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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
● 본명: 이유, 세종의 둘째아들(수양대군)
● 출생-사망: 1417 ~ 1468
● 재위기간: 1455년 윤6월~1468년 9월(13년 3개월)
● 주요 업적: 현재 근무하는 관리만 녹봉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 실시, 호구조사를 통한 인구, 가축 수 파악, 호패법 재실시, 단종 복위 세력(사육신 등) 숙청, 왕권 강화,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 편찬, 관직 이름 재정비, 건주여진 세력 토벌
[제7대 세조실록]
[1.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 찬탈]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대신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 두 파의 내부에는 또 다른 작은 세력권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즉,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왕족 세력 속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안평대군이, 재상 정치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대신들 속에는 김종서와 황보 인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왕도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정치세력은 언제나 왕족을 등에 업거나 또는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대의명분을 얻기가 힘들었다. 특히 단종 시대는 왕이 너무 어린 관계로 왕권 자체가 유명무실했고 왕을 대신할 실질적인 궁중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왕족 중에 한사람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안평대군이었다.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선택한 까닭은 한마디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왕권이유명무실해지자 신권이 강해지는 한편, 왕위를 노리는 왕족들의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신들은 왕족들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되었고, 그래서 비교적 힘이 약한 안평 쪽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노 골화한 것이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수양대군의 위세가 높았던 것은 그가 왕족의 대표로 단종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 왕족 대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는데,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인 수양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었지만 일찍이 태조의 여덟째 아들 방석의 양자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당숙이 되던 금성대군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이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수양대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명대신들에게는 이러한 수양의 세력 팽창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은 본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족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왕권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그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은 곧 대신들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김종서와 황보 인을 위시한 고명대신들의 숙고 끝에 수양대군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은 육진을 개척할 때에 김종서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인물인데다가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학문과 문예도 뛰어나 선비의 낭만적인 면모도 있었다. 말하자면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수양에 비해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고명대신이 안평과 손을 잡자 수양대군의 기세는 다시 위축되었다.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과 견줄 만한 대표적인 왕족 세력인 안평대군과 힘을 합침으로써 그야말로 힘과 대의명분을 다 쥐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이에 대한 타계책을 모색하게 되고, 결국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의 이 거사는 단종 즉위 초부터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있었던 듯싶다. 그것은 수양이1452년 7월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음주를 함께 편찬하던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그는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사뭇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것을 자청한 일이다. 1452년 9월에 명나라가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이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할 사은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이 일이 종친의의무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수양의 수하들은 그를 만류했다. 수양이 없는 틈을 타서 대신들이 세력을 팽창시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은 이 일을 강행한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된다. 수하에 신숙주를 끌어들였는가 하면,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수양의 명나라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김종서 일파의 경계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거사 계획을 짜는 한편, 그들의 경계를 늦추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양이 김종서, 황보 인 등의 조정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계유정난'은1453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났다. 수양은 그 동안 진행해온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우선조정 최대의 권력가이자 정적인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간다. 김종서는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뛰어난 문인이자, 육진을 개척하는 등 무인적인 역량까지 발휘한 비상한 인물이었다. 여하튼 계획에 따라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 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 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수양에 의해 이렇듯 정난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 출신들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게 동조했다. 이들은 비록 유교적 비 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 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수양 역시 이들을 애써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양이 집권한 뒤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 복위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 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세종에게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중 남효온은 사건 당시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한 사람이 되었다.
[2. 세조의 강권 정치와 문치의 후퇴] (1417-1468, 재위 기간 1455년 윤6월-1468년 9월, 13년 3개월)
1453년 계유정난으로 왕권과 신권을 완전히 장악한 수양대군은 그 후 노골적으로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어린 조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왕으로 등극했다. 그 전에 수양은 자신의 왕위 등극에 반대하던 금성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을 유배시켰고,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은 모두 제거했다. 때문에 조정 대신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의 왕위 계승을 비판하지 못했다. 그는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유, 자는 수지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과는딴판으로 무예에 능하고 성격이 대담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7대 왕세조이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 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 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주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무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또한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법칙으로 삼았다. 이런 일련의 왕권 강화책을 통해 안정기에 접어들자 세조는 왕도 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또한 1460년에는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호의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을 복구했으며, 이듬해인 1461년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 반란으로 한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우선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화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기도 하고 변방의 안정에 공이 많았던 양정이 세조의 퇴위를 희망하다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한 명의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살해케 했는데도 순종을 잘 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펼쳤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1468년에 탄생한 것이 원상제였다. 이 제도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어쨌든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의 상명하달식의 국정운영은 정국의 경색을 초래하였으며, 공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비리가 누적되기도 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나서 부터 피부병을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를 비롯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으며, 능은 현재 경기도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이다.
