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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이정립선생
高夫人神政記
머 릿 말
제일장(第一章) 봉사시대(奉事時代)
제이장(第二章) 제일교단시대(第一敎團時代)
제삼장(第三章) 제이교단시대(第二敎團時代)
제사장(第四章) 제삼교단시대(第三敎團時代)
제오장(第五章) 은거(隱居)와 선화(仙化)
재판(再版) 편집후기(編輯後記)
高夫人神政記
머 릿 말
증산천사(甑山天師)께서 고부인(高夫人)을 수부(首婦)로 맞아들이사 천지공사(天地公事)의 후계사명(後繼使命)을 지워주시고 인(因)하여 종통연원(宗統淵源)을 내리셨음은 여러 제자(弟子)들의 증언(證言)은 고사(姑捨)하고라도 천지(天地)굿 공사(公事)와 세 살림 부탁(付託)과 연령가감(年齡加減)의 훈화(訓話)로서 증명(證明)된 바이다. 그 후(後)로 신해년(辛亥年) 구월(九月)에 대흥리(大興里)에서 부인(夫人)이 신도(神道)가 열림으로 인(因)하여 포교운동(布敎運動)이 개시(開始)되니 제일교단(第一敎團)이 성립(成立)되었음을 비롯하여 조종(祖宗)골의 제이교단(第二敎團)과 용화동(龍簧)의 제삼교단(第三敎團)을 통(通)하여 구비구비 새 기틀이 열릴 때마다 매양 신정(神政)의 행사(行事)가 있은 뒤에 새로운 사태(事態)가 발전(發展)되여 왔었다. 그리하여 부인(夫人)의 신정행사(神政行事)는 교회발전사(敎會發展史)와 표리연관(表裏聯關)의 관계(關係)가 있었으므로 이제 신정(神政)의 중요(重要)한 행사(行事)를 수집(蒐集)하여서 교우(敎友)들에게 신앙과본(信仰課本)의 보충자료(補充資料)로 제공(提供)하는 바이다.
대순(大巡) 구십삼년(九十三年) 십일월(十一月)
후학(後學) 이정립(李正立)씀(書)
재판(再版) 편집후기(編輯後記)
본서(本書)를 천후신정기(天后神政記)라 명명(命名)하니라.
종사(宗師)께서 초유(初有)에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라 서명(書名)을 정(定)하고 송문섭(宋文燮)이 필경(筆耕)하니, 이 책은 오장(五章) 분류(分類)에 총(總) 백삼십이면(百三十二面)으로서 등사(騰寫) 출판(出版)했던 바이다.
이제 재판(再版)을 내면서 고구(考究)하건대, 두 가지를 보완(補完)해야 되겠음을 절감(切感)하게 되니, 첫째는 서명(書名)에 있어서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를 천후신정기(天后神政記)로 하고, 둘째는 유장무절(有章無節)로 인하여 독자(讀者)로 하여금 기억(記憶)한 대목(大目)을 분간(分揀)하여 찾아보기가 어려우므로 쉽게 하고자 절(節)을 붙이니, 이후(以後) 학인(學人)은 근송축독(謹頌祝讀) 하여 영세불망(永世不忘) 할지니라.
大巡 百十五年 二月 十八日 회상(回祥) 정영규(丁永奎) 씀
제일장(第一章)
봉사시대(奉事時代)
1. 천후(天后)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본(本)은 장택(長澤)이요, 이름은 판례(判禮)니, 이조(李朝) 고종(高宗) 경진(庚辰) 삼월(三月)에 전라도(全羅道) 담양군(潭陽郡) 무면(武面) 성도리(成道理)에서 탄생(誕生)하시니, 부친(父親)의 이름은 덕삼(德三)이요, 모친(母親)은 박씨(朴氏)니라.
2. 박부인(朴夫人)이 기묘년(己卯年) 오월(五月)에 어느 절에서 기도(祈禱)할 새, 하루밤 꿈에 높은 산(山)에 올라 굉장(宏壯)한 집에 들어가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冊)과 누런 책(冊) 각(各) 한권(一卷)씩 주거늘 부인이 받아가지고 놀라 깨었더니, 이로부터 잉태(孕胎)하여 천후(天后)께서 탄강(誕降)하시니라.
3. 천후(天后) 낳신지 여섯달만에 부친상(父親喪)을 당(當)하시고, 아홉 살에 모친(母親)을 따라서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대흥리(大興里)에 이사(移徙)하시고, 이로부터 이숙(姨叔) 차치구(車致九)를 좇아 동학(東學)을 믿으시니라.
4. 정미년(丁未年) 동짓달 초이튿날 천사(天師)께서 순창(淳昌) 농(籠)바우로부터 대흥리(大興里)에 오실새, 태인(泰仁) 행단(杏壇)에 이르사 차경석(車京石)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首婦)를 들여세우라 하시니라.
5. 차경석(車京石)이 천사(天師)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 이종매(姨從妹) 고씨(高氏) 천후(天后)를 천거(薦擧)하니, 동지달 초사흩날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를 맞아 결혼(結婚)하실 새,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만나려고 십오년(十五年)동안 정력(精力)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맡기리라 하시며, 이날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를 옆에 끼시고 붉은 책(冊)과 누런 책(冊)을 각각 한권씩 앞으로부터 번갈아 깔며, 그 책(冊)을 밟아 방(房)으로부터 마당에 나가사 남쪽 하늘에 별을 바라보고 네 번 절하라 하시고, 다시 그 책(冊)을 번갈아 깔며 밟아서 방(房)에 들어오게 하시니라.
