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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48. [역경의 열매] 김정택 (1-25) 주여, 저를 이곳에 있게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역사적인 현장으로 가게 하신 뜻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걸 제게 알려 주십시오.…”
지난해 10월 10일 인천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계속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아무래도 이번 미국행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것 같았다. 한미FTA 비준에 앞선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길에 나를 초청한 사실이 어찌 예사로운가. 나는 공식수행원이 아니라서 따로 비행기를 탔다.
눈을 감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퍼뜩 머릿속을 스쳐가는 게 있었다. 27일에 있을 ‘부사관 사랑음악회’였다. 국토방위에 고생하는 부사관들을 위해 내가 기획한 음악회에 대통령 영부인을 초청하고 싶어 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 잘하면 이번에 영부인에게 직접 부탁할 수 있을지 몰라.’
어지럽던 머릿속이 좀 정리되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비행기가 이륙하고 다섯 시간 가까이나 흘렀다. 기도 겸 묵상 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비행기 승무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전도본능’이 발동됐다. 잠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한 뒤 통로를 지나가는 한 여승무원을 붙들었다.
“안녕하세요. 저 SBS 예술단장 김정택인데 아시나요? 가끔 TV에도 나가고 하는데….”
“아, 예. 반갑습니다. 저희 비행기에 타게 돼서 영광이에요. 불편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싸! 제대로 걸려들었다.’ 직감적으로 잘 될 것 같았다. 나는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대화를 이어가다 다른 승무원들을 불러줄 수 있느냐고 했다. 그녀는 금방 다섯 명의 동료를 데려왔다. 나는 다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 본심을 드러냈다.
“좀 있다가 승객들이 모두 잠들고 나서 예수에 관심 있는 분들은 제게로 오세요. 오늘 제가 멋진 선물을 드릴게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승객들 대부분이 깊이 잠들었다 싶을 때 두 명의 여승무원이 내 옆으로 왔다. 나는 짧은 간증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그들의 손을 잡고 영접 기도까지 마쳤다.
“앞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기막히게 좋은 날들이 펼쳐질 겁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보증할 수 있어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만 하면 두 분의 인생이 행복으로 도배질될 겁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셔야죠.”
“아멘.”
나는 두 승무원에게 신앙적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며 명함을 한 장씩 건넸다. ‘야호! 비행기 안에서 한 건 했다.’ 입에서 절로 찬양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처럼 누구를 만나든, 어떤 시간이나 상황에서든 전도에 초점을 맞추어 산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수많은 연예인들이 내 전도의 대상이 됐다. 하나님을 만나 멋지고 행복하게 살게 된 입장에서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거룩한 부담감이랄까.
나는 이번 연재를 내 인생에 들어오신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로 이루어진 전도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굳이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일어났던 일화를 앞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한데 진짜 하나님의 역사는 미국에 도착한 뒤에 일어났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정택 (1) 주여, 저를 이곳에 있게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 [역경의 열매] 김정택 (2) 전도 1계명 ‘하나님이 주신 찬스를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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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정택 (4) 예배당 신발 흩뜨리기 선수였던 개구쟁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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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장로=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음대 기악과 졸업. 높은뜻푸른교회 장로. 97동아시안게임, 건국 50주년 경축행사, 동계아시안게임, 2002부산아시안게임, 2002월드컵 전야제, 2003대구유니버시아드 등에서 음악 작·편곡. 하이서울 페스티벌 음악감독.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밤이면 밤마다’ ‘미워요’ ‘정말로’ 등 300여 히트곡 작곡. MBC 아름다운 노래 대상·백상예술대상 기술상·대통령 표창 등 수상.
***[역경의 열매] 김정택 (2) 전도 1계명 ‘하나님이 주신 찬스를 놓치지 말라’
“저를 이 자리에 인도하신 하나님. 우둔한 저로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저녁 워싱턴 시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대연회장에 들어선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교민 대표들의 간담회가 열리는 그곳은 엄숙함을 넘어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 행사의 특별공연 연주자로 초청된 나는 현장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됐다.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메기의 추억’에서부터 ‘아리랑’까지 향수를 달래줄 만한 곡들 위주로 연주했다.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지는 듯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용기가 났다.
“이명박 대통령님 부부와 수행원 여러분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국땅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고생하시는 교민 대표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사랑하는 조국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가 임하길 기원합니다. 이 계절에 맞는 이브 몽땅의 ‘고엽’을 연주하겠습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멘트를 하고는 ‘고엽’에 이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열정적으로 연주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지며 행사장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굳어 있던 참석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마무리 곡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자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너도나도 내 손을 잡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식사시간으로 이어졌다.
“김관진 장관님, 충성! 예비역 육군병장 김정택 인사합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고국의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장관님께 인사합니다.”
나도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내가 국방부장관 앞으로 가 턱하니 거수경례를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귀빈들이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김 장관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악수를 청하는 김 장관의 손을 잡고 나는 마음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리는 ‘부사관 사랑음악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 장관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해줬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일이 얼핏 떠올랐다.
보람된 하루였다. 그날 밤 호텔 방에 들어온 나는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역시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의 일정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했다.
다음날은 워싱턴 한국대사관 초청 조찬모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한덕수 대사 부부를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과 방미단 수행원들이 모여 담소하며 교제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과 아는 체를 하면서 인사하는 중에 한 대사의 부인 최아영 여사와도 인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유독 그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뜻인가?’ 나는 조심스레 최 여사에게 다가가 내 간증을 요약해 전했다. 그리곤 짧게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분의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호의적인데 힘입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자고 제안하고는 그분의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했다. 그분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리곤 최 여사에게 부사관 음악회에 영부인을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그분은 “영부인 여사님께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라면서 행사의 취지에 대해 칭찬을 해줬다. 그로부터 보름여 후 열린 부사관 음악회에 영부인 김윤옥 여사와 김관진 장관이 모두 참석해주셨다.
이 일화에 대해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했던 걸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이다. 나는 늘 이렇게 살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3) 탤런트 임동진 목사 “자넨 하나님 막내아들이야”
나는 음악인이다. SBS(서울방송) 예술단장으로서 지휘자로 또 작곡 및 편곡자로 활동하고 있다. 여덟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평생 음악인의 길만 걸어왔다. 그러다보니 건반악기는 물론이고 관악기건 현악기건 타악기건 웬만한 악기는 능란하게 다룰 수 있다. 대학 시절부터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고 인기 가수들의 세션맨(전문연주자)으로서도 오랫동안 일했다. 한때는 밤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극성팬들 때문에 뒷문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시절도 있다.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순수음악을 전공한 내가 이렇게 대중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간혹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걸어온 길과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내 적성과 재능에 맞는 길이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그 길을 사랑하면서 열심히 걸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었다고 믿고 있다.
나는 태생적으로 밝고 매사에 긍정적이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한결같이 나를 재미있다고들 한다. 간혹 ‘우스운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길지 않은 생애, 되도록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게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의 지론이 돼 있다. 탤런트 임동진 목사님은 이런 나를 ‘하나님의 막내아들’이라고 하신다.
대신에 나는 열심히, 아니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한다.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직업적으로는 음악인으로서,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예배자와 전도자, 사역자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끊임없이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살지만 내 나름으로 스스로를 향한 채찍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나는 무대 위에서 악단을 지휘할 때나 악기를 연주할 때 가장 신이 난다. 지휘를 하거나 연주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온 몸에 땀이 흥건해지지만 그럴 때 사는 재미를 느낀다.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과거를 회고하면 진한 감상에 젖어든다. 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아쉬움이 밀려들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을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여기며 하나님께 깊이 감사한다.
나는 내 인생을 나름대로 BC(기원전)와 AD(기원후)로 나눈다. 예수님의 출생을 기준으로 BC와 AD가 구분되듯이 내가 예수님을 만난 시점을 기준으로 내 인생이 나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어쨌든 나는 모태신앙으로 세상에 나왔다. 서울 원효로에서 태어나 그 일대에서 죽 성장했다. 어릴 때 효창공원에서 아카시아 꽃을 따 먹고 골목길을 누비며 뛰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4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당시 대부분 가정이 권위주의적이었던데 반해 우리 집은 개방적이며 화목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그런 분위기를 이끄셨다. 아버지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세련된 가치관을 가지셨던 분인 것 같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온전히 6남매에게만 관심을 쏟으셨고, 늘 6남매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그게 지나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다. 지금의 내 성격이 그때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부모님과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내 아들(형음)과 딸(형애)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위해 노력한다. “아비들아 저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역경의 열매] 김정택 (4) 예배당 신발 흩뜨리기 선수였던 개구쟁이가…
어린 시절의 나는 대단한 개구쟁이였다. 워낙 장난기가 심해 거의 악동 수준이었다. 나의 장난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신발 흩뜨리기는 내 주특기였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나는 예배 중에도 이런 저런 장난질을 하다가 목사님의 축도 순서가 되면 살며시 밖으로 나가 예배당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마구 흩뜨려 놓았다. 그리곤 교회 마당으로 나와서 현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즐겼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어른들이 저마다 자기 신발을 찾느라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물론 어른들은 나의 소행임을 알았지만 아무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면서 ‘아이고, 이 장난꾸러기’ 하는 분은 가끔 있었다.
