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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하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 |
한국 선불교(禪佛敎)의 참나(진아眞我)는 힌두교 브라흐만이다. 그 증거를 든다. 힌두교 원시경전인 '브리하드 아라냐까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우리는 결코 (니르구나) 브라흐만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선사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청담·서암·진제·혜국 등 고승들은 '참나(眞我 true atman)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안다.'고 한다. 즉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지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사들의 주장에 의하면 몸이 없어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 가능하다. 몸을 벗은 중음신(中陰身 영혼)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안다는 것이다. 심지어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는, 몸을 벗어 즉 중음신이 되면 견문각지의 기능이 여러 배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중음의 상태에서 해탈도 더 쉽다고 한다. 망자(亡者)의 해탈과 수생(受生)을 돕기 위해 49재를 지내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우파니샤드는 우리가 브라흐만을 보고 듣고 생각하거나 알 수 없다고 했을까? 그 논리는 단순하다. 거울이 거울 자신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보는 자가 보는 자신을 볼 수 없고, 듣는 자가 듣는 자신을 들을 수 없고, 생각하는 자가 생각하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고, 아는 자가 아는 자신을 알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자를 실체화하기 때문에 생기는 논리이다. 감각작용과 정신작용의 뒤에 그 작용을 하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면, 즉 이들 작용이 연기현상이라면 성립하지 않는 논리이다.
한국의 선사들도 견문각지하는 놈을 불변의 존재로 실체화해서 그놈을 찾으라고 한다. 주인공을, 참나를, 본래면목을 찾으라 한다. 하지만 이리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족히 84,000리는 멀어 진다.
부처님은 안근(眼根 시각 기관)이 안경(眼境 시각 대상)을 만날 때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하였다. 즉 본다고 하는 것은 근·경·식(根境識) 삼자의 연기작용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감각작용인 이비설신의(耳鼻舌身意) 작용도 마찬가지 이다.
미리 안식이 존재해서 안식(보는 주체)이 안근(시각 기관, 눈)을 통해서 안경(시각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안식은 근이 경을 만날 때 생긴다는 것이다. 대상에서 반사된 빛이 망막을 때리면 생체 전기가 발생해 생체 전기줄인 신경회로를 타고 뇌시각 중추에 도달하는 게 본다는 현상이다.
이비설신(耳鼻舌身)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감각이건 감각 경험의 주체는 없다. 여기서 더 혁명적인 것은 의(意)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의(意)로 대표되는 생각과 인식(認識)조차도 연기작용이라는 것이다. 자칫하면 '안이비설신'만 연기작용이지 '의'는 아니라고 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의'조차도 연기작용인 것이다. 뇌의 특정 부위가 망가지면 그 부분이 담당하는 특정 기능이 사라진다.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는 안면인식불능증(prosopagnosia)이 발생한다. 이 사람의 얼굴을 저 사람의 얼굴과 구별하지 못한다. 다 같게 보인다. 그러므로 얼굴에 대해서 사유하는 게 불가능하다. 지형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형인식불능증(topographical agnosia)도 생긴다. 이 지형과 저 지형의 차이를 못 느낀다. 중증 길치 증이다.
정리하면 감각작용과 정신작용은 즉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감각작용과 생각하고 인식하는 정신작용은 근·경·식 3자의 연기작용이므로 그 작용 뒤에 참나(진아)나 브라흐만 등 불변의 주체가 있어서 감각을 하는 게 아니다.
이는 혁명적인 통찰이다. 뒤늦게 2,500년 만에 마침내 현대 신경학과 뇌과학이 확인하고 있는 바이다.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이다. 인간의 지각·인식까지도 연기작용임을 꿰뚫어 본 것이다. '결코 브라흐만이나 참나 등 불변의 주체가 있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알아차린 것이다. 즉 '견문각지의 주체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론(無我論)이다. 보리수 밑에서의 7일간은 깊은 사유를 통해서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지 참나를 찾은 게 아니다. (참나를 찾으려 하는 것을 모래로 밥 지으려는 격이다.)
