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地將軍玉果彌羅寺大捷碑樹立除幕式擧行
정지장군옥과미라사대첩비수립제막식거행
고려말엽 6백30년 전 왜구는 매년 백회 이상 침구하여 한반도 전역을 강타 침탈 방화 납치 살인등 갖가지 알랄한 방법으로 횡폭 사회를 혼란시키고 민심은 흉흉하고 국내정치는 명.원 정쟁속에 많은 조공을 요구하여 왔고 북쪽에는 홍건적등 흉노 남은 왜구의 잦은 침구로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남해안 주민은 생활터전에 농지를 버리고고향을 이주하여 연명하기가 어려웠다 곡성지역은 순천광주 7회에 비하면 3회로 경미한 편이다 정지장군은 중랑장으로 왕을 모시면서 왜구토벌 평구책을 헌책하여 전라도 안무사로 천호공명첩으로 목포연해에 방위군을 설치순천병마사로 호남지역 방어책임자로 순천낙안에서 2회에 왜구를 토벌하여 쌀 안장 갖춘말 백금 오십량을 하사받고 영광군백수면 구수포로 침구한 왜구 사오백명이 방화 약탈하므로 추격하여 광주 화순 동복을 거쳐 도망해 갔다 아군이 철옹산성에 주둔당시 도주하여 옥과현 장파봉아래 미라사에 총집결 정보를 듣고 추격 완전 포위하여 왜구는 독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다 수백명의 왜구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차례 공격을 감행 해왔으나 탈출의 기회를 노렸으나 용납되지 않았고 오히려 왜구의 잔인성만 보여주었다 아군의 철통간은 포위망을 뚫지 못했고 계속 아군은 투항 요구에 오히려 저항해 왔다 장군의 지혜로 산등성이부터 불태우기 시작하여 완전소사 전멸에 이르게 되었다 마전리 앞 절골 산 계곡에 미라사 절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원부대인 지용기 부대는 하루속히 전쟁을 종결 짓고 복귀를 재촉해왔다 수백여명의 왜구와 절은 일순간에 재로 산화 되고 말았다 전쟁은 쉽게 끝나고 왜구의 전마 100필을 로획하고 이번전쟁은 정지장군의 지략과 용병술이 크게 작용했다 1378년 우왕4년 정지장군 32세에 10월의 가을철이었다 우왕은 정지장군과 지용기 장군에게 어찰과 은자 오십량씩 각각 하사하였다 옥과주민들은 전승을 축하 3일간 잔치를 벌려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숨돌릴 사이없이 11월 담양에 왜구 출현하여 17명을 사살하고 이듬해 순문사에 승진되었다 이어 진포 관음포해전에 아군 47척으로 왜구대형함정 120척을 쳐부수고 해도원수 문하평리로 요동정벌에 안주도 도원수 2등공신으로 양광도전라경상도지휘사 도정제체찰사 1`1회의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 되었으나 부임 못하고 45세의 일기로 서거하셨다 미라사 있던 산은 장파봉으로 불러오고 인근 마을은 마전리로 옥과팔경에 장파사루 (將坡師淚)6백년간 애환이 전해왔다 고려말에 정지장군은 최영장군과 이성계장군 3인 체제가 국방이 오직 왜구퇴치에 생애를 바쳐 민족정기에 귀감으로 기리기리 받들기를 충심으로 바라며 조선왕조에 정치적 안정과 임진왜란시 이순신장군의 대첩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수군창설과 화약제조로 화포사용 싸움배 천척을 만들어 임진왜란에 밑거름이 되었다
구전하는 도리깨타령은 정지장군의 승첩을 여실히 전해주고 있으며 오늘날 절골은 수백명의 왜구혼은 자고 새소리만 남았다 장파봉아래 역사의 처참한 현실을 현창하며 정지장군의 대첩비를 정부의 지원받아 건립하였고 항왜정신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2016년 3월 26일 곡성군 겸면 남양리 장파봉아래 목화공원 국도변에서 유근기 군수님이하 각급기관장 유림하동정씨 자손 주민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정지장군연구유적보존회장
정득채 제공 061-360-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