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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서방 유학생을 동행(同行) 삼아
김정숙 / 국사학
한 번에 가장 오래 외국에 정주해 있었던 것은 물론 유학 시절이다. 유학은 보통 학위를 하든 또는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든 삶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향해서 출발한다. 사람마다 유학의 이유는 굉장히 다르지만.
나는 왜 유학을 갔을까? 나는 학부는 국사교육과 출신이다. 유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돌이켜 보니, 참 많이도 내가 미처 꿈꾸지 못하던 세계가 ’미리‘ 열려 있곤 했다. 시나이산이나 홍해를 가고 싶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그곳에 갈 기회가 생겼다. 미칼렌젤로의 조각을 본다든가 고호의 마지막 아틀리에를 들린다든가 등등은 언제나 내가 원하기 전에 기회가 펼쳐졌다.
‘어설픈 준비’지만, 환골탈태를 꿈꾸고
박사학위를 고려하고 있을 때,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금의 틀에서 떠나야 한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대학, 대학원을 동계진학 한 나는 ‘다른 학교’로 가서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해야 한다고들 권했다. 그런데 한국같이 동창의식이 끈끈한 곳에서는 타교 진학은 ‘배반‘ 했다는 등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외국 유학은 어디를 다녀와도 모교의 식구로 인정해 주었다.
더욱이 지도교수는 고대사에 인류학을 접목시키라고 하셨다. 그분은 한국고대사 연구에 통계학과 사회학을 접목시키고 계셨다. 그분은 국사학에서 다른 이들보다는 영어를 잘한다는 평을 얻은 분이었다. 석사지도 교수는 외국으로 나갈 명분을 만들어주고 계셨다. 게다가 성신의 학원장 할머니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이옥 교수를 통해서 프랑스 유학을 돕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평생 꿈도 꾸지 않았던 외국에를 나가게 되었다. 물론, 일본 생활은 염두에 둔 적이 있다. 나는 재일교포에게 한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국사 선생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본에 가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학을 생각했던 건 아니다.
떠나게 됐다. 지금 같으면 그런 무모한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유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하는데 엄청 힘들었다. 대학원 해야지, 고등학교 선생이지,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에 프랑스어 하러 다녀야지, 그리고 일요일은 한문 경전을 읽으러 다녀야지 정말 바빴다. 또 서울은 좀 넓은가? 길에다 뿌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대학원 논문을 쓸 때는 고등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논문이 통과되자, 학위수여식을 안하고 미리 떠났다. 하루라도 빨리 적응해야 했다.
너무 여러 곳에 떠난다고 이야기했던가? 실제로는 바빠서 떠난다고 알리러 다닐 틈도 없었지만...... 여러 곳에서 나름대로 준비를 도와주었다. 나는 학부 때까지는 열심인 개신교 신자였다. 일요일에는 가정교사가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기대하는 데도 모른 척하고 교회에 가서 활동했다. 동시에 신앙적 의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느님은 왜 사랑인가”라는 답을 찾지 못해서 대학원 때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대학 때 같이 반사를 하던 선배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출발 이틀 전이었다. 그는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면서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합격을 했던가 그랬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었나 보다. 그는 파리에 내리면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가를 가르쳐 줬다. 나는 아주 잘 배웠고,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김정숙씨,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이냐 덜 들이냐의 문제이지, 목표만 세우면 항상 이룰 수 있어요. 시간과 노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선배의 마음이 따뜻하게 떠오른다.
내가 근무하던 고등학교 동료 교사들도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짜장면을 시켜 먹을 줄 아느냐? 침대가에서 자다 떨어져서 한밤중에 혼자 깨어있지 말고 벽에 붙어서 자라는 등 농섞은 충고도 많았다. 미술 선생님은 프랑스는 우리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다면서 프랑스식 사고를 가졌는가 테스트를 한다고 문제를 내기도 했다. 가령,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데, 그 분수에는 조명이 있다. 파리는 조명이 아름다운 곳이니까...... 한사람은 그 조명에 달걀을 구워 먹었고, 다른 사람은 분수에 소변을 봤다면 누구의 죄가 더 큰가라고 하면서 파리식으로 사고해야 된다고 했다. 답은 달걀 구워먹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공공물을 보다 더 오래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환송회도 했다.