당시 이런 저런 장난으로 ‘악행’을 일삼던 내가 끝내 이루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장난 거리를 찾기만 하면 기어코 해내던 내가 헌금 주머니로 잠자리를 잡는 건 미수에 그쳤다. 긴 막대에 헌금 주머니를 매달아 성도들에게 돌릴 때마다 나는 ‘저걸로 잠자리를 잡아야지’하고 별렀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인기 짱’이었다. 생김새도 예쁘장했지만 그보다 피아노를 잘 친 덕분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그때 남자 아이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연히 또래 아이들에게 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 뒤에는 항상 여자 친구들이 줄을 이었다. 모두가 음악에 큰 관심과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지 덕분이다.
어쨌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과 누나들,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으니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트럼펫에 심취했다. 우연히 들은 ‘밤하늘의 트럼펫’이라는 곡에 매료된 나는 당장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경기중이나 서울중에 들어갈 실력이 됐지만 배재중에 입학했다. “예수믿는 사람은 기독교 학교에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소신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 6남매를 모두 미션 계통의 중·고교에 보내셨다.
중학교 때 더욱 음악 재능을 발휘한 나는 서울예고를 택했다. 고입 실기 시험엔 트럼펫으로 응시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프렌치 호른의 매력에 빠졌다. 훗날 서울대학교 음대 기악과에 입학해서는 오히려 전공을 드럼과 기타로 바꾸고, 지휘와 피아노를 부전공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대학 시절에 나는 웬만한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됐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그룹사운드에 들어 용돈을 쏠쏠하게 벌어 썼다.
나의 10대는 천방지축이었다. 음악을 한답시고 세상이 좁다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그러니 신앙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집에서 지겹게 듣는 성경과 하나님 이야기를 교회에서까지 들어야 한다는 게 내게는 고역이었다. 단조롭게 느껴지는 찬송가도 도통 재미가 없었다. 늘 어떻게 하면 학교 채플이나 교회 예배에 빠질까 하는 생각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하면 예배 시간 내내 엉뚱한 짓을 하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다만 재미있는 행사를 하거나 부모님으로 받은 헌금으로 군것질을 할 때면 교회가 고마웠다.
그래도 그때 교회에 다녔던 것이 내게는 보약이었다. 당시 나는 정동제일교회에 다녔는데, 억지로 드린 예배와 마지못해 한 성경공부를 통해 신앙생활의 기초를 닦았으니 말이다.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churchgoer)에 그쳤지만 목회자 섬기는 법이나 예배에 임하는 자세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5) 내 인생 첫 실패 ‘미8군 오디션 낙방’의 교훈
나는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부모님뿐 아니라 형 셋과 누나 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형과 누나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정택은 있기 어려웠다. 특히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큰형(김정호)은 내가 지휘자와 연주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셨다. 백석예술대학 교수인 셋째 형(김정훈)은 내가 서울대 입시를 앞두고 힘들어 할 때 가정교사 역을 자임해주셨다. 거듭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과 누나들은 탄탄한 바람막이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분들 덕분에 나는 커면서 조금도 어려움을 몰랐다.
한데 대학 재학 중 내 생애 첫 실패를 맛봤다. 호기롭게 지원한 미8군 연주자 오디션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만 것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결과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럴 줄 알았으면 떠벌리지나 말 것을…’
오디션을 앞두고 나는 ‘될 확률 100%, 안 될 확률 0%’라고 장담했다. 친구들한테는 “앞으로 술값과 당구비는 모두 책임진다”고, 가족들에게는 “미8군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외교관이 되겠다”고 허풍을 떨기까지 했다.
그 시절 미8군은 최고의 아르바이트 자리이자 가수나 연주자로 출세하는 등용문 같은 곳이었다. 패티 김이나 윤복희 조영남씨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미8군 무대를 발판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디션 장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 장으로 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자 악보 하나가 주어졌다. 익히 아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였다. 이쯤이야 하고 악보를 훑어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악보 상단에 원곡의 F 키가 아니라 A플랫 키로 돼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등짝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시작한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요란하게 종이 울렸다.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악기라면 못 다루는 게 없는 내가, 한국 최고 대학의 기악과에 다니는 내가 30초 만에 KO를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한남동 미8군 부대에서 이문동의 집까지 울면서 걸었다. 처음엔 부끄럽고 억울하다 나중엔 분노가 일었다. 달리 누구도 아닌 실패자인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게 서너 시간은 걸었을까, 마음속에서 오기 같은 게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고, 겉으로는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채 있는 대로 멋을 낸 모습이었다.
그날로 나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연주 연습에 몰두했다. 서점에서 ‘재즈 1001곡’이라는 악보집을 구입해 밤낮없이 연습했다. 특히 즉석에서 조를 옮길 수 있는 이조(移調) 기술을 피나게 연습했다. 결국 나는 모든 키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주할 수 있는 기술을 완전히 체득했다. 게다가 1000곡이 넘는 재즈곡을 연습하면서 하드록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어 다양한 장르의 연주법을 응용할 수 있게 됐다.
결국 미8군 오디션의 낙방이 내 연주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때의 실패를 하나님의 복이며 은혜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의 실패를 기회로 만들어주셨다.
나는 청소년들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이 경험담을 들려주며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할 수 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해준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그때의 실패는 지금까지 내가 음악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어왔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6) ‘히트곡 제조기’ 최고 전성기와 함께 온 시험
내 젊은 시절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미8군 무대 오디션 낙방 후 맹훈련을 거듭해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나는 그야말로 빛나는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하면서 미8군 무대에서도 연주자로서의 입지를 닦았다. 여기저기서 초청이 쇄도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 새 내가 악단을 이끄는 위치에까지 서게 됐다.
자연스럽게 ‘김정택’이라는 이름 석자가 가요계에 알려졌다. 연주는 물론이고 지휘 또한 대단하다는 평가가 쫙 퍼졌다. 대학 때 공부한 지휘법을 바탕으로 내 스스로 개발한 파워풀한 지휘는 그 자체만으로도 볼 거리였다. 거기다 수없이 많은 곡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편곡에 대한 비법도 터득했다. 나중엔 작곡까지 하면서 인기가수들의 세션맨(전문연주자)으로서 독보적인 자리를 확보했다.
1970∼80년대에 마침내 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나온 히트곡 치고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게 별로 없을 정도였다. 내가 직접 작곡을 했든지 아니면 편곡이나 세션맨으로 작업을 함께 했던 것이다. TV 인기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톱10 중 7∼8곡이 내 손을 거친 곡일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에는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덕분에 돈벌이가 좋았다. 작곡·편곡·연주료로 들어오는 돈이 쏠쏠했다. 방송사나 정부에서 주관하는 대형 이벤트에 끊임없이 불려 다니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마음에 쏙 드는 아내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행복한 가정도 이뤘다. 그야말로 ‘김정택의 전성시대’였다.
어디를 가도 나는 최고의 연주자로 대접받았고, 가수들은 내 곡을 받기 위해, 그리고 나와 공연을 하기 위해 안달을 했다. 전영록의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심수봉의 ‘미워요’, 현숙의 ‘정말로’ 등 내가 작곡한 곡들이 연이어 히트를 쳤다.
그때 내가 고정적으로 서는 무대는 서울 퇴계로2가 퍼시픽호텔에 있는 극장식 나이트클럽인 ‘홀리데이 인 서울’이었다. 많은 연예인이 그 무대에 섰고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관광명소였다. 나는 연주도 했지만 주로 지휘봉을 잡고서 관객들을 홀렸다. 온 몸으로 하는 나의 격정적인 지휘는 관객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40분씩 이어지는 공연이 한 차례 끝나면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얼른 새 옷을 갈아입고 무대에 올라갈 정도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안기부 관계자가 귀순한 북한의 고위 인사라며 한 남자를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자본주의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공연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인사를 하자 그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며 “선생님은 약을 잡쉈습네까”라고 하는 거였다. 그의 눈에 내 모습이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 몸을 흔들며 정신없이 지휘할 수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연주자로서 고정 팬을 확보하게 됐다. 가수도 가수이지만 내가 이끄는 악단의 연주를 보기 위해 오는 이들도 꽤 많았다. 무대의 내 모습이 잘 보이는 테이블은 항상 만석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갈 때는 나를 만나기 위한 극성스런 팬들 때문에 뒷문으로 도망을 쳐야 했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나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내 영혼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당시엔 그걸 몰랐다. 공연을 마치거나 큰 행사를 마무리하면 동료들과 어울려 한 바탕 술을 퍼마시기 다반사였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멋이라며 하루 몇 갑씩 담배를 피워대고 온갖 겉 멋을 부리기에 바빴다. 이런 나를 지켜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면서 아팠을까. 그러다 결국 하나님은….
