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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수용과 여성의 근대의식
이 향 만
Ⅰ. 서론
외세에 의한 양란이후 조선사회는 왕권이 약화되었고 사회는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신진 지식인층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었고 이는 계층의 분화와 외세에 의한 새로운 문화의 유입, 가치관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벌렬 세력은 그들의 집권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영․정조는 탕평책으로 이를 완화하려 하였지만 결국 전례 논쟁은 당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치세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던 지식인들은 학적으로 주자학적 중세사유를 반성할 수 있는 내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의병활동 이후 사회적 역할이 더욱 부각된 중인과 평민 계층은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작이나 도매업을 하는 이들은 부를 축적하여 새로운 경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의관․관상감원은 전문적 식견을 통해, 서리들은 행정능력이나 문학적 소양을 통해, 더 이상 사회적 권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잔반들과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잔반들과 중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평민 문화가 성숙되기 시작하였다. 부농과 거상의 등장, 서얼의 차별이 철폐된 것도 이 시대 신분변화의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순조 원년(1801)에 국가가 노비안을 불태운 사건은 노비의 궁극적인 해방과 새로운 신분질서를 확인하는 사건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이앙법의 개발로 농업 중심의 노동력이 자연스럽게 상공업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모두가 의식의 변화를 필요로 하며 근대의식으로 다가가는 지각변동의 시기였다. 이 중심에 서학이 유입되고 있었다.
17․18세기 서학의 유입은 조선의 후기 유교문화에 두 가지 양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나는 실학이라고 일컫는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한 실증적인 사유의 발달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 수용으로부터 비롯한 종교적 사유와 심성의 재발견이다. 이 두 가지 외래의 새로운 문화 경향성은 조선 사회의 의식구조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다.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정신으로 발전하여 내외적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실용학문의 장을 열어, 유학을 체용이 겸비된 학문으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수용은 조선 성리학 체계에서 종법적인 의례적에 국한되었던 유교의 종교성을 벗어나 신앙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종교사회의 구성을 체험하게 하였다. 이는 종교적 심성의 심화와 평등한 사회적 인간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사회의식의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 글에서는 서학의 두 번째 문화적 경향성인 천주교의 수용과 전래과정에서 나타난 여성의 사회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를 고찰하려고 한다. 천주교와 여성의 만남은 여성의 인권의식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가습家習에 따른 수동적인 종교적 신념의 수용으로부터 유교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면하게 된다. 새로운 종교적 신념의 선택은 반유학적인 사학邪學으로 여겨져 박해로 이어졌으며 여성들은 선교와 박해의 과정에서 남다른 ‘의식의 흐름(the stream of consciousness)’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새로운 신념 체계의 수용과 이를 적대시하는 기존 가치관이 대치하는 가운데, 가부장적인 유교질서 안에서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던 여성의 사회의식은 커다란 위기와 변화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의식의 흐름’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정신의 창조적 작용”과 같은 것이었으며 여성의 내면으로부터 형성된 근대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위기 순간에 여성들은 정치 문화적으로 중세적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불합리한 가치관의 한계를 밝히고 유교사회 안에서 여성의 근대적 사회의식을 여는 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Ⅱ. 천주교 수용과 사회적 연대의식
천주교회의 초기 수용 과정은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 단계는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김원성金源星․권상학權相學․이총억李寵億․이벽李檗․정약용丁若鏞 등이 서학과 한역 천주교서적을 함께 연구하며 이승훈李承薰을 북경에 파견하게 되는 ‘강학기(1777-1783)’이다. 제 2단계는 이승훈의 세례 귀국이후 자립적인 천주교의 포교와 진산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가성직假聖職에 의한 ‘자립기(1784-1791)’이다. 제 3단계는 진산 사건이후 주문모周文謀신부가 입국하기까지의 신념의 ‘정지기(1792-1794)’이며, 제 4단계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이후부터 신유사옥까지의 ‘선교기(1795-1800)’이다. 이 네 단계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1․2단계는 남인 친서파 유학자들에 의해 서학의 학문적 관심과 천주교 수용이 주도된 시기이다. 그리고 3․4 단계는 진산 사건 이후 신해박해로 일련의 유학자 층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난 이후 중인과 여신도들에 의해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며, 천주교가 실질적인 교계체계를 갖추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강학기’가 끝나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 남인 소장학자들의 가계를 중심으로 천주교의 전교가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가계 안에서 가치관을 전습하는 유교 전통에서는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남인 양반들의 자매와 부인들이 점차 입교하였고 그들의 자녀들도 부모의 뜻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유교 사회 양반부인들의 지적인 수준과 자녀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도덕적 교육관에 힘입어 천주교의 입교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실제로 부인들은 이미 서학서의 유입을 통해서 내실이나 규방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접해 알고 있었으며, 친인척들에게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었다. 