너무 요란스럽게 광고를 했었는지, 우리 초등학교 출신들로서는 드물게 유학을 떠나서인지, 초등학교 남자 동창도 전화해서 덜렁대며 이야기했다. “공부 열심히 해. 비행기는 뒷문이 없기 때문에 학위 못했다고 뒷문으로 내리려고 해도 내릴 수도 없어.” 이제 보니, 참 많이 사랑받았다.
갈 곳은 한국 대사관뿐
나는 연고가 없는 파리에 내리게 되었다. 내 형편을 아는 동료, 영동여고 프랑스어 선생이 유학 가 있는 자기 친구에게 연락해서 공항에 나오라고 하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 사람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성신여대 대학원 2회로 학교 전체가 초기였기도 하고, 한국인은 당시 프랑스로 유학가는 경우가 드물었고, 또 내 학문은 유학을 가는 분야가 아니었기에 동창들도 없었다. 내 고등학교 동기, -우리는 동계 진학들을 했으니까 대학도 물론 동기인데- 한명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그의 거리는 엄청 떨어져 있어도 모친은 프랑스에 친구도 있다는 것으로 위로 삼고 싶어 하셨다.
알래스카에서 한번 쉬고 18시간이 걸려서 파리에 도착했다. 그때 대한민국 비행기는 샤를 드골로 가지 않고 오를리 공항으로 갔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이 아니고, 김해공항쯤에 내리게 됐다는 얘기다. 7월 말이었는데, 공항 활주로 옆으로는 노란색 작은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무슨 꽃인지는 모른다. 아름다웠다.
도착은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공항에 나오라고 부탁받았다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받았기 때문에 전화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한국에서 액면가가 큰 지폐만 들고 왔기 때문에 전화를 하려면 돈을 바꿔야했다. ‘자, 프랑스어의 첫 테스트다.’ 옆에 있는 사람을 붙들고 한 가지만 물어보자고 말을 붙였다. 그 사람은 꼭 한 가지만 물을 거냐고 장난스레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 돈을 교환하는 곳도 묻고, 전화기도 찾고 전화를 거는 데까지 성공했다. 사무실에서는 그 사람은 ’휴가 중‘이란다. 파리에서 휴가 중인 사람이 날 위해서 일부러 나오진 않을 것이다.
정말 아무도 없는 땅에 서게 됐다. 난 대사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하철 타는 방법은 배웠으니까. 몇 년 동안 쓰려고 짐을 잔뜩 챙겨서, 비행기가 허락하는 최고 28Kg을 꽉 채워서 싸들고 왔기 때문에 이 짐들을 들고 대사관까지 갈 수는 없었다. 짐 보관소를 찾아 짐을 맡기고, 손가방만 들고 나섰다.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대사관은 7구, 즉 파리 중심가에 있었다. 이 정도면 수제자지라고 뇌이며 지하철 티켓을 사고, 갈아타고 했다.
드디어 한국 대사관 앞에 섰다. 아침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거의 점심 때가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국기를 보고, '이제 됐구나' 라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파란 눈의 프랑스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수위는 나에게 용건을 물었다.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설명을 해야 한다.’
유학 온 학생인데, 교육담당관을 만나고 싶다라고 했더니, 지금 자리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좀 기다리면 안되냐며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영사가 나가다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사관에는 영사가 둘이었던 것 같다. 그는 행정·치안 담당 영사이고, 교육담당 영사는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유학 업무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프랑스인 수위에게 더듬는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있는 한국인을 보고 사정을 물은 것이렸다. 나는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랬더니 그는 식사하러 나가는 데, 아직 점심 전일 터이니 함께 가자고 했다. 염치불구하고 따라나섰다.
행운이었다. 그는 유학생이 이곳에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교육담당관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는 동정이 발동했던지, 나를 싹이 있다고 보았던지, 아마도 나에 대해 잘 얘기해 준 것 같다. 그래서 교육담당관이 나를 책임져야 하는 것 같이 생각했던 것 같다.
