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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여행의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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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는 설도의 춘망사 4수 중 세 번째 시이다. 설도는 당대(唐代)의 기녀이다. 자는 공도(洪度).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개 770년과 832년쯤인 것 같다. 곳에 따라서는 태어난 해를 768로 보기도 하고 죽은 해를 841년으로 보기도 한다.
원적(原籍)은 장안(長安). 어려서 하급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그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8,9 살에 능히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기울어서 16세에 악적(樂籍-고급기생이 되는 것)에 올랐다.
설도의 어린 시절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와 함께 집의 정원에 앉아 있었을 때 아버지가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마당에 늙은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치솟았구나.)
그리고는 어린 딸에게 대구(對句)를 하라고 했다. 설도는 즉시 이렇게 대답했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가지는 남쪽과 북쪽에서 오는 새들을 맞고,
잎은 오고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
이것을 듣고 그 아버지는 슬퍼했다고 한다. 새와 바람이 오고 간다는 것은 고급 기생에 대한 시적인 표현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설도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설도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났다. 그녀는 그 지방의 군사장관이었던 웨이가오(韋?, Wei Gao)라는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설도를 공식적인 관명인 "교서(校書, Collator)"를 부여해 주었고 후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그렇게 대우했다.
웨이가오는 805년(설도 약 35세)에 사망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그녀를 계속, 그러니까 약 20년 동안, 돌봐주었다. 웨이가오가 죽으면서 설도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겨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머지 생애 동안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녀는 악적(樂籍)에서 나온 후로 끝내 시집가지 않았다.
설도의 말재주와 재능에 관한 일화가 있다. 한 자사(刺史, 관직명)가 잔치자리에서 천자문령(千字文令) 문제를 냈다. (令은 문체(文體)의 일종이다.) 즉 천자문 중에 물고기, 짐승, 새를 포함하고 있는 구절을 대는 문제였다. 그 자사는 먼저 "유우도당(有虞陶唐)"[이 말은 순임금과 요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유우는 순임금을 말하는데, 그는 처음에 우나라를 세웠고 후에 요임금으로부터 임금을 물려받았다. 도당은 요임금을 말하는데, 그는 처음에 도라는 곳에 살다가 당이라는 곳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한다.]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虞)는 중국말로 어(魚)와 같은 음이 나기 때문에 장난을 친 것이었다.
설도가 대답했다. "좌시아형(佐時阿衡)."[아형은 은대(殷代)의 재상인데, 이 말은 때를 돕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자사가 물었다. "그 말 속에는 물고기나 새 같은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지 않소? 마땅히 벌을 받아야 겠소." 그러자 설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형(衡)'자에는 가운데 작은 '어(魚)'자가 들어있는데 당신의 '유우도당(有虞陶唐)'에는 '어'자가 하나도 없네요." 그래서 좌석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다른 얘기에는 고변(高騈)이란 사람이 촉(蜀: 삼국시대 때 유비가 세운 나라 이름. 수도가 성도였기 때문에 성도 주변 지역을 이렇게 부른다)에 진(鎭)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설도에게 한 줄 짜리 글을 짓게 했다. 그러면서 조건을 달았다. "반드시 한 글자가 형상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운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먼저 글을 지어 보였다. "구사몰량두(口似沒梁斗)"[입은 망가진 수수(곡식이름) 말(곡식을 담는 용기) 같도다.] 구(口, 입)에 관한 형상을 묘사하면서 구(口)와 두(斗)가 운을 이루고 있어서 자신이 내건 조건에 잘 맞고 있다.
설도가 즉시 대답했다. "천사삼조연(川似三條椽)"[시내는 세 개의 서까래 같도다.] 이것도 천(川, 시내)가 세 줄기 서까래같이 흐르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고 천(川)과 연(椽)이 운을 잘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시내가 세 개의 서까래 같다? 의아해서 고변이 물었다.
"어찌 한 개의 구부러진 물건 같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자 설도가 대답했다. "상공(相公)께서는 서천(西川)의 절도사(節度使)이신데도 항시 망가진 말(斗)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술을 다함에 있어 서까래 세 개만큼 해야 하는데 다만 대수롭지 않은 구부러진 것 하나만큼을 하고 있어도 어찌 이상타 하겠습니까?!"