남인 학자들과 권씨 가문 출신의 부인들과의 관계는 가계중심의 전교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대부가 부인들의 의식 수준이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사회의 현실적인 모순을 잘 지적하며 그들에게 삶의 새로운 전망을 주고 있다는 확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천주교는 유교사회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여성의 사회적 언로를 타고 빠르게 전래되었다. 유교사회 안에서 사대부들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언로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실생활을 담당하고 있던 여성들은 계급이나 계층의 구분이 없이 일상의 언어로 광범위한 언로를 경험하고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규방가사와 내방가사 등으로 알려진 이 일상언어로 이루어진 언로는 조선후기에 오면서 문학적 양식을 통해 구속된 개인적인 삶과 사회비판을 담아내고 있었다. 문학성을 지닌 내용은 여인들의 공감대를 타고 사회 저변에서 일상의 담론으로 수용되었다. 이제 이러한 언로의 확산은 천주교를 접할 수 있었던 일부 개방적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천주교를 통해 자신들의 비판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여인과 중인의 역할이 중시되면서 종교적 친교와 평등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3․4 단계의 시기에 중인 신도들과 여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자각하며 사회의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정약종丁若鍾이 이끄는 명도회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사대부 학자들은 교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중인들은 최창현崔昌顯이 회장으로 일하는 평신도회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 실무를 책임지는 지도층으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선교는 강완숙姜完淑을 중심으로 여신도회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내 유교 지식인들의 배교로 말미암아 신도들의 역할이 새롭게 분화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변화는 유교와 천주교의 사상적 기반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이와 더불어 실질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중인과 잠재적 지식인층이었던 소수 양반 계층의 부인들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새로운 종교적 신념에 따른 새로운 사회 질서의 경험을 가능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 구성의 변화는 서구 계몽정신이나 천주교의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초기의 선교형태는 중국에서의 예수회 선교 방침이 보여주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선교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선교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초기 강학회의 성격이 말하듯 학자들에 의해서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를 수용하였으며, 천주교 역시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종교로서 유교 사회의 계층 변화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신도들이 스스로 천주교의 교리 안에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인권의 평등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4단계의 선교 과정에 나타난 초대 교회 내에서의 양반부녀들은 신앙공동체의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직자를 보호하며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선교를 수행하였다. 강완숙의 집은 주문모 신부가 거처하면서부터 천주교 신앙과 선교의 중심지가 되어 미사가 거행되고 남녀신자들이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강완숙은 양반 부인들과 폐궁 내인․과부․하녀․머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위와 신분․성별을 개의치 않고 교리를 가르치며 이들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녀의 집에서는 남인 유학자들과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사대부들과의 교류는 그녀의 지식과 신심이 얼마나 돈독하였는가를 보여준다. 강완숙의 뒤를 이어 과부 한신애韓信愛도 양반 출신으로 지적인 교양과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하여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강완숙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교를 돕고 있었고, 중인 이합규李鴿逵와 정광수鄭光受에게 자신의 비복을 전교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후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서적과 성물을 은닉하기도 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당시의 여신도들은 전체 신도수의 3분의 2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관변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따르면 당시의 양반부녀는 강완숙과 한신애를 비롯하여 한신애의 딸 조혜의趙惠義, 이요李裀의 처 송씨, 그의 며느리 신씨, 홍정호洪正浩 어머니 이소사李召史, 이순이李順伊의 어머니 권소사權召史, 정광수의 누이동생 순매順每, 조섭趙燮의 아내 이희李喜와 그의 딸 조도애趙桃愛, 이중복李重馥의 아내 신소사申召史 등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나머지 여신도들은 중인과 하층민으로 짐작된다. 양반부녀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지만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신분의식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부각된 데에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내재되어있었다. 권철신이 쓴 『유한당 권씨 언행실록』(柳閑堂 權氏 言行實錄)의 서문序文에서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부부(夫婦)는 텬디(天地)와 대우(大宇)라 텬쥬(天主)가 텬디를 만드시고 텬디 있은후 만물이 나고 부부 있은 후 오류(五倫)이 났나니 부자군신(父子君臣)과 붕우(朋友)가 부부로부터 나고 일가구족(一家具族)과 장유(長幼)가 다 부부로부터 나고 만세자손까지 다 말미암아 났나니 인륜(人倫)에 으뜸이다.” 이 서문은 “천주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부부는 모든 인륜의 으뜸으로서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오륜의 근원, 및 존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있음
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부부의 대등한 관계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이 오륜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오륜이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주체적인 사고의 전환을 읽을 수 있다. 천주교가 여성 스스로 인권을 자각하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여성의 사회의식의 변화는 기존 유교가치관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기존 유교적 사회 질서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가치관은 종교적 신앙을 통해 변하고 있었다.
