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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들의 얼굴
-박제영 기집,『뜻밖에』(애지, 2008)를 중심으로-
서 안 나 (시인)
시인은 시대의 아픔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 박제영 시인의 3시집『뜻밖에』(애지, 2008)에서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가 강하에 담겨있다. 2번째 시집 출간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시집『뜻밖에』(애지, 2008)에서는 신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과 고통 받는 소외된 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포착하고 있다. 양극화가 진행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박제영 시인의 시선은 닿아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높아만 가는 빌딩의 조직 속에 원자화된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한 아픔에 주목하고 있다.
박제영 시인은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샐러리맨으로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상들과 소외된 타자들의 실상을 시의 전면에 등장시키고 있다. 박제영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구조적 모순에 의해 드러나는 상처들을 풍자와 위트 그리고 아이러니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제영 시인의 시들은 무언가를 감춘 시들이다. 안주머니에 칼을 감춘 시들처럼 읽을수록 섬세하고 예리한 그것들은 때론 뭉툭하게 때론 날카롭게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온다.
이번 시집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두 개의 축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째는, 가족사를 통해 현대인들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는 버려진 자들의 얼굴과 전쟁의 폭력성에 집중하고 있다. 거칠게나마 나누어 본 이러한 속성들은 그의 시집을 받치는 커다란 기둥들이다. 이러한 기둥들은 소외된 타자들이란 한 채의 집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서로 몸을 기대며 아픈 자들의 내면을 쓸쓸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1. ( )안의 사람들. 모퉁이의 시학
떠나는 것들은 모두 모퉁이를 돌아서 갔다
첫(사랑)도 가출한 (아내)도 죽은 (할머니)도
저 모퉁이를 돌아 떠나갔다
그러나 어쩌랴
떠난 것들이 돌아오는 것도 저 모퉁이인 것을
술 취한 (아버지)가 비틀거리면서도 매일 저 모퉁이를 돌아 왔듯이
월남에서 죽었다던 (삼촌)도 저 모퉁이를 돌아 왔듯이
사는 일이 사막을 견디는 일이라면
모퉁이는 사막 위에 세워진 간이역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덤덤히
모퉁이를 돌아 가고 오는 것
(나)는 오늘도 모퉁이를 돌고 있다
떠나고 있는 것인지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중략-
( )안을 무엇으로 채운들 또한 무슨 상관이랴
-「모퉁이」, 부분 인용-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우리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괄호 안에 어떤 인물을 써놓아도 문맥은 완성된다. 괄호 안에 쓰인 인물들은 술 취한 가장이며, 전쟁에서 상처 입거나 죽은 외삼촌 혹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가난에 찌들고 삶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시의 화자는 자조적으로 발화하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 가거나 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쓸쓸하고 애처롭다. 중심을 벗어난 모퉁이를 오고 가는 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 비루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중심이 있으려면 구석과 같은 모퉁이가 존재해야 한다. 시의 화자는 이러한 각성을 통해 중심과 모퉁이의 힘의 차이에 의한 불평등의 모순을 들춰내고 있다. ( )를 통해 힘의 이면에 감추어진 모퉁이와 중심 그 상관관계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
죽어라죽어라 살아야 한다.
유전된 누대의 기억,을 더듬어 온 일생
짐작이 가고도 남을 저 휜 허리.
늙은 사내는
제 몸보다 더 큰 박스더미를 싣고
제 삶보다 더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일요일 오후 세 시
뙤약볕 좁은 언덕길을 꾸역꾸역 오르고 있다.
내려오던 마을버스, 올라오던 승용차, 그 뒤로 줄지어 선 자동차들, 경적소리, 욕지거리, 비키라고 빨리 좀 비키라고,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뭐야, 뭔 일 났대? 쌈 난 줄 알고 모여든 구경꾼들, 난장 한 가운데 꼼짝없이 끼어버린,
이제 넘어지면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몰라
죽어라죽어라 중심만은 놓지 않고 있는
저 늙은 사내
일요일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다.