***[역경의 열매] 김정택 (7) 심수봉과 동행한 여인 “주님이 보내서 왔어요”
1990년 6월의 어느 날, 초여름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야간 공연을 마치고 단원들과 회식 자리로 이동하려고 나서는 순간 가수 심수봉씨가 찾아왔다. 심씨와 한창 신곡 준비 작업을 하고 있던 때라 그 일로 찾아온 줄 알고 일단 차에 타자고 했다. 차에 오르는데 심씨와 함께 온 일행이 있었다. 1년 전쯤 역시 심씨와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아주머니였다. 기억을 더듬으니 모 교회 전도사님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뜻밖에도 그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교회 전도사님이시잖아요. 근데 비가 많이 오는 늦은 밤에 어떻게 두 분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전도사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 마디를 툭 뱉었다.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순간 나는 머리가 띵 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몇 가닥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머리가 약간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야, 심수봉씨가 데려온 사람이면 그건 아닐 거야. 아마 교회 광신도일 거야. 적당히 따돌리고 빨리 회식 장소로 가야지….’
하지만 그 전도사님은 작심한 듯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날 찾아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안양의 어느 교회에서 심수봉씨의 간증집회가 있었다. 심씨가 간증을 하는 동안 성경을 읽고 있는데, 성경책 위로 내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1년 전 잠깐 인사만 나눈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이상해서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생각했다. 근데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내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심씨랑 나를 찾아왔다.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빨리 회식 자리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단장님, 요즘 지내기 어떠세요?”
전도사님은 또 다시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갈수록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입에서는 질문보다 더 이상한 답이 나왔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지요. 뭐…”
이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멋지고 살고 있는 내가 왜 죽지 못해 산다고 했단 말인가.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내뱉은 신음이었다. 화려한 외양과는 반대로 외로움과 짓눌림에 괴로워하는 내면에서 나오는 탄식이었다.
“단장님, 더 이상 죄 짓지 마세요!”
“예? 전도사님, 저 죄 많이 짓지 않는데요.”
“아닙니다.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어요.”
이후 전도사님은 잠깐 더 대화를 나눈 뒤 심씨와 함께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한동안 응시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처럼 귀청을 울렸다. 온갖 생각들로 뒤엉킨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조금 전 단원들에게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서 소주 한 잔 해야지” 하고 너스레를 떨며 바람을 잡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순간 회식 자리로 갈 생각이 싹 달아났다. 단원들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 전도사님의 말이 다시 생각나며 이유 없이 노여움이 일었다. 그런 한편으로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는 그분의 말에 긍정의 느낌도 들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차를 몰고 강변북로로 접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차창을 마구 두들겼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대형차가 내 차를 들이받아 한강으로 처넣을 것만 같았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감까지 들었다. 그때 나를 찾아온 그 전도사님은 현재의 전몽월 목사님이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다 하겠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8) 돌아온 탕자의 ‘회개기도’… 내 인생 AD를 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짓만 해왔어요. 하나님! 정말로 잘못했어요.”
차를 몰고 혼자 집으로 가면서 나는 마구 외쳤다. 회개기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한참을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나는 잘 나갔다. 돈도 벌 만큼 벌고, 실력도 인정받았다. 갈수록 인기가 치솟아 여기저기 부르는 곳도 많았다. 누가 봐도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다. 그뿐인가. 반듯하고 내조 잘하는 아내와 예쁘게 자라주는 두 아이가 있는 가정도 행복했다. 외견상 내게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그게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싹을 틔운 외로움이 점점 자라나 내면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활동 무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돈을 벌면 벌수록, 작곡한 노래의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외로움은 더 나를 짓눌렀다. 그 외로움을 달랜답시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전도사님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는 와이퍼도 무용지물이었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차창으로 나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지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어릴 때 교회에서 신발 흩뜨렸던 일에서부터 불과 한 시간 전 심야의 파티를 즐기려고 했던 일까지 기억 속에서 다 떠올랐다.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잘못한 일들이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깥에 쏟아지는 비처럼 내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차를 길가에 세우고 그냥 울었다.
그런 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집에 도착했다. 마치 만취 상태에서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집 앞까지 와서 초인종을 누르니 “누구세요” 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누구긴 누구야. 나지” 했을 테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빵점짜리 시험지를 받아온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야. 성경책 어디 있어? 성경책 좀 줘봐.”
성경책을 어디에 뒀는지도 몰랐던 나였다. 아내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고 나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피아노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의자나 소파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끝없이 떠오르는 죄 때문에 울며 기도했다. 난생 처음으로 눈물에 온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얼마나 회개의 눈물을 쏟아냈을까, 이번에는 감사의 눈물이 쏟아졌다. 내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감사했다. 충분히 내칠 수도 있었지만 다시금 자신의 품으로 안아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다. 허망한 생활을 그만두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죽도록 감사했다.
사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였다. 음악을 한답시고, 예술가랍시고 온갖 겉 멋을 부리면서 그야말로 ‘똥폼’을 있는 대로 잡고 다녔다. 일을 마친 뒤 집으로 가기보다 여기저기 즐길 곳을 찾아 다녔다. 양심에 조금 찔리기라도 하면 ‘직업상 많은 유혹을 받게 돼 있다’고 자위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지 않고 그냥 마지막 종을 쳤어도 나로선 아무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을 보내셔서 다시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니 그 감사함이 가슴에 사무쳤다. 비로소 내 인생의 BC가 마감되고 AD가 열리는 시점이었다. 죄로 얼룩진 내 인생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는 때였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역경의 열매] 김정택 (9) 첫번째 변화 “밤무대 접고 자유인이 되자”
그날, 그러니까 피아노 밑에 들어가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한 날 이후 비로소 나는 BC의 삶에서 AD의 삶으로 접어들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이라고 여기게 됐다.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내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내 안의 혼돈과 공허가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날이 환하게 밝기 전 새벽의 미명이 있듯이 말이다. 어린 아이가 첫 발을 뗐다고 금방 성큼성큼 걸을 수 없듯이 말이다. 희끄무레한 미명 속에서, 이제 막 초보 걸음을 시작한 나는 곧잘 헛발을 내딛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변화됐다면 겉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가운데 거리끼는 것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먼저 굽 높은 구두를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다. 신발장에서 높은 굽의 구두를 모두 꺼내 구둣방으로 들고 가 일반 굽으로 교체했다.
그 다음은 선글라스였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끼기도 했지만, 나는 주로 멋을 내기 위해 야밤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예전에는 그게 멋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 모습이 그렇게 촌스러울 수 없었다. 내면이 변화되니 멋과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내 생활에서 일어났다. 밤무대에 오르기 싫어진 것이다. 마냥 좋기만 했던 휘황한 조명과 폭발적이거나 뇌쇄적인 음악,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등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되레 역겨워지면서 죄책감과 부담감 등으로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밤무대 생활을 청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이 말리거나 비아냥거릴 것 같았다. 그리고 아내의 저항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동료들과의 문제는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내를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발하는 아내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 자신부터 주 수입원을 포기하기 망설여졌다. 한동안 그렇게 보내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는 식탁에서 슬쩍 운을 띄워봤다.
“여보, 나 나이트클럽 일 그만둘까 봐.”
그러곤 슬슬 아내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과일 깎던 칼을 내려놓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친 김에 나는 한 마디를 더했다.
“정말이지 나 그 일 하기 싫어졌어.”
아내가 소프라노 목청으로 ‘당신 미쳤냐’며 공격할 것을 예상하며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역시 이번엔 아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아내의 반응은 내 예상과 정반대였다. 오히려 내가 충격을 받았다.
“할렐루야! 여보, 마음 잘 먹었어요. 안 그래도 제가 6개월 전부터 당신 그 일 그만두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밤무대에 서기를 싫어하기 이전부터 아내는 이미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밤무대 생활을 청산한 나는 자유인이 됐다.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편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그걸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 말씀 안에서의 자유라고 여겼다. 세상의 재물이나 인기, 명성 등과는 견줄 수 없이 좋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었다. 바로 경제난이었다. 밤무대 생활을 그만두고 나니 항상 두둑하던 주머니가 텅 비게 된 것이다. 아내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커질 대로 커진 씀씀이를 갑자기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건전하게 돈 벌 일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차에 누군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0) ‘1000만원의 유혹’을 극복케 한 아내의 불호령
“단장님, 오랜만입니다. 저랑 같이 일 좀 하시죠. 제가 극장식 식당을 개업하는데, 단장님이 음악을 좀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계약금 1000만원을 드릴게요. 앞으로 보수는 서운찮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이 전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해서 나간 자리에서 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안 그래도 심심한데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웬 떡인가 싶었다. 혹시 술집인가 해서 확인했더니 건전한 가족식당이라고 했다. 앞뒤 잴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계약금을 4등분해서 250만원은 차 바꾸는 데 쓰고, 250만원은 한동안 챙겨드리지 못한 어머니 용돈으로 드리고, 250만원은 교회 카펫 교체에 헌금하고, 나머지 250만원은 아내에게 주면 되겠다.’
