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규가 재배합니다. 작년에 병든 몸을 이끌며 찾아가
뵙고 인사드리며 저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아울러 쌓인 그리움을 한번 풀고자 했습니다만, 병 때문에 이루지 못한 채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귀밑머리에 내린 서리는 한층 더 하얗게 세어 가니 봉산노인(凰山老人)께서는 나보다 몇 년 더 늙으셨을까 생각합니다만, 그 늙는 것을 다시
어쩌겠습니까. 꽃 앞에서 술동이 열던 때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접때 쇠약해져 병으로 누워 있는 침상에서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의 말씀이 간곡하며 정성스럽고 살펴주시는 마음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 풍으로 마비된 몸이 갑자기 낫는 듯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새로 회혼(回婚) 잔치를 치르며 그 자리에서 축하 율시로 두툼한 시편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서, 이 노인께서 다시 젊은 사람이 되셨으니 참으로
신선 속의 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평범한 속세에서 백발이 되어 병으로 신음하는 제가 그저 안부를 묻는 글이나 책상 위에 보내 드려
금동(金童)과 군선(群仙)의 비웃음을 사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미루면서 시간만 보냈으니 선옹(仙翁)께서 의아해 하시며 책망하실
것을 생각하면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편지 내용 중 영전(榮轉)을 기대하여 황영수(黃永叟
영수는
황윤석(黃胤錫)의 자(字))를 가리켜 말씀하였으니, 이는 선옹께서 단지 늙은 신선 가운데 혼자만 신선이 되고 또한 평지에 있는 병든
신선의 심사는 전혀 헤아리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본디 보잘것없는 바닷가 백성으로 평소 천명을 알고 저의 분수를 알아 벼슬을 부러워하거나
어떻게든 부여잡아 출세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과거에 급제하여 가난한 선비로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붓을
쥐고 끙끙거리며 서울과 지방을 분주하게 오간 지 30년입니다. 참으로 문밖 10리만 나가도 모두 뛰어나고 우러를 만한 당대의 현인과 준걸들인데,
하물며 영남(嶺南)이나 기호(畿湖)에까지 이르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사사로운 마음이 집요하여 매번 절로 소외되었고, 한 사람도
악수하고 서로 교제하는 사람이 없어 편지로 안부를 묻는 일은 인척관계에 있는 형제가 아니면 고을 경계 밖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영남이나 호서, 한양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과거 시험장을 왕래할 때는 주막이나 여관을 제외하면 단연코 아는 사람 집에서 유숙하면서 남에게
부탁하거나 인정을 바라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양에 들어가면 바로 반촌(泮村) 집주인에게 세를 얻고, 과거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을 나오면
곧장 말을 타고 애고개〔瓦峴〕를 넘었습니다. 대갓집 자제들과는 당초 얼굴을 아는 정도의 친분도 없었으며, 권세가의 큰 집은 부끄러워 엿보지도
않았고 엄격하여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품속에 애초 글자가 닳은 명함조차 없었으니, 한양에서 어찌
반목(蟠木)의 영예가 있었겠습니까.
과거 시험장은 부득불 무리를 따라 오갔지만 본관(本官) 백일장
외에 이웃 고을에서 문예를 겨룰 때나 도회(都會)의 승보시(陞補試)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관장(官長)에게 드리는 인사도 한두 수령이
먼저 스스로 방문하려고 했으나 분의(分義
분수에 맞는 도리)에 구애되어 몇 차례 사의를 표했습니다.
그 밖에 나머지 귀양살이 온 사람 중 남들에게 존경받는 분에 대해서도 모두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한양 과거 시험 볼
때 경상(卿相)의 자제들이 왼쪽에서 붙들고 오른쪽에서 꾀면서 세력과 이익으로 누르고 유인해도 한 번도 응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만나자고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하물며 어찌 그들과 함께 정성으로 모여 공부하면서 영예를 구했겠습니까. 그래서 바닷가의 변변치 않은 가난한
위(魏) 선비에게 한양에서 ‘괴상한 사람’이니, ‘독한 사람’이니 하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반촌의 어린 사람들은 저의 베옷과 짚신을 보면 모두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습니다. 심지어 계상(溪上)의 스승 문하에서도 단지 선생님께서 간곡하게 인정해 주신 것 외에, 비록 동문인 여러 사대부조차
아울러 편지로 연락을 하거나 교분을 맺을 길이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나 명성을 훔치고 출세하려는 사람 중 어찌 저 같은 괴물이
있겠습니까.