Ⅲ. 민중문화와 사회교육 의식
천주교의 수용은 정교의 분리를 의미하고 있다. 윤지충이 말하듯 당시의 유교문화는 정교 일체가 신분 중심으로 지나치게 경직되어 본래의 유연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예론에 대한 논쟁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분석적인 논쟁은 파벌과 당쟁으로 발전되었으며 누구나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했다. 중립적으로 머물거나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렇듯 학문이 배타적인 경향으로 된 것은 극단적 인문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경전에 대한 해석은 양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고, 평민은 아무런 자각없이 그들의 해석을 따라야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학서는 과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전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실증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즉, 새로운 서구 경전인 성서의 등장은 유교경전에 의존하고 있던 정치이념에 대한 도전이자 유교경전을 상대화시키는 일이 되었다. 이것은 정교분리에 대한 간접적 요청을 내재하고 있었고 이 요청은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리서의 번역은 대원군이 “천주장이가 잘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 하나는 한글 잘하기요, 그 둘은 송장 치우기요, 그 셋은 밀초 잘 만들기다”라고 한 말처럼 평민의 교양과 문자습득에 기여하였다. 한글은 언문諺文으로 일컬어지며, 당시 여인들과 평민들의 문화어로 자리잡고 있었다. 문자는 구어와는 또 다른 이해와 의미의 전달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한문 소설이 한글 소설로 문학 장르가 변해가는 영․정조시기에 학술적 한자어가 아닌 한글로 번역된 교리서는 여인들과 평민들의 지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글을 읽음으로써 비판의식과 교양을 더욱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적 움직임에서 서구 르네상스와 같은 순수한 인문주의 성향을 찾을 수는 없지만 유교의 폐단을 벗어나고자 하는 점에서 종교적 인문주의라 할 수 있다. 시대 비판적인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이 이미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번역된 교리서는 여성들과 하층민에게 구체적으로 이상적인 삶을 언급함으로써 유교사회의 문제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차별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인들은 비록 교리서 번역의 주체는 아니었지만 정약종․이가환․이벽 등에 의해 번역, 요약된 성서와 교리서의 실질적인 애독자였고 이를 통해 신심을 돈독히 하며 전교를 원활히 할 수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압수된 한글 번역본 천주교 서적은 선교 초기에 얼마나 다양한 교리서가 번역되었고 여인들에게 읽히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홍콩주재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조아(Legrégeois)에게 발바라라는 신앙심깊은 여신도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발바라는 꽤 긴 신자지도서, 문답, 요리문답, 성녀 발바라 및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전, 조선의 여러 순교자 전기, 그밖에 조선 사람들이 한글로 저술한 작은 신심서들을 다 외고 있습니다.
이 인용문에서 선교하는 여성들의 종교적 신심과 열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구전을 통한 전교야말로 박해기에 가장 안전한 선교방법이었으며 그에 따라 여인들의 상당한 지적수준이 요구되었음을 말해준다.