오후에 만난 교육담당관은 매우 친절했다. 당장 묵을 방도 정하지 않고 온 내게,- 학교는 9월에나 열리니까 기숙사도 그때에나 들어갈 수 있다- 마침, 얼마 전에 자기 부인이 오기로 해서 방을 보러 다녔었는데, 그때 알게 된 방이 아직 나가지 않았으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퇴근할 때까지 근무해야 하니, 그 시간을 이용해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가서 등록을 하고 시내를 좀 돌다가 오라고 했다.
나는 바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가서 레벨 테스트를 하고 한 달 등록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어 교재에서만 보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퇴근 시간에 맞추어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교육담당관은 내가 한달동안 세들 집에 데려다 줬다. 그날 교육담당관이 저녁을 사주었던가? 지금 생각하니, 나는 그 이후 영사나 교육담당관에게 제대로 인사를 챙긴 것 같지 않다. 정말 중요한 때에 신세를 졌는데......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한번도 유학 시절을 차분히 되돌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너무 바쁘게 살았다. 한편, 너무나 몰라서이긴 했지만, 바로 대사관의 도움으로 유학을 시작했으니, 나도 대단하다. 사랑 많이 받은 날들.
그 집은 바스티유 지역에 있는 전형적인 파리식 아파트였다. 즉 건물 가운데는 비워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뺑 둘러싼 건물이다. 한층을 절반으로 나눈 것이 아파트 한 채이다. 그래서 한층에는 ㄷ자 건물이 맞붙어 있는 형태가 된다. 따라서 한집의 아파트는 문(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응접실이 있고, 이후 긴 복도로 연결되며 침실, 목욕탕, 다른 방, 화장실, 부엌들이 길게 자리를 잡고있다. 햇볕이 드는 곳은 응접실 뿐이고, 저녁에 해질녘에서야 중앙 광장에 면한 곳에 약간, 아주 짧게 햇볕이 들 뿐이었다. 햇빛만 있어도 공부를 잘할텐데라고 뇌이던 그 경험의 시작이었다.
전세든 아파트를 혼자 지키고
주인은 전형적인 프랑스인 할머니였다. 교육담당관은 나를 소개해주고 떠났다. 주인 할머니(Mme. Bareau)는 계약서를 쓰고 나한테 사인을 하라고 했다. 읽어보니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이 있었다. 너무 복잡했다. 내가 끄덕였더니, 그 적은 내용을 다시 베껴서 나에게 주면서, 500프랑을 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고 계약은 끝났다. 할머니는 복도 불 켜고 반대편에 이르면 끄는 방법, 화장실, 욕실, 부엌 사용을 안내하더니 쉬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방을 가르쳐주며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지금 그 아파트 들어섰을 때의 냄새가 생각난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이 냄새를 이해하게 할른지는 모르겠다. 익숙한 냄새인데...... 지하철에서 나던 냄새하고는 다르다.
내 방이란 곳에 들어서서 방문을 닫았다. 천정은 왜 그렇게 높은지..... 그러니까 방이 더욱 썰렁해 보였다. 그때까지 침대생활을 하지 않았던 나는 높다란 침대, 오래 되어서 가운데가 약간 꺼진 침대를 보았다. 새 시트를 씌어 놓았지만, 분명 남이 사용하던 침대임에는 분명한데도, 그 위에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프랑스인들은 전기를 무척 아끼는데, 나는 그날 불도 끄지 못한 채로 잠들었다.
18시간이나 걸렸던 비행기. KAL 직행이었는데도 알래스카를 거치며 한번 쉬었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아침 일찍부터 교과서에서 배운 프랑스어를 현실에 뿌려가며 하루를 돌아다녔더니,.....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 계약서 받고 돈을 줬으니까...... 짐도 없고......
내가 얼마나 준비가 안 된 사람이냐면, 프랑스인들은 아파트 안에서 신을 신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밖에서 신는 외출용 신이라기보다는 실내화 같은 것이다. 나는 덧신을 가져오지 않았으니까 그냥 양말 발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날 밤을 지냈다. 아파트 바닥은 온통 오래된 나무 마루였는데, 걸으면 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데리고 왔으니, 나를 있는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겼을까? 그 할머니와는 유학 시절 내내 잘 지냈다. 내가 다시 연구년으로 갔을 때도 나는 그 할머니 집을 찾아갔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프랑스 할머니와 단 둘이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공항에 가서 짐을 찾아와야 했다. 그런데 한번 나가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돌아오는가? 주소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내가 집 주소를 물었더니, 할머니는 “Comment?(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이후 내가 살아가면서 무척 자주 들을 단어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까, 또 “뭐라고” 했다.(사실 나는 이 Comment이라는 단어를 무서워했다.) 나는 주눅 들지 않고, 어제부터 오늘에 이른 이야기를 해주고, 당신 집으로 오려면 어떻게 오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Où somme nous?(우리가 어디에 있니?, 우리가 있는 데가 어디니?)”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그 얘기라고 하니까, 주소를 적어주고, 문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바스티유 14번지였는가 했다.
