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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히4:14-16)
1. 지난여름 올림픽이 열렸던 브라질의 리우 데 자이네루의
높은 산에는 큰 동상이 있죠!
예수님이 바다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상이에요.
저희 부부도 파라과이 선교지 방문을 하는 길에
이 산에 올라서 직접 본적이 있어요.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이 예수상의
모습과 같이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도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나아갈 것을 간절하게 촉구합니다.
히브리서는 단지 책이 아니에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메시지-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의 대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그 주제는 “대제사장론”이에요.
예수께서 히브리서 교회(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는 말씀입니다.
2. 왜 히브리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이야기를 할까요?
대제사장의 역할은 중보자로 변호사와 같아요.
변호사는 나를 대신해서 내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나의 무죄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죠!
나의 의로움을 끝까지 드러내주는 역할을 변호사가 합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이 말씀을 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교회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그토록 필요했을까요?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은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핍박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어요.
생업을 박탈당하는 일도 있어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기도 했어요.
그것도 잠깐 얼마 동안만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더
그런 생활을 해야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떠나서 옛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더 이상 나는 못
견디겠다.“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옛날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이런 가운데도 하나님께서는 해결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게 한다든지 그들의 가난을 좀 여유
있게 바꾸어 주시든지, 어떤 변화도 주시지 않았어요.
그런 해답은 주시지 않고 대제사장을 소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큰 대제사장이 되신다. 그분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시험-고난을 이기고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성령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너희가 능히 이길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이긴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느냐?“(요16:33)는 말씀이에요.
3. 히브리서 목회자는 히브리서 교회의 큰 대제사장(큰 변호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라고 말씀합니까?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합니다.
승천하심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을
말해요. 그는 사람(요셉)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승천할 수 있었습니다.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해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두 가지를 겸비해야 합니다.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을 구비해야 되요.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사람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4. 히브리서 목회자는 완전한 사람이신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누구시라고 합니까?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주님도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왜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 두 가지를 강조하였을까요?
예수님이 지상에서 받으신 구체적인 시험은 유혹을 말해요.
예수님도 히브리서교회 성도들이 받고 있는 유혹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주님이 그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동정하시는-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동정-쉼파데사이는 함께 고난 당하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고통스러워할 때 주께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과 고통을 당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자주 발견됩니다.
주님이 연약한 병자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어요.
불쌍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민망히 여기사)는 동정-심파데사이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말이에요.
막1:41이하에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 주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병자를 고치실 때는 손을 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손으로 만지실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말씀만 하셔도 낫기에.
주님이 직접 자신의 몸을 만지고 손을 잡아주셨을 때 이 나환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주님이 그 몸에 손을 댄 것은 그의 마음을 만져 주신 것이에요.
주님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마치 나병을 앓아본 사람처럼
그 마음을 어루만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이 우리를
동정하시는 분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요.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사53:4 예언의 성취)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연약함(질병), 도덕적 또는 정신적인 연약함(유혹에 넘어감),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일 등이에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절규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의 연약함은 죄를 범하고 타락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목회자는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동정하고 돕는다고 합니다.
5.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잘 아시고
동정하실까요?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아보셨기 때문이죠!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어요.
솔직하게 나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겸손하게 말해야 해요.
주님께서 만일 시험을 당해보지 않으셨다면, 그는 다만 하나님이시지
비참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그가 사람이 되셔서 겪은 시험(시련-고난)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으실 때까지 시험이 떠나지 않았어요.
헤롯 대왕의 시기심으로 인해 영아살해 가운데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며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실 때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고요.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은혜주시고자 했지만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였고 몇 사람만 고쳐주시고 씁쓸하게 떠나셨죠!
공생애가 무르익으며 군중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 등 종교인들은 그를 경계하며 대적했어요.
그들은 주님을 시기하며 십자가에 죽이는 계획을 세우고 군중들을 선동했고요.
주님은 이러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끝까지 품고자 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주님은 끝까지 쓰디쓴 배반의 잔을 마셨습니다.
주님이 시험받으신 이야기를 설교할 때 히브리서 성도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히브리서에는 시험(고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당시 상황을 전해줍니다. 주님이 시험 당하신 이야기를 들을 때
자기들이 시험당하는 일들과 비슷함을 발견했습니다.
고난이 힘들다고(일시적인 것) 안식(영원한 것)을 잃을 수는 없어요.
오늘날 미국교회나 한국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시험(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번영신학이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세대와 같이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과 같이 시험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고난에 대한 말도
없습니다.(금언처럼!) 그래서 교회 규모와 관계없이 병든 교회가 되고 맙니다.
