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정의와 분류
조선시대에는 3년에 한 번씩 호적대장을 작성하였는데, 그 기본적인 목적은 호구 파악을 통한 부세 수취에 있었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문서로 호구단자, 준호구를 들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식년, 즉 ‘자·(子)묘(卯)·오(午)·유(酉)’로 끝나는 해마다 한 번씩 전국적인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호적대장을 정리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호적을 작성하는 식년이 되면 민간에서는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는 면(面)과 관(官)의 확인을 거친 이후에 1통은 각 호로 되돌려 보내지고, 1통은 호적대장을 작성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다. 한편 준호구는 신분 증명의 자료나 노비소유, 소송 등 제반 증명이 필요할 경우 개인적으로 관에 발급 신청을 하면 해당 관에서는 장적에 준하여 등급해주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까지는 준호구에 대한 이러한 원칙이 관철되었지만 조선시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행정의 효율, 종잇값의 절약 등의 이유로 인하여 호구단자를 비롯한 준호구도 백성이 작성하여 제출토록 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전국의 호적대장 업무를 관장하던 한성부와 아래에서 소개할 경주부를 들 수 있다.
이후 조선후기에 와서는 지역에 따라 호구단자 2장, 준호구 1장을 따로 작성하지 않고 호구단자만 1장 제출해서 곧바로 관의 확인을 받는, 이른바 ‘문서 작성의 간소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단(草單)의 정단화(正單化)’라고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호구단자를 열서하지 않고 준호구처럼 연서해서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를 ‘연서식(連書式) 호구단자’라고 명명한다.
【참고문헌】
문현주, 「조선시대 戶口單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대학원 석사논문, 2009
문현주, 「조선후기 戶口單子와 準戶口의 작성과정 연구 -경주부(慶州府)의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38, 2011
최승희, 「戶口單子·準戶口에 대하여」, 『규장각』7, 1983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증보판)
문서의 양식<1> 호구단자
위의 문서는 1678년(숙종 4) 경주에 살고 있던 손익(孫釴)이 경주부에 제출한 호구단자로 『전율통보(典律通補)』 별편에 실린 문서식을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다. 호구단자는 지역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기재 방식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문서식에 근접하는 실물 문서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열서(列書)로 작성한다는 원칙은 거의 준수되었던 편이다.
①은 문서의 첫머리 부분으로 ‘거주지+호구단자’의 형식으로 기재된다. 한성부는 ‘부(部) 방(坊) 계(契)’, 지방은 ‘면 리’의 형식이다. 위 문서에는 ‘戊午三月 日 府北面 安康縣 江東 第二里 良佐村 第九統 戶籍單字(무오삼월 일 부북면 안강현 강동 제이리 양좌촌 제구통 호적단자)’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경주시 안강읍 양동리, 즉 ‘양동 민속마을’이다. ‘무오삼월 일’은 문서를 작성한 날짜인데 사실 맨 마지막에 써야 함이 맞으며 ‘제구통’도 다음 행에 적어야 함이 맞지만 첫머리에 적어 넣은 것이 특징이다. 문서의 이름도 원칙대로라면 ‘單子(단자)’로 씀이 맞지만 이처럼 ‘單字(단자)’, 혹은 ‘單刺(단자)’라고 쓰기도 하였다.
②는 문서의 작성자, 즉 ‘호수(戶首)’의 인적사항과 본인의 사조(四祖), 즉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를 기재하는 부분이다. 호수에 관한 부분은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몇 통 몇 호’라고 쓰는 부분과 본인의 품계나 관직, 이름과 나이(간지), 본관을 쓰는 부분이다. 통과 호는 살고 있는 집 자리의 순서별로 매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손익은 ‘제 9통’을 앞에다가 쓰고 ‘제 3호’만 두 번째 행에 적고 있다. 그의 품계는 ‘무공랑(務功郞)’이며 나이는 69세(경술생), 본관은 경주이다. 남성의 본관은 ‘본(本)’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부는 ‘종하(宗賀)’, 조는 ‘시(時)’, 증조는 ‘광서(光曙)’, 외조는 ‘최응규(崔應奎)’이다.