입이 망가진 말(斗) 같다는 고변의 말을 받아서 그럼 당신의 입이 그렇게 망가진 말이라는 소리냐, 그래서 이렇게 대접이 소홀한 것인가 하는 뜻이었다. 그가 다스리고 있는 곳인 서천(西川)을 '천'(시내)으로 비유하며 교묘히 자기 주장을 끄집어 낸 것이었다. 과연 좌객들이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변'이란 인물에 대해 찾아보니 821(?)-887에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설도와 시대가 맞지 않는다. 관리의 이름이 혼동되어 구전되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도는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설도를 얘기할 때 원진(779 - 831, Yuan Zhen)은 좀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는 설도보다 10여세 연하였다. 자는 미지(微之). 9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을 개척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경박하고 속되다며 비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권력 다툼에 기인해서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이것이 대략 809년의 일이다. 약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얼마 지나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 날을 기약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가 그의 처가 되기를 바랬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는데, 그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 위씨가 원진을 따르려 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게 되었다.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난새(鸞새)가 되어 버렸다.
조금 다른 얘기에서는 원진이 설도를 만날 때 약 30세의 나이였는데 이미 처가 있었고, 설도를 만난 후 약 2년 후에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 또 배(裴)씨 여자를 들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는 설도에 대해 단지 풍류끼를 발휘한 것이고 처음부터 설도와 함께 맺어질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두 사람은 설도의 조건 때문에 맺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설도는 악기(樂妓)였고,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명문 출신은 아니었고, 설도의 나이는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다. 사람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했다.
설도는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살았다. 집이 창포(菖蒲) 꽃으로 가득했고, 설도는 대나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성도에는 현재 설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망강루(望江樓)공원이 있는데 약 130 종 이상의 대나무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성도의 종이의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곧 완화계의 맑은 물을 사용하고 연꽃즙을 집어넣고 해서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이 종이를 "설도전"(전 = 箋: 작은 종이의 뜻) 또는 "완화전"이라고 부른다. 그 후에 많은 문인들이 이 종이에 대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사회도 산업화로 인해 민간에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거의 사라져 있기에 중국에서는 '설도전'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만민속촌(台灣民俗村)에는 과거에 어떻게 종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 관의 이름이 바로 '설도장(莊)'이다. 설도는 계속 시를 썼고, 후에,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의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약 45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약 90수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도 당대(唐代)의 어떤 여류 시인의 글보다 많다.
'동심초' 시는 설도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것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녀를 돌봐주고 총애해 주던 웨이가오를 향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웨이가오가 죽고 나서 만나 연모하게 된 원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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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는 무엇일까?
노랫말을 보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로 시작하고 있어 "아! 동심초 꽃잎이 바람에 지는구나"하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전에 보면 동심초라는 단어가 없다. 중국말 사전에도 동심초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동심초라는 꽃이나 식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동심초는 무엇이란 말인가? 동심초는 무슨 풀이름이 아니라 바로 연서(戀書), 곧 러브레터란다. 그런데 왜 '풀 초(草)'가 들어가는가?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러브레터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방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설명을 듣고 이 시를 다시 살펴보자. 괄호안에 풀어놓은 설명을 주목하면서 말이다.
攬結草同心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사랑의 편지 써서는 곱게 접어)
將以遺知音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네 (내 맘 아실 이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 봄 시름은 그렇게 끊어 졌건만(편지 쓰는 동안에는 행복했건만)
春鳥復哀吟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쓴 편지 부칠 길이 없어 슬퍼지네)
風花日將老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그리워 하다가 세월만 흘러가는데)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만나 볼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네)
不結同心人 무어라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할 사람인데)
空結同心草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부질없이 편지만 쓰면 무엇하나)
또한 여기에서 不結同心人도 김억의 번역처럼 마음과 마음을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할 사람' 이 바른 번역이라고 한다. 바로 윗 구절에 이미 "내 마음 아시는 분께 보내려 하네" 가 나오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空結同心草도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 아니라 "헛되이 편지만 접었다가 폈다 하네"가 바른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체의 바른 번역은 ‘한 마음이지만 맺어지지 못할 사람이라 그걸 알면서도 헛되이 연애편지만 썼다가 찢었다가 하네 (혹은 접었다 폈다하네)’ 가 된다는 설명이다. 즉 부치지도 못할 편지 써놓고는 하릴없이 접었다고 펴고 접었다고 펴고 하는 여인의 애타는 현실을 그린 것이 된다.
'월명사'라는 ID를 가진 블로그에서 발견한 이 설명이 그럴 듯 하다. '동심초'노래를 들으면서 김안서의 번안으로 된 노래가사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를 따라 부르기는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춘다면, 이 설명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同心結은 옛날 연애편지를 접는 방식 또는 그 편지이며,그밖에도 사랑의 정표의 의미로 화초나 물건으로 만든 여러 가지 매듭, 혹은 장식물의 총칭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同心은 한마음이나 막연한 상징물이 아니라 바로 同心結로 마음을 담은 러브레터라는 설명인데 보다 구체적이고 멋있지 않은가? .