-「일요일 오후 세 시」, 전문 인용-
이 시의 화자 역시 중심을 벗어난 괄호 밖의 사람이다. 모퉁이나 세상의 구석에서 삶을 연장하는 결핍된 타자이다. 굽은 어깨와 고된 노동으로 훼손된 신체와 가난한 삶만이 운명처럼 남은 자이다. 가난으로 휘어질 대로 휘어진 허리만큼 사내의 생은 고달프다. 앞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자동차 사이에 꼼작 없이 갇혀 곤욕을 치르는 사내를 통해, 죽어라 삶의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고단한 삶이 그려져 있다. 능률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시하는 세태를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다.
늙은 개가 졸고 있다.//200승 30패의 전적마저 지워버린/마침내 단순해진 저, 늙은 투견의 졸음//어떤 짐승의 울음도/그의 졸음을 깨우진 못 한다.//아버지의 귀는 이미 순해졌다.
-「늙은 투견」, 부분 인용-
세상의 모든, 아비들이 실은
꼭꼭 숨겼던, 남근들이 죄다
저리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뻣뻣하게 거드름 피운 것도 생각해보면
가늘고 무른 속이, 흔들리는 제 뿌리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
세상의 아비들은 다만
살기 위해 딱딱해져야 했던
무골(無骨)의 가계(家系)를 숨기고 싶은 것이다
-「남탕」, 전문인용-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부분 인용-
피고름 파낸 저 귀,//거죽 뿐인, /뼈란 뼈 전부 녹고 삭은,//안팎의 모진 욕이란 욕/수십 년 묵혀 마침내 다 품은,//터엉텅/빈//북이다. 네 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막 깨어났는데, “바쁠텐데 왜 왔니” 하신다. 자식 셋 데리고 모질고 독한 사막의 건기를 그보다 모질게 그보다 독하게 건너온 저 늙은 북.
-「어머니의 만성중이염」, 부분 인용-
화자인 “나”에게 아버지는 “무골(無骨)의 가계(家系)를 숨기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싸움의 전력만 화려하게 남은 순한 귀를 가진 졸고 있는 투견과 같은 존재이다. 시의 화자는 투견과 같은 늙은 아버지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의 추락한 위치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젊은 날 가족들을 위해 싸움판에 나가서 전력투구하던 몸, 그리고 목욕탕에서 나신으로 드러난 몸에서 지난한 가족사를 통해서 전락한 가장들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시의 화자인 “나”의 어머니는 올바른 교육도 받지 못하고 평생 자식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소모시키며 주변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모성성의 발견은 곧 “나”의 인식을 확대시키는 발원의 지점으로 작동되고 있다.
시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산성이 제거되어버린 육체를 지니고 있거나 중이염에 걸린 어머니나 투견처럼 졸고 있는 순한 귀를 지닌 아버지 혹은 목욕탕에서 흉터를 드러내는 아버지의 몸들은 곧 삶에서 상처 입은 현대인들의 영혼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상처의 자리에서 시인은 눈물과 고통을 읽어내고 있다. 결국 가난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관계와 관계 사이의 결과물이라는 점에 힘을 주고 있다.
2, 버려진 자들의 얼굴과 전쟁의 폭력성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동편, 도곡동 467번지에는 마천 철옹 타워팰리스가 서 있고
서편, 포이동 266번지에는 뗏목 같은 비닐하우스가 떠 있다.
그게 공존이다.
지진이 나진 않겠지만 타워팰리스는 지진을 견딜 수 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비닐하우스는 전복될 수 있다.
그게 공학이다.
동편으론 날마다 해가 뜨고, 서편으론 날마다 해가 진다.
그게 상식이다.
해 뜬 곳에 사람이 살고, 해 진 곳에 유령의 보트피플*이 산다.
그게 행정이다.
어느 누구도 양재천을 가로질러서는 안된다.
그게 법률이다.
서울은 오늘도 그렇게 안녕하시다.
서울은 그렇게 오늘도 무사하시다.