6. 그 후 모든 일을 가르치시며 문명(文命)을 쓰실 때에도 반드시 천후(天后)의 손에 붓을 쥐게 하시고, 천사(天師)께서 등 뒤에 겹쳐 앉으사 천후(天后)의 손목을 붙들어 쓰이시니라.
7. 초나흗날 백미(白米) 한 섬을 방(房)에 두시고, 백지(白紙)로 만든 고깔 이십여개(二十餘個)를 쌀 위에 놓고, 엽전(葉錢) 아흔 양(兩)과 메주콩 한 너레기와 성냥 아홉 통과 청수(淸水) 아홉 그릇을 놓고, 천후(天后)로 하여금 종이에 글을 쓰이사 불사르시고 가라사대 '물과 불만 가지면 비록 석산(石山) 바위위에 있을지라도 먹고 사느니라' 하시고 그 백미(白米)로 밥을 지어 이날 모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니라.
8. 무신년(戊申年) 정월(正月)에 천사(天師)께서 종도(從徒) 십여인(十餘人)을 뜰아래 늘어 세우신 뒤에 천후(天后)와 더불어 마루에 앉으사, 차경석(車京石)을 명(命)하여 망치를 들고 천사(天師)와 천후(天后)를 치며 동상례(同床禮)를 받게하시니, 천후(天后)는 방(房)으로 뛰어 들어가시며 가로대 죽으면 한 번 죽을 것이요, 두 번 죽지는 못하리라 하시니 천사(天師)께서 크게 칭찬(稱讚)하시고, 다시 안내성(安乃成)에게망치를 들리사 경석(京石)을 치며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으니 경석(京石)이 역모(逆謀)를 하겠다고 대답(對答)하는지라. 이에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 나이는 스물 아홉이요, 내 나이는 설흔 여덟이라. 내 나이에서 아홉 살을 감(減)하면 내가 너 될것이요, 네 나이에서 아홉 살을 더하면 네가 나될지니, 곧 내가 너되고 네가 나되는 일이니라' 하시니라.
9. 하루는 걸군(乞軍)이 들어와서 굿을 친 뒤에,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고 친(親)히 장고(長鼓)를 들어메고 노래를 부르시며 가라사대 '이것이 곧 천지(天地)굿이라. 나는 천하일등재인(天下一等才人)이요, 너는 천하일등무당(天下一等巫堂)이라. 이 당(黨) 저 당(黨) 다버리고 무당(巫堂)의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인(因)하여 천후(天后)에게 무당도수(巫黨度數)를 정(定)하시니라.
10.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반듯이 누우신 뒤에, 천후(天后)로 하여금 배위에 걸터앉아 칼로 배를 겨누며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定)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라고 다짐을 받게하시고, 천사(天師)께서 허락(許諾)하여 가라사대 '대인(大人)의 말에는 천지(天地)가 쩡쩡 울려나가나니, 오늘의 이 다짐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으리라' 하시며 이도삼(李道三), 임정준(林正俊), 차경석(車京石) 세사람으로 증인(證人)을 세우시니라.
11.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이경문(李京文)을 명(命)하사 천원(川原)에 가서 일등교자(一等轎子)와 일등하인(一等下人)을 구(求)하여 오라하사, 교자(轎子)를 마당에 꾸며놓고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와 더불어 나란히 앉으사 구릿골로 가자 하시며 길을 재촉하시다가 정지(停止)하시니라.
12.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구릿골에 계실새 차윤칠(車輪七)이 가서 뵈오니, 천사(天師) 윤칠(輪七)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 매씨(妹氏)를 잘 공양(供養)하라. 네 매씨(妹氏)가 굶으면 천하(天下) 사람이 모두 굶을 것이요, 먹으면 천하(天下) 사람이 다 먹을 것이요, 눈물을 흘리면 천하(天下) 사람이 다 눈물을 흘릴 것이요, 한숨을 쉬면 천하(天下) 사람이 다 한숨을 쉴 것이요, 기뻐하면 천하(天下) 사람이 다 기뻐하리라' 하시니라.
13. 천사(天師)께서 매양 천후(天后)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가라사대 '너는 복동(福童)이라. 장차(將次) 천하(天下) 사람의 두목(頭目)이 되리니, 속(速)히 도통(道通)을 하리라' 하시니라.
14.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없으면 크나큰 세 살림을 네가 어찌 홀로 맡아 하려 하느냐' 하시니라.
15.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차경석(車京石)에게 명(命)하사 세숫물을 가져오라 하시니, 경석이 세숫물을 가져다 올리고 나가거늘, 천사(天師) 경석(京石)을 손가락질 하며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 살기(殺氣)를 보라. 경석(京石)은 만고대적(萬古大賊)이라. 자칫하면 내 일이 낭패되리니, 극(極)히 조심(操心)하라' 하시니라.
16.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의 손 등을 물으시니 청독이 크게 앉는지라. 천사(天師) 가라사대 '네게 여덟가지 큰 병(病)이 있는데, 그 중(中)에서 단독(丹毒)이 가장 크므로 이제 단독(丹毒)은 없앴으나, 남은 병(病)들을 내가 없으면 어찌 하려느냐' 하시니라.
