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아는 신은 없다. 신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신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원래는 조상신이었다. 죽은 조상이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과 관련이 있다. Enemy는 엄마가 아니라는 말이다. 엄마가 다르면 죽인다.
씨족은 많아봤자 30여명이다. 집단은 엄마와 딸들과 손녀로 구성된다. 아빠라는 개념은 없다. 아기는 신의 축복을 받아서 저절로 생긴다고 믿었다. 비너스라는 말의 어원은 ‘받는다’는 뜻이다. 받는게 복이다. 미녀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비너스 신의 발등에 키스하여 복을 빼먹으려고 했다.
어떤 똑똑한 사람이 부계사회를 발명했다. 형제가 같은 아빠의 자식이므로 닮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원래 부족민은 족외혼을 해도 좁은 영역에서 수백년간 대를 이어가면 근친혼에 가까워져서 얼굴이 다들 비슷비슷한데 말이다. 외부인과 접촉하면 얼굴이 아빠를 닮는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모계사회의 여신도 있지만 부계사회의 남신이 더 강력하다. 어떤 남자가 여자 열명 이상과 결혼해서 자녀 백명 이상을 낳으면 부족의 단위가 커지기 때문이다. 모세의 출현은 씨족에서 부족으로 집단의 단위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히브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희미했다. 원래 같은 민족끼리 잘 다툰다.
결정타는 바빌론 유수다. 한 인간의 창작으로는 구약의 두꺼운 텍스트를 감당할 수 없다. 성경은 집체창작이며 바빌론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집대성한 것이다. 사막의 점토판에서 계속 새로운 성경 구절이 발굴된다. 삼국유사에는 그리스의 미다스왕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말이다.
원래 이야기는 잘 전파된다. 콩쥐팥쥐는 신데렐라 설화 변종이다. 나라마다 수백가지 신데렐라 설화의 다른 버전이 있다. 유태인이 바빌론에서 사고의 규모를 키웠듯이 기독교인은 로마에서 새로운 사고의 점프를 이루었다. 세계신의 등장이다. 씨족신이 부족신으로, 민족신으로, 세계신으로 커졌다.
그렇다면 우주신으로 커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신은 이런 존재다 하고 단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에 제한을 두는 모든 생각은 우상이다. 기독교의 신은 우상이다. 물론 겉으로는 종교의 신을 섬기는 척 쇼를 하면서 마음으로는 진짜 신을 찾을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신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을 반영한 것이다. 그것은 터부다. 원래 인간은 터부를 통해 다른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사회를 결속시킨다. 즉 터부가 없으면 사회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종교가 없으면 사회가 붕괴된다. 신이 없으면 사회가 붕괴된다. 인간은 직관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신이 작으면 대신 결속력이 커진다. 그러므로 사이비는 작은 종교를 만든다. 복음주의는 작은 신을 밀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그들만의 신을 찾는다. 한국 복음주의는 오직 강남만을 위한 신을 밀고 있다. 강남=가나안 이름도 비슷하잖아. 강남은 강북 애굽에서 새로 옮겨간 약속의 땅이잖아.
유타주 솔트레이크에는 소금호수가 있다. 딱 봐도 갈릴리 호수잖아. 모르몬교. 그들만의 작은 신을 만들어 결속력을 높이는 착취기술이다. 진짜 신은 크다. 양자역학이 규명하고 있듯이 우주는 시뮬레이션이다. 80억 인간은 80억 번의 강화학습이다. 우주 자체가 컴퓨터이고 지능이고 인격인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방법으로 우주가 만들어지는 시나리오와 신이 부재하는 방식으로 우주가 만들어지는 시나리오 중에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가? 합리적인 것은 효율적인 것이고, 효율적인 것은 자원을 공유하는 것이다. 원자론은 하나의 바탕을 공유한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게 비용이 적게 드니까.
석가는 말했다. 바탕은 없다고. 시스템의 공유는 바탕이 아니라 관계다. 바탕은 모니터지 컴퓨터가 아니다. 우주는 간섭을 공유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신이 존재하는 우주가 더 합리적이고 신이 없는 우주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신은 수염난 남자가 아니다. 흑인도 아니다. 모건 프리먼이 신이냐?
구조론은 세상을 파동의 간섭으로 설명한다. 결맞음과 결어긋남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감시인을 누가 감시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설계자는 누가 설계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민주주의다. 국민 인식의 부단한 진화가 새로운 설계자를 설계한다.
도달점은 없고 출발점은 있다. 우리는 도달점에서 신을 찾으려고 하지만 출발점에서 신을 찾아야 한다. 인생의 도달점은 없지만 출발점은 있다. 빅뱅이 있듯이 출발점은 있다. 보상을 주는 신은 없지만 출발선에 세우는 신은 있다. 누구든 팀에 들 수 있다. 당신이 팀에 들었다면 당신은 보상을 받았다.
우리는 신의 선물을 원하지만 그것은 팀의 일원이라는 증거에 불과하다. 선물을 받고 팀에 소속된 사실을 알고 안심하는 것은 어린이다. 진짜는 팀의 건설이다. 가족을 만드는 방법으로 쉽게 팀을 건설할 수 있지만 창의하는 자궁을 낳는 것이 진짜다. 역사를 이어가는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야 진짜다.
인간은 터부의 동물이다. 터부는 집단의 결속을 추구하므로 작아진다. 신을 부정하면 터부를 생산하게 된다. 종교인의 터부행동은 신을 부정하는 배반이다. 신의 미션을 받은 사람은 터부를 부정하므로 삶의 행동반경이 커진다. 열살 때 나는 이 세상이 지루하고 싱거워서 살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세상의 많은 바보들과 허겁지겁 리액션을 맞춰주겠는가? 차라리 신은 벌거숭이라고 폭로해 버리지. 신이 불쌍해졌을 때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5억년 알바를 27번 넘게 뛴 신은 아직도 해야할 강화학습이 쌓여 있다. 내가 신의 숙제를 조금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미래를 예견했고 맞다는 가정에 따라 계획을 세웠다. 예상이 빗나갔으면 계획은 무용지물이다. 조선시대 군담소설에 나오는 설정 있다. 도사 할아버지가 말한다. 너는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라. 무언가 줄 것이다. 가봤더니 과연 그대로 된다. 만나고 만나고 하며 징검다리 밟고 송나라로 간다.
도적을 때려잡고 공을 세운다. 조선시대에 웬 송나라? 하여간 이야기니까. 계시를 받듯이 미지의 징검다리를 믿고 가보니 과연 발디딜 곳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가보는데 가지니까 계속 가는 것이다. 목적 따위 없다. 강화학습은 시행착오가 본질이니까. 그 길이 아니라는 확인이 목적이다.
틀린 길을 확인한 만큼 바른 길을 찾아낼 확률이 증가한다. 방향이 맞으면 계속 간다. 길이 막히면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한다. 경험치를 축적하여 삽질의 반복을 피한다. 지구는 우리우주 안에서 순위권 선두그룹에 속한다. 신대륙에 처음 간 사람은 일단 갈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 가보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