빌어먹을 럭키, 오, 럭키 서울
-「럭키 서울」, 전문 인용-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타워팰리스와 포이동 266번지는 대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양재천을 걸어 본 사람들은 타워팰리스와 포이동 266번지가 만들어내는 두 개의 이질적이고 극단적인 풍경을 쉽게 접합시키지 못한다. 그만큼 두 곳은 양극단의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타워팰리스가 부와 명성과 권력의 상징이라면 타워팰리스 맞은편에 위치한 포이동 266번지는 이 도시를 떠다니는 보트피플 같은 삶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포이동 266번지의 삶의 풍경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풍경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상처이며 치부이다. 그 두 극단의 풍경 사이에서 시의 화자는 공간의 상징적 대비를 통해 공존과 공학 그리고 법률과 행정으로 시상을 확대시키면서 “럭키 서울”이라는 제목은 통해 시의 주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오늘도 무사하시다.//빌어먹을 럭키, 오, 럭키 서울”이라는 자조적인 발화에서 도시의 풍경을 통해 양극화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신랄하게 꼬집는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음 앞에서 제 죽임을 망설인 흔적,
망자의 사인(sign).
그것은 스키드 마크다.
고속도로에 무수히 찍힌 스키드 마크.
제 삶에 급브레이크를 걸어야했던 절박의 흔적들.
주저흔이란 방어흔이다.
자살은 없다.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
-「주저흔」, 전문인용-
주저흔이란 자살을 감행했던 자의 손목 등에 남은 흔적을 의미한다. 고속도로에 찍힌 스키드마크를 통해 화자는 “주저흔이란 방어흔이다.”란 사유를 통해 자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새로운 질서나 법은 이미 범죄자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듯이 즉, 자살은 곧 타살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개인의 과실이나 실패가 아니라 곧 자본주의의 부조리한 모순으로 자살 할 수밖에 없는. 그 망설임의 극적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다.
K와 L과 S는 당분간 내 밥줄이므로. 당분간 저들이 내 목을 쥐고 흔들면 흔드는 대로 흔들려야 하므로. 오전 골프를 마치고 예약한 사슴목장을 찾았다. “박형, 내가 전국 다 가봤는데 이 집 엘크가 최고야. 시커먼 불알을 봐. 엄청나네. 오늘은 저 놈으로 하자구.” 마취된 숫사슴의 뿔 밑둥에 고무줄을 단단히 감고 능숙한 솜씨로 톱질을 하는 주인 남자. 순식간에 뿔이 잘리고 고무줄을 풀자 솟구치는 붉은 피. “워메 진국이구만. 한 잔씩 돌리지.” “뜨끈뜨끈한 게 아랫도리에서 벌써 신호가 오는데.” “박형 뭐해. 빨리 마시라구. 사내란 말이여 모름지기 좆심으로 사는 거 아니겠어. 우린 말이여 좆심 없는 놈한텐 십 원도 안 빌려줘.” 까짓 거 눈 딱 감고 들이켰다.
화장실은 사육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 마취 풀린 녀석이 비틀거리고 있었는데, 암컷들 무리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잠시 눈을 마주쳤는데, 그날 밤 아내와 그짓을 하는데 도무지 심!이 서질 않는 거였다.
-「심」, 전문인용-
그룹화되고 무리지어 권력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라인에 동승하기 위한 샐러리맨들의 고단한 하루가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이다. 화자는 접대를 위해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고 난 후 일행들과 함께 농장에서 사슴피를 마시고 있다. 이때의 사슴이나 피 또는 동료들은 알레고리를 통해 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의 말처럼 권력과 지식은 항상 보폭을 같이하고 있다. 권력의 주체와 권력의 힘 구조 속에서 파생되는 역학관계들에는 수많은 음모가 숨어있다. 사슴피를 마시며 공범의식을 통해 힘을 가진 권력자자들이 행하는 부도덕한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은 기득권자들의 야만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과 권력에 대한 질문을 시의 화자는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충무로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50대의 사내가 죽은 지 7일 만에 발견되었다. 그는 <바보들의 행진>의 구두닦이였고, <영자의 전성시대>의 깡패였고, <바람불어 좋은 날>의 식당주인이었고, <만다라>의 걸승이었고, <칠수와 만수>의 페인트공이었고, <남부군>의 인민군 18이었고, <하얀전쟁>의 베트공 13이었고, <악어>의 포주였고, <실미도>의 버스승객 7이었고, 그 사이 한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할 때도, 그 여자 아들 데리고 떠나갔을 때도, 그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 촬영 중인 영화의 택시기사역이 일주일 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촬영장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르는 것처럼, 그의 죽음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어느 필모그래피의 죽음」, 전문 인용-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존 도우는 신원미상의 남자 시체. 존 도우란 그러니까, 그가 죽었다는 것과 그가 남자라는 사실 외에는 그를 알 수 있는 어떤 연고도 단서도 없다는 뜻.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존 도우란 그러니까, 가판대 앞에서 복권을 찢고 있는 아니 전화를 걸다말고 장기매매 전단지를 차마 버리고야 마는 아니 질주하는 바퀴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그 남자. 일테면 인도를 잃어버린 그 남자. 우리가 내다버린, 잊어버린 검은 비닐봉지 같은. 지리멸렬한 진술은 지루하다. 이쯤에서 끝장내자. 우리들이 씹다버린, 우리들이 밟고 지나간, 보도블록의 저 무수한 껌,껌,껌댕이들, 존 도우들.