③은 처와 처의 사조에 관해 적는 부분이다. 처는 정씨(鄭氏)이고, 나이는 68세(신해생),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여성의 본관은 ‘적(籍)’이라고 표현하였다. 사조를 보면 부는 ‘사도(師道)’, 조는 ‘담’(湛), 증조는 ‘인개(仁凱)’, 외조는 ‘한극효(韓克孝)’이다.
④는 본인과 처를 제외하고서 솔하(率下)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의 직역과 이름, 나이를 적은 부분이다. 세 아들의 직역은 모두 ‘유학’이다.
⑤는 솔하의 노비를 기재한 부분이다. 3년 전 호구단자를 작성할 때와 비교하여 변경된 사항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기재를 하였다. 노 검산(檢山)과 비 논분(論分), 돌분(乭分)은 가족들과 함께 도망하였다. 비 계분(戒分)은 남편 애생(愛生)의 호로 이거하였으며 비 옥매(玉梅) 역시 남편을 따라 이거하였다. 이들 외에도 비 향월(香月)과 노 소석(小石)이 상전 김여상(金汝尙)을 따라서 경주부의 동면 입곡촌(入谷村)으로 이거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비 봉금(奉今)과 세월(世月)은 밀양으로 이거하였으나 그 이유는 적혀있지 않다. 노비 명단을 전부 기재하고 나서 기재가 끝났다는 뜻으로 ‘인(印)’자를 썼다.
⑥은 문서를 작성한 날짜를 쓰는 것인데 맨 마지막에 ‘연호 월 일’의 형식으로 기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경우에는 ‘강희십칠년(康熙十七年)’만 끝에다가 쓰고 ‘삼월 일’은 첫머리에 적었다.
⑦은 문서의 수신인이다. ‘부사(府使)’는 경주부사를 가리킨다.
⑧의 ‘호수(戶首) 손익(孫釴)(착명;사인)’은 예외적인 기재 사항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나서 본인의 이름과 함께 사인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각 호의 대표자는 ‘主戶(주호)’, ‘戶主(호주)’라고도 불렸다.
⑨는 관에서 문서를 확인한 표시이다. 붉은 먹으로 ‘준(準)’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호수가 제출한 호구단자를 접수한 관에서는 관아에 보관된 호적대장을 꺼내어 상호 내용을 대조하고 착오가 없는지를 점검하였다. 좌측 하단에도 이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2번의 확인을 거친 듯하다. 또한 호 내의 구성원 이름 위로 붉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관의 확인 과정을 거친 흔적이다. 해당 호의 현존 인구수를 파악하여 점을 찍어놓은 것으로 도망이나 이거한 노비의 이름에는 점을 찍지 않았다. 누락된 인구가 있으면 추가로 기입하기도 하였다.
문서의 양식<2> 준호구
위의 문서는 1669년(현종 10)에 경주부사가 손익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준호구는 호구단자가 열서인 것과 달리 연서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①은 준호구의 발급 일시이다. 기본적인 투식은 ‘연호 월 일+발급 관청’인데 위 문서에서는 연호가 아닌 당해 간지 ‘기유’를 쓴 것이 특징이다.
②는 준호구를 발급할 때 준거의 근거로 삼은 당식년의 간지를 ‘考○○成籍戶口帳內(고○○성적호구장내)~’의 형식으로 명시하는 부분이다. 위 문서가 작성된 1669년의 간지는 기유이기 때문에 ‘고기유성적호구장내(考己酉成籍戶口帳內)~’라고 하였다. 기유년, 즉 당식년에 만들어진 호적대장을 근거로 하여 준호구를 발급해준 것이다.
③은 호수 손익의 주소와 인적사항, 그리고 가내 인구의 정보를 기입한 부분이다. 거주하는 곳은 경주부 내의 안강현 강동면이다. 그의 직역은 ‘유학’, 나이는 60세(경술생), 본관은 경주이다.
④는 처의 인적사항과 사조를 적은 것으로 처 정씨의 나이는 59세(신해생), 본관은 영일이다.