교리서 외에 여교우들을 중심으로 읽혀졌던 여교훈서가 있다. 여교훈서는 전통적으로 유교의 예를 기반으로 정절과 유순과 효도를 여성의 덕목으로 권장한 여성교육의 기본 교양서였다. 권철신의 질녀인 유한당 권씨의 『언행실록』은 여교훈서의 내용에 커다란 변화를 주어 천주교인들을 중심으로 유교적 여성관이 새롭게 정립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문이 한글로 되어있는 『언행실록』은 여신도들이 행해야할 예의범절의 내용을 내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언행실록』은 소혜왕후의 『내훈內訓』이나 『여논어女論語』에 비추어 볼 때 ‘텬쥬'에게서 받은 인격적 존재로 여성의식을 강조하면서 모든 여성들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여교훈서는 궁중여인과 사대부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효와 예의 도덕적 원리로서 남존여비의 종속적인 관계를 정당화하고 여성의 굴종과 노동․청렴을 형식적으로 의식화하였다. 그에 비해 『언행실록』은 서민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마음․용모․몸가짐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교육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내면으로부터 외적인 일까지 여성의 고유한 덕성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인식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유교적 여성도덕관의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수용하면서 내면적이고 실제적인 해석을 추구하였다. 해석의 원칙은 신앙에 근거하여 부덕이 드러나게 하는데 있다. 초기 천주교 여신도인 저자가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로 자각하고 기존의 유교적 도덕을 천주교의 종교윤리를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 이 저작은 천주교 여신도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기 시작한 가치관의 변화를 여신도들에게 구체적으로 계몽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규잠閨箴』,『규람閨覽』등 책이름만 전해지는 여성들의 종교적 윤리 지침서는 유교적 여성관을 개선하려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노력이자 지적인 성과로서 여성의 사회 교육적인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저작들이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관을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라 종교윤리가 여성의 덕성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원론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철신이 언행실록의 서문말미에서 말하듯 “범 부녀자 이대로 행한다면 부덕婦德이 적당하고 숙녀淑女철부哲婦가 되야 남의 문호를 창대하여 주고 나의 이름이 텬추에 류방할 것이니 제일 유공하다 할 것이다”라는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기대가 함의되어 있었다.
민중 문화적인 면모는 주로 박해 말기에 발전된 천주가사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천주가사는 무엇보다 민중의 일상적인 언어인 한글로 표현되었고, 함께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천주가사에는 성서와 교리내용 뿐만이 아니라 박해에 대한 저항과 설득․이상적인 삶․유교의례에 대한 비판․나라사랑과 나라걱정에 대한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어 있다. 이는 천주찬미와 신앙고백과 참회와 선교의 노래이다. 베틀노래가 보여주듯 여성들의 일상의 노동에 비유하여 덕을 쌓을 것을 권고하는 대목은 천주가사가 민중의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있음을 보여준다. 번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천주가사는 성직자와 학자들에 의해서 선교의 목적으로 창작되었으나 여인들을 중심으로 암송되고 전파되었음을 볼 때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들의 사회 교육적 역할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헤르더가 말하듯 ‘언어가 체험 속에, 심정적 힘의 전체성 속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며 ‘언어가 세계와의 만남의 심오한 표현임’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누구보다 먼저 언어와 사유의 일체감을 획득하였고 이는 사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천주가사에 내재된 기존의 민중음악인 민요와 불교의 범패의 선법일부를 차용한 듯한 선율은 대부분 4․4조의 유려한 흐름으로 민중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으므로 익히기가 쉬웠다. 또한 유교나 천주교가 음악을 의례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으며 한국인의 음악적 정서가 유별난 점을 감안한다면 가사문학이 종교적으로 발전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예기禮記』「악기樂記」편에 ‘악樂은 덕德의 화花’라 하였듯이 성서와 기도문에 이르기까지 운율을 붙여 노래한 것은 박해받는 처지를 하소연하고 위안을 얻으려는 민중정서와 잘 결합하고 있다. 이에 이러한 노래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고 덕을 쌓으려 한 종교적 수행이 돋보인다. 함께 노래하는 가운데 서로 일치감을 확인하고 종교적 삶의 보조를 맞추어 나가고자한 천주가사의 내용과 음율로부터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엿보게 한다.