17.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태인(泰仁) 새올에 계시면서 박공우(朴公又)를 보내어 경석(京石)을 부르시거늘, 경석(京石)이 가 뵈이니 천사(天師)께서 돈을 주시며 돌아가서 쌀을 사서 놓으라 하셨더니, 경석(京石)이 그 돈을 사사(私事)로 써버린지라. 그 뒤에 천사(天師)께서 오시어 천후(天后)에게 물어 가라사대 '쌀을 많이 사놓았느냐'. 천후(天后) 대(對)하여 가로대 '알지 못하나이다'. 천사(天師) 경석(京石)을 불러 물어 가라사대 '일전(日前)에 새올서 네게 돈을 주며 쌀을 사라 하였더니, 네 매씨(妹氏)에게 그 말을 고(告)하지 아니하였느냐'. 경석(京石)이 대(對)하여 가로대 '고(告)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거늘, 이 뒤로는 천사(天師)께서 모든 일을 경석(京石)에게 부탁(付託)하지 아니하시고 바로 천후(天后)와 의논(議論)하여 조처(措處)하시니라.
18. 팔월(八月) 열려드렛날 저녁에 천사(天師)께서 말을 타고 오시어, 곧 안중선(安重宣), 차윤경(車輪京)을 불러 명(命)하여 가라사대 '이길로 구릿골로 가서 일등교자(一等轎子)와 일등하인(一等下人)을 구(求)하여, 날 밝기 전(前)에 당(當)하여 오라. 내일(來日) 수부(首婦)를 데리고 구릿골로 이사(移徙)하리라' 하시니, 두 사람이 명(命)을 받고 곧 떠나니라. 이튿날 아침에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구릿골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질 것이요, 이곳에 있으면 네 몸이 크리니, 이곳에 있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홀로 떠나 살포정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만남에, 드디어 말을 버리고 교자(轎子)를 바꾸어 타시고 구릿골로 가시니라.
19. 시월(十月)에 천사(天師)께서 구릿골로부터 오시어, 종도(從徒)들과 함께 밖에 나가사 무(蕪)를 뽑아 나누어 잡수시며, 내일(來日) 천후(天后)를 구릿골로 데려가실 의논(議論)을 하시고 들어오사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털토수(吐手)와 남바우를 네가 쓰고, 우리 둘이 걸어갈지라. 우리가 그렇게 걸어서 천천히 구경(求景)하며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저 양주(兩主)는 둘이 꼭같아서 천정연분(天定緣分)이로다 하리니, 세상(世上) 사람은 우리를 구경(求景)하고 우리는 세상(世上) 사람을 구경(求景)하며 슬슬 걸어가는 것이 좋으리라' 하시더니, 그 이튿날 다시 말씀치 아니하시니라.
20. 동지(冬至)달에 천후(天后) 안질(眼疾)을 얻으시거늘 윤경(輪京)이 구릿골에 가서 천사(天師)께 고(告)하였더니, 스무이렛날 밤에 천사(天師)께서 종도(從徒)들을 데리고 오시어, 수저를 돌려 저녁밥을 함께 잡수시며 종도(從徒)들을 명(命)하사 [경주용담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대선생전 여율령 심행 선지후각 원형이정 포교오십년공부(慶州龍潭 大道德 奉天命 奉神敎 大先生前 如律令 審行 先知後覺 元亨利貞 布敎五十年工夫)]를 읽게하시고,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를 팔에 안아 재우시더니 날이 장차 밝으려 할 때에 천후(天后) 잠을 깨어 눈을 뜨니,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많이 흘러내리고 인(因)하여 안질(眼疾)이 나은지라. 수일(數日)동안 천후(天后)의 안력(眼力)을 검사(檢査)하실 새, 기(旗) 수십개(數十個)를 세우고 그 아래 한사람씩 세우신 뒤에 사람의 이름을 낱낱이 물어 알게 하시고, 또 깃발에 글자를 써놓고 낱낱이 물어 알게하시고, 밤에는 등(燈)불을 향(向)하여 불 모양(模樣)을 물어 분명(分明)히 알게 하시더니,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입으신 색(色)저고리를 천후(天后)에게 입히시고 밖으로 나가서 집을 돌아 뒷문으로 들어오라 하시고, 막 들어올 때에 미리 덮어두었던 양푼을 들라 하시거늘, 천후(天后) 들어보니 그 밑에 머리털 한 개(個)가 있는지라. 그 털을 들고 아뢰니 천사(天師) 가라사대 이제는 염려(念慮)없다 하시니라.
21. 모친(母親)이 단독(丹毒)을 앓는다는 기별(寄別)을 듣고 근친(覲親)하려 하다가, 천사(天師)께서 좀 기다려서 함께가자 하시므로 마음으로 기뻐하여 기다리시더니, 얼마 안되어서 모친(母親)이 들어와서 아랫방(房)에 앉거늘, 천사(天師) 가라사대 '왕대 뿌리에 왕대 나고 시누대 뿌리에 시누대 나느니, 딸 잘되도록 축수(祝手)하시라'고 부탁(付託)하시더니, 이로부터 단독(丹毒)이 곧 나으니라.
22.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마당에 말(斗)을 덮어놓고 그 위에 요(褥)를 깔고, 왼손에 칼과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앉으사 천후(天后)로 하여금 땅에 앉게 하신 뒤에 말을 가리키시고, 다시 천후(天后)로 하여금 칼과 망치를 들고 말위에 앉게 하시고 천사(天師)께서 땅에 앉으사 천후(天后)에게 말을 가리키시니라.