계약금을 받아 상의 안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오랜만에 큰돈을 쥐었으면 기뻐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속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죄 지은 사람처럼 슬금슬금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박 집사, 이건 술집이 아니고 말이야. 가족 레스토랑이고…”
일부러 호칭까지 교회 식으로 부르면서 돈봉투를 꺼내들고 운을 떼는데, 아내는 금세 내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곤 어렵사리 연 내 말문을 일거에 닫아버렸다.
“당신 또 왜 그래요!”
아내의 불호령에 순간 뜨끔했다. 얄팍한 내 꼼수가 들통 난 기분이었다. 어머니 용돈을 드리고 교회 카펫을 바꾸겠다는 포장으로 내 실속을 차리겠다는 속셈이라는 자각이 일었다. AD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의 BC의 생활이 아직 눈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롯의 부인처럼 소돔과 고모라 성에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단호함에 타협이란 없을 것 같았다.
“갖다 주면 되잖아.”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돈을 돌려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형 유흥업소나 요식업소엔 조직폭력배들이 판을 치고 있어 보복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여보, 나 하나님 빽 믿고 간다!”
다음날 아침, 나는 명함 한 장을 내보이며 집을 나섰다. 당시 나는 방배동에 있는 찬양신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작곡과 편곡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과분하게 선교음악과 교수 명함을 만들어줬던 것이었다.
“이 전무님. 죄송하지만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아니 단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개업 날짜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학생들에게 찬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 개업에 지장이 없도록 좋은 연주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건네준 명함을 받아든 이 전무는 말없이 명함과 내 얼굴을 번갈아 몇 번 쳐다봤다. 불과 몇 초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이 내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행여 주먹이라도 날아오면 어쩌나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전무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단장님, 저도 일이 잘 안 될 땐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도 하고 그래요.”
정말로 뜻밖이었다.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 둘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참으로 홀가분했다. 비록 손에 들었던 거금을 도로 내놨지만 마음만은 구름 위를 날았다. 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 입에서는 찬송가가 저절로 나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1) ‘女福 터져 팔자 고친 김정택’에 관한 에피소드
나는 아내 덕분에 첫 번째 시험을 잘 통과했다. 내가 또 다시 야간업소에서 일하고자 했을 때 아내가 응해주었다면 나는 또 다시 방탕의 생활로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참으로 고맙고 귀한 내 아내다.
내 아내 박해순 권사는 전북 전주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불교 신자로서 1980년 5월 9일 나와 결혼했다. 결혼 후 한동안 아내는 우리 집안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적응치 못해 힘들어했다. 집에서 간혹 구역예배라도 드릴 때면 음식을 차려놓고 살그머니 밖으로 나갔다가 교인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며느리에게 별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언젠가는 며느리에게도 복음이 들어가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 아내가 어느 날부터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앙이 급성장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인인 나를 선도하게 됐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모델이 된 것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아내가 경기도 고양의 한 기도원에 들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아내는 그날 기도원에서 찬양을 하던 중 너무나 좋은 예수님을 알게 됐다. 아내는 목이 터져라 울며불며 찬양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거실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찬양을 했다. 솔직히 나는 그날 아내가 실성한 줄 알았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 않은가. 거기다 아내가 기도원을 가게 된 것도 우연 치고는 희한했다. 그때는 우리 부부가 남매를 낳고서 부모님 댁에서 분가한 직후였다. 새로 이사한 집의 위층 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중 어느 날 그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기도 고양의 한 기도원을 가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아내는 완전히 바뀌었다.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틈만 나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양했다. 내가 모태신앙인이면서도 세상에 두 발을 푹 담그고 날라리 신자로 지내고 있는 중에 아내는 신앙의 바탕을 차곡차곡 다져나갔다.
아내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불교 집안인 처가의 모든 가족을 전도했다. 4남3녀의 막내인 아내는 처가 부모님은 물론이고 오빠와 언니들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로 인도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리고 내친 김에 내 인생의 반전극을 연출하게 해주신 전몽월 목사님에 대해서도 잠깐 밝히겠다. 비 오는 날 밤에 심수봉씨와 함께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면서 나를 찾아와선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고 일침을 가하신 당시의 전도사님 말이다.
전 목사님은 현재 목회 사역과 함께 사단법인 ‘나누리’의 이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활기차게 하고 계신다. 여성이면서도 뛰어난 영적인 파워를 가지신 그분은 상대가 누구든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여지없이 곧은 말을 하신다. 나는 신앙적으로 상담할 거리가 있으면 그분을 찾는다. 그분은 한번도 내 기대를 저버리신 적이 없었다. 나는 그분을 감히 내 신앙의 멘토로 삼고 있다.
전 목사님을 보노라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제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전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에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분으로 인해 나는 지금도 서울 전농동의 지역아동센터를 나름대로 열심히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주도하는 음악회나 각종 행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두 여성, 그러니까 아내와 전 목사님 덕분에 팔자를 고친 사람이다. 거기다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치면 세 여성이 내 인생을 행복으로 이끌었다. 가히 여복(女福)이 터진 사람이라고 해도 실례가 되지 않으려나? 예수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한 이들도 여성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2) 하나님의 통 크신 선물 ‘SBS 예술단장 승격’
“김 단장, 사실은 오래 전에 이미 자네를 단장으로 내정했다네. 하지만 혹시 자네가 거절할까봐 공개모집을 했지. 그랬더니 자네 말고도 여섯 명이나 지원했더군.”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내가 1991년 SBS(서울방송) 개국 때 관현악단장에 뽑힌 것도 과분한데, 이미 내정까지 돼 있었다는 방송국 고위층의 말을 듣고 보니 도대체 어쩐 영문인지 몰랐다. 내 실력이나 관록으로 볼 때 분명히 분에 넘치는 자리였다. 게다가 방송계가 어떤 곳인가. 인맥과 로비가 실력에 우선하는 곳이 아닌가. 가수들과 친하긴 하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실력자로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어느 누구한테 로비라곤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 맞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곰곰 하던 중에 나는 답을 찾았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줄 선물을 한 손에 들고서 극장식 식당이라는 유혹으로 나를 시험하신 것이었다. 내가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까 아내를 붙여서 극복하게 해주신 것이었다. 내 눈에선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를 향한 그분의 인내와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앞으로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꿈에도 그리던 자리를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8년 정도 MBC 악단의 팀장으로 일하면서 계속 단장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출근할 때 MBC 사옥을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악단장을 맡아서 원하는 음악을 하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근데 언젠가부터 ‘뒤로 돌아라’라는 암시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나의 나쁜 행동과 습성에서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다. 근데 그게 내 뒤로 빤히 보이는 SBS였다니….
당시 나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회개는 하면서도 번번이 죄를 향해 손을 내밀곤 했다. 회개를 했으면 반복해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나란 사람은 워낙 강하지 못했다. 나의 죄성은 나를 거듭 죄의 길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던 중 언젠가부터 나는 성경 속 한 구절을 위로로 삼았다.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 누가복음 15장 17절의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의 ‘이에 돌이켜’라는 말이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내가 연약해 자꾸만 헛발을 디디지만 그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그 길에서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시는 은혜였다. 그리고 돌이킨 것만으로도 가상히 여기고 회복시켜주시는 은혜였다.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은가.
관현악단장을 맡고서 몇 년 뒤 나는 예술단장으로 승격됐다. 관현악단에다 합창단과 무용단을 통합해 예술단으로 만들면서 첫 단장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SBS의 정식 직원으로 발령을 내줬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예로부터 악단장을 포함한 단원들은 계약직이었다.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축복이었다. 나는 그저 부지런히 전도하고 단원들을 위해 기도한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셨다. 그때 나는 분명한 생각을 갖게 됐다. 보잘것없는 내게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안기신 건 단 한 가지 ‘이에 돌이켰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도 나는 곧잘 넘어지고 깨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에 돌이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커다란 행동이나 단단한 결심, 빛나는 업적이 필요 없는 것 같다. 단지 있는 그 자리에서 잠시 돌이키기만 해도 그분은 갸륵하게 여기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진짜 통이 크신 분이다. 한 번 주셨다 하면 쩨쩨하게 주시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시는 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3) “담배 안 피우게 해주세요” 기도 한마디에…
SBS 예술단장, 참으로 황홀한 자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는 절대로 내 실력으로, 내 공로로 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과분한 축복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가시적으로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떠오른 게 아내가 찬양 속에서 ‘무너졌던’ 그 기도원이었다.
아내와 나는 매주 화요일 그 기도원을 찾기로 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아무리 피곤해도, 설사 몸이 아파도 화요일 저녁만큼은 기도원에 가기로 했다. 기도원에 가면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맨 앞자리를 잡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우리 부부는 일단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신념이었다. 가끔 목사님의 침이 얼굴이 튀기도 했지만 그래도 관계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내가 어찌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에 몰두하지만 나는 두 마디만 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졌다. 옆에선 회개한다고, 감사하다고, 소원을 들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해대는데, 나는 벙어리 신세였다. ‘에라 모르겠다. 주기도문이나 외우자’며 한 시간 동안 주기도만 반복한 적도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만 한 시간 동안 반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은 어쩌나 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데,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근엄한 얼굴의 내가 한 손에는 성경책을 펼쳐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불붙은 담배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곤 담배 한 모금 빨고 성경 한 구절 읽고, 다시 담배 한 모금 빨고 성경 한 구절 읽고 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우습기도 하면서 ‘이건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웅얼거리듯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뭔가 어색하네요. 하나님 저 담배 안 피우게 해주세요.”
