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구경험방 집필지 공주 허임 선생 제향에 '국민에게 침구사를!' 기원 행사
침구의(鍼灸醫) 허임 선생의 후예 침구사 양성제도 시행 바램 담아
2020년과 2021년 5월에 이어 2022년에도 침구경험방 집필지에서 공주시 주관 허임 선생 기념 제향이 있었습니다.
2022년 5월 15일 오전 11시 침구경험방 집필지 기념비 앞(공주시 우성면 내산1리 마을회관 앞) 조병진 공주 민예총 회장(공주 허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 진행한 이날 제향에서는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기간이라 초헌에 이일주 공주문화원 원장이 맡았고, 아헌에 손중양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대표이사, 종헌은 허성 12대 허임 선생 후손이 했고, 축문 은 마을에 임일수 선생님이 낭독했습니다.
이날 허임 선생 제향에서는 특별 순서을 마련하여 “국민에게 침구사를!” 헌법소원 자료집 9권을 올리고, 현행 의료법을 개선하여 침구사 양성 제도가 조속히 시행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2021년 5월22일에는 공주시 김정섭 시장이 초헌을 하고, 지방정부에서 허임 선생 기념제향을 하는 뜻을 직접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날도 조병진 허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 진행을 맡았고, 공주시 의회 이동훈 의장, 문화원 최창석 원장,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손중양 대표 외 여러분이 허임 선생을 기리는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허임 선생은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역사 인물!]
침구의(鍼灸醫) 허임 선생은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 때 전시 최고 사령부에 해당하는 광해군 분조(分朝)와 동행 하며 야전부대의 군관민을 일선에서 치료한 종군의사였습니다. 출신에 의한 계급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에 허임 선생은 오직 침구술로 선조와 광해군과 인조에 이르기까지 임금을 치료할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발휘했습니다.
세 임금을 치료하던 당대의 명의가 충청남도의 농촌마을 공줏; 우성면 뜸밭골로 귀촌하여 의술을 베풀며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표 침구전문서 침구경험방을 집필하였습니다. 『침구경험방은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데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허임 선생의 침구경험방은 중국과 일본 등지로 퍼져나가 조선의술의 ‘한류’(韓流)를 이끌었고, 동의보감과 나란히 국제적인 인술(仁術) 교류의 대표서적이 되었습니다.
처음 침구경험방 간행을 추진한 당시 내의원 제조 이경석 선생은 1644년 5월(음력 4월) “침과 뜸은 구비하기 쉬우면서도 그 효과가 매우 빠르다”며 “세상이 공유하여 널리 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문을 썼습니다.
이에 허임 선생과 선조들의 인술(仁術)에 대한 귀한 뜻이 담겨있는 침구경험방이 마침내 세상에 나온 5월을 우리는 ‘허임의 달’로 정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참고1] 광해군 분조(分朝) : 임진왜란으로 삼도(三都 : 한양·개성·평양)가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적이 침략하여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선조는 장차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목적으로 의주방면으로 갈 때 평안도 박천에서 왕세자인 광해군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때 조정을 갈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를 ‘원조정(元朝廷)’이라 하고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分朝)’라 하였다. 즉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소조정(小朝廷)이었다. 이에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등 10여인의 중신들이 광해군을 따라 분조에 귀속되었다.
광해군은 종묘사직을 이끌고 평안도의 맹산·양덕, 황해도의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분조를 두고 남조의 장수들과 각 처의 의병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격려하고 상을 내리고 관(官)에 임면(任免)하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와 위험을 느끼게 되자 다시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성천으로 갔다가 다시 영변으로 가서 분조를 이끌어갔다.
1593년(선조 26) 4월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도 광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역까지 다니며 군민을 격려하며 민심수습에도 크게 공헌하였다.이로 인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해군 분조에 호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책록하였으나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폐삭(廢削)되었다.
[참고2] 침구술은 고려시대부터 분과적으로 발전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초기부터 침구 전문의를 분리시켜 침구의(鍼灸醫) 의과고시(醫科考試)를 따로 실시하였다.
조선에서 침구의(鍼灸醫)는 침의(鍼醫)라고 불렀다.
1438년(세종 20) 3월에 침구전문생을 매년 3인씩 뽑아 전의감(典醫監)·혜민국(惠民局)·제생원(濟生院)의 3의사(醫司)에 각각 1인씩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침구 전문의로서 분과된 처음이다.
『경국대전』의 의과취재(醫科取才)에 침구의(鍼灸醫)는 다른 의원들과 분리되었으며, 고시과목으로 『찬도맥 纂圖脈』·『화제지남 和劑指南』·『동인경 銅人經』은 기송(記誦)하도록 하고 그밖에 『직지맥 直指脈』·『침경지남 針經指南』·『자오유주 子午流注』·『옥룡가 玉龍歌』·『자생경 資生經』·『외과정요 外科精要』·『십사경발휘 十四經發揮』·『침경적영 針經摘英』 등은 임문(臨文)하게 하였는데, 이런 방서들은 거의 중국의 침구 전문서들이다.
그리고 『향약집성방』에도 침구편(針灸篇)이 따로 분리되었는데 본편에서는 송나라의 왕집중(王執中)이 편집한 『자생경』을 주로 인용하였으며, 그 뒤 침구 전문서로서 세종 때의 의관 전순의(全循義) 등이 엮은 『침구택일편집 鍼灸擇日編集』과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이 엮은 『침구요결』 등을 들 수 있다.
침구 전문의를 분리시키고 침구 전문서를 편성한 것은 우리 침구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침구의(鍼灸醫))]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분조(分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