23. 하루는 천사(天師)께서 남(南)을 등지고 북(北)을 향(向)하여 서시고, 천후(天后)로 하여금 북(北)을 등지고 남(南)을 향(向)하여 서게하신 뒤에 그 가운데 술상(床)을 차려놓게 하시고, 무수(無數)한 글을 써서 술상 위에 놓으시고 천후(天后)와 함께 서로 절하시니라.
24. 기유년(己酉年) 유월(六月) 스무나흩날 천사(天師)께서 구릿골 약방(藥房)에서 화천(化天)하시니, 종도(從徒)들이 이 사실(事實)을 천후(天后)에게 속이고, 천사(天師)께서 청국공사(淸國公事)를 보시려고 남경(南京)에 가서 계신다고 말할 뿐이더라.
25. 천사(天師)께서 화천(化天)하신지 미구(未久)에, 천후(天后) 안질(眼疾)이 다시 도져서 심(甚)히 고통(苦痛)하시니, 경석(京石)과 윤칠(輪七)이 크게 근심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 다만 일심(一心)으로 주문을 외울 뿐이더니, 얼마 아니하여 천후(天后)의 안질(眼疾)이 절로 나으니라.
26. 하루는 경석(京石)이 김형렬(金亨烈)과 함께 변산(邊山)을 다녀와서, 사랑(舍廊)에서 서로 의논(議論)하는 말소리가 들리거늘 천후(天后) 조용(從容)히 들으시니, 곧 다른 선생(先生)을 구(求)하러 갔다가 헛걸음 하고 온 이야기라. 다녀온 일을 후회(後悔)하고는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수련방(修鍊房)을 차리고 내성(乃成)과 중선(重宣)과 더불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지라. 천후(天后) 종도(從徒)들의 이런 태도(態度)를 보시고 크게 이상(異常)히 여기시니라.
27. 이 뒤로 천후(天后) 태을주(太乙呪)를 읽으시더니, 취정회신(聚精會神)된 뒤에 혹(或) 상여(喪輿)가 들어와 보이기도 하며, 혹(或) 들것도 들어와 보이기도 하며, 혹(或) 천사(天師)의 손이 머리위로부터 내려와서 이마를 어루만져 보이기도 하며, 저녁이면 혹(或) 천사(天師)께서 평시(平時)와 같이 의관(衣冠)을 갖추어 들어오시기도 하고, 혹(或) 평시(平時)에 거가(居家)하시는 모양(模樣)으로 중우적삼과 푸단님으로 들어오시기도 하여 보이더라.
28. 하루저녁에는 천사(天師)께서 홋중우와 푸단님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앉으시거늘,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누구임을 물으니 곧 천사(天師)의 음성(音聲)으로 대답(對答)하시는지라. 천후(天后)께서 딸 태종(太宗)을 불러서 불을 켜라 하시니, 태종(太宗)이 올라와서 성냥을 그음에 천사(天師)께서 불어서 꺼버리시고, 다시 그으면 또 꺼버리사 이렇게 하여 성냥 두갑(匣)을 다 그어버린지라. 천사(天師)께서 이에 가만히 태종(太宗)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는 곧 너의 아버지이니, 아랫 방(房)에서 내가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시고, 인(因)하여 누우시며 입으신 마고자에 빛이 찬란(燦爛)한 호박(琥珀) 단추 세 개 중 두 개를 떼어서 천후(天后)에게 주시거늘, 천후(天后) 받아서 손에 쥐고 주무셨더니, 날이 밝음에 깨어보시니 천사(天師)께서 계시지 않고 손에 쥐었던 호박(琥珀) 단추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29. 경술년(庚戌年) 칠월(七月)에 천후(天后) 오른발 용천혈(龍泉穴)에 독종(毒腫)이 나서, 다리가 크게 부어 쑤시고 아파서 수십일(數十日) 동안 크게 앓으시더니, 하루저녁에는 누워서 정신(精神)없이 앓으시는 중에 문득 천사(天師)께서 삿갓을 마루에 벗어놓고 들어오사 일러 가라사대 '네가 종기(腫氣)로 얼마나 고통(苦痛)하느냐' 하시고, 친히 종처(腫處)에 싸맨 것을 풀으시고 혀로 종처(腫處)를 킮(?)으시니 즉시(卽時) 통증(痛症)이 개이는지라. 인(因)하여 곤(困)히 잠들으셨다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종처(腫處)는 나았으나 곁에서 주무신줄로 믿었던 천사(天師)께서 계시지 않거늘, 경석(京石)과 여러 집안 사람들에게 천사(天師)의 계신 곳을 물으니 아는 자(者)가 없고, 모두 이상(異常)히 여기니라.