단 한 마디의 기도였다. 근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정말 내가 담배를 안 피우게 된 것이다. 하루 세 갑씩 피우면서 주머니에 두세 갑, 집에 두세 보루씩 여분이 있어야만 정서적으로 안정됐던 내가 담배를 멀리하게 된 것이다. 구수하기만 했던 담배 연기가 오히려 역겨워졌다. 처음엔 속이 안 좋아서 그런가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오랜 기간 동지였던, 평생 동지로 여겼던 담배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건강에 안 좋다고 끊은 것도 아니고, 나의 결심으로 끊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담배와 성경책을 같이 들고 있는 내 꼴이 우스워서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 기도 한 번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셨다. 철부지 신자의 짤막한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 좋으신 하나님이셨다.
나는 요즘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과 능력을 느낀다. 그리고 한 손에 성경책을, 다른 한 손에 담배를 쥐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나님 한 손에는 말씀의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쥐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른바 담배사건은 나로 하여금 기도의 중요성을 절감케 했다. 그리고 기도생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나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결코 기도에 소홀할 수 없었다. 아내와 기도원으로 향하는 발길이 점점 가볍고 즐거워졌다. 그렇게 족히 일년은 매주 화요일 기도원 출석을 계속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원장님이 반주자가 없다고 걱정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반주자를 자원했다. 쉽지 않을 일을 나는 너무나 쉽게 떠맡았다. 반주자를 맡으면 한동안은 계속해야 하는데, 내 입에서는 거리낌 없이 ‘내가 하겠다’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성령이 주장하신 말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4) 철야기도회 반주 1년만에 “이젠 연예인 전도”
기도원 반주자의 일은 꽤 어려웠다. 매주 화요일이면 일을 마치자마자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키보드를 챙겨들곤 기도원으로 향해야 했다. 저녁기도회 참석자들이 오기 한 시간 전에는 가야 키보드를 설치하고 기도로 준비할 수 있었다.
끝나는 시간은 더욱 힘들었다. 적어도 새벽 2시나 3시는 돼야 기도회가 끝나는데, 집에 돌아오면 보통 4시는 된다. 그야말로 파김치가 된 몸으로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부랴부랴 출근하기 바빴다. 처음엔 ‘내가 왜 이 일을 떠맡았을까’ 하는 후회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의지보다 성령의 주장으로 하게 됐다고 생각하니 후회 같은 건 금세 사라졌다. 그러면서 ‘일단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자정 넘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에도 나는 계속 반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목청을 올려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키보드 밑으로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잘 나오던 반주가 갑자기 끊기면서 반주자도 없어지자 놀란 원장님은 내 아내에게 가서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김 집사님 어디 가셨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어! 저기 있네요.”
키보드 밑에 쪼그리고 앉아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건드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원장님이었다.
“집사님, 반주 해주셔야죠.”
나는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 반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도하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키보드를 치자 손가락은 연주를 하고 나는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노련한 연주자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였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그날 나는 기쁨으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의 기도원 ‘개근’은 내가 생각해도 가상할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두어 달이나 갈까 했는데, 일년을 가뿐히 넘기고도 계속됐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설교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면서 일어났다. 주위 사람들을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어느새 ‘나도 이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그때부터 나에겐 흔히 말하는 ‘기도 제목’이라는 게 생겼다. 바로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누굴, 어떻게 전도하느냐 하는 생각이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답을 찾았다. 나의 일터인 방송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전도하자는 것이었다. 예술단장으로서 불가피하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방송국을 나의 전도밭이자 사역지로 삼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연예인 전도야말로 참으로 주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들은 대부분 물거품 같은 대중의 인기에 집착해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마약이나 알코올, 문란한 사생활로 곧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이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굳게 서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연예인들은 대중적인 영향력이 어느 직업의 사람들보다 크다. 그들이 복음전도자가 된다면 그 반향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 내가 그들로 하여금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역경의 열매] 김정택 (15)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 개그우먼 이영자씨
“단장님, 숨겨놓은 여자 있죠?”
“엥…. 뭐라고요?”
“제가 1년 내내 지켜봤는데, 어떻게 단장님은 항상 싱글벙글이세요?”
1997년으로 기억된다. 개그맨 이영자씨가 난데없이 날더러 바람피우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1년여 동안 진행해온 ‘아이러브코미디’라는 마지막 회 녹화를 마친 뒤 분장실에 모여 스태프와 함께 송별 회식을 하기 위해 나서려던 참이었다. 일단 당황스러웠지만 영자씨에게 뭔가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야 뭐, ‘할렐루야’니까 늘 웃죠. 영자씨도 늘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잖아요. 영자씨는 웃을 일 많지 않아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을 잘 못자요.”
사실 영자씨의 순발력과 재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거기다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그래도 연예계에서의 생존은 만만찮다. 자기계발과 공부에 전념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연예계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내가 쭉 지켜본 바에 의하면 영자씨는 누구보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며 순수하고 순박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당시 영자씨는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그녀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바람이나 물거품 같은 인기에 매달려야 하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하겠는가. 거기다 만약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갈등과 고민까지 있다면 그 스트레스는 배가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가끔 점쟁이를 찾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녀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장소를 식당으로 옮기고서 나는 일부러 영자씨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곤 내가 항상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줬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말해줬다. 그리고 모든 근심의 해결점이 그분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이씨는 내 이야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속으로 ‘성령님, 역사해주세요’ 하고는 영접기도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홍진경씨와 조연출자, 코디 담당자에게도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고맙게도 연장자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는지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몇 주 후 교회에서 영자씨를 보게 됐다. 함께 방송할 기회가 없어서 만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제 발로 교회에 온 것이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으로 들어서는데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이 낯익다 싶어서 옆으로 가서 확인하니 영자씨였던 것이다. 참으로 감사했다. 그녀가 감사했고, 그녀를 교회로 인도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다.
그 뒤 영자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나왔다. 다시 몇 주 후엔 아버지를, 이어 오빠와 올케 등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다. 한 사람이 주 예수를 믿으면 온 가족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도행전 16장 31절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언젠가 영자씨가 자신의 친구 연예인 결혼식장에서 복음성가인 ‘축복송’을 불러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리고는 무대 뒤로 돌아와 혼자서 눈물을 훔쳤는데,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안다.
영자씨는 지금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위 사람들을 잘 섬기면서 복음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가끔 TV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면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에게서는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기운 같은 게 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연예인으로서 발휘하는 파워보다 복음전도자로서 발휘하는 파워가 훨씬 막강해질 것으로 믿는다. 영자씨, 주님 안에서 사랑해요.
***[역경의 열매] 김정택 (16) “주님, 패티 김 선배를 멋진 전도자로 세우소서”
나의 전도 편력은 연예계에서 유명하다. 연예계에서 밥 좀 먹은 사람 치고 나의 전도 대상자가 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기회만 되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형의 대상자들을 만난다. 복음을 전하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끝내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될 듯하면서도 계속 뜸을 들이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런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계속 기도한다.
내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분들을 전도하기가 더 어렵다. 특히 나보다 연세가 더 많으면서 실력은 물론 돈이나 명예, 인기 등을 많이 가진 분에 대해선 각별히 조심스러우면서 정성을 들인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패티 김과 나훈아 선배님은 특별하다.
먼저 패티 김 선배님부터 보자. 선배님은 가수 이전에 그냥 한 인간으로서도 대단한 분이다. 그분은 무대에서 노래할 때뿐 아니라 평소 말이나 행동, 의상이나 자세 등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그리고 어떤 무대에서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프로다. 그분을 생각하면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그런 선배님으로부터 내가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분은 콘서트를 할 때마다 항상 나를 부르시니 말이다.
얼마 전 선배님이 54년 가수생활에서 은퇴한다는 발표를 하셨을 때 나로선 만감이 교차했다. 그분과 만들었던 숱한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참으로 그분으로 인해 행복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한국 가요계의 큰 별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싶으니 아쉬움도 컸다. 오는 6월부터 선배님의 마지막 콘서트 전국투어를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설레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선배님을 만나면 언제나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그분은 웃는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예전에 선배님이 무대에서 ‘그대 없이는 못살아’를 부를 때면 나는 지휘봉을 잡고서 “하나님, 패티 김 선배님이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고 찬양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다. 언젠가 선배님이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단장님, 사실 우리 어머니가 교회 권사님이셨어. 그거 몰랐지?”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선배님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하자 그분은 고맙다며 활짝 웃었다. 그리곤 속에 담았던 또 다른 말씀도 하셨다.
“우리 어머니 생전의 소원이 내가 찬양하는 걸 보시는 거였어. 근데 소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지.”