Ⅳ. 종교적 친교와 평등의식
탄압 가운데 사람들은 명례방에서 이루어진 명도회 모임에서 계급과 계층을 넘어선 진정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어냈다. 생명의 위협 가운데 절대적 신뢰로 계속된 이들의 만남은 모든 인간이 가문과 직업의 귀천을 떠나서, 지식과 재산의 정도를 떠나서, 지고한 공동의 신념을 위해 평등하게 타인을 초대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신념을 지켜나가는 자유는 신뢰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 유교의 가족 중심의 폐쇄된 공동체와는 달리 이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천주의 자녀라는 개방적이고 보편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교회 공동체는 양반사회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적인 이익을 떠나 공동선을 위해 지식인과 평민, 남녀가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인과 여인들은 실질적인 만남의 매개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천주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즐겨 사용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은 천주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사실로부터 평등한 만남의 조건이 주어졌다. 같은 조상은 씨족의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으며 유교사회에서 사회계층과 계급은 상속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적 씨족 공동체의 의미를 발견했고 열린 형제적 삶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위폐를 묻거나 태움은 폐쇄된 장의 문을 여는 필연적이고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의례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새로운 만남의 형태를 창출했다. 특별히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교우들 간에 정성으로 환난상구患難相救를 하였음을 여러 공초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석춘은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천주교를 배우면 이익이 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주교를 배우면 평소에 모르는 사람이라도 정이 지친至親한 사람과 같아서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해준다. 너는 형제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니 이것을 배워도 무방하다.
윤지충은 공술에서 “천주교 신자일수록 장사지내는 일을 더욱 두텁고 근실하게 하며 유교풍속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밝힌다. 긴박한 위기감 속에서도 엄숙한 장례예절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앞서 인용한 대원군 말에서 천주교인들이 잘 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송장 치우기’는 교우들이 가진 진솔한 만남의 형태를 짐작하게 한다. 실로 천주교의 장례예절은 그리스 도교가 유교문화 안에 잘 토착화된 면을 보여준다. 엄숙하고 신실한 장례예절은 천주교인이 현실을 부정하고 단순히 천상의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장례예절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다. 이 예절에 참여한 자들은 믿음의 결과이자 공동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실로 죽음은 새로운 만남의 장이다. 죽음이 인간 삶의 종말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의례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유교 의례 전통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의례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천주교의 의례는 영적 가족이라는 의미로 그 의례를 확장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종교적 의례의 특징이다. 죽은 자의 몸을 깨끗이 닦고 하얀 수의를 입히는 가운데 사람들은 함께 울고 진혼하며 눈물로 각자의 마음을 닦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함께 마음의 새 옷을 입고 새로 태어난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게 된다. 유교의 의례 안에 있는 죽음과 탄생의 신비는 천주교 안에서 종교적으로 심화된다. 계급과 계층을 넘어선 만남 그리고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인간의 만남이 이들 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남편을 잃어도 시가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재가의 기회를 잃고 있었던 청상과부들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비합리적인 의무를 벗어나고자 하였고 몇몇은 모여서 수도자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유교적 관습에 어긋난 것이었지만 권리는 없고 의무만이 있는 인습이 중시된 사회에서 자율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개인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더욱이 종교적인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유교적 수절이 갖고 있던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였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들을 포용하여 새로운 삶의 활로를 터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모임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선을 향한 사회적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공동체적 움직임 외에도 종교적 신념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동정을 지킨 여인들이 있었다. 이러한 선택은 독신생활을 지고의 종교적 가치로 가르치며 초대교회로부터 ‘백색순교’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봉헌으로 권고한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결혼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다만 효와 후사를 책임지던 유교의 문화라는 것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천주교로부터 또 다른 삶의 형태를 알게 된 여인들은 동정을 통해 전통의 관습으로부터 탈출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할 수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은 당시에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지금도 성을 왜곡시켰다는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육적인 낳음만으로 대를 잇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낳음도 있을 수 있다. 함께 동정을 지키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공동체 안으로 인도하고 위로하는 가운데 이들로부터 영적인 낳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여자로서 경제적인 고통을 감수하고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며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이상적 사회를 향한 지향성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회 안에서 중인과 여성의 새롭게 부각된 역할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으로부터 시작한 서학이 사회 실천적 의미로 전환되어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인 공동체 생활 외에 또 다른 만남의 형태는 동정 남녀의 만남이 있었다. 향반인 유중철柳重哲과 사대부 가문의 이순이李順伊가 가족의 허락으로 교회 앞에 동정을 약속한 부부로 살 것을 언약한 만남이나 조명수와 권데레사의 결혼생활이 그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형태는 박해로 말미암아 유교 사회적 통념상 받아들여지지 않은 동정생활을 위해 차선책으로 선택한 생활이었다. 이들의 육정을 죄악시 한 이분법적이고 종말론적 시각을 비판할 수 있지만, 후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계급을 넘어서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삶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윤리적 가치를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정형화되어 있던 부부생활에 새 빛을 비추는 점이 있다. 그들은 여느 부부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부부로 살지만 부부다운 삶이 아닌 예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의 인격을 보이며 살았다. 이러한 만남은 시대를 넘어서 그들이 갖추고 살았던 부부에 대한 고양된 의식을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하게 한다. 가치는 외부로부터 정해진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적으로 승화된 가치는 고유한 효과를 밖으로 드러낸다.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신뢰와 사랑이다. 신뢰와 사랑에는 전제가 없다. 신뢰는 인격을 높이고 사랑은 관계를 심화시킨다. 그러므로 이들의 선택에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아쉬움이나 후회도 없었던 것이다.