30. 구월초(九月初) 어느날 저녁에 천후(天后) 주문(呪文)을 읽으시더니, 광명(光明) 속에 문득 대흥리(大興里)로부터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山)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草殯) 나래 두모습(?)에 시추(尸醜)물 묻은 것까지 보이므로 크게 의혹(疑惑)하시더니,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천사(天師)께서 들어오시어 일러 가라사대 '내가 죽었는데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하시거늘, 천후(天后) 대(對)하여 가로대 '어찌 상서(祥瑞)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戱弄)하시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죽었노라' 하시고 손으로 천후(天后)의 등을 어루만지시고 손을 잡으시며 이별가(離別歌) 한 곡조(曲調)를 크게 부르신 뒤에 일어나서 문(門) 밖으로 나가시며 문득 보이지 아니하신지라. 천후(天后) 크게 의혹(疑惑)하사 윤경(輪京)을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보내어 경석(京石)을 불러오사, 천사(天師)의 종적(踪跡)을 물으시고 찾아가자 하시니 경석(京石)이 가로대 '천사(天師)께서 며칠 전에 남경(南京)으로부터 구릿골로 돌아오사 큰 공사(公事)를 보시는데, 다만 한사람만 출입(出入)하며 수종(隨從)들게 하고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出入)을 금(禁)하시니, 그러므로 가 뵈옵지 못하나이다' 하는지라. 천후(天后) 할 일없어 고민(苦憫)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분(粉) 한 갑(匣)과, 독약(毒藥) 한 봉(封)과, 이왕(已往)에 천사(天師)께서 주신 흰바둑 한 개(個)와, 진주(眞珠) 한 개(個)와, 총전(總錢) 칠분(七分)과, 적은 백로지(白鷺紙)쪽 마른 것을 담은 엽낭(葉囊)을 가지고 새벽빛을 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립문을 나서시니, 적막(寂寞)한 천지(天地)에 어스럼이 남았고 북(北)으로 터진 빈 들에 찬기운만 돌 뿐이라. 삼십평생(三十平生) 첫 출입(出入)에 구릿골이 어데인지 방향(方向)을 알바없고, 오직 전날 밤 광명(光明) 속에 나타났던 큰길로 초빈(草殯)한 곳을 바라보고 가시니, 걸음이 빨라져서 팔십리(八十里)를 한나절에 당도(當到) 하시니라.
31. 경석(京石)은 천후(天后)께서 계시지 아니함을 알고 놀래어 이웃집에 ?어도 아는 자(者)가 없고, 뒷 들에서 새벽일 하는 농부(農夫)가 말하되 '이른 새벽에 천후(天后)께서 정읍통로(井邑通路)로 급(急)히 가는 것을 보았노라' 하거늘, 경석(京石)이 아우 윤칠(輪七)과 함께 급(急)히 뒤를 쫓아 태인(泰仁) 도창(道昌)고개 밑에 이르러 천후(天后)를 만나게 된지라. 드디어 천후(天后)의 몸을 수색(搜索)하여 독약(毒藥)을 빼앗고, 이에 여쭈어 가로대 '누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시나이까? 천사(天師)님이 지금 중대(重大)한 공사(公事)를 보시는 중(中)인데, 부르시는 명령(命令)이 없이는 절대로 오지 말라고 기별(寄別)하셨으므로, 아우도 이제까지 가뵈옵지 못하고 부르시는 명령(命令)이 속히 있기만 고대(苦待)하는 중이거늘, 이제 졸연(猝然)히 가뵈오면 누님은 고사(姑捨)하고 아우에게도 큰 꾸지람이 있으리니, 어떻게 감당(堪當)하시려 하나이까? 바라건대 이길로 돌아가서 일간(日間)에 명령(命令)이 있기를 기다리사이다'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청(懇請)하되, 천후(天后) 굳이 듣지아니 하시고, 걸음만 계속(繼續)하시니 경석(京石) 형제(兄弟)도 할수없이 뒤를 따르니라.
32. 원평(院坪)에 이르사 윤칠(輪七)에게 명하여 약간(若干)의 주과포(酒菓脯)를 준비(準備)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논두둑과 밭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峯) 위 장탯날에 올라 초빈(草殯) 앞에 당도(當到)하사, 윤칠(輪七)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시니 경석(京石)이 가로대 '남의 초빈(草殯)을 헤치다가 초빈(草殯) 임자가 바라보고 달려와서 힐란(詰難)하면 어찌하려나이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 하며 굳이 간(諫)하되 천후(天后) 들은체도 아니하시고 몸소 헤치기 시작(始作)하시거늘, 경석(京石)이 할수없어 윤칠(輪七)을 명하여 초빈(草殯)을 헤치고 널 천개(天蓋)를 때니, 천사(天師)의 용모(容貌)는 아직 상(傷)하지 아니하신지라. 천후(天后) 가지고 왔던 진주(眞珠)를 입술 안에 넣고, 한삼(汗衫)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백로지(白鷺紙)쪽(옥황상제{玉皇上帝}라 썼음)을 덮고, 천개(天蓋)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 주과포(酒菓脯)로 전을 올리고, 초빈(草殯)을 다시 봉(封)하시니라. 김형렬(金亨烈)이 바라보고 종도(從徒) 십여인(十餘人)과 함께 나와서 천후(天后)를 맞아 들어가니라. 천후(天后) 형렬(亨烈)의 집에서 이틀동안 쉬시고, 경석(京石)과 윤칠(輪七)과 함께 고부(古阜) 와룡(臥龍)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이르시니, 마침 시아버지께서 오셨거늘, 인(因)하여 수일(數日)동안 머무르시다가 대흥리(大興里)로 돌아오시니라.
제이장(第二章)
제일교단시대(第一敎團時代)
1. 신해년(辛亥年) 사월(四月)에 천후(天后) 차경석(車京石)과 유응화(柳應化)와 응화(應化)의 아들을 데리고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사, 대례복(大禮服)을 차리시고 천사(天師)의 성령(聖靈)께 혼례식(婚禮式)을 행(行)하실새, 만고장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서 크게 점명(點名)하시고, 인(因)하여 사십구일(四十九日)동안 진법수련(眞法修鍊)을 행(行)하신 뒤에, 고부(古阜) 와룡(臥龍)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오셔 백일(百日)동안 수련(修鍊) 하실새, 딸 태종(太宗)이 수종(隨從)드니라.