나는 선배님의 그 말씀을 듣고 속으로 ‘이 분이 언젠가는 세상 누구보다 멋진 찬양을 하시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요즘 선배님과 함께 찬양 콘서트를 하는 꿈을 꾸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내가 사랑의 콘서트를 기획해 추진할 때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패티 김 선배님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서 선배님께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김 단장 생각을 하면 내가 당연히 출연해야 하는데 말이야, 내가 아는 찬송가가 없어서…”
“찬송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냥 선배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곡으로 하나만 불러주세요.”
선배님은 그때 자신과 너무 잘 어울리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사랑은 영원히’라는 노래를 열창해 주셨다. 나는 악단을 지휘하면서 선배님이 어느 때보다 가사에 마음을 실어 진심으로 노래하셨다는 걸 느꼈다. 비록 찬송가는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가사에 진정을 담아 부르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을 확신했다. 나는 그분을 위해 끝까지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패티 김 선배님을 멋진 전도자로 세워주세요.”
***[역경의 열매] 김정택 (17) “나훈아가 무대 서면 총 쏘겠다” 발칵 뒤집힌 뉴욕
“회장님은 모든 면에서 저보다 월등히 뛰어나십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제가 회장님보다 더 앞서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제가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알아, 알아! 김 단장 마음 내가 잘 알아.”
나는 언젠가부터 나훈아 선배님을 최 회장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선배님이 사업을 하고 나서 그분의 본래 성씨를 붙여 그랬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벼르고 벼르다가 선배님을 전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내가 연예계에서 일하면서 나훈아 선배님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도 드물다. 그분은 매사에 ‘똑 소리’다. 노래 한 곡을 부르실 때마다 어떻게 해야 청중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지를 철저히 연구하고 준비하신다. 특히 공연을 할 때면 꼼꼼하게 자료를 챙겨 구상한 다음 무대연출까지 직접 하신다. 선배님은 연주, 조명, 음향, 무대장치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다. 30년 가까이 그분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감탄해왔다.
그러다 보니 선배님과 공연을 할 때면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워낙 섬세하고 철저한데다 다양한 분야에 해박한 분이기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작은 실수라도 할라치면 공연 후 정확하게 지적하신다. 시간만 나면 책을 읽고 공부하시는 선배님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나는 선배님께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일을 벗어나서는 겉보기와 달리 많이 여유롭다. 그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인정과 의리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리분별을 해야 할 때는 철저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시쳇말로 쿨하다. 가끔씩 경상도 사투리로 툭툭 던지는 조크는 주위 사람들을 저절로 끌려들게 하는 매력이다. 그러면서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항상 강한 카리스마를 유지하신다.
그러기에 선배님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나의 ‘전도 본능’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만 나면 시작되는 나의 예수님 이야기에 선배님은 가끔 귀찮아 할 때도 있지만 대개 웃으면서 들어주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분명한 것 같아. 우리 김 단장이 이렇게 변한 걸 보면 말이야.” 그분은 나의 BC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힘입어 나는 나의 변화에 대한 간증을 집중적으로 했다.
선배님과 미국 공연을 갔을 때 일이다. 뉴욕에서 막바지 공연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교민으로부터 기획사에 공연을 취소하라는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님이 무대에 오르면 총으로 쏘겠다는 것이었다. 기획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획사 사장은 아무래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집중적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나훈아씨에게는 말하지 말고 그냥 진행합시다. 대신 경호는 철저히 해야 합니다.”
초긴장 속에서 진행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무대에 올라간 선배님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나중에 그 상황을 전해들은 선배님은 “내가 김 단장 기도 덕을 톡톡히 보네” 하며 껄껄 웃으셨다.
그 뒤 지방공연을 갔다가 대기실에서 선배님이 내 손을 잡고는 어색하게 말문을 여셨다.
“나는 내 공연이 계속 성공하는 이유를 알아. 김 단장이 나와 내 공연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란 걸 알지.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랑은 일 못한다.”
나는 그때 선배님이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했다. 실제로 선배님은 그 이후 내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연신 끄덕이셨다. 그 뒤에 또 한 번은 공연을 잘 마치고 나면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지금도 선배님이 공식석상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실 날을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8) SBS 관현악단, 25개 악기로 하나님을 연주하다
1991년 SBS 개국을 앞두고 나는 걱정 하나를 떨쳐내지 못했다. SBS 관현악단장으로서 공식 활동을 시작하면서 꼭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25명의 단원 중 16명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억지로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싫어할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5명만 모여서 따로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개국전야제 날이 됐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단원들 앞에서 내 속내를 밝혔다.
“여러분 가운데 비기독교인이 여러 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모두 다 함께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다음 공식 활동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러곤 단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단원들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설득을 하고서는 나름의 ‘약식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기적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저를 잘 알지 않습니까. 예전의 김정택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변화된 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항상 모자랍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이 채워지고 은혜로 넘치게 됩니다.…”
나는 나름대로 말씀을 전했다. 말이 좋아 말씀이지 풋내기 신자의 어설픈 고백이었다. 내 입장에서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말에 질서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때는 그게 나의 한계였는걸. 하인들이 순종해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보았듯이 우리도 주님께 순종하자, 뭐 그런 메시지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악보 한 장씩을 돌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찬송가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새찬송가 310장) 연주를 시작했다. 한 소절쯤 나갔을까, 단원들도 저마다의 악기를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주가 이어지면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이루며 울려 퍼지는 찬양 소리가 천상의 음악보다 아름다웠다. 연주를 하면서 저마다 감동에 젖는 표정이었다. 비록 그 찬송가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모르는 단원들이라 하더라도 저마다의 화음으로 어우러졌다.
나와 기독교인 단원 9명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목이 메어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나 같이 쓸데없는 죄인에게, 우리처럼 연약한 자들에게 왜 이리 큰 은혜를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눈물로 찬송가를 부르자, 다른 단원들도 분위기에 젖어 울먹거렸다. 단원들은 몰랐지만 나는 그때 강한 성령의 임재를 느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나는 단원들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 어린 단원들은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연장자 몇 분에게는 조심스러웠다.
“형님들, 저는 우리 악단을 위해서 매주 월요일 아침 스케줄 브리핑에 앞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담스러우면 예배 시간에 형님들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세요.”
“아, 그러면 되나요. 같이 해야죠.”
의외의 반응이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월요일마다 저마다의 악기로 찬양하면서 나름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는 돌아가면서 기도와 설교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단원들끼리 예배를 드리다보니 이번에는 방송국 안에 신우회를 만들고 싶어졌다. 이 또한 조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관현악단이 개국하자마자 매주 예배드린다고 웅성거리는 판에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면 너무 설친다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차에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생겼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19) SBS 개국 1주일 만에 꿈의 ‘신우회 예배’를
SBS 개국 후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침에 방송국에 출근한 나는 깜짝 놀랐다. 서울 여의도 본사 게시판에 신우회 설립예배를 알리는 공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렵사리 관현악단의 월요예배를 만든 뒤 SBS 신우회를 설립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흥분된 나는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가 구내전화로 신우회에 가입 의사를 알려줬다. 알고 보니 ‘코미디계의 대부’이자 당대 최고의 연출가였던 고(故) 김경태 장로님이 주도하신 것이었다.
나는 신우회의 설립예배를 누가 봐도 폼나게 드리고 싶었다. 단원들에게 웬만하면 예배에 참여해 함께 반주를 하자고 부탁하고는 그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예배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나와서 미리 준비를 하자는 부탁도 했다.
마침내 예배 당일, 나와 단원들은 오전 6시에 도착해 저마다의 악기를 조율했다. 한데 6시30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걱정이 됐다. ‘SBS에는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나? 그래도 그렇지, 김 장로님은 오실 텐데….’ 순간 장소가 방송국 옆에 있는 여의도관광호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호텔로 뛰어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런 예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해서 게시판으로 가서 공고를 다시 읽었다. ‘엥…’ 예배시간이 오전 7시가 아니라 오후 7시였다. 나의 실수였다. 흥분한 내가 7시만 읽고 당연히 아침이겠거니 했던 거였다. 단원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백배 사죄를 하고는 저녁에 다시 한 번 만나자고 부탁했다.
그날 저녁의 SBS 신우회 첫 모임은 그야말로 은혜롭게 진행됐다. “선배님도 크리스천?” “아니, 자네도 교회에 나가?”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서로들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며 손을 잡고 예배를 드렸다. 감격의 눈물이 예배장에 일렁였다. 예배를 마친 뒤 돌아가며 인사하는 시간에 내가 아침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소개하자 장내에 한 바탕 폭소가 터졌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내게로 와서 인사하고는 한 마디를 했다. “단장님이 얼마나 이 예배를 사모하셨으면 그랬겠어요.”
