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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서울 최고의 요정 대원각이 불교 사찰 길상사가 되었다. 삼청각 선운각 그리고 대원각 3대 요정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 성북동에 도심지 사찰 길상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슴 뻐근한 울림을 주고 있는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설법전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이 방문객을 영접하고 있다.
단청을 하지않은 단아한 한옥 설법전이 단백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 설법전 앞에 관음보살상이 뭉클한 감동을 안고 자리하고 있다.
이곳 관음보살상은 명동성당의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길상사 개창 당시 천주교신자인 최종태 조각가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해 축사했고, 법정 스님은 1998년 2월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앞에 두고 무소유의 정신으로 외환위기를 이겨내자고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법정 스님은 “김 추기경의 넓은 도량에 보답하기 위해 찾아왔다”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인연과 천주님의 뜻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조각가 최종태교수(서울대)에게 길상사 관음보살상 제작을 맡긴 일화로도 유명하다.
천주교신자인 최교수는 법정스님 추모글에서 관음보살상 건립경위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관세음보살상 조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원이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법정스님 덕이었다.
만약에 내가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절 마당에 나의 관음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스님이 세상을 뜨시고 나서야 내가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법정스님은 아래와 같은 글을 적어 대화에 새겼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 지이다.
2000년 4월 28일 세우다.”
관음상을 만들 때, 또 그것을 길상사 마당에 세울 때, 그리고 그 뒤로도 절에서 어떻게들 생각할까 그런 염려를 나는 전혀 하지 않았다. 스님은 그 일을 나한테 맡겨 놓고 전혀 궁금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조건 없는 절대의 믿음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말로 한 대로 법정은 그렇게 사셨다. 자기가 글로 쓴 대로 법정은 그렇게 실천하셨다. 말은 말대로 하고 글은 글대로 쓰고 그런 수가 많지만 스님은 그러시지 않았다. 산중에 혼자 사시면서 말은 누구랑 하셨으며 밥은 누구랑 드셨을까. 고독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법정을 보면 알 수 있고, 침묵이 영혼을 살찌운다는 것도 법정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스님은 거침없이 말했다. 고독과 침묵으로 무장되었기에 두려운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시대의 행동하는 지성이셨다.
최종태 교수는 법정스님에게 세가지를 물었다.
1.관음상 머리에 관은 뭐라고 부릅니까?
2.손에 든 병은 무슨 뜻입니까?
3.오른손을 들어 올린건 무슨 의미입니까?
법정스님은 간결하게 대답했다.화관.정병.구고입니다.이마에는 자비의 꽃으로 된 관입니다.
정병은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감로수입니다.오른손을 들어 올린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싸인입니다.
법정스님의 대답을 듣는순간 마음속에 작품이 다 그려졌다.
밤새 흙일을 일사천리로 마치고 법정스님께 연락했다.바로 법정스님이 내 연구실로 찿아 오셨다.
작품을 보고 법정스님도 만족해 하시고 찬탄하였다.
최종태 서울대 교수는 작업전에 자신의 직책상 가토릭 주교회의에 길상사 관음보살을 조성하게된 뜻을 전했다.
주교님들은 모두 반겼다.장익주교는 특별히 당부했다.‥혹시 잡음이 생기더라도 마음 쓰지 말라.‥
길상사 관음보살상 낙성 점안식에서 최종태 작가는 말했다.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습니다.땅위에 있는 모든 종교가 울타리를 허물면 한마당이 될것입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높이 1.8미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관음상은 이마위에 화관을 쓰고 왼손에는 질병을 고쳐주고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는 정병을 들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얻으라는 시무외인의 손모양이다.
관음보살의 겉옷은 수녀복에 가깝고 대좌 또한 연화좌가 아닌 성모상에 흔히 쓰는 장식없는 사각형 대좌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깊은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상을 연상케 한다.알듯 말듯한 은근한 미소는 사랑의 어머니를 표현한 느낌이다.
최종태 회장이 조각한 길상사의 마리아관음상은 전통불교조각의 명상미에 가토릭 분위기를 가미하여 종교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교수는 법정스님과의 인연을 기려 모든 작업을 무료로 보시하였다.
극락전이다. 옛 요정 대원각 시절에는 요정의 안방으로 쓰이던 곳이다. 법정스님의 법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인상적이다.
그의 법구를 운구하던 스님들은 극락전 앞에서 무릎을 세번 굽히는 것으로 영결식 등 모두 절차를 대신하였다.
주지스님이 쓰던 행지실(行持室)은 법정스님 기념관이 된다. 그 건물 남쪽 언덕에 법정스님의 유골은 모셨다.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이 즐겨 사용하던 나무의자이다. 그가 손수 만든 나무의자이다.
법정스님이 이곳에서 앉아서 사색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고 자연을 감상하셨다고 한다
친척에게 속아 가난에 내몰려 기생이 된 열 여섯 살의 진향,백석의 연인 자야,
사업가 김숙, 모두 김영한 씨의 모진 세월 속에 지나간 이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법명 길상화로 보살로서 길상사에 남아, 세상에 기억되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열 여섯살에 집안이 몰락하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스물세 살. 영한은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신지식 여성인 그는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하게 된다.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김영한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기생 김영한과 만나게 된다.
백석은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이야”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 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아마도 기생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 했던 것 같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되었다.
백석은 그후 북한 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 기구한 삶을 살게 된다.
늘 사랑과 고향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정치이념은 의미가 없었고 당성이 부족하고
늘 사랑타령이나 하는 시인이었으니, 북한 체재에서 환영을 받을리 없었다.
백석은 북한 체제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백석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한 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성공해 당대의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는 중 1997년 2억 원을 출연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같은 해 7000 여 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 여 동 등 1000 억 원대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 설립하게 된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3대 요정이었다.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로스앤질레스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을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가 이어진다.
시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와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간 되풀이 끝에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하여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나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하다.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져 기존 건물을 개보수하여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천주교와 불교가 종교 이념의 벽을 넘게 된다.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김영한 할머니는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고 하였다 한다.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라고 하신 김영한 할머니는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한 후,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긴 후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한다.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김영한 할머니의 뼈가루를 길상사 경내에 뿌려준다.
그는 시가 1천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사찰에 헌납한다.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
-천 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 쯤에 태어나서 문학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거야."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 즐겼습니다.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