⑤는 솔하의 노비들을 기재한 부분이다. 노 검산(檢山), 비 논분(論分)은 이전의 어느 시점엔가 도망하였고 비 감진(甘眞)은 갑신년에, 비 문개(文介)는 무자년에 각각 도망하였음을 명기해놓았다. 비 사금(士今)과 자은양(自卩陽)은 도망하였다가 되돌아왔으므로 ‘자수(自首)’라고 하여 다시 기재하였다. 노비 명단을 전부 기재하고 나서 기재가 끝났다는 뜻으로 ‘인’자를 썼다.
⑥에는 원래 지난 식년의 호적대장과 대조해보고 내어준다는 뜻으로 앞선 식년의 간지를 명시하여 ‘등○○호구준급자(等○○戶口準給者)’라는 결사어를 써야한다. 1669년에 앞서는 식년은 1666년(병오)이므로 ‘등병오호구준급자(等丙午戶口準給者)’로 끝맺음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하였다. 실제 준호구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기입하고 있으며, 지역이나 작성자에 따라서 법전상에 규정된 이 투식 외에도 ‘호구상준자(戶口相準者)’, ‘상준인(相準印)’, ‘준급자(準給者)’등 여러 가지 표현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⑦의 ‘戶(호) 幼學(유학) 孫釴(손익)(착명;사인)’은 위 호구단자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기재 사항이다. 손익이 문서를 작성하고 나서 본인의 이름과 함께 사인을 한 것이다.
⑧은 문서 발급처의 관장인 ‘부사’, 즉 경주부사를 가리킨다.
⑨는 관에서 호적대장과 준호구의 내용을 대조하면서 구수를 점으로 찍어놓은 것이다.
⑩은 금식년과 지난 식년의 호적대장, 그리고 금식년의 호구단자와의 대조 결과 이상이 없음을 확인해주는 ‘대조인(對照印)’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주협개자인(周挾改字印)’으로서 지운 것[周], 끼워 쓴 것[挾], 고친 것[改]이 총 몇 글자인지를 적어 넣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위 문서처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을 찍는다. 『경국대전』에서는 ‘주협개’가 몇 글자인지를 횡으로, 그리고 인장과 겹쳐서 ‘쓰라’고 하였는데, 『전율통보』에 와서는 ‘주협자개인’이라는 다섯 글자를 도장으로 새겨서 횡으로 ‘찍으라’고 되어있다.
『경국대전』시기의 것으로 문서상에 직접 써서 넣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서의 양식<3> 기타
1. 정단(正單)으로서의 호구단자
위 문서는 1738년(영조 14) 경주부에 거주하는 손맹걸이 동거 가족과 소유 노비를 기록하여 경주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이는 처음에 예로 들었던 1678년(숙종 4) 손익의 호구단자와 외형상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서명이 ‘호구단자’인 것은 동일하나 준호구에 찍혀야 할 ‘주협무개인’ 즉 대조인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경주부의 경우 1738년부터는 호수가 제출한 호구단자에 곧바로 대조인을 찍어서 돌려주었기 때문에 별도로 준호구를 발급 받아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호구단자에 곧바로 대조인을 찍어주는 과정을 ‘문서 작성의 간소화’ 혹은 ‘초단의 정단화’라고 하는데, 앞에서 본 1678년 호구단자와는 작성 과정이나 문서의 성격상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편의상 ‘정단으로서의 호구단자’라고 명명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호구단자가 아닌 준호구의 투식으로 작성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곳은 경주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전국적인 호적업무를 총괄하였던 한성부가 대표적이다. 물론 간소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역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2. 연서식 호구단자
위 문서는 1831년(순조 31) 하동(河東)에 사는 김정백(金貞百)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연서식 호구단자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지역에 따라 호구단자 1장만을 제출하고 거기에 곧바로 대조인을 찍어주는 문서 작성의 간소화가 진행되면서, 호구단자와 준호구라는 뚜렷했던 문서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하였다. 그럼에 따라 이와 같이 호구단자를 제출하면서 준호구처럼 연서로 써서 제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첫머리에 ‘도광십일년 신묘식 하동부 호구단자(道光十一年 辛卯式 河東府 戶口單子)’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http://yn.ugyo.net/knowledge/view;jsessionid=1D539E8191F756D120E86AE1A9150ACA?knowType=olddoc&qCond=&q=&pageIndex=1&pageUnit=20&id=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