고 금수기피욕錦繡綺被褥을 폐물幣物로 보냈으며 이로부터는 매양 정벌征伐할 적마다 오로지 공公을 의지하였다.
공公은 몸이 장대長大하고 기민한 지략智略이 있었으며 궁술弓術이 뛰어났었다. 일찍이 태조를 따라 평산平山에 갔을 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 지나가자 태조가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하였다.
공公이 곧 여쭈어 말하기를 “청컨대 신臣이 쏘리다. 몇째 기러기를 쏘아 맞히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셋째의 왼쪽 날개를 맞히라” 하거늘 시위가 당기어지자 기러기가 떨어지는데 과연 어김이 없었다.
태조가 탄복하여 말지 아니하고 드디어 세 마리의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둘레로 하여 하사하고 이어 평산平山으로써 공公의 관향貫鄕(본本 또는 본관과 같음)을 삼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지켜오고 있으며 그 땅을 이름하여 궁위전弓位田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10년(서기西紀 927) 가을 9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고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신라는 동맹국이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군사 1만 명으로 달려가게 하였으나 미처 당도하지 못했는데 견훤이 갑자기 경주慶州에 침입하여 드디어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金傅를 새 임금으로 세우는 한편, 병졸들을 풀어 놓아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 지내게 한 다음, 친히 정예 기병精騎 5천을 거느리고 공公과 김락金樂으로 대장을 삼아 공산公山 동수桐藪(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된 태조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다.
본시 그 얼굴이 태조와 흡사했던 공公은 벌써 형세가 궁박하여 벗어날 수 없음을 살피고 몸소 태조를 대신하여 죽기를 자청하는 동시에 태조를 애수에 숨게 하고 드디어 임금의 수레에 타고서 김락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죽으니 견훤의 군사가 공公을 태조로 여기고 공의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돌아가자 포위가 마침내 풀리었다.
태조가 겨우 죽음을 모면한 다음, 다시 싸우던 곳으로 돌아와서 공公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이를 분간할 수가 없었더니, 공公의 왼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이 일곱 사마귀黑子가 있었으므로 이로 증험하여 찾아내었으며 이에 목공을 시켜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어 자리에 앉게 하고 심히 통곡하면서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고 제토祭土 9천보九千步를 하사하고 수묘군守墓軍 30호戶를 두었으며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으로 함께 원윤元尹(벼슬이름)을 삼았었다.
그리고 또 동수桐藪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서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공公의 공훈功勳을 아뢰자, 벽상 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과 시諡 장절壯節을 재가裁可하여 중서문하에 어필御筆로 대서大書하였으며, 치제致祭의 전교傳敎에는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을 더하고 뒷날 태조의 묘정廟庭에 함께 모시어 고려의 종말까지 이어왔다.
본조本朝(조선의 조정을 이름)의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 때에 미쳐서는 공公이 임금을 위하여 대신 돌아간 절의節義가 우리 동방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을 일깨웠으므로 세상이 다르더라도 민몰泯沒(문드러지고 몰락하고)할 수 없다 하여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올려 함께 향사할 것을 명하고 또 유사有司에게 신칙申飭하여 공公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게 하고 비록 지서支庶라도 군적軍籍에 들거나 잡역雜役에 징용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
이로부터 역대의 임금이 잇따라 준행遵行하더니 또한 우리 선왕先王 정종장효대왕正宗莊孝大王 20년 병진丙辰(1796)에 이르러서는,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에 공公과 배현경 복지겸 유태사 검필庾太師黔弼의 철상鐵像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중히 받들며 제사 지낸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크게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을 도운 자는 장절공壯節公과 여러 태사들이다” 하여 친히 제문을 짓고 공公의 후손으로서 앞서 대장大將을 지낸 바 있었던 대현大顯에게 명하여 말술斗酒과 생체(돼지의 날고기)로써 사당 아래에 나아가 북을 치고 군악을 연주하여 유식侑食하게 하였으며 예조禮曹에서는 액호額號를 의논하되 기공紀功이라 하였더니 임금이 4태사사四太師祠로 고치게 하였다.
아! 공公의 충忠과 열烈은 천고千古를 두루 헤아려도 오직 기신紀信이 이 같을 뿐이요 그 밖의 예例가 있음을 나로서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공公은 기신보다도 두 가지 나은 것이 있으니, 기신은 한고조漢高祖의 평범한 장수로되 공公은 한 나라의 터전을 개창한 원훈元勳인지라 이는 살아서 나은 것이요, 남궁南宮의 잔치에 한고조가 다만 삼걸三傑(소하, 장량, 한신을 가리킴)의 힘만 칭찬하고 기신은 언급하지 않았으되 공公은 고려태조가 측은히 여겨 슬퍼함이 저와 같았고 천년 후에도 우리 두 임금의 그윽한 감회를 불러일으키어 융숭하게 보답함이 이와 같은지라 이는 죽어서도 나은 것이다.