2. 구월(九月) 중순(中旬)에 대흥리(大興里)로 돌아오사, 경석(京石)에게 열아흐렛날 천사(天師)의 탄신기념치성(誕辰記念致誠)을 올릴 것을 명하시니, 경석(京石)이 제수(祭需)를 성비(盛備)하여 열아흐렛날 새벽에 치성(致誠)을 올리니라. 스무날 아침에 천후(天后) 마당에서 거닐다가 혼도(昏倒)하여 네댓 시간(時間)을 쓰러져 있는데, 현황(炫煌)한 중에 큰 저울과 같은 것이 공중(空中)으로부터 내려오거늘, 자세(仔細)히 보시니 오색(五色) 과실(果實)을 고배(高杯)로 고인 것이라. 가까이 내려와서는 문득 헐어져서 쏟아지거늘 놀래어 깨시니, 집안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애통(哀痛)하다가 천후(天后)께서 깨어나심을 보고 모두 기뻐하는지라. 천후(天后)께서 일어나 앉으사 문득 천사(天師)의 음성(音聲)으로 경석(京石)을 대(對)하여 누구임을 물으시니 경석(京石)이 이상(異常)히 여겨 성명(姓名)을 고(告)하고, 또 무슨 생(生)임을 물으심으로 경석(京石)이 경진생(庚辰生)임을 고(告)하니, 일러 가로대 '나도 경진생(庚辰生)이라. 속담(俗談)에 동갑(同甲) 장사 이(利)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同甲) 장사 하자' 하시고, 또 생일(生日)을 물으니 경석(京石)이 유월(六月) 초하루임을 고(告)한대 다시 일러 가로대 '내 생일(生日)은 삼월(三月) 이십육일(二十六日)이라. 나는 낙종(落種)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자(者)는 다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천후(天后)께서는 성령(聖靈)의 접응(接應)을 받으사 한 달 동안 신정(神政)을 행(行)하시니라.
3. 스무하룻날 부터 날마다 마당에 청수(淸水)를 떠놓고 날마다 물형부(物形符)를 받아서 불사르실 새, 경석(京石)이 천사(天師)를 원망(怨望)하여 가로대 '부인(夫人)만 알고 제자(弟子)는 알지 못한다' 하거늘, 이에 천후(天后) 경석(京石)을 명(命)하여 부(符)를 받으라 하시니, 경석(京石)이 붓을 들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으되 종시(終是) 부(符)가 내리지 아니하더라.
4. 이때에 박공우(朴公又)에게 기별(寄別)하여 술을 가져오라 하시니, 공우(公又)는 기유년(己酉年) 봄에 천사(天師)의 명(命)으로 술 서말을 빚어두었다가 천사(天師)께서 다시 찾지아니하시고 화천(化天)하였으므로 그대로 봉(封)하여 두었더니, 이제 천후(天后)의 기별(寄別)을 듣고 이상(異常)히 여기며 또 기뻐하여 신경수(申京洙)로 하여금 그 술을 메어오니라.
5. 스무나흩날 경석(京石)에게 명(命)하여 사인교(四人轎)를 빌려오라 하시더니, 그 이튿날 침방(寢房)을 깨끗이 쓸고 차윤덕(車輪德)으로 하여금 방(房)을 지키라 하시고, 경석(京石)의 한삼(汗衫)에 [어명(御命)]이라 써서 입히시고, 갓을 주물러 씌우시며 일러 가라사대 '너는 암행어사(暗行御史)라. 암행어사(暗行御史)는 폐의파립(弊衣破笠)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니라' 하시고, 천후(天后) 사인교(四人轎)를 타시고 경석(京石)을 앞세우시고 윤칠(輪七)과 임정준(林正俊)과 주낙범(朱洛範)을 데리고 길을 떠나, 원평(院坪)에 이르사 송찬오(宋贊五)의 집에 처소(處所)를 정(定)하신 뒤에, 윤칠(輪七)을 명(命)하여 약장(藥藏)과 궤(櫃)의 열쇠를 가지고 약방(藥房)에 가서 지키라 하시고, 경석(京石)을 명(命)하여 짐꾼 세사람을 데리고 가서 약장(藥藏), 궤(櫃) 등 약방기구(藥房器具) 일체(一切)와 부벽서(附壁書)와 벽(壁) 바른 종이까지 모조리 떼고, 방(房)바닥에 먼지까지 쓸어서 가져오라 하시니라.