나는 SBS 신우회를 나름대로 열심히 섬겼다.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 단원들이 그랬다. 특히 믿지 않는 16명의 단원들이 군말 없이 같이 움직여준 덕분이다. 이들은 나중에 거의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인으로 거듭나기까지 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찬양사역도 하고 KBS MBC와 함께 3사가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SBS 개국 멤버인 우리 단원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저마다 자기 파트에서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게다가 음악인으로서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이끌어가면서 그 중심에 신앙을 두고 싶었다. 하나님 중심으로 뭉쳐야 악단을 순조롭게 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믿지 않는 단원들의 전도가 선결과제였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장 직위를 앞세워 강압적으로 하다간 부작용이 있을 게 뻔하고,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다. 집 거실 벽에다 전체 25명의 이름을 붙여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의 심정으로 벽을 쳐다보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해나가자 내 속에서 단원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솔솔 솟아났다. 안 그래도 SBS라는 조직 안에서 한 가족으로 엮어진 게 고맙고 감사한데, 그 마음이 두 배, 세 배로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분은 각양의 방법으로 한 명씩 복음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드셨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20) 전도본능 1계명 “전도를 위해서라면 지옥까지”
“단장님, 우리 애 아빠 좀 살려주세요. 내일이면 검찰로 넘어간답니다. 어떡해요 단장님….”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단원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잔뜩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남편이 경찰서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근데 웬일인지 내 속에선 언짢거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이번 기회에 그 단원을 제대로 전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하면 마음이 약해지고, 그럴 때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울 거라는 생각이었다.
단숨에 경찰서로 달려갔다. 초췌한 행색의 그가 앉아 있고 그 옆에서 부인이 넋을 놓고 있었다. 담당 경찰관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내막을 알아보니, 이틀 전날 밤 음주운전에 뺑소니까지 쳤다가 현장에서 경찰서로 연행돼온 상태였다. 그러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버티다가 오늘에서야 부인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제가 미쳤습니다, 단장님. 흐흐흑… 필름이 완전히 끊겼어요. 죄송합니다. 흐흐흑…”
“단장님, 이 사람 좀 살려주세요. 흐흐흑…”
내 앞에서 부부가 듀엣으로 울고불고 그야말로 난리를 피웠다. 그런 중에 부인은 “이제 애 아빠 사표 써야 되는 거죠”라며 남편의 직장 걱정을 했다. 나는 부인에게 “제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하고는 단원 앞으로 갔다.
“이봐! 당신 안 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그랬어! 내일 당장 녹화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그 정도면 당신이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이 당신을 마신 거야. 그러게 내가 진작 예수 믿으라고 했잖아! 그러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고.…”
한 바탕 호통을 치고는 자판기 앞으로 데려가 부부에게 차 한 잔씩을 빼 주곤 일단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그리곤 예수를 믿을 건지 아닌지 분명히 말하라고 ‘협박’을 했다. 부부는 훌쩍거리며 믿겠다고 했다. 나는 부부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주위에서 보든 말든 나는 한참동안 눈물로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부부를 안심시키고는 담당경찰관에게로 갔다.
“경찰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젊은 혈기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일 저 사람이 없으면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방송 이야기까지 하면서 연신 굽실거렸다. 단원은 한참 더 조사를 받고 나서 벌금형으로 풀려났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는 애초부터 벌금형 대상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그 단원이 나를 찾아왔다.
“단장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날 단장님이 비굴할 정도로 경찰관에게 비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울화가 치밀어 그냥 내가 감방에 간다고 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단장님의 진정이 느껴져 나중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야 이 사람아. 감동을 받으려면 예수님에게 받아야지 왜 나한테서 받나. 당신이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나는 당신 바짓가랑이 속에도 들어갈 수 있어!”
그 단원 부부는 이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 지금까지 나란히 집사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지만 그는 가끔 연락을 해와 “예수님을 알게 해줘 고맙다”는 말을 한다.
이 외에도 많은 단원들이 각양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예수님을 영접했다. 나중에 예술단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단원이 44명까지 늘었는데, 두 명만 빼고는 모두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중에는 무려 7년 동안 공을 들이다가 겨우 영접하도록 한 경우도 있다.
예수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왔을 때의 그 감격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21) 스무살 현숙, 히트곡 ‘정말로’로 예수님 영접
“선생님, 저에게 맞는 노래 한 곡만 만들어주세요.”
가수 현숙씨가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선 생글생글 웃으며 곡을 하나 달라는 거였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진심이었다. 1980년으로 기억된다. 현숙씨는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라는 노래로 한창 방송을 타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근로자들이 가족들과 떠나 외국의 공사 현장에서 힘들게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던 시대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던 노래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갓 스물인데 타국에 계신 아빠가 어쨌느니 하면서 청승맞게 노래를 부르니 친구들이 놀리잖아요.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그것도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됐으면 저럴까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날 저녁,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그네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시에 나오는 ‘정말로’라는 단어와 함께 악상이 떠올랐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그려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곡이 ‘정말로’였다. 이 노래로 현숙씨는 당당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물론 그때 전도를 목적으로 곡을 만들어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현숙씨는 훗날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나의 특기인 음악을 통해 수많은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작곡이나 편곡, 연주나 진행 등을 연결고리로 해서 자연스럽게 해온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를 나만의 블루오션이라고 여기며 사명감을 가지고 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절절하게 깨우친 게 여럿 있다. 무엇보다 전도는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만나게 해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에 전도는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전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한 명을 전도할 때마다 내가 체험하는 은혜는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또 전도는 하면 할수록 자신감과 노하우를 쌓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1998년인가, ‘이주일 코미디쇼’에 고정적으로 출연할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여장(女裝)을 한 만담가로 출연하던 개그맨 김의환씨가 “단장님”을 연속으로 부르며 달려왔다.
“단장님, 저희들 들어가기 전에 경쾌하고 빠른 음악을 좀 깔아주세요.”
“글쎄….”
나는 평소 스태프나 출연자의 요구에 거의 시원하게 ‘오케이’를 하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고 뒤를 흐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콤비 강성범씨까지 합세해 다급하게 나에게 달려들었다.
“단장님 왜 그러세요? 제발 부탁 드려요. 저희들 들어갈 때 그런 음악을 깔아주셔야 오늘 저희들 코미디가 재미있어요.”
그때 두 사람의 인기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나는 애를 태우는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하고선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선 웃는 얼굴로 “두 사람 예수님 믿는다고 약속하면 오늘 내가 최고로 빵빵하게 깔아줄게”하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자 김씨가 “걱정 마시라”며 자기 어머니가 권사님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그럼 자기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지?”
아니나 다를까, 둘 다 우물거렸다. 이 때다 싶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연예인들이 좇는 인기의 허상, 직접 겪은 화려함 뒤의 외로움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권했다. 둘 다 진지하게 듣고 공감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분명히 입으로 시인하면서 나와 함께 기도했다. 물론 그날 그들을 위해 최고로 경쾌한 음악을 빵빵하게 깔아줬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22) 이주일 선배님, 끝까지 전도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징그럽게도’ 거부하는 이들이 여럿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면서 전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간혹 있는데, 그럴 땐 너무 가슴이 아프다. 대표적인 사람이 고 이주일 선배님이다.
“선배님! 이리 와보세요. 제발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가 마주 앉아 말을 꺼내는가 싶으면 선배님은 벌떡 일어서 피한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선배님은 얼른 달아나신다. 내가 다시 잡으려고 가면 부엌 쪽으로 뛰어들어가신다.
“아이고 김 단장, 나 좀 봐줘. 내 나중에 믿을게.”
“나중이 뭡니까. 이리 오세요. 그냥 제 이야기만 좀 들어보세요.”
거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거실로, 나중엔 안방으로까지,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나는 쫓고 선배님은 나를 피해 달아나신다.
“아, 이 사람이…. 회의는 네 신데 왜 두 시간이나 빨리 와서 이래?”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사모님은요?”
“시장 갔어. 자네 올 줄 알고 도망간 거지 뭐.”
1996년, 선배님과 함께 ‘이주일 코미디쇼’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스태프와 함께 매주 한 번씩 경기도 분당의 선배님 댁에서 회의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한다. 선배님 부부를 전도하고픈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 선배님이야말로 예수님의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정’주일이 아닌 ‘이’주일로 살면서 겪었던 슬픈 과거를 갖고 있는 그분이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 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내고서 지독한 아픔을 안고 있는 그분이었다. 그럼에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다른 사람들을 웃기는 그분을 보면 짠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진다. 그 선배님을 향해 집요할 정도로 전도에 매달렸지만 도무지 소득을 얻지 못했다.
“김 단장, 내 나중에….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 선배님은 항상 똑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셨다. 그렇게 마지막 방송을 마칠 때도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방송을 끝내면서 나는 성경책과 찬송가를 한 권씩 구입해 선물로 드렸다. 그 뒤에 가끔씩 전화를 걸어 성경책 읽느냐고 물으면 전화기 옆에 두고 있다고 하셨다.
국회의원을 지내셨고,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선배님에게 나는 정말로 복음의 위대함을 전하고 싶었다. 한데 그분은 2002년 이 땅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 나는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다.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도 컸지만 그분과 함께 영접기도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고 서러웠다.
이주일 선배님 이야기를 하다보니 개그맨 이영애씨가 생각난다. 영애씨는 나에게 ‘달덩이 단장’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사람이다. 선배님으로부터 무척 사랑받던 후배이기도 했다.