하물며 그 훌륭한 명성과 의로운 소문이 밝은 세상 여러 선비들의 우러러 받드는바 됨으로써 무릇 저 고향 마을로부터 공적을 드러낸 고장과 충용忠勇을 떨친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두俎豆를 받들어 제향하고 장수藏修(쉬지 않고 학문에 힘씀)하며 공덕을 칭송稱頌하되 세대가 더욱 오랠수록 은택이 더욱 새로우니 이는 또 잠깐의 강개慷慨함만으로써 명성을 이루게 되는 사람으로서는 바랄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아! 거룩하고 뚜렷하지 아니한가.
공公의 적덕여경積德餘慶이 후손들에게 흘러내리어 평산 신씨가 해동海東에 두루 가득하여 이름나고 두드러진 이들이 수두룩하게 벌이어 있으며 보첩譜牒 백여 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대개 언급하지 않겠다.
또 살피건대 공公이 돌아간 뒤에 정령精靈이 아주 기이하여 해동명신행적海東名臣行蹟에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팔관회八關會를 베풀 때에 공公과 김락의 전사한 일을 측은히 생각한 나머지, 짚을 묶어 가상假像을 만들어서 반열班列 위에 앉게 하고 주식酒食을 내리자 술이 문득 저절로 말라지고 가상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하였으며, 뒷날 예종睿宗(고려조의 16대왕)이 평양平壤에 순행하여 팔관회를 베풀 때에는 두 가상假像이 잠簪(옛날 벼슬아치가 조관에 꽂는 비녀)과 홀笏(임금을 뵐 때 손에 쥐는 물건)을 갖추고 붉은 옷을 입고서 말을 타고 뛰어 달리는지라 임금이 기이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그 연유를 아뢰자 임금이 몹시 감개하면서 김락의 손孫과 공公의 현손玄孫 경勁에게 벼슬을 주었다 하였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공公이 돌아간 뒤에 곡성谷城의 성황신城隍神이 되었다 하였고 그의 자손들이 또한 말하기를 묘소를 수호하는 자가 혹시 근신謹愼하지 않으면 문득 재앙을 빚어낸다고도 하여 세상 사람들이 혹은 의아함이 없지 않으나 나는 적이 생각하건대 그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옛날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부열傅說(은나라 정승임)이 죽어서 열성列星이 되었다 하였고 유종원柳宗元이 유주柳州에 귀양 가서 죽으니 그 신령이 고을州에 내리는지라 나지羅池의 사당에 이를 향사하였는데 이의李儀가 술에 취하여 만홀慢忽히 하다가 폭사暴死하자 한유韓愈가 비문에다 이것을 적었으며 그 밖의 오자서伍子胥나 관우關羽 같은 경우라도 뚜렷한 영이靈異 함이 전기傳記 가운데 나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대저 사람이 태어나되 대단한 용맹勇猛과 뛰어난 기백氣魄이 있는 자로서 비명非命에 죽게 되면 그 애틋하고 끓어오르 듯한 정상精爽이 육체를 따라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이따금 황홀히 변화하여 산사람生人을 몹시 놀라게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사리에 없을 수는 없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공公과 같은 이는 스스로 천지를 뒤덮고 우주宇宙를 휩쓸어도 민멸泯滅되지 않을 것이니 또 어찌 구구하게 이러한 것을 논하겠는가.
묘소에 본시 신도비가 없었더니 올해 갑자甲子에 대현大顯이 비로소 그의 종인宗人들과 더불어 도모한 다음 외예外裔인 나 조순祖淳에게 글을 청하였다. 아! 공公이 돌아간 지 이제 천년千年이 되었는데, 이것도 혹은 때를 기다림이 있어 그러함인가. 사양하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또한 감히 굳이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신씨申氏 세계世系의 면면綿綿함이여 맨 먼저 곡성谷城에서 비롯 하였도다
사서史書에는 광해주光海州로 적혔으니 아마도 뒷날 옮겼으리라
이제는 평산平山으로 관향貫鄕하여 나라에서 내린 땅도 가졌도다
거룩하신 우리 태사太師여 하늘이 고려高麗 위해 내셨네
궁시弓矢의 위엄이요 간성干城의 용자勇姿로다
궁예弓裔가 음학淫虐하여 절로 꺾이자 철원鐵原에서 처음 치시었네
태사가 기미機微에 밝으시어 바람 일 듯 번개 치듯 하였도다
고려태조를 추대하여 포학을 없애고 바로 잡았도다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과 서로 손잡고
배현경裵玄慶과도 덕德을 함께 하시었네
계림鷄林을 조종하고 압록鴨綠을 무찌르며
나라의 터전을 돕고 천명天命을 비롯 하였네
신라新羅는 혁명으로 쓸어져 가고 견훤甄萱은 참람하게 반역 하였네
나라의 신기神器는 옮겨지고 홀笏과 면류관은 바뀌었도다
임금이 태사에게 말씀하시되 맹방盟邦이 화액禍厄을 당했구나!