Ⅴ. 신념의 선택과 사회적 자아의식
순교는 강요된 신념체계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개인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는 인간 실존의 표현이다. 즉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체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철저히 자신과 마주서게 된다.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배교야말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죽음이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한다. 여기서 신앙인들은 자유를 선언하며 지적인 진리가 아니라 삶의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순교에 이르게까지 하는 참혹한 박해는 교인들이 국문 가운데 같은 인척을 고발하고 교인끼리 고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내면을 비정하게 드러내는 지경에까지 몰아갔다. 그 가운데서도 의연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죽어간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세계가 올 것이라는 희망의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희생이 그러한 세계로 가는 가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관용과 용서는 감내하기 힘든 수많은 고문 가운데서 굽히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하나같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고백이고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죽어가는 가운데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죽음은 개인이 사회 안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이들은 죽음을 통해 강요된 집단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천부적인 저항의 권리를 행사한다. 따라서 순교자의 죽음은 ‘순교를 강요하는 사회의 가치관와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이자 새로운 사회 개혁의 요청을 의미하게 된다. 폭력을 이겨내고 신념을 확인하는 일이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순교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순교는 과거의 지평으로부터 미래의 지평을 여는 역사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적 행위이다. 이 지평은 개인의 지평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지평을 연다. 개인의 지평에서는 순교로 말미암아 계시된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었다. 신을 만남은 인간 모두를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이것이 순교가 육적인 지평을 넘어 영적인 지평으로 가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평은 앎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는 삶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장을 여는 거룩한 변모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여신도들은 사악한 여인으로 간주되어 성직자를 보호한 죄로 다른 신자들 보다 모진 고문과 형벌로 죽음 앞에서도 차별을 받아야 했고 스스로 인권의 존엄성을 계몽해야했다. 강완숙은 사형장에 나아가서도 “법에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되어있으나 여자를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옷을 입은 채로 죽기를 원한다고 알리시오”라고 하였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여성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유교적 형벌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고고하게 여성의 품위를 지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동정부부로 순교하게 되는 왕손녀王孫女 이순이(루갈다)는 시부媤父인 유항검의 죽음에 가족으로 연루되어 처음 벽동 위노정배爲奴定配(관비로 정배 가는 것)로 집행되었을 때 관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여주기를 관리들에게 간절히 청하였다.
… 시월十月 십이일十二日에 관비정속館婢定屬하여 벽동碧潼(평북平北)으로 원배하니 본관에 들어가서 여차 저차하대(이렇게 저렇게 말하기를) 우리 등이 천주를 공경하나니(하니까) 국률에 죽일지라 각인들과(저분들과 함께) 천주를 위해 죽으렸노라(죽겠다고)하니 바삐 쫓아 나가라(내라 하기에) 다시 더욱 들어앉아 성주城主(지방장관)를 여성勵醒(단단히 깨우쳐) 다시하대(다시 말하기를) 국록國祿을 먹으면서 국령을 순종치 아니신다 여러 가지 말을 하대들은 체도 아니하고 끌어 내치기로(끌어냄으로서) 할 일 없이(부득이) 길을 떠나 연로沿路에 행하여 구하는 자 더욱 간절하더니, 백 여리를 겨우나가 다시 잡히니(도로 돌아서게 되니) 이는 극진하여極盡(지극하여) 다시 더할 것 없는 총은이라 어떻게 감사하여야 마땅할꼬! 날(나) 죽은 후라도 감사주은感謝主恩하옵소서... 하며 순교를 영광으로 받아들인다.
