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
<히든 피겨스>(테오도어 멜피, 드라마, 12세, 2016)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애플사의 창업자이면서 컴퓨터 분야의 기술혁신에 한 획을 그은 스티브 잡스는 우리 사회에 ‘인문학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기술혁신과 관련해서 인문학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서 잡스는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단순한 기계적인 사고나 상업적인 마인드만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잡스가 말한 것을 오해 혹은 오독하여 인문학적인 사고를 ‘인문학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기술혁신에 기여하는 ‘인문학적인 사고’의 핵심은 사고의 전환을 위한 동기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 익숙한 것이나 관습적인 것에서, 그리고 다른 것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여길 정도로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에서 눈을 돌려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만으로는 쉽지 않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힘은 전혀 뜻밖의 경우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인문학적인 사고를 통해 인지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문학적인 사고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자신을 반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계산 가능한 틀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인문학적인 사고는 단순한 인문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사유 방식을 말한다. 인문학적인 사고는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개혁과 혁신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기술의 혁신과 인문학적인 사고의 상관관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기술혁신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기술의 축적으로부터가 아니라 사고의 전환에서 분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히든 피겨스>는 소련과 미국이 우주과학기술의 우위를 겨루는 과정을 배경으로 한다.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미국을 크게 자극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발 빠르게 반응하여 우주탐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지만, 미국이 우주탐사 기술을 개발하기도 전인 소련은 다시금 1961년에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였고,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옴으로써 소련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기록되었다. 이에 케네디는 10년 내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하는데, 영화는 바로 이런 정치적인 긴장 관계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NASA의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미국이 이렇게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우주 탐사에서 소련을 앞지를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해서 소수 흑인 여성들의 공로에 주목한다. 우주선을 발사하고 또 귀환하는 일 뿐만 아니라-이것은 당시 소련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지구 궤도를 도는 중에 원하는 시기와 장소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장차 우주선이 다른 행성에 착륙할 수 있게 하는 일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구 밖의 세계와 관련한 일이라 기존의 수학공식으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한 소수의 흑인 여성들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화려한 영광 속에 감춰진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세 명의 흑인 여성으로 뛰어난 수학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미국 NASA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하는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메리 잭슨(자넬 모네)이다. 캐서린 존슨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 프로젝트에서 궤도를 계산하는 일을 맡는데, 뛰어난 수학적인 능력으로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돌고 또 귀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데 기여하였고, 도로시 본은 관리자로서 그리고 시대를 앞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메리 잭슨은 최초의 엔지니어로서 현출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흑인 여성으로서 그들의 활약은 더욱 빛났다.
영화는 주로 캐서린 존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실 그녀는 이미 50년대부터 NASA에 근무하였으나 영화는 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세 여성들이 60년대 초 미국에서 극심했던 인종차별을 어떻게 극복하며 NASA의 역사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그것이 영화의 주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최고의 화두였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투쟁이 단지 배경으로만 등장할 뿐 결코 중심무대로 소환되지 않은 것은 그 단적인 예다. 흑인 여성들의 성공담이나 여성 및 흑인 인권운동의 영웅 이야기로서 아무런 흠이 없다. 그런데 필자는 오히려 당시 소련에 뒤지고 있었던 미국이 소련의 우주과학기술 수준을 넘어서게 했던 기술의 혁신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몇 가지 단서들을 제시하며 스토리를 전개한다. 첫째는 무엇보다 흑인 여성들의 용기 있는 태도다. 그들은 흑인이고 또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각종 불이익에 대한 반응을 보임에 있어서, 비록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았다 해도,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캐서린은 자신의 수학적인 능력만으로 인정받길 노력했고, 도로시 본은 관리자로서 혜안을 통해 백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메리 잭슨 역시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서 사회적인 편견에 맞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백인남성만이 입학 가능한 학교의 야간 수업에 흑인 여성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법원으로부터 얻어내는 일에서 성공했다. 인권적인 측면에서 백인 판사를 압도하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윈윈 전략을 통해 그리고 오직 실력을 통해서만 백인들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에 주목하도록 한 것은 매우 인상 깊다.
결국 세 여성들은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사항들을 정치적인 시위로, 곧 자신의 인권이나 생존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표출하지 않고, 조직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부각시키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관철시켰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정치적인 인권운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로서 그녀들에게 가능한 방식을 사용하여 인권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둘째, 타자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오직 능력에만 집중하였을 때 기술 혁신은 가능했다. 특히 NASA의 항공우주국의 책임자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은 비록 당대의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해도, 캐서린을 단지 흑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만 보면서 폄하하지 않고 그녀의 수학적인 능력을 알아보고 또 그 능력이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일은 혁신적인 기술을 발견하는 일에서 결정적이었다. 결국 알 해리슨은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의 책임자로서 백인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시각을 버리고 오직 기술 개발 가능성에만 집중함으로써 당시 사회적인 패러다임이었던 각종 차별주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기술에 있어서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셋째, 시대를 앞서는 혜안이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그동안 수작업으로 수행했던 수학적인 계산원의 직종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도로시 본은 이런 사실이 흑인 여성 계산원들의 불행한 현실로 이어질 것을 예견하고, 아직 백인 남성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 기술을 습득하였고 또 다른 흑인 여성들로 하여금 컴퓨터 활용능력을 습득하도록 했다. 덕분에 계산은 더욱 빨라져 우주를 탐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안주하기보다 시대를 앞서 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훈련시키는 일에서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기술혁신과 관련해서 사고의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차 확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류의 문명사에서 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혁신과 과학혁명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숨은 공로들이 있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비록 역사의 무대에 자기 자신으로 나타나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의 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배우가 있다.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야 행복한 배우와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 뒤에 숨어야 편안함을 느끼는 배우다.”
기술혁명 및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이어지는 제2차, 제3차, 제4차 산업혁명은 기술혁신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는 숨겨진 인물들이 항상 있어 왔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각종 차별주의의 희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숨은 역할로 만족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자본력에 의해 소비되어 이름조차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감춰진 인물들이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갑을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그런 역할이 강요되었다면, 이것은 반드시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적폐 가운데 하나다. 비록 감춰져 있으나 공로를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역사를 발굴하여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숨은 공로를 애써 무시하고 마치 우리의 것처럼 여기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혹독한 비판을 받는 시대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사는 한 신학자로서 이런 생각이 든다. 기독교 특히 교회와 신학의 개혁을 위해 우리가 바꾸어야 할 생각은 무엇일까? 무엇에 대해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이 시대를 이겨낼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에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