나는 불어를 배울 때 우리가 어디 있냐?(‘Où somme nous?’)라는 질문을 멍청한 문장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자기가 있는 데를 몰라서 묻느냐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쓰는 거였다. 당신 머리 색은 무슨 색입니까? 당신 국적은 무엇입니까? 내 나름 판단한 꽤 많은 바보 같은 문장들이 다 경우에 따라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이곳은 우리같이 머리색이 다 똑같지도 않았다.
주소를 받아 든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어제 온 노선을 거꾸로 짚어가면 되었다.
집에 돌아와 막 짐을 풀고 있는데, 할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자기가 다음 날부터 한 달 동안 이탈리아에 여행 간단다. 나 혼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가끔 아들이 와서 둘러볼 것이라고 했다. 이런,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아는 프랑스인인 그가 내일 여행을 간단다. 잘 모르는 할머니지만, 그 할머니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는 떠나고,..... 다음 날이 주말이었나 보다. 주변에는 먹을 곳이 없었다. 지역 일대는 상가가 다 닫혀 있었다. 파리는 여름휴가들을 많이 떠나는데, 대부분은 지역을 바꾸어가며 가게가 문을 닫는다. 나는 한여름에 도착했는데, 당시 내가 머무른 지역이 휴가철에 들어갔나 보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지역에 가야 빵을 사는 모양인데 나는 그것을 몰랐다. 지하철 입구에 가야 끼니를 때울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한 채 이틀이 지났다.
아! 아! 친구
내가 잘하는 것은 차 타는 것 아닌가? 주말이 되자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을 했다. 그곳에는 중, 고, 대학교를 함께 다닌 동기가 불문학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북부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샀고,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에 잘 도착했다. 그런데 역에서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의 기숙사는 꽤 멀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기숙사로 갈 교통편이 없었다. 프랑스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당시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다. 대중교통이 일찍 끊겼다. 그나마 파리는 늦게까지 지하철이 다니는 편이었는데, 이곳에는 지하철도 없었다.
역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어떤 신사 한 분이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었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자기 차를 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도 없었다. 남의 차를 얻어타면 안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신사가 기숙사 앞에 내려주었다.(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분께도 축복을!)
문 앞에서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너무 놀라와했다. 내가 파리에서 공부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했지만, 몇일에 도착한다는 연락도 미처 못한 것 같다. 파리에서 전화라도 하고 찾아갔더라면 좋았겠지만, 내가 차 타는 것을 전화거는 것보다 쉬워해서는 아니고,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기숙사로 걸면 되었을텐데...... 전화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 방에서 같이 지냈다. 우리가 그 밤에 잠을 잤던가? 스트라스부르그는 독일하고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대중교통인 버스를 타고 넘는다. 친구가 독일제품이 좋다면서, 몇가지 생활집기를 사러 가자고 했다. 가위, 칼, 접시 몇개 등등.....그때 산 가위를 아직도 사용한다. 프랑스에서도 생활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마련할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는 일요일 오후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파리를 다 아는 것처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친구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음이 기억된다.
한달 후 Paris VII대학 DEA(박사 전 단계)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숙사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프랑스어를 위해서는 매월 등록제였던 알리앙스 수업은 그달로 끝내고, 파리가톨릭대학(I’institude catholique de Paris) 어학반으로 옮겼다. 학위를 준비하면서, 4년 내내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왜인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파리에서 ‘사막 체험’을 했을까?