과거 문장은 구차하게 과거 문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향시(鄕試)에 매번 낙방했습니다. 과거를 보는 것은 어려서부터 40세를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부모님의 성심이 명운(命運)을 감동시켜 3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 대과(大科)는 본시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저 부모님의 명을 좆아 으레 과거를 보았는데, 책문(策問)으로 합격한 것이 모두 일곱 번이었습니다. 세간에 일곱 번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회시(會試)에서 낙방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분수에 편안하고 운명에 맡겼기 때문에
파수(灞水)를 건너며 눈물을 머금은 적이 없었고, 이어 가난한 집에서도 세속에 구애되지 않은 채 나이가
칠순이 되었습니다.
먼지 앉은 시렁의 서적은 모두 어린 시절의
전제(筌蹄 통발과 올가미)였으니, 어찌 여전히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밤마다 모두성(旄頭星)을 볼 생각이 있겠습니까. 뜻밖에 수의어사(繡衣御史)께서 사람들의 말을 잘못
들으신 탓에 비루한 저의 이름이 위로 임금님의 귀를 더럽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하늘 같은 은혜로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부봉사(副奉事)로 임명하셨습니다.
6일,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위해 입시했다가, 그날 밤에 만언소(萬言疏)를 봉하여 바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소는 지난 계묘년(1783, 정조7), 시골에 살 때 무료하여 망녕되게 재야의 부정확한 의논을 되는 대로 써서 엮어 둔 것이니, 어찌
조금이나마 어리석은 마음으로 이 상소를 지엄한 궁궐에 당돌하게 제출하여 임금님께 바치려고 생각했겠습니까. 입시했을 때 이미 폐막(弊瘼)을
조목조목 진달하라고 전교하셨고, 승정원에 종이와 붓을 지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저녁에 여객주인(旅客主人)을 내보내 예문관(藝文館)
하인을 불러 다음 날 아침 인찰지(印札紙)를 가지고 와 대령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인정(人定) 때 호조(戶曹) 하인이 소본지(疏本紙) 두
축(軸)을 가지고 글씨를 잘 쓰는 서리 13명을 데리고 와 임금님의 하교를 전하기를 “상소의 예에 따라 밤새 정서하여 내일 아침 상달하라.”라고
했습니다. 시골구석에서 동서도 구별 못하던 병든 늙은이가 졸지에 궁궐에 들어가 숙배하고 또 탑전에 입시하여 종일 있다 나왔으니, 기력이 아득하여
끙끙거리며 죽고 싶었을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스스로 애써도 황공하고 두려운 마음이 또 연달아
일어나 정신이 아득하여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자질(子姪) 중 마침 계묘년에 썼던 초고 종이를 가지고 온 아이가 있어서 그 초고를
가지고 서리와 함께 글자 수를 세어 나누어 썼습니다. 마침내 밤새워 다 써서 아침에 상달했습니다.
7일 저녁, 저녁밥을 먹은 뒤 또
입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허둥지둥 궐문 밖에 도착했더니 그대로 승정원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술시(戌時)쯤 비답을 내리셨는데, 그 끝에
다음 날 정사(政事
인사)에서 고을 수령에 제수한다는 전교가 있었고, 물러가서 대령하라고 했기
때문에 황송하여 숙소로 나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조 서리가 와서 기장(機張) 수령 망(望
후보)단자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시(午時)에 또 칠십 노인이 어떻게 그리 멀리 가겠느냐는 전교가 있었고, 이조
서리가 다시 와서 태인(泰仁)으로 바꾼 망단자를 보여 주었습니다. 저녁 무렵 다시 부임지가 옥과(玉果)로 바뀌었으며, 도성을 출발하라고
재촉하면서 다음 날 말을 지급하여 내려보내라고 전교하셨기 때문에, 8일 오후 차비를 갖추고 마패를 받아 도성 문을 나섰습니다.