광릉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면서 석실과 병석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석실을 회격으로 바꿈에 따라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의 배치상으로 동원이강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는 국초왕릉제의 일대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3.세조의 가족들]
제7대 세조의 가계도
세조는 늦게 왕위에 오른 탓으로 후궁을 많이 거느리지 않았고, 따라서 후사도 많지 않았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와 근빈 박씨에게서 각각 2남 1녀, 2남을 얻어 총 4남 1녀를두었다. 이들 중 정희왕후 윤씨 소생이 의경세자(덕종), 해양대군(예종), 의숙공주이며, 근빈박씨 소생으로 덕원군, 창원군이 있다. 세조의 가족이 많지 않은 관계로 정희왕후 윤씨와 후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삶을 약술한다.
정희왕후 윤씨(1418-1483)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했으며, 처음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한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의경세자(1438-1457)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4. 세조의 무단 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세조의 정치는 한마디로 무단 강권 정치였다. 이는 왕권 안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세조 특유의 전제 정치로, 조선 성리학자들의 왕도 정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세조가 이 같은 무단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대의명분 없는 즉위 때문이었다. 대의명분을 정치적 행위의 최상의 근거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패륜적인 행동으로 얻은 왕위를 지켜줄 수 있는 오직 물리적인 힘뿐이었다. 따라서 세조는 물리적인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무단 정치를 했으며, 그 방법으로 철저한 측근 정치를 택했던 것이다.
측근 정치란 말 그대로 자신의 심복 내지는 측근을 위주로 정사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조의 이런 측근 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그와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른바 정난공신 세력덕분이었다. 정난공신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 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눠질 수 있다. 심복세력들은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을 직접 수행한 인물들이며, 집현전 학사 세력은 계유정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이 거사의 대의명분을 설정해준 인물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의 공통점은 김종서, 황보 인 등의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또는 이들의 정권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계유정난에 협조한 이유는 사뭇 달랐다. 심복 세력들이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학사 세력도 결국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으며, 그 대가로 세조 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조 시대를 이끌었던 이들 두 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인 권람, 한명회, 신숙주 등의 삶을 약술하면서 세조의 무단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수양의 좌장 권람(1416-1465)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는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다. 1416년에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컸다. 그래서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다.
1450년, 3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그는 향시와 회사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전시에서는 4등이 되었으나 장원한 김의정의 출신이 한미한 덕으로 장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 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 황보 인 등이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안평대군이 그들 대신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수양대군이이에 불안을 느끼며 동지를 찾고 있을 때 권람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 접근하여 집권 거사를 모의한다. 이후 권람은 수양의 부탁에 따라 양정, 홍달손, 유수, 유하 등 무사들을 규합하여 수양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성공한다. 정난에 성공하자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그는 집현전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시 1년 뒤에는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에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 는 문장에 능했고 호탕한 성품에 걸맞게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아버지 권제가 첩에혹하여 어머니를 내쫓은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수양의 '장량' 한명회(1415-1487)
권람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면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들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 '생살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적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처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함길도(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이유는 그들이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시애의 계략이었다. 이시애는 조정에 혼란을 야기 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한명회, 신숙주 등이 강효문과 짜고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변란이었다. 즉위 이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일단 신숙주와 한명회를 옥에 가두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 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공신들과 함께 고관 요직을 독점 하다시피했다. 세조는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단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됐다 하여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를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1417-1475)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 통치를 수행하여 당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사실 신숙주는 계유정난의 공적 면에서는 한명회에 뒤질지 몰라도 세조에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에서는 누구보다도 앞섰다. 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숙주는 단연 세조의 오른팔격이었다.