내가 곧 싸움에 나가리니 그대는 출사出師하여 길吉할지어다
날쌘 기병騎兵 오천五千으로 팔공산八空山에서 무찔렀도다
천시天時가 이롭지 못하여 힘이 빠지고 지략智略이 다했었네
봉축부逢丑父가 제경공齊頃公을 닮았듯이
기신紀信이 초패왕楚覇王 속이듯 하였도다
머리 잃을 걸 각오한 용맹이요 몸을 던져 버리는 충성이로다
임금이 태사를 측은히 여김이여 죽음이 더욱 으뜸 공을 이뤘었네
선진先軫의 얼굴인 듯 산 것만 같고 범려의 주상鑄像인양 정교하도다
금으로 머리 새겨 시신尸身에 합쳐 후한 예禮를 갖추어 장사 지냈네
높다랗게 솟은 세 봉분이어 아! 비방동悲方洞 언덕이로다
우리 태사 신하이실 제 씩씩한 무용武勇 뛰어났었고
우리 태사 돌아갔건만 그 신령神靈 늠름하여라
오자서伍子胥가 조수潮水를 몰아치고
관운장關雲長이 순행巡幸 길을 도왔듯이
황홀하고 눈부신 영靈이시여 현저히 민생民生을 도우시도다
넘쳐흐르는 태사의 여경餘慶이여 대대로 후손들이 창성昌盛하였네
수없이 떨치고 떨쳐 팔도八道에 흩어져 가득찼도다
백성도 되고 선비도 되고 더러는 한 나라의 스승도 되었네
기린麒麟 같아라 봉황鳳凰 같아라 태평성대太平聖代의 빛이로세
빛을 펼치고 덕업德業을 적어 큰 글자로 깊이 새겼네
멀고 아득한 이 외손外孫은 사책史策을 간직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거룩하신 명성名聲을 돌이켜 보오매 천년千年 옛일이 이제런 듯 하도다
태사의 공적功績이 없어지지 않을진대 나의 영광도 다함이 없으리라.
숭정崇禎 기원후 삼을축三乙丑(1805) 10월에 세우다.
외예外裔 원임原任 대제학大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영부사겸領敦寧府事兼 지경연실록사 규장각검교 제학知經筵實錄事奎章閣檢校提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안동安東 김조순金祖淳은 삼가 짓고,
후손後孫 승의랑承議郞 수홍문관 부교리守弘文館副校理 지제교 겸知製敎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실록기주관實錄記注官 동학교수東學敎授 문신 겸文臣兼 선전관宣傳官 위緯는 삼가 쓰고,
외예外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 겸議政府左議政兼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달성達城 서매수徐邁修는 삼가 전篆하다.
5. 발跋
시대時代는 옛날과 지금이 있고 일은 자상仔詳하고 간략簡略함이 있나니, 지금의 시대에 태어나 옛날의 일을 논論함은 비록 그것이 간략하여 그 자상함은 가히 얻어서 알 수가 없음을 아나니, 이것은 뜻이 있는 자者들이 동일同一하게 개탄慨歎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 선조이신 장절선생壯節先生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은 일성日星과 같이 밝아서 비록 부인婦人이나 유자孺子(어린 아이)와 초부樵夫나 목동牧童도 모두 그분의 충절忠節을 알지만, 그 전말顚末(자초지종自初至終)에 이르러서는 비록 관冠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은 자者일 지라도 흐리멍덩하게 아지 못하니 어찌 유감遺憾된 바가 아니랴!
다행히 지금 우리 일족一族에 성당誠堂인 어진 원님이 와서 상산商山(상주尙州)의 군수郡守가 되어 정치政治에 통달하고 사람과도 화목和睦하였다. 특별히 선조先祖의 일에 뜻이 있어서 매번 공무公務를 보던 여가에 국승國乘을 참고하고 야사野史에서도 수색搜索하여 당시當時의 사적事蹟과 후세後世의 장덕문狀德文을 요약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인쇄印刷에 올려 세상에 공포公布하여 천년千年 전의 일로 하여금 환하게 목전目前에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유자산庾子山이 저술著述한 부賦와 두원개杜元凱의 자서自序는 진실로 그야말로 마땅하구나.
불초不肖는 문인文人을 으뜸으로 여기며 통치統治하던 아래에서 있던 인물人物로써 역시 선생先生(장절공壯節公)의 후손後孫의 대열隊列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 고을에서 있었음을 기뻐하면서 같은 마음으로 일을 보았기 때문에 외람猥濫됨과 망령妄靈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삼가 발문跋文을 썼노라.
병인丙寅(1926)년 중하仲夏(5월)에 후손 우균佑均은 삼가 씀
첫댓글 아이고 신후식 선생님
감사합니다
적극 환영합니다
신한국 회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간추려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