6. 경석(京石)이 구릿골에 가서 형렬(亨烈)에게 온 뜻을 고(告)하니, 형렬(亨烈)이 가로대 '내 딸은 사경(死境)에 임박(臨迫)하였노라' 하며 약방기물(藥房器物)을 가져가기를 허락(許諾)치 아니하거늘, 경석(京石)이 가로대 '신도(神道)에서 결정(決定)된 일을 그대가 쫓지 아니하면 화(禍)가 있으리라'. 형렬(亨烈)이 가로대 '만일(萬一) 신도(神道)에서 결정(決定)된 일일진대 천지(天地)에서 징조(徵兆)를 나타낼 것이니, 어떠한 징조(徵兆)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나는 그대의 말을 믿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때에 천후(天后)의 명(命)을 형렬(亨烈)이 듣지 아니한다는 기별(寄別)을 들으시고, 양지(洋紙)에 해와 달을 그려놓고 두 손 식지(食指)로 하늘을 향(向)하여 지휘(指揮)하시니, 문득 청천(靑天)에 벽력(霹靂)이 일어나고 소낙비가 쏟아지며 번개가 온 집을 두르는지라. 형렬(亨烈)이 징조(徵兆)를 요구(要求)하다가 이 현상(現狀)이 일어남을 보고 크게 놀래며, 문득 마음에서 '망하는 세간사리는 애체(愛滯)없이 버리고 딴 배포(配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 놓지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서 망(亡)하느니라' 라는 천사(天師)의 말씀이 생각나거늘, 이에 경석(京石)에게 가로대 '진실(眞實)로 천의(天意)이니 마음대로 가져가라' 하니라.
7. 이에 경석(京石)은 짐꾼에게 약장(藥藏)과 궤(櫃)와 철연자(鐵硏子)와 삭도(削刀)와 횃대와 부벽시(附壁詩)와 액자(額子)와 벽바른 종이와 방바닥에 먼지까지 쓸어서 지우고 풍우(風雨)를 무릅쓰고 떠날 새, 형렬(亨烈)에게 돈 이십원(二十圓)을 주며 가로대 '따님 병(病)이 위중(危重)하다 하니, 약소(略少)하나마 약(藥)값에 보태어 쓰라'하고, 인(因)하여 형렬(亨烈)을 작별(作別)하고 나와서 마을 앞 정문(旌門) 거리에 이르니, 풍우(風雨)와 뇌전(雷電)이 그치며 형렬(亨烈)의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형렬의 집 사람이 달려와서 김부인(金夫人)이 사망(死亡)하였다는 부고(訃告)를 전(傳)하니라.
8. 모든 물건(物件)을 송찬오(宋贊五)의 집에 들여놓을 새, 경석(京石)이 불평(不平)한 말을 내거늘 천후(天后) 발을 들어 차시니, 경석(京石)이 눈을 맞아서 눈퉁이가 크게 부은지라. 경석(京石)이 크게 크게 앓으며 애걸(哀乞)하거늘 천후(天后) 뒷일을 경계(警戒)하시고, 인(因)하여 청수(淸水)에 면경(面鏡)을 담근 뒤에 그 물을 경석(京石)에게 먹이시며 손으로 어루만지시니, 경석(京石)의 눈이 곧 나으니라.
9. 스무아흐렛날 아침에 형렬(亨烈)이 와서 천후(天后)께 딸 죽은 일을 아뢰거늘, 천후(天后) 치상비(致喪費)를 후(厚)히 주시고, 태인(泰仁) 도듭실 유응화(柳應化)에게서 족두리와 원삼을 빌어다가 새롭게 단장(丹裝)하시고, 사인교(四人轎)를 타시고 약장(藥藏)과 모든 물건(物件)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고 대흥리(大興里)로 돌아오사, 약장(藥藏)과 모든 기물(器物)을 침방(寢房)에 봉안(奉安)하고, 부벽시(附壁詩)는 벽(壁)에 붙이고, 벽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반자(天盤子) 속에 갊아두시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래어 이상(異常)히 여기더라. 이에 천후(天后)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을 소집(召集)하여 교단창립(敎團創立)을 선언(宣言)하시고, 여러 종도(從徒)들에게 명(命)하사 포교(布敎)에 종사(從事)케 하시고, 신경원(辛京元)과 김병욱(金秉旭)에게 명(命)하사 태인장(泰仁場)에서 큰 소 한 마리를 사다가 기르시면서 신정(神政)을 행(行)하시니라.
10. 하루는 천후(天后) 궤(櫃) 위에 면경(面鏡)을 세워놓고 다시 작은 면경(面鏡)을 그 면(面)에 붙이신 뒤에, 경석(京石)으로 하여금 그 앞에 앉아서 주문(呪文)을 읽으라 하시니, 경석(京石)이 주문(呪文)을 읽다가 불평(不平)을 하니 문득 붙었던 면경(面鏡)이 떨어지거늘, 경석(京石)이 놀래어 면경(面鏡)을 주워서 다시 붙이려 하되 붙지 아니한지라. 경석(京石)이 천후(天后)께 고(告)하니, 천후(天后) 다시 붙여놓고 신정(神政)을 행(行)하시더니, 문득 폭우(暴雨)가 내려 큰 물이 져서 경석(京石)의 집도 침수(浸水)되니라.
11. 경석(京石)이 어려서부터 등이 굽어서 보기 싫더니, 하루는 천후(天后) 주먹으로 경석(京石)의 굽은 등을 치며 '보기 싫다' 하시고, 더수기를 잡아 일으켜 세우시니, 경석(京石)의 척추(脊椎)에서 뚝 소리가 나더니 이로부터 경석(京石)의 등이 곧아지니라.