관직의
고하(高下)와 후박(厚薄)을 막론하고 평생 아등바등 뛰어다녀도 일명(一命
9품직이나 낮은 관직)의
벼슬을 얻는 사람은 백에 한둘입니다. 하물며 저처럼 재능 없고 졸렬한 사람이겠습니까. 문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임명되는 사람 중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경우는 열에 한둘입니다. 하물며 저처럼 모자라고 비루한 사람이겠습니까. 속언에 이른 바 “꿈에선들 언제 이런 일이 있을까.”라고 말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도성에 머물던 사정을 아는 고향 친구 대여섯 명이 앞다투어 와서 축하도 하고 위로도 하며 “이는 특별한 은혜이다. 자네의
도리로는 명을 듣자마자 처음부터 관직에 나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조에 관직을 사양하고 체직을 청하는 소지(所志)를 올리면, 그 뒤
은명(恩命)이 어디에 이를지 모른다. 2품도 얻을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보아라.”라고 했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본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려고 했던 사람이지, 본래 산림에서 덕을 기르던 선비가 아닙니다. 이렇게 뜻밖에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니, 참으로 존귀한 분이
내려 주시는 관직을 비루한 사람이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의리가 있습니다. 한 고을을 맡는 수령이라는 관직은 증조 이후 없던 일로, 얻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원래 하늘이 주신 것을 받지 않을 이치는 없습니다만, 어찌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여 낮은 관직을 사양하고 높은 관직을 도모하는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이미
관아에 나왔으니 오로지 나라를 속이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조금도 명예를 구하거나
저의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평소 집안이 가난하고 정성이 박하여 제사에 떡과 국수, 생선과 고기를 준비할 수 없어 항상 한스러워하면서
일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사철의 정제(正祭), 명절 제사, 기제사(忌祭祀)는 가까스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으니, 망극한 임금님의 은혜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5월 보름 어버이 제사가 지나갔습니다. 20일 전에 돌아가려고 단단히 준비하였으나 마침 아내가 74세의 나이에
심한 설사와 학질로 거의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결코 더위를 무릅쓰고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부득이 앉아서 서늘한 가을을 기다렸을 뿐이지, 어찌
터럭만큼이나마 관직에 연연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저의 몸에도 다시 마비 증상이 도져 신임 감사 연명(延命
부임 행사 및 의례)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삭망(朔望)ㆍ망궐(望闕)ㆍ알성(謁聖) 등 여러 예식을 몇 달째
폐기하였으니, 어찌 하는 일 없이 수령의 직책에 있으면서 외람되이 바쁜 공무를 감당하겠습니까.
안으로 원래 품고 있던 마음을 돌아보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지만, 전최(殿最
직무 평가)가 좋지 않은 것은 실로 달갑게 생각합니다. 다만
공사(公事)로 문책을 당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불행 중 다행입니다. 누추한 집에 돌아와 누워 온갖 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더욱 옛사람들이
이를 커다란 즐거움이라고 생각한 것이 참으로 빈말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임금님의 돌보심이 멀리 있지 않아 바로 품계를 올려 4품 자급을 내려
주시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더욱 깊이 두렵고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끝이 없습니다. 어찌 이보다 더한 분수에 넘치는 바람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말씀대로 청현직(淸顯職)이었다면 병 때문에 가까이서 알현하는 반열에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70년 동안 책만
읽은 사람이 임금님을 위해 덕을 실천하는 직임을 다하지 못하고 외람되이 관직 이름만 차지하며 속으로 훗날 호적이나 화려하게 장식할 일만
기뻐하겠습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어찌 죽도록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요즘 조봉대부(朝奉大夫)라고 제명(題名)하니 이미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복입니다.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찌 그칠 바를 모르겠습니까. 다만 가깝게는 친족부터 멀리는 아는 벗이나 사돈 집안까지
모두 관직을 지내고도 집안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꾸짖고 비웃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저에게 딱 들어맞는 이름이 되더라도
스스로 달갑게 여기고 후회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축하 잔치의 운(韻)은 제가 시상(詩想)이 본디 졸렬하고 병 때문에 기력이 곱절은 소모되어
겨우 56자를 모았고, 짧은 서문은 정신이 혼미하여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하다가 지금까지 늦어졌습니다. 삼가 질책하실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에야 비로소 써서 바치는데, 번거롭게 해 드릴 친동생과 자식들의 청이 있어 여기에 아울러 기록하여 올립니다.
부디 웃으시며 받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진사 동생은 이미 좌하(座下)께 인사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그 사람이 자신의 졸렬한 시를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