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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되는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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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창세기 13:1-4.
0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0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0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0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애굽에서 나오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변치않는 선하신 언약의 이행으로 돌보심과 지키심을 힘입어서 환란의 때를 잘 넘겼다.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곤경임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너무나 편파적인 사랑으로 자기는 보호하시고 바로는 책벌하시는 괴정에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무한 것임을 마음 깊게 느꼈을 것이다.
아브람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살펴보자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아브람의 이상한 한 가지 행동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겨버렸던 한 남자가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초연한 듯 한 아브람의 행동에 대한 것이다.
아브람이 아내를 바로에게 시집 보내게된 일을 당한 후에도, 후회하거나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했다는 부분이 없는 것으로 추측컨대, 어쩌면 아브람이 자기의 아내 사라가 시집을 간 채로 그대로 살기를 은근히 기대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한기도 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아 보기 위하여, 보편적인 일반 남성들의 심리상태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사실 남성들이 자기 종족 보존과 번성에 강한 내면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내 사라로 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기의 생각 안에서 많은 고민도 하고 별의 별 생각을 대 해 보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여인에게는 남편의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도 크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자기의 자식을 보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은 또한 어떠랴! 우리는 보통 남성의 심리 상태를 통하여 아브람의 내적 마음을 추론하고 읽어보고자 한다.
물론 예외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보편적인 남자들의 심리를 통하여 아브람의 내면의 심리세계를 탐구하여 보자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하면 많은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더욱이 아브람처럼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는 경우는 그 갈등이 더 심하다. 다만 겉으로 나타내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내에게 누가 될까봐 감추고 전혀 아닌 것처럼 행동할 뿐인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은 경우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기의 자식을 보고자 한다. 그러나 아내를 크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므로 차라리 이혼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담대하게 요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처럼 더욱 괴로운 일이다.
우리는 아브람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한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또한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람의 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그의 일들에 대하여 너무 상세히 까발리는 식의 인물 연구가 자칫 아브람에게 모독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더 큰 다른 교훈을 잃어 버리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보다 바람직한 성경의 인물에 대한 연구 자세는, 믿음의 조상들의 부끄러운 부분들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 이해를 위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일이 결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불명예가 되거나,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이들의 삶의 모든 것을 밝혀서 이해시키는 일들이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교훈을 삼게하여서, 삶의 질을 높이며 바른 신앙인으로 성장되어 가는 일에 도움이 되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살펴본 바 처럼, 보통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종족 번성에 대한 본능적 심리상태가 조금만이라도 아브람에게 있었더라면(좀 심할지는 몰라도) 이런 추측도 가능해 진다.
차라리 아내 사라가 이참에 바로에게 시집가서 왕녀로서 살게 되고, 어쩌면 왕의 총애를 받아서 황후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나 사라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게된다면 아브라함 자신도 아내 사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한결 줄어들 것이고, 보다 편한 마음으로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서 자식을 볼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미 바로는 사라를 좋아하여 자신에게 많은 재물과 종들까지 주는 호의를 베풀지 않았는가!
그가 이런 상황을 접하고도 당황해 하거나 마음 아파하였다거나 또 아내가 돌아오게 된 것에 크게 기뻐하거나 감사히 여겼다는 등의 어떤 기록도 없는 것은, 이런 유의 추론들을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제공한다.
그가 참으로 다른 어떤 경유로든, 이런 일을 은근히 원하였거나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초연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런 황당한 일에 대하여, 그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다손 치더라도, 상황의 다급함으로 보아서 하나님께 황급하고 간절하게 구하지 않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는 이런 느낌을 가질만한 어떤 기록이나 언급이 없는 것은, 이런 아브람의 내면적인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성경 저자에 의하여 포함되어 있음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능히 짐작하게 할 만 하지 아니한가!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 그는 바로의 선물이 감사하기나 한 듯이 사양하지 않고 널름 받아챙기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가 그런 불의 한 재물과 종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모습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어떤 것인가?
오늘날을 물질 만능의 시대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지 않는 시대가 한번이라도 있었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사실은 아니다. 타락한 후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물질을 최고의 가치 기준인양 착각속에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제외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필자는 지금 아브람을 욕되게 하려는 마음은 털 끝만큼도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 때문에 포장하거나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하게 그의 인간성을 파헤쳐 봄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유익을 얻고자 함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어떤 연단의 과정들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점진적인 성장을 하였고, 마침내는 그가 어떤 믿음을 나타내어 보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와 장차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앞에, 모범적인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서 늘 부족하고 연약하기만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얻으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간접 경험함으로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우리의 삶 속에서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이가, 우리를 아브라함의 예 에서와 같이 인도하셔서, 마침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하고, 삶의 현장에서 축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람의 세속적 성품.(“모든 소유며”)
아브라함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이고 저질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세속적 성품들 중에 하나로써 그도 물질을 좋아했다.