신숙주는 1417년 태생으로 세조와는 동갑내기다.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이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그는 한명회와는 달리 일찍 관직에 나갔다. 22살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됐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1447년 그는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신숙주가 수양과 가까워진 것은 1452년 그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감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1453년 신숙주는 승정원에서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지만 김종서 등의 권신들의 경계를 받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0월에 외직에 나가 있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가장 빠른 출세를 하고 있던 신숙주가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것은 그와 수양대군과의 관계를 김종서 쪽에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은 신숙주로 하여금 수양의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신숙주는 정난공신 1 등에 책록된 뒤 곧 도승지에 올랐다. 세조가 권력을 잡자마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신숙주를 앉혔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했다는 의미가 된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수양대군에게 보고했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제7대 왕이 된다. 이후 신숙주는 1456년엔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1462년 마침내 영의정부사직(영의정)에 제수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 부사직을 사직한다. 하지만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에 따라 한명회와 함께 원상으로 서무를 결재하는 데 참여하고, 이듬해 예종이 죽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데 성공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 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다.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 출신 벗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이른바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롭게 만들었다.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거' 등의 작품을 남겼다.
[5. '세조실록'편찬 경위]
'세조실록'은 총 48권으로 본문 47권과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록에 종묘와 제례에 쓰는 음악 악보를 수록한 점이 특징이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세조혜장대왕실록'이며, 1455년 윤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13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세조실록'편찬 작업은 1469년(예종 1년)4월에 시작하여 1471년(성종 2년)에 완료되었다. 이 작업은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 작업을 거친 상태여서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4월초에 1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른바 '민수의사옥'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록 편찬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사건의 발단은 사초를 거둘 때 사간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간에서는 사초에 서명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명을 할 경우 소신껏 쓸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왕명에 따라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수는 사관시절에 대신들에 대해 비판을 많이 가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사초를 몇 군데 뜯어고쳤다. 이것이 발각되자 예종은 민수를 제주에 관노로 보내고 서명을 반대하던 사관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실록 편찬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종이 죽고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2년 만인 1471년 12월 15일에 완성되어 성종이 찬진을 마쳤다. 이 편찬 작업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영관사에 신숙주와 한명회, 감수에 강희맹과 양성지 등이었고, 나머지 58명이 실무를 담당했다.
세조 시대의 세계 약사
이 당시 중국의 명에서는 대지진이 발생해 전국이 기근과 가뭄에 시달려 혼란에 빠졌으며, 일본에서는 '응인의 난'이 일어나 본격적인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유럽은 독일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이 창립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공공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로마에 처음으로 인쇄소가 설치되어 문화적인 발흥을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의 비용이 1462년에 '유언시집'을 간행하고 이듬해 죽었다.
조선왕조 제7대 세조
왕위찬탈의 조짐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 대신파로 나뉘었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 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리고 힘 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 노골화한 것이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지경이었다. 해서 고명대신들은 수양을 견제하고자 비교적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안평과 손을 잡고 수양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자 결국 수양은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 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수양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눈을 따돌리고자 이 거사를 단행 하기 6개월전에 명나라의 사은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명나라를 다녀온 다음 곧바로 이 거사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거사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일어났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 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 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 인, 정 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 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왕으로 등극한 수양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 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 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7대 왕 세조이다. 이 대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의 치세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 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 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 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회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또한 '동 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다.
또한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또한 1460년에는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호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을 복구했으며, 이듬 해인 1461년 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 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 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 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 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 위 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 난 이 반란으로 한 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소흘하지 않았다. 우선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 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기강을 바로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 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측근 중심의 정치
세조는 내용에 상관 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 치게 관대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기도 하고 변방의 안정에 공이 많았던 양정이 세조의 퇴위를 희망하다 불 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한 명의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 을 살해케 했는데도 순종을 잘 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 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 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폈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 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 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상제의 도입
1468년에 탄생한 이 제도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 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 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이다.
그 외의 일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 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 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 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 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 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 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 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 며, 덕종에게도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 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 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덕종(의경세자)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 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 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