강완숙과 이순이의 의연한 죽음의 선택에서 새로운 종교적 열녀관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유교적 열녀관은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다. 조선사회는 여성의 정절을 강요하고 때로는 자살에 이르게끔 하여 여성의 순결을 왜곡시키고 도구화하였다. 삼종지도의 윤리관은 이러한 여성인권의 유린을 정당화하였고 여성을 가정 안으로 가두어 버렸다. 강완숙과 이순이는 관습에 의한 요청 때문에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지 않고 가정을 가족에 한정시키지 않고 진리를 전파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가정 안에서 혈연을 중심으로 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공유하는 새 식구들을 맞이하였고 그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라는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이들과 함께 그들만의 가치관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삶을 선택한다. 이들의 순결과 정절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지켜졌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의 품위와 덕성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Ⅵ. 결론
여성의 의식은 서학의 수용과 함께 변화하였다. 새로운 사회적 자아의 발견, 잔반과 중인의 신분과 계층을 넘어선 평등한 인격적인 교류, 죽음을 통해 저항한 개인의 자유의식, 사회교육의식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들 내면에서 일어난 이러한 의식의 흐름이 오로지 서학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서학은 이러한 근대의식을 담론화하여 지속시켰다. 서양의 근대의식이 기독교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수용을 통해서 근대의식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의 근대의식은 자연법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반면 서학을 통해 천주교인들이 경험한 근대의식은 모든 사람이 계시적 신의 평등한 자녀라는 관점을 보인다. 로크가 자연적인 권리로서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를 불가양도의 천부인권으로 언급했다면 천주교인들은 계층을 넘어선 만남을 통해서 평등을, 나눔을 통해서 재산의 권리를, 죽음을 통한 저항 가운데 생명과 자유의 권한을 고백했다고 할 수 있다. 유교문화권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 인정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가르침과 유교 의례와 윤리관에 대한 몰이해가 불필요한 희생과 상호간에 배타의식을 조장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의 현실을 누구보다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살아온 여성들에게는 이러한 비판 가운데에서 현실적인 타당성을 찾아 새로운 가치관의 변혁을 추구했다. 비록 소수이지만 여신도들은 시대의 흐름을 잘 감지하고 대처할 방도를 찾아 나아갔다. 그들은 천주교 신도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 사회의식의 변혁 한가운데 있었다.
천주교 수용과 선교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과 내적인 참혹한 갈등 가운데서도 한 개인의 계몽적인 차원에서 사회에 저항하고 고발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담론과 의식을 공유하며 지속적으로 종교의례를 통하여 의식화를 주도하였다. 대원군의 말은 천주교인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즉, 언어를 통한 문화의식, 종교적 의례를 통한 공동체 의식 그리고 노동에 대한 의식이다. 이러한 순수한 종교적 의식의 발로는 새로운 사회의식을 여는데 기여하였음이 틀림이 없다. 근대의식을 어떤 시기나 특정한 의식의 발현만으로 제한해서 안될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체감하고 공동의 연대를 구성하고 지속적으로 의식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면 이를 근대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천주교인들이 가졌던 개혁과 변화의 몸부림 속에서 사회의식의 전환을 추구한 삶 속에서 근대의식의 단초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소외된 여성이 종교 사회 안에서 사회적 역할을 자발적으로 발견하고 계몽했음은 더욱 주목할 일이다.
근대성을 논하는 가운데 아직까지 미해결로 남아있는 부분은 여권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의 근대사는 여성의 인권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한 미완의 근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여성 스스로가 일구어낸 근대의식의 단초가 무엇이고, 그 한계가 어떤 것인지 살피는 것은 여성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권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다. 오늘날 서양의 후기 근대에 대한 담론은 이미 우리의 담론 문화 속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시점에서 우리 근대성의 단초를 다시 살펴보며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피 흘려 일구어낸 소중한 근대의식의 의미들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사태로 단순화하고 축소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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