‘이주일 코미디쇼’ 녹화 때 일이다. 선배님이 초대 손님으로 나온 영애씨를 소개하자 무대로 나온 영애씨는 선배님에게 가기 전에 나에게로 와선 “달땡∼이 단장님∼”하면서 애교를 부리는 게 아닌가. 이때부터 연예계서는 물론 일반인들도 나를 달덩이 단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 영애씨는 내 얼굴이 둥글넓적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별명이 별로였다. 하지만 갈수록 그 별명이 좋아졌다. 달이 무엇인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행성 아닌가. 태양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달이다. 나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태양으로, 나를 달로 비유해보니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예수님의 반사체가 되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님을 알아간다면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역경의 열매] 김정택 (23) 진정한 위로기도는 산 같은 환난도 물리친다
나는 방송인이기에 앞서 생활인이다. 그러니 방송국 밖에서 만나는 사람도 많고, 전도할 기회도 많다. 내 경험상 전도의 기회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술을 벌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내 경우 유난히 많은 전도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식당이다. 육의 양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해주셨다. 어느 때는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이, 어느 때는 손님이 나의 전도 대상이 됐다.
식당에서 전도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삼는 덕목이 있다. 최고의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주 가야 한다. 그리고 맛있게 먹어주고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 식당의 단골이자 귀빈이 되고 허물없이 가까워진다. 그런 다음 식당이 좀 한가할 시간에 맞춰 과일이나 빵을 사가지고 가서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예수님을 전하면 큰 효과를 얻는다.
언젠가 하루는 점심 먹을 시간을 놓쳐서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사무실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내가 어렵게 전도한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주인 아주머니와 한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중년의 여인이 들어왔다.
“여기 소주 한 병만 줘요!”
대낮에, 그것도 여자 혼자서 소주를 시키다니….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같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술을 안 판다고 하자 그 여인은 격하게 항의를 했다. 그래도 주인이 강경하게 나오자 그 여인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딱 한 병만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도 주인이 거절하자 여인은 거의 울상이 됐다.
“제가 지금 그럴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안주 시킬 돈은 없으니까 소주 한 병만 주세요. 부탁해요.”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여인에게 뭔가 사연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자 나의 넓은 오지랖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주머니! 대낮부터 소주는 좀 그렇고, 제가 시원한 맥주 한 병 사드릴게요.”
나의 ‘돌출행동’에 주인 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주인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는 잔에다 맥주를 따라 그 여인에게 줬다. 여인은 단숨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황을 넋두리처럼 늘어놨다. 몇 년 전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집을 나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딸 셋을 키워왔다. 그런데 최근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이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지만 설마 했는데, 중증의 장애아였던 것이다.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져 여기저기 길거리를 헤매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좀 나을 것 같아서 식당에 들어왔다.
“정말 안 됐네요. 어떻게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교회 장로인데…”
내가 말을 꺼내자 여인은 듣기 싫다는 듯 한 마디로 내 말을 잘랐다.
“나는 집사예요!”
결국 장로가 집사에게 술을 사준 꼴이 됐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 싶어서 맥주를 한 잔 더 권하고서 여인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다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나름대로 재미있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의 능력을 덧입으면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여인의 손을 덥석 잡고 기도했다. 여인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남편이 빨리 돌아오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곤 내 명함을 건네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여인은 한참 동안 울고 나서 식당에 들어설 때보다 한결 평온한 얼굴로 나갔다. 그 후 보름여 후 전화가 걸려왔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의 기도를 들으신 것 같아요. 남편이 돌아왔어요.…”
***[역경의 열매] 김정택 (24) 당신 집 호주가 예수라면… 그래도 바람 피겠어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꽤 오지랖이 넓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 같다. 여기저기 끼어들 일이 잘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웬만하면 남의 가정사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그럴 일이 가끔 생긴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김 단장님, 저 죽고 싶습니다. 아니, 저 자살할 겁니다. 죽기 전에 김 단장님 목소리나 한 번 들으려고 전화했습니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온 연예기획사 이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선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 활달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그가 한껏 기가 꺾여서 죽는다는 소리까지 하는 게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사장, 일단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죽더라도 얼굴이나 한 번 보여주고 죽어. 지금 어디야? 여의도라고? 지금 바로 렉싱턴호텔 커피숍으로 와. 알았지?”
나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달려갔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있던 그는 나를 보자 벌떡 일어서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많이 수척해 보였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를 따져 물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랬다. 그놈의 바람기가 또 발동한 것이다. 워낙 준수한 외모에다 달변인 그는 이전에도 두어 차례 이런 일로 가정의 풍파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달라요. 대충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와이프가 반드시 이혼을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어요. 저 이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분했다. 일단 그의 잘못에 대해 훈계를 했다. 그의 입에서는 ‘잘못했다’는 말이 연신 나왔다. 그런 가운데 묘한 생각이 일어났다. ‘잘하면 이번 기회에 이 친구의 버릇을 제대로 고치고 전도도 할 수 있겠구나.’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김정택입니다. 속 많이 상하셨죠? 제가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안 만나겠다는 부인에게 통사정을 해서 호텔의 일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참 후 약속 장소에 온 부인은 자기 남편이 함께 있는 걸 보자 싸늘하게 되돌아섰다. 나는 부리나케 달려나가 다시 애원을 해서 겨우 방으로 들였다. 부인은 아예 남편을 외면했다.
나는 비로소 내 작전을 수행했다. 부인이 보는 앞에서 자기 남편을 혼내기 시작했다. “이봐 이 사장, 당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로 시작해서 원색적인 표현까지 해가며 아주 박살을 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거세게 퍼부었다. 부인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잘하면 부부로서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이봐, 이 사장.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약속하고 각서를 써!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나는 아예 이 사장에게 무릎까지 꿇렸다. 부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곤 부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부탁했다. 만약 한 번만 더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나서서 이혼을 주선하겠다고 하면서 사정하고 애원했다. 30여분을 그렇게 하자 완강하기만 하던 부인의 태도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이때다 싶어서 나는 부부가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로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없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 사장, 당신 집의 호주를 예수님으로 해봐. 그러면 완전히 변화할 수 있어. 나도 그랬고 내 주위 많은 사람들이 그랬어. 그럴 수 있어?”
“예…”
나는 양 손으로 이 사장과 부인의 손을 각각 잡고 영접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이 사장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했다. 이후 나는 매주 한 번씩 전화를 걸어 부부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정택 (25·끝) 최고의 영성 갖춘 오케스트라와 열방 전도가 꿈
방송에서 얼굴이 좀 알려진 덕분에 나는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때가 더러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 연주나 지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그런데도 실제보다 과분하게 평가받을 때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광고를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예배나 기도, 전도에 나름대로 힘쓴다고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 지식도 내가 아는 건 그야말로 쥐꼬리만큼의 수준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를 잘 아신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가끔 나의 이 쥐꼬리만큼의 지식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신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쉬운 비유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나는 새의 비유를 통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신 것처럼 말이다. 말씀을 통해 혹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섭리를 보여주시고, 필요할 때마다 영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나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절절히 깨닫고서부터 내 신체구조에 특이한 현상이 생겼다. 눈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찬양을 하면서 무시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내 아내 박해순 권사는 이런 나에게 ‘고장 난 수도꼭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나는 이 때문에 난처할 경우가 가끔 있다. 그 중에서도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눈물이 쏟아질 때는 참으로 곤란하다.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중 주일 아침 교회로 나설 때면 아내는 “당신, 오늘은 제발 좀 고장 난 수도꼭지 좀 조심하세요” 하는 말을 하곤 했다. 물론 나 역시도 오늘은 울지 않아야지 다짐한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그 다짐을 무산시킨다.
앞에서 지휘봉을 잡고서 대원들의 찬양을 이끌어가다 보면 어느새 코끝이 찡해지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내가 그러면 몇몇 여자 대원이 덩달아서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다 나중에는 음정이야 틀리든 말든, 가사가 제대로 전달되든 말든 전 대원들이 꺽꺽대며 찬양을 한다. 성가대가 그러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도 여기저기서 훌쩍인다. 그러다 결국 단 위에 서신 목사님까지 목이 메어 설교를 제대로 못하신다.
이러다 보니 나는 가끔 주위로부터 왜 그리 눈물이 많으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주저 없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답한다. 누군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나만 나의 경우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영락없이 영적 사형수였다. 세상의 온갖 죄를 뒤집어쓰고서 곧 죽을 목숨이었다. 하지만 사형 집행 직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임하면서 풀려났다. 이처럼 각별한 사연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어찌 특별한 은혜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받은 은혜인데, 얼마나 특별한가.
나는 언젠가부터 하나의 비전을 품고 있다. 최고의 영성과 실력을 갖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열방을 누비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윗이 한 손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다른 한 손에 물맷돌을 들고 나가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나 또한 한 손에 복음을, 다른 한 손에 최고의 찬양단으로 악의 세력들을 깨부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리하여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정택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칭찬을 들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바로 이 사람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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