이렇게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서조차 서양문물을 접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내가, 그것도 철저히 준비한 것도 아니고, 가야 한다는 필요성에 떠밀려서 파리에 있게 되었다. 가장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는 국제도시 파리에, ‘고아원에서 갓 뛰쳐나온 아이’ 같은 상태로 출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 학생들은 고생이 더욱 심했다. 아르바이트 할 기회조차도 국가간 협약이 있는 범위였다.
나는 참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혼자 말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서재필도 미국에 가서 학위를 했잖아. 갓 쓴 할아버지도 학위를 했다잖아! 10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왜 못하겠어?”를 수없이 뇌었다.
이상한 것은 그때 힘들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참 많은 ‘보호의 손’을 보게 된다. 그때는 미처 생각 못했는데, -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학생활을 아무 연고도 없이 가서 바로 대사관의 사람들로부터 도움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다. 노동현장에서 노동법을 적용시켜 달라고 외쳐도 통하지 않자 분신자살을 했다는 전태일에 비하면, 나는 그곳에 기관이 있으면 당연히 하겠지 하고 믿었고 실제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통했으니..... ‘내 인생에 작용한 손’을 왜 이제야 느끼는 걸까?
글쎄, 내가 유학을 떠날 때 프랑스 대사의 딸이 옛 제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설학교인 영동여고에 1학년을 다니고 아버지 따라 프랑스로 간 학생이었다. 그때 나같은 신출내기 선생들 말고,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경력있는 선생님들은 저만한 집에서 이런 신설학교에 학생을 보내니 인품이 대단하다고 그 학부형을 칭찬했었다. 갓 졸업하고 교사가 된 사람들은 그 학부형을 직접 볼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도 만 3년이 흐른 뒤에 내가 그 땅을 밟는 거였다. 물론 연락도 없었고, 내가 프랑스 간다고 연락할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내가 정착하고 나서 한참 후에 대사 사모님을 뵐 수 있었다. 그 제자도 한번 만났다. 이후 대사가 다른 보직으로 옮겼던 것 같다. 그래도 어려울 때는 도움을 청하리라는 막연한 의지가 있었던 걸까? 하느님도 이렇게 막연한 ’의지‘로 받치고 계시는 걸까?
분명 그때 내게는 어떤 ’힘‘이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 연고뿐 아니라, 비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지도 않았고,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 막막한 곳에서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막에 나간 은수자(隱修者)들이 마주치는 경이(驚異)같은 힘이었을까? 그것을 제대로 찾아 설명할 수만 있다면, 사막 경험을 한 ’은수자‘들의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에서 중세가 시작되기 전 많은 이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러, 또 인생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으러 사막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체험‘을 했다.
이 원고를 준비하려고 앉자 그때 일정한 체험이 있었음이 느껴진다. 작용은 했지만 오랫동안 덮어둔, 아니 이름짓지 못하고 흘려버린 힘이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연구년을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학교로 가면서, 속으로 말했었다. “웃음을 잃어버려서 가야 해요” 그 웃음이 웃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힘이었으리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는 다만, 한국사회가 고달파서, 한국 사람들이 잘 웃지 않아서 웃음을 잃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다른 힘이었다. 직시하지 못하고 그냥 웃음이라고 표현했던, 그 생기(生氣), 바로 무언가 그 안에 있다.
생기를 받쳐준 것은 숨은 도움들이었다. 나는 늘 인생을 감사하며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추상적인 감사였다. 지금 이 글을 계획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곳곳에서 받았던 많은 사랑과 직면하게 된다. 다시 보게 되었음에 감사하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차례로 자세히 살피고 싶다. 그 과정에서 분명, 그때의 기운을 파악할 것이고, 혹시 재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생활은 내게 정말 많은 것을 주었다.
<아래의 에피소드들은 이미 명예교수회 카페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Episode ① : 비주(bisou)
나는 프랑스인들이 비주(bisou)라고 하는 인사를 할 줄 안다. 이 인사는 뺨을 번갈아 마주대는 방식이다.
프랑스의 학기는 9월에 시작하는데, 나는 석사논문을 마치고 바로 떠나서 7월 말에 파리에 도착했다. 한 달의 시간을 알뜰히 쓰겠다는 각오로 도착하는 날, 짐 풀기도 전에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에 어학 등록하러 갔었다. 간단한 테스트를 하고 한 달 등록을 했다.(9월이 되면 학교로 갈 것이기 때문에)
파리는 온갖 나라 사람들이 다 와 있고, 또 단기 체류인 사람들도 단 얼마간이라도 공부들을 한다고 오기도 했다. 이른바 국제사회이다.