-「존도우」, 전문 인용-
두 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우리들의 기억에서 제거된 자들이다. 비정규직과 해고된 노동자들 혹은 경제적 파탄으로 절망한 인간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서야 세상의 관심을 받는다.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은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를 불러온다. 그리고 이내 다른 사건에 묻혀 버린다.
위의 시편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연고자와 길바닥에 눌어붙은 껌과 같은 존재들의 비극적 삶을 조명하고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만이 존재를 증명받고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버려진 자들의 이야기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빨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의류나 침구용품·식탁용품·가구류 등의 피륙 따위에 묻은 때를 적절한 세제와 기계적인 힘을 가함으로써 물리적ㆍ화학적 작용을 촉진시켜 제거하는 일.” 네이버 뉴스는 지금 이스라엘이 빨래중이라고 전한다. “8일 레바논 남부 가지예의 한 병원 시체안치소에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숨진 3살짜리 소년 마날 알-후세인의 사체가 안치돼 있다.”
그러니까 세 살짜리 마날 알-후세인은 때다.
무슬림이란 적절한 세제와 기계적인 힘을 가해 제거해야 하는 묵은 때다.
빨래를 하다가 손을 베인 적이 있다.
흰 빨래는 자꾸만 빨갛게 물들었다.
빨갛게 물들고 있는 빨래스타인, 그 곳에 가짜 지구가 있다.
가짜 지구에 미사일이 세제처럼 내린다.
빨아도, 빨아도, 지울 수 없는, 상처는, 피는, 때가 아니다.
빨간,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진짜로, 가짜 지구가 가짜였으면 좋겠다.
-「빨래, 빨래스타인」, 전문 인용-
빨래는 더러운 무엇인가를 청결하게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나는 빨래라는 행위는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고 제거해버리는 폭력적인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세 살 난 꼬마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에서 촉발된 시상은 전쟁의 참상과 폭력을 고스란히 비판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의 주체와 주변이 형성하는 관계와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의 양상은 권력을 행하는 기구나 양식의 특수성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이름 뒤에는 무수한 자국의 이익들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과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 속에서 때처럼 제거되어 버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빨래라는 행위를 통하여 괴물적인 민족주의와 전쟁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역사는 앞면과 뒷면만을 기록해왔다.
앞면과 뒷면의 전쟁
뒷면과 앞면의 평화
역사는 단 두 줄의 지루한 반복이다.
-중략-
앞면과 뒷면의 전쟁이 역사의 외록(外錄)이라면
켜켜이 쌓여있는 옆면의 죽음은 전쟁의 내록(內錄)이다.
뒷면과 앞면의 평화가 역사의 외록이라면
옆면의 희생이 겹겹층층 쌓여있음 또한 평화의 내록이다.
-「세계사」, 부분 인용-
역사란 권력과 함께 해왔다. 가진 자의 역사, 권력자들의 시각이 강요된 허구의 역사이다. 앞면 혹은 뒷면만 있을 뿐 흑백 논리에 벗어나는 일탈의 흔적과 고뇌들은 절대 기록되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역사란 이름 속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날카롭게 발화하고 있다.
박제영 시인의 3번째 시집 <뜻밖에>에는 가족사를 통한 현대인들의 비극과 버려진 자들의 얼굴과 전쟁의 폭력성에 집중하여 시원하게 외치고 있다. 버려지거나 골목이나 모퉁이에 사는 소외된 타자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수많은 타자는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일 수도 있으며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의 이면에 감추어진 그 아픈 사연들에 시인은 집중하는 그 마음이 눈물겹다. (*)
- 『다층』 2008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