이 한시의 원작자 설도(薛濤 대략 770~832)는 중국 당대(唐代)의 유명한 기녀이며 문학인이다. 우리나라의 황진이에 비견할 수 있을까? 어렸을적 부터 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나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인 백거이(白居易), 원진(元 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등과 교류가 많았는데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으며,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는 감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명작이 많아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하는데 약 450편의 시를 썼지만 90수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 든 동심결, 동심초에 대한 설명이 러브레터라는 설명이 더 맞을 수 있는 것은, 중국에 설도전(薛濤箋)이라고 하는 편지지가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설도는 만년에 시성 두보(杜甫)의 초당으로서 유명한 성도(成都)의 서교(西郊)에 있는 완화계(일명 백화담) 근처 만리교 근방으로 은거하였는데 이 근처는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어서 설도는 심홍색 종이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촉의 명사들과 시를 증답(贈答)하였다고 하며 그것이 풍류인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심초의 바른 번역은 '사랑의 편지' 혹은 현대식으로 러브레터가 맞는 것 같다. 이런 점을 당시의 뛰어난 시인인 김안서가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당시 시중에 도는 번역문만 참조해서 번안하다 보니 마치 꽃이름처럼 되어버렸고, 그러다 보니 동심초라는 꽃도 우리나라에는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떨까? 우리나라 소프라노들이 부르는 동심초는 '마음이 통하는 꽃'이란 듯처럼 보이는 그것 그대로도 좋지 않은가? 우리가 세상일을 모두 다 알고 살수는 없다. 적당히 알면서 즐기는 것도 인생이다. 으악새가 새면 어떻고 풀이면 어떤가? 동심초가 꽃이면 어떻고 사랑의 편지면 어떤가? 모두 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인데.(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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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望詞四首 춘망사 4수
花開不同賞 꽃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고,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질 때에.
攬結草同心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將以遺知音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 봄 시름 그렇게 끊어 버렸건만,
春鳥復哀吟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風花日將老 꽃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
那堪花滿枝 어찌 견디리 꽃 가득 핀 나뭇가지,
번作兩相思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눈물이 주르르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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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 설도와 망강루 성도의 동남쪽 장강의 지류인 금강변 대나무들이 무성한 곳에 당나라 시대 여류시인 설도(薛濤·768~832)를 기리는 망강루가 있다. 김성태가 작곡한 ‘동심초((同心草)’는 여류시인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중 일부(其三)를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망강루 정문을 들어서면 대밭이 울창하게 펼쳐있다. 설도는 일생동안 대나무를 자신의 지조에 견주어 사랑하며 시를 통하여 대나무의 미덕을 찬미하였다. 대밭을 지나 좀 더 들어가면 설도의 기념관이 나타난다. 기념관 주변에는 설도의 상이 세워져 있어서 마치 그녀가 대밭 주변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그곳에는 설도(薛濤)가 남긴 시와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설도는 768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다.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 성도로 이사왔으나, 아버지가 죽자 20세 전후하여 기생이 되었다.
당시 절도사 위후는 그녀의 재능을 총애하여 교서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절도사의 후원으로 당시 백거이들과도 교우하였다 한다. 설도는 평생 500여 시를 썼으나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100여수. 절도사 위후가 죽은 뒤 한 때 11세 연하의 감찰어사 원진과 의기투합하기도 하였으나 사랑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원진을 흠모하며 지은 시가 바로 ‘춘망사‘이다. 설도(薛濤)의 기념관을 나서면 완천정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꽃무늬 그림이 박힌 고운 편지지를 만들어 내었다. 이 편지지에 그녀는 시를 적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편지지를 만들기 위해 닥지에 사용했던 우물인 설도정(薛濤井)이 자리잡고 있었다.
망강루는 설도를 추모하기 위해서 청나라 시절 세워진 누각이다. 망각루에 올라서면 금강이 훤하게 펼쳐져 보인다. 망각루 층층마다 설도(薛濤)의 명시가 걸려 있었다. 4층 누각에 걸려 있는 망각루의 현판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팽진(彭眞·1902~1997)의 휘호이다. 공원 한편에는 설도의 묘가 있었다. 이 묘는 문화혁명 당시 진부한 문화라는 이유로 파헤쳐졌다가 훗날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