그런데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쉬는 시간이었는데 브라질에서 온 남학생이 떠난다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차례로 비주를 하면서 돌기 시작했다. 굉장히 다정하게들 인사를 했다. 결국 나는 내 차례를 피하기위해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왔었다. 서로들 잘 모르는 사이들이니, 내가 교실에서 나간 것도 몰랐을 것이다. 첫 번째 비주 인사에 대한 기억이다.
물론 그들도 처음 만난 사이에서 이런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 친한 사람들 사이의 인사이다. 그렇지만, 비주는 나라나 사람마다 다르다. 독일이나 영국, 미국 등 겔트 언어 족에서는 비주가 어색하다. 내가 비주로 하는 인사를 어색해 할 때, 친구들은 프랑스에서는 뺨을 두번 대는 비주를 하지만, 남미 대륙에서는 네 번 뺨을 댄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인사는 라틴어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 사회의 문화이다. 어쨌든 그 남학생은 남미 대륙에서 온 학생이었고, 그들에게는 비주 인사가 무척 자연스럽다. 자주.
몸이 닿는 인사는 따뜻함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프랑스에 갔어도,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나누는 비주는 우리를 금방 학창시절로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인사는 몸이 닿지 않는 인사이다. 최근에는 미국식 악수를 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제자가 취직했다고 인사하러 오면, 남자 교수들은 악수를 하는 편인데, 여자인 나는 축하한다고 말로 인사하는 편이다. 아무튼 신체를 접촉하는 인사는 사람을 빨리 친숙하게 한다.
Episode ② : 동양식 오로스코프(horoscope) ‘띠’ 이야기
개강이 되면서 나는 프랑스어 강의를 파리가톨릭 신학대학교에 등록했다. 이곳은 4년 이상 장기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시험을 쳐서 진급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나는 언어는 현지에 있는 동안 철저히 배우고 싶었다.
수업이 시작됐고, 아마 첫째 날인지 둘째 날인지 쉬는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오더니 자기는 무슨 띠냐고 물었다. 별자리로 12달을 나누어 오로스코프를 가지고 있는 서양문화에서 그는 동양은 연도를 따라 띠로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태어난 연도를 말해달라고 했더니, 1957년생이란다. 그런데 그때 착각해서 1956년생의 띠를 생각하고, “넌 원숭이 띠이네!”라고 말했다. 1957년생은 닭띠인데.-
그는 퍽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넌 친절하지 않구나.” 라고 하더니, 좀 뜸을 들이고 나서, “그거 바꿔 줄 수는 없니?”라고 물었다. 순간 나는 이걸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무슨 띠를 원하냐고, 혹시 물고기 띠는 괜찮냐고 물었다.
짧은 쉬는 시간이었는데, 난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의 개념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때 충격은 강렬했다.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것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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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오늘 성탄을 기다리는 마지막 주일에 '숙제'를 제출합니다. 원고를 받으면서, 편집위원장이 모델을 내놓아라라는 말씀을 듣곤 했는데, 워낙 필자들께서 잘 쓰시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가을 일정이 복잡해서 늦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나가 볼 예정입니다. 교수님들께서도 생각나시는 대로 카페에 투고해 놓으시면 좋겠습니다, 혹 너무 늦어서 <<늘푸른나무>>15호에는 실리지 못하더라도.....(이번호는 12월 31일까지 마감합니다.) 향후 새 편집위원장께서도 '회지 특집'으로 계속 이어가시겠지 여기고, 또 희망합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제로 글을 씀은 서로 회상과 구조, 표현을 돕는 일이지 싶습니다. 모두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프랑스 자유여행 가고싶은데 프랑스어를 못해서 못갑니다. 초기에 고생 많이했네요.
지금은 영어로 다 해결됩니다. 저희 때만 해도,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알아도 자기 말에 대한 긍지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들도 했는데...... 어쩌면, 진짜 영어를 못해서 안하는 것도 같았구요...... 지금은 영어가 국제어인 것 같습니다. 자유여행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