12. 임자년(壬子年) 칠월(七月) 초사흗날 천후(天后) 경석(京石)을 데리고 걸어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이르사, 구월(九月) 초이튿날 까지 날마다 치성(致誠)을 행(行)하시더니, 하루는 경석(京石)이 냇가 돌위에 앉아서 주문(呪文)을 외우다가 낙상(落傷)하여, 중태(重態)에 이르러 여러날 동안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고 누워 앓거늘, 천후(天后) 주먹으로 경석(京石)의 등을 치시며 꾸짖어 가라사대 '일을 다보았는데 너는 어찌 정신(精神)을 차리지 아니하느냐' 하시니 경석(京石)이 곧 나은지라. 이때에 여비(旅費)가 떨어졌거늘 경석(京石)이 먼저 돌아와서 여비(旅費)를 주선(周旋)하여 가지고 가서 천후(天后)를 모셔 오니라.
13.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은 원래(元來) 천사(天師)를 모셔 좋은 세상(世上)을 만나서 영화(榮華)와 복록(福祿)을 누리려는 희망(希望)으로 천사(天師)를 따르다가, 뜻밖에 천사(天師)께서 화천(化天)하시므로 모두 크게 실망(失望)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더니, 신해년(辛亥年) 구월(九月)부터 천후(天后) 신도(神道)로서 포정소(布政所) 문(門)을 열으심에 모두 다시 발심(發心)하여 대흥리(大興里)로 모여와서, 천후(天后)를 모시고 교단(敎團)을 창립(創立)한 뒤에 각기 사방(四方)으로 돌아다니며 포교(布敎)에 힘쓰니, 이로부터 교세(敎勢)가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여 그 뒤 삼년(三年) 동안에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와 충청남도(忠淸南道)와 경상남도(慶尙南道)와 서남해중(西南海中) 모든 섬 일대(一帶)에는 거의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연(連)하게 된지라. 갑인년(甲寅年) 봄에 순천(順天) 장기동(張基東)의 의연(義捐)으로 교실(敎室)을 지어 비로소 본소(本所)의 면목(面目)을 세우니, 이에 교세(敎勢)가 날로 흥왕(興旺)하니라.
14. 교단(敎團)의 기초(基礎)가 확실(確實)히 서게되고, 교세(敎勢)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을 본 경석(京石)은 가만히 교권(敎權)을 움켜쥐려는 계획(計劃)을 세워, 먼저 종도(從徒)들과 교도(敎徒)들 사이에 이간(離間)을 붙여 연원(淵源)의 의(誼)를 끊게하고, 다음에는 천후(天后)의 법소(法所)에 주렴(珠?)을 걸어놓고 겉으로는 천후(天后)를 높이는 체 하나, 실상(實狀)은 천후(天后)와 참배(參拜)하는 교도(敎徒)들 사이의 간격(間隔)을 멀게하니, 이에 종도(從徒)들은 경석(京石)의 야심(野心)을 간파(看破)하고 모두 분개(憤慨)하여, 더러는 교문(敎門)을 하직하고 물러가서 지방교도(地方敎徒)들과 연락(連絡)하여 따로 문호(門戶)를 세우기도 하고, 더러는 경석(京石)을 따돌리고 천후(天后)의 법소(法所)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운동(運動)을 하기도 하니라.
15. 을묘년(乙卯年)에 김형국(金炯國)이 보성(寶城) 지방(地方) 교도(敎徒)들과 연락(連絡)하여, 천후(天后)의 법소(法所)를 장성(長城) 필암(筆岩)으로 옮기려고 운동(運動)하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더니, 병진년(丙辰年)에 이치복(李致福)과 채사윤(蔡士允)이 다시 각 지방교도(地方敎徒)들과 연락(連絡)하여 법소(法所)를 원평(院坪)으로 옮기려고 운동(運動)함에, 천후(天后)도 또한 경석(京石)의 발호(跋扈)하는 것을 불쾌(不快)히 여겨 치복(致福)의 운동(運動)에 동조(同調)하시더니, 이윤수(李胤洙)가 경석(京石)의 부탁(付託)으로 천후(天后)께간(諫)하고, 강사성(姜士成)은 경석(京石)의 부탁(付託)으로 천후(天后) 앞에서 치복(致福)의 과실(過失)을 들어서 공격(攻擊)하니, 이에 법소(法所)를 옮기려는 운동(運動)은 실패(失敗)하게 되고, 치복(致福)과 사윤(士允)은 할 일없이 교문(敎門)을 하직하고 물러가니라.
16. 치복(致福)과 사윤(士允)이 떠남에 이 뒤로 본소(本所)에는 종도(從徒)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오직 경석(京石)이 그 아우들과 더불어 천후(天后)를 모시며 교도(敎徒)들을 응접(應接)하게 된지라. 경석(京石)이 이에 김형규(金炯奎), 문정삼(文正三) 이하 심복교도(心服敎徒) 스물네사람에게 방주(方主)의 임명(任命)을 주어 각지방(各地方)으로 파견(派遣)하여 교도(敎徒)들을 수습(收拾)하고 교권(敎權)을 집중(集中)한 뒤에, 교도(敎徒)들이 천후(天后)께 참배(參拜)하는 길을 막아버리고, 인(因)하여 정사년(丁巳年) 시월(十月)에 경석(京石)이 유람(遊覽)의 길을 떠나니라. 경석(京石)이 떠난 뒤에 천후(天后) 일년동안 교도(敎徒)들을 상대(相對)하지 못하시고 한가(閑暇)한 세월(歲月)을 보내시다가, 무오년(戊午年) 구월(九月) 열아흐렛날 대흥리(大興里)를 떠나사 김제군(金堤郡)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鍾瑞)의 집으로 옮겨가시니라.
용량 관계로 3장~12번, 4장~5장은 13번 게시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