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콜드 케이스(Cold Case)’ 뜨는 까닭
지존파 사건 해결…고병천 박사 중심으로 ‘미제사건포럼’ 꾸리다!
취재/이상호 기자 ㅣ 기사입력 2015/03/16 [13:40]
첫 번째 사건 ‘나주 여고생 살인’ 맡아…공소시효 전 해결 의지 보여
고 박사 “현장 경험을 통해 연구”…학문 통해 ‘프로파일링’ 작업 이어가
[사건의내막=이상호 기자]미국의 유명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콜드 케이스(Cold Case)’는 장기 미해결 사건을 의미한다. 한국과 달리 미국, 일본 등에서는 흉악 범죄의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소를 유지해 ‘강력범은 반드시 잡겠다’는 수사기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국내에서도 미제사건 해결과 공소시효 폐지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몇 년 동안 미제 사건들이 급증하면서 각종 범죄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대검찰청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미제사건은 2010년 20만6647건에서 2012년 25만4457건으로 증가세를 기록 중이다. 최근 지존파 사건 등을 수사했던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중심이 돼 ‘미제사건포럼’이 꾸려졌다. 여기에는 전·현직 베테랑 형사 5명과 범죄학자, 변호사가 포함돼 미제사건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이 팀에겐 과거의 미제사건도 현재진행형이다. <사건의 내막>이 취재했다.
지난 2001년 2월4일 새벽. 전남 나주시 남평읍 드들강 유역에서 여고생이던 박모(당시 17세)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양은 발견 당시 성폭행당한 채 벌거벗겨져 강에 빠져 숨져 있었다. 목이 졸린 흔적은 있었지만 사인은 익사였다.
경찰은 곧바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박 양이 사건발생 전날 밤 11시30분께 두 명의 남자와 있는 것을 본 A(당시 17세)군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이른바 ‘나주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당시 광주에 살던 박 양이 어떤 경로로 나주에 가게 됐는지부터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은 “한달이상 수사를 진행했지만 도무지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며 “게다가 당시는 기술부족으로 익사한 시신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고 기억했다. 박 양이 연고가 없는 나주에서 발견된 점도 수사가 미궁에 빠진 이유라고 설명했다.
미제사건으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나주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은 그러나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2012년 9월 전환점을 맞게 된다.
대검찰청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돼 있던 A양의 중요부위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용의자는 현재 목포교도소에서 강도살인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김씨로 확인됐다. 게다가 김씨는 사건 당시 박양의 집 인근에서 거주 중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사람들은 진범이 잡혔고 미제사건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박양 시신에서 김씨의 DNA가 발견되는 등 명확한 증거가 있었지만 범행을 부인하는 용의자 김씨와 목격자의 진술만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박양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A군이 (김씨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진술한 점과 김씨가 부인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3년 전에 그것도 딱 한 번 어두운 밤에 만났던 목격자의 진술이 불기소 처분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법조 관계자는 “정황증거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성관련 범죄에서 이 정도의 증거(중요부위에서 발견된 DNA)를 증거불충분으로 판단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고 말했다.
수사에 참여한 경찰은 “김씨가 무기수이기 때문에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경찰이 검찰의 처분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 사건은 다시 미제사건으로 분류됐고, 2016년 2월3일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미제사건포럼 결성…해결 나선다
박 양 사건과 관련해 전·현직 베테랑 형사 5명과 범죄학자, 변호사가 팀을 만들었다.
지존파 사건 등을 수사했던 고병천(66)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중심이 돼 지난 1월 꾸린 ‘미제사건포럼’은 박 양 사건을 첫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 3월11일 만난 고씨는 “30년 형사 생활을 하면서 한 건의 미제사건도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범죄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예전부터 이런 일을 해봐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씨는 지난달 광운대에서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 패턴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후로 수사본부까지 꾸려졌지만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해 장기미제로 분류된 것은 ‘대구 황산테러 사건’(1999) 등 모두 20건에 이른다.
미제사건포럼이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공소시효가 채 1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살인죄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늘었지만, 2001년에 발생한 이 사건에는 기존 15년 시효가 적용된다.
고씨는 “유전자가 일치하면 거의 범인이 맞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씨를 조사한 게 사건이 나고 10년도 더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목격자가 부정적 진술을 했다고 해도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씨는 특히 유력한 용의자 김씨가 2명을 살해해 복역 중인 사실을 눈여겨보고 있다. 범죄 패턴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살인도 알코올 중독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범죄를 저지르면 불안하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범죄를 또 저지른다. 일단 교도소에 들어가면 수사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미제사건포럼은 박 양 가족을 접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4년이 지났지만 가족 얘기를 듣다 보면 당시에는 놓친 중요한 단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씨는 “용의자와 같은 방에 수감된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면 큰 도움이 된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안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역이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사건이라도 ‘보이지 않는 증거’는 남아 있어요. 현장은 물론 피해자 주변이 말해주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미제사건 해결팀엔 과거의 미제사건도 현재진행형이다.
고병천 박사는 누구?
지난 1976년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고씨는 지존파 사건 외에도 ‘온보현 택시 납치 살인 사건’, ‘앙드레김 권총 협박 사건’ 등 숱한 강력 사건을 해결하며 베테랑 형사로 이름을 날리고 2009년 33년간 정든 경찰을 떠났다. 이후 2012년부터는 광운대 범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아왔다. 그는 앞서 경찰 재직 중이던 지난 2002년 한성대 마약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2007년에는 수필집도 출간하는 등 남다른 학구열을 보이기도 했다. 고씨는 “퇴임을 하니 이 사회를 위해 할 일이 없어지더라”며 “현장 경험을 살려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고 아직 정립 중인 범죄학에도 이바지하고 싶었다”고 박사과정을 밟게 된 계기를 전했다. 그는 지난달 8일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패턴에 관한 연구-지존파 사건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써 최근 심사를 통과했다. 논문은 지존파 두목 김규환을 비롯해 조직원 6명을 리더형·창의형·계획형·추종형·모방형·우발형 등 6가지 행동 패턴으로 분석했다. 논문은 김규환이 조직을 꾸리는 한편 전남 영광에 살인을 위한 아지트를 직접 구상하기도 했지만 행인을 상대로 계획에 없던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리더형·창의형·계획형·우발형으로 분류했다.
고씨는 “이 같은 행동패턴을 파악하면 앞으로 범죄 수사를 위한 ‘프로파일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논문은 또한 김규환의 지존파 결성을 여러 사회학 이론을 통해 조명했다. 고씨는 “힘든 노동생활과 천대받는 삶에서 깊은 회의와 좌절을 실감하며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감정이 ‘있는 자’에 대한 분노로 발전했고, 실패의 반복에서 탈피하려는 잘못된 일탈의 표현으로 살인을 택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기사입력: 2015/03/16 [13:40] 최종편집: ⓒ sagunin_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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