생각해 보자! 아무리 물질을 좋아해도 그렇지, 조금 만큼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남자라면, 아내의 수치스러움을 담보로 얻게 된 재물을 되돌려주거나 버리거나 하였을 법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의기 양양한 듯이 또는 매우 기분이 좋은 양,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이해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다름이 아니라 당시의 풍습이다. 당시의 풍습은 고의에 의해서든지 실수에 의한 것이든지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 피해를 보상해 주는 미덕이있었다. 또 피해자는 그 선물을 받음으로서 피해에 대한 보상도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허물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상대에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는 것이기에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런 당시의 시대상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 재물을 챙겨서 돌아오는 아브람의 모습은 어쩐지 결코 유쾌치 않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도 세속적인 면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분명하게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의 연약한 면을 봄으로써 더욱 소망이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처럼 연약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소망을 가지는 것은, 이렇게 세속적이고 유약하기만 한 아브람을 불러 내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서 같은 믿음의 도를 따라 또한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세속적이고 온갖 부족한 것들 투성이인 우리들을, 사랑과 인내로 친히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마침내 아브라함처럼 강건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삶은 이 진리에 말씀을 우리에게 확신하도록 권면하는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연일 메스컴에 보도되는 사건들의 대부분이 이런 부정해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겐 아직 소망이 있다. 아브람도 우리와 유사한 이런 세속적인 면들이 있었으나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함에 이르게 되지 않았는가!
자!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내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있지 아니한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를 계속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변화되는 아브람.
아브람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 사람이었다. 그도 세속적 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출세욕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을 받아가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점진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나가는 것을 보게된다.
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조카 롯과 서로 헤어질 때, 살기에 좋은 땅과 나쁜 땅을 놓고, 조카 롯과 양자 간에 선택하게 되었는데, 조카에게 먼저 결정권을 주는 그의 초연한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하여 보다 초연해진 자세를 보여주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생활의 진리를 전진적으로 깨달아 갔던 것이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계획이 결코 자기에게 유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이 땅의 축복을 추구하지만, 우리도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계획을 알아 가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갈 것이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 금이 풍부하였더라”
하나님은 아브람의 작은 믿음과 비록 선하지 못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내리시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의 말씀 중에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신 28:6)” 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수 1:9)” 는 말씀도 기억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거나 떠나지 아니하신다.
구약에 성도를 그리하셨거든 하물며 그 아들의 영으로 거듭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사랑과 관심은 더욱 각별하신 것임을 꼭 기억하라!
“전에 장막 쳤던 곳”
아브람은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축복의 땅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가나안 땅 벧엘(하나님의 집)로 돌아온다.
비록 과거에는, 믿음이 작으므로 그 땅이 황폐하여 보이고 주위 정세와 사정이 힘들어 보였기에 이 땅을 떠나,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애굽을 향하여 떠나갔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는 곳이 진정 축복의 땅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믿음은 애굽으로 내려갈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제 큰 믿음의 힘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한 신앙
우리가 말로만 듣고 섬기며 이론과 지식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 생활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체험되어져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맛보아 알게되면, 믿음 생활에 더 큰 담력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 생활에 실제적인 체험을 얻게 된 아브람이 가지게 된 신앙의 담력이 어떠했을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의기 양양하게 돌아오는 아브람! 먹을 것을 염려하며 애굽으로 갈 때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런 아브람의 모습은, 그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서 보고싶어 하는 모습이다. 바로 이런 모습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보고싶어 하시는 자랑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라! 그리하면 믿음샐황에 당당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지고 커질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갈 때, 두려워하고 나약하던 모습은 더 이상 그에게서 그 그림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은 비록 아브람이 신앙적 삶에 믿음이 없는 실수를 행하였지만, 이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이런 삶의 현장에서 그를 훈련하셔서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도하심으로서, 그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된다.
하나님의 교육은 말씀을 통한 이론적인 교육과, 실질적인 삶의 현장 교육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양육시키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서와 같이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행하시고 계심을 믿으라! 이것이 큰 담력을 얻고 인생을 승리하며 나아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은혜를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는 또 앞으로도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며 복을 내리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는 표현이다. 이와 함께 이제부터 자신은 환경과 여건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씀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그가 다시 돌아와서 부른 여호와의 이름은 처음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도 그러하듯이 똑같은 목소리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하더라도 그 각자의 개인적 신앙의 형태와 감격과 고백과 체험, 나아가 사랑의 차이에 따라 그 감격도 다른 것이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노래함에 대한 진정(眞情)이 다른 것이다.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감사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와, 지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감격은 결코 같거나 비슷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감격이 신앙에 연륜이 쌓이면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커지는 은혜를 간구 하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저희도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면서 믿음의 성숙함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부르짖게 하소서~~~
목사님~
지는유~ 시간나믄 천천히 읽어 보겠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