이를 부처님은 '인내심과 사유력이 없으면 자신의 깨달음은 불가능했다.'고 '증일아함경 화멸품'에서 자신의 육성으로 직접 밝히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절대로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고 맹세하고 잠과 음식을 끊고 7일간을 같은 자세로 버티며 깊이 사유를 한 끝에 찾아온 게 깨달음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즉 구경각)이다. 인류역사상 실로 희유한 사건이다.
만약 한국 선불교 선사들이 주장하듯이 부처님이 연기법을 초월한 ‘참나(眞我 true atman)’를 찾은 것이라면 이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참나’는 이미 힌두교의 전신인 브라만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브라흐만(梵語 Brahman)이다. 브라흐만도 연기법과 인과의 세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이다. 항상 빛을 발하는 대광명이다. 그리고 브라만교에 의하면 명상을 통해 브라흐만과 합일할 수 있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이다. 물론 신비한 길을 통해서이므로 말로 표현할 수는 없고 직접 경험할 일이다. 소위 이언진여(離言眞如) 진리는 말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어디 짠 걸 먹어보지 못한 이에게 짠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 또, 봉사에게 저녁노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포근한 눈길을 알려 줄 방법이 있을까? 그놈(참나)과의 합일은 체험할 일이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도 힌두교나 한국 선불교나 같은 주장이다.
어디 모든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동물은 말없이도 잘 산다. 하지만 말을 초월한 ‘신비로운 불변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망상(妄想)이다. 환망공상(幻忘空相)이다. 악성 환망공상이다.
예를 들어, 브라흐만 수트라는 ‘(니구나 niguna 無相) 브라흐만에 대해서는 침묵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게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침묵이므로, 침묵을 통해서만 브라흐만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브라흐만이 뭐냐?'고 묻는, 젊은 구도자 바슈깔린에게 현자 바다바가 한 답이다. 참나불교는 선불교의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참나를 찾는 걸로 해석한다. 이것은 우파니샤드로의 퇴행이자 지극히 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200만 년 인류역사상 그리고 35억 년 지구 생명체 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발견인 불교 무아론(無我論)을 망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한 것처럼 사악한 일이기도 하다. 이들은, '부처님이, 당신이 부정한 브라흐만(梵語 Brahman)을 사실은 속으로는 인정한다.'고 망언을 하기 때문이다.
니구나 브라흐만은 잘못 이해한 선불교(禪佛敎)의 성품(性品)이다. 견‘성’성불의 ‘성(性)’품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다. 이걸 잘못 해석하면 참나론이 된다.
한국 선사들은 수 십년 동안 참선을 하면서 '엉뚱한' 걸 깨달은 것이다. 알맹이 없는 껍질만 얻는 셈이다. 왜 그랬을까? 지혜(智慧)를 닦지 못하여 그 결과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지혜마저 잃고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현대 물리학적 우주론을 부정한다. 그러고도 자신들이 망상에 빠져있음을 전혀 모른다.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바로 근본무명이다.
이들은 진화론과 현대 물리학적 우주론이 경전에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부정해도 무방(無妨)하다.'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불법(佛法)이 어디 그리 만만한 대상인가? 어리석은 자의 머리를 초월하는 것은 참나가 아니라 불법(佛法)이기 때문이며 끝없이 정진(精進:진리를 따름)하고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반드시 환망공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산속에 틀어박혀 자폐적 쇄국 정책을 피지 않고 부처님처럼 천하를 주유하면서 천하의 학자들과 논쟁을 했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출처 : 불교닷컴
■ 금강경과 상(相)
범소유상(凡所有相) 무릇 내가 일으킨 모든 상은 개시허망(皆是虛妄) 그 모두가 허망한 것일 뿐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모양이 모양 아님을 함께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여래를 볼 있을 것이다. |
약보살(若菩薩) 만일 보살이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 무아법을 통달하면 여래설명진시보살(如來說名眞是菩薩) 여래는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이름 하느니라. |
약보살(若菩薩) 만일 어떤 보살이 유(有)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면 즉비보살(卽非菩薩) 이는 보살이 아니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