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회 신군부의 12.12거사가 혼미의 79년 겨울 崔圭夏 대통령
권한 대행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해 주길 바랄 뿐
신군부의 12.12거사가 혼미의 79년 겨울에 일부 핵심 군 지휘관들의 전쟁으로 치러진 동안 계엄하의 언론은 입도 뻥긋못하고 있었고 대다수 서울시민과 남한 주민들은 아직 쿠테타 발생사실조차도 모르고있었다.
국민들은 20년 독재를 비극적으로 마친 朴正熙대통령의 죽음을 막연히 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여긴채 인자한 모습의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혼 란한 정국을 수습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崔대행은 예상대로 11월9일 오후 [시국담화]를 발표,
▲유가헌법을 대통령 발의나 국화발의를 통해 개정하고
▲잔여임기에 국한받지않고 개헌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조속 실시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토대를 쌓으며
▲빠른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겠다는 것이었다.
崔대행은 이어 11월14일 시정연살을 통해
▲헌정중단은 없으며 합헌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고
▲韓美공동방위체제를 공고히해 한반도 전쟁억지를 견지하며
▲경제분야의 안정기조를 유지한다는 등 사회 각 분야의 시책을 발표했다. 국민을 안심시키는 조치였다.
게다가 崔대행은 각계인사들과 대화를 실시, 11월27일에는 서울 15개대학 총장들과 면담을 갖고 제적학생 복적.복교 등을 추진하고있다고 밝혀 바야흐로 유신암흑의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예고했다.
崔대행은 12월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대통령단독후보로 출마한 제10대 대통령 보궐선거 결과 2천5백49명의 대의원 중 2천4백65표를 얻어 당선됐다.
崔대통령이 된 그는 12월8일을 새벽 0시를 기해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고 2백14명의 시국사범을 면소 또는 불기소처분하고 복역중인 93명에 대해서 는 잔형을 면제했다.
그는 [새 국가건설에 동참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80년 3월초까지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정치 스케줄을 발표했다.
崔대통령은 12월14일 국무총리에 申鉉碻,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李漢彬, 내무 金鐘煥, 법무 白翔起, 국방 周永福, 문교 金玉吉 등 18개 부처 새내각을 발표했으며 12월31일 대통령 취임에 맞춰 1천6백41명에 대해 특 사.가석방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申총리는 12.12 이틀후인 14일 조각발표에 덧붙여 {12.12 사태이후 에도 정치스케줄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새 대통령 취임뉴스와 잇단 사면.복권조치를 보도하기에 바빴으며 그 사이에 金載圭 등 내란살인 사건의 계엄 보통군법회의 수사발표를 통해 가끔식 계엄사 합수부장이라는 머리 벗겨진 사람이 흑백TV에 비쳤다.
바햐흐로 朴대통령 사망사건은 다가올 민주화 시대를 열었으며 국민들은 이듬해 80년 봄이 여느해와는 다른 봄이 될것으로 믿기를 주저하디 않았다. 이미 시극의 두꺼운 얼음장은 녹기 시작했다.
총선과 개헌에 이어 민선방식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이제 남한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정계와 대학가에 넘실거렸다.
崔대통령은 이어 80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총리급 남북대화를 제의하는 한편 3월에 개헌심의회를 설치해 1년내에 개헌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당초의 스케줄을 지연시킨셈이었지만 崔대통령은 {정치바람에 휘말려 서둘러 헌법을 개정한 결과 1년도 못가 헌정이 중단되고만 경험을 되살려 이제는 후회없는 헌법개정을 해야한다}고 전제하고 {이를위해 전직 3부요인 등 각계원로가 참여하는 [국정 자문위]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그가 입을 열지않아 개헌연기에 신군부의 압력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당시엔 혼란한 정국의 정치스케줄에서 개헌에 신중하겠다는데 반대하는 여론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대학가에서부터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엄동인 80년1월, 개학도 하기전에 [복적생]신분으로 학교에 돌어온 긴급조치위반 제적생들은 각 대학에 잔존한 시국서클을 규합, 나름의 시극 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주된 구호는 [학원자율화]였으며 이를 위해 당시의 학도호국단제를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해야한다는 주장이 가장 먼저 제기됐다.
신임 金玉吉 문교부장관은 이를 긍정수용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해제와 시국 사범 추가해금, 정치일정 단축 등을 오구하는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개학과 동시에 이 봇물은 터질 것이었다.
崔대통령은 2월8일 문교부 순시에서 {학생들이 본연의 자세를 잃고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므로 면학지도를 철저히 해줄것} 을 당부했으나 이는 당랑거철에 불과했다.
3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건 金泳三 新民黨 총재였다. 그는 2월 18일 崔대통령 초청으로 삼청동 총리공관에서(그때까지 崔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주하지 않았다) 오후 6시부터 밤11시까지 5시간동안 독대하며 민주화일정을 논의했다.
金鐘泌 共和黨 총재도 2월22일 기자회견을 갖고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을 촉구했다.
金大中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76년 3.1 明洞사건으로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그는 崔대통령 취임특사로 2월29일 시 국사범 복권조치로 정치에 복귀한다.
그러나 그는 2金과는 달리 군부를 경계하는 성격이 다분히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했다.
5년동안 투옥.연금을 당했던 사람답지않게 그는 복권 다음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정부가 국민이 원치않는 일을 성습하게 추진하려하거나 국민전체가 원하는 바를 짐짓 늦추려한다면 이것 자체가 정국을 불안하게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 순간에 있어 나의 1차적인 관심은 민주제도의 차질없는 재확인이지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며 {대통령 후보 경쟁에 열중한 나머지 민주주의의 소생을 송으로 원하지않는 자들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또 그는 {민주주의 파수병의 한사람으로 국민들과 더불어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오지않도록 감시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긍의 이같은 목소리는 일간지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대규모 사면복권기사와 3金 대권경쟁체제를 예고하는 남한의 3월 기류속에 [기우]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행복한 설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