세상이 먼저 이것을 알아봅니다. “그곳도 교회냐고?”(레이크우드 교회, 조엘 오스틴)
히브리서 설교는 시험(고난) 이야기를 하며 주님과 같이 그들도 그것을 피하지
말고 이기도록 권합니다. 12:4,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죠.
6. 히브리서 목회자의 설교는 어떻게 마칩니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는 옛날 번역 가운데 시은소라고 했어요.
은혜를 베푸는 곳, 구약 시대 성막의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죄 용서를 구하는 곳이에요.
은혜의 보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지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단 번의 제사로 둘 사이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년에 대제사장만이 한 차례만 들어가던 지성소를
이제는 주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어요.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는 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확신을 가지고-뻔뻔스럽게)
나아가라(끊임없이)고 강조할까요? 지성소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이 바로살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고향을 떠나고, 더러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려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 시험을 이기는 것은 주님과 끊임없는 영적 교제를 확신 가운데 가지는
것입니다. 박해 시대에 고난 가운데 있던 히브리서 교회 성도들에게 때를
따라(아무 때가 아니고, 가장 적절한 때) 돕는 은혜가 임할 것을 믿으라고!
히브리서는 시편을 많이 인용하는데, 시인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응답받은 일들을 잘 알았습니다.(시33:20-도우심을 기다린다,
121:2-도우실 것을 믿는다, 38:22-고난 속에서 속히 와서 돕기를 간구함,
63:7-도우심을 감사 찬양함)
7. 옥한흠 목사님이 미국 유학 가운데 만난 어느 한국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좋은 집을 사고 목사님을 초청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의사가 안내하는 대로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는데 최고급 오디오 장비를
갖추어 놓고 음악을 듣고 영상도 볼 수 있는 영화관 같았답니다.
예수를 믿는 집인데도 어느 방은 온갖 종류의 양주병들이 진열되었어요.
울적하면 한잔 마시면서 기분을 풀 수 있는 카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죠!
침실을 비롯하여 모든 방이 화려했습니다.
그 의사는 자기가 그만큼 성공하고 화려하게 산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였고
상당히 우쭐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옥목사님이 그날 밤을 오랜 후까지 잊지 못했던 이유는 나이가 비슷한 그 의사
의 형편이 자신과 비교되면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27년이 지난 어느 날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의사가 자기 병원 로비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옥목사님이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가 그래도 신앙생활을 했는데, 무슨 고민을 하다가 자살을 했을까?
그 사람이 믿었던 예수님이 그에게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은 무엇이었는가?“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오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며 사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현장에는 여전히 시험이 많고 온갖 성내고 분내고 혈기를
부리게 하고, 남을 용서치 못하는 일들이 즐비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는 욕심과 정욕과 교만이 계속 어슬렁거리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참고 인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 목회자가 답을 줍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8. 건국 대학교 유태영 교수(은퇴)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하여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합니다.
소꼴을 먹이고 토끼를 기르며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이 애처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갔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꿈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구두닦이를 했답니다.
아무데서나 자다가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써봐라!
그는, "저는 한국 농촌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농업이 잘 발달되어 있는 덴마크에서 공부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편지를 받은 덴마크 국왕이 감동을 받고 그를 초청해주었어요.
그는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갈 수 있었고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그는 한국 농촌을 살리는데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9. 히브리서 설교자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나라와 안식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너무 현실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의 나라와 안식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에만 빠져서 우리 영혼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끊임없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먼저 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며, 믿지 않는 자들로 나아가도록 안내합시다.
오늘부터 행복모임-전도가 시작됩니다.
행복모임은 소그룹 전도에요. 10주간 전도하고 싶은 사람과 관계 맺기를
하고 상황이 되면 가정으로 또는 교회에서 모이는 행복모임으로 초대합니다.
행복모임에서는 분명한 복음제시를 듣고 기도응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행복모임 10주 중에 두 주는 우리끼리 모이고, 3주차부터 행복모임 자리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행복모임을 10주간 모이며 사람들을 교회에 초청하고요.
이 방식으로 전도하는 것이 훨씬 열매도 많고 정착도 잘됩니다.
내 주변에 전도할만한 분들을 생각해 보고 베스트 작정서에 이름을 써주세요!
다음주일까지 주시면, 그 이름들을 부르며 저녁 기도회 때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이 방법이 좋지만, 이 방식으로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또 한 번의 전도를 실시합니다.
행복모임에는 오지 못했지만, 교회 귀빈초청 주일에 올 수 있도록
4주간 준비해서 6월10일에는 교회로 초청합니다.
이때는 누구든지 초청해서 올 수 있습니다.(총동원 주일)
하나님께서 이번 첫 전도 실행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주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자세한 것은 광고 시간에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