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인의 징후독법 | 육호수 | 신작 시 |
落夢 외 1편
―馬頭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딱 한 번
어린 첫 딸을 산에 묻고 돌아오던 날 이야기를
내게만 해준 적 있다
칠십몇 년 전, 나의 부친이 태어나기 전 일이었다
죽은 아이의 아빠는 나의 조부가 아니었댔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이옥순 할머니의
온전한 기억이었다
나의 부친이 중학교에 가던 해였댔나
나의 조부 육부연은 자살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집안 어른들에게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 종종 꾼다
방금 어미가 떠난 달걀이 되어
천천히 식어가는 꿈
이 꿈에서 깨고 나면 꼭
그때 옥순이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이 꿈이 그날 이후 내게 찾아오는 거란 걸 알게 된다
아흔의 할머니가 잠시
스물한 살의 호수와 동갑내기인 옥순이가 되었던
이천십이년 전농동 산 32 다시 몇 번지
기억이 피가 되는 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의 눈과 귀가 생겨나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도로 식어가는 꿈
(중학교 삼학년 겨울, 청평종로기숙학원에서 친해진 여자애가 나한테
편지로 쓴 적 있다
“호수야,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비밀을 말하고 싶어져”)
이 시는
나와 피를 나눈 누구도
읽지 않으면 좋겠다
인터넷에 올리지 마시오.
落夢
―遺言
얼마 전 다시 찾은 코창에서
친구들과 돌아가며 시를 읽었다
나한테는 내 시가 없어서
네이버에서 검색해서 찾아 읽었다
누군가
블로그에 한 구절을 틀리게 올렸는데,
이후로 사람들이 그대로 복사해서 올렸는지
모두 똑같은 부분이 틀리게 올라와 있었다
“야, 네이버에 내 유언들이 전시되고 있어”
웃음이 한번 터지니까 멈추질 않았다
“근데 유언에 오타가 났어”
“누가 니 유언 별로래, 뭔 말인지 모르겠대”
여기가 내 묘지네, 공동 육호수 묘지
두 번째 시집 나오기 전까지
나는 절대 죽으면 안 되지만,
혹시 내가 먼저 죽으면
여기 블로그에 와서 댓글로 추모하라고 했다
“추모 댓글엔 오타 내지 말고”
애들이랑 웃음이 숨넘어가게 터져서
읽으려던 시는 못 읽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슬픈 유언만 썼구나 싶었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 이 시인의 징후 독법 | 육호수 | 근작 시 |
추억은 배낭에 쓰레기는 가슴에 외 2편
그러니까, 철수와 영희가
장기 여행자이자 인스타 헤비 업로더였을 때
기억 속에 수많은 객실을 가진
임대업자들이었을 때
그러나 세 들어오는 이 있을 리 없이
축제가 한창이던 어떤 도시에서 영희는
텅텅 빈방들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서
“Do you have an available room?”
빈방들을 욱여넣을 빈방을 찾다가
찾아 걷다가 찾다가 영희는
텅 빈 이 몸을 이국의 귀신에게 물려주고 싶었다지
온통 소똥뿐인 골목에서 철수는 심통이 나 카메라로
똥만 찍고 다니다
골목에 쭈그려앉은 영희를 처음 보게 된다
소똥, 개똥, 쥐똥, 새똥, 사람똥, 돼지똥,
철수(selfie), 똥에 파묻힌 꽃잎, 소똥 속에 죽어 있는 쥐, 일렬로 난 똥, 똥 위로 난 바큇자국, 그리고... 영희
“그러니까 철수야, 모든 걸 그만두고 모든 걸 함께하고 싶어”
어느 밤, 악몽에서 내쳐진 영희에게
잠든 철수의 눈잔등은
열쇠를 삼킨 채 닫힌 싱글 룸처럼 막막해지고
그래도 이 악몽만은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한다 믿고 싶고
사랑 안 한다, 사랑한다, 사랑해라, 사랑해, 사랑 안 한다...
다음 날 아침, 영희와 나란히 거울 앞에 서서 양치를 하며
‘우리의 여덟 개의 눈동자가 마주칠 4의 4제곱 개 경우의 시선’에 잠겨 있던
철수에게
영희의 빈방들이 어항처럼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영희야말로 구원에 최적화된 영혼 같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서로가 서로의 끝을 배통 속에 감춰둔 것처럼
가까워지며 끝으로만 가는 것 같았지
손가락 총을 서로에게 겨누고
“이 놀이에 먼저 질리는 사람은 진짜 총 맞는 거야”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
빵!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
“철수를 좋아하는 영희를... 영희를...”
그렇게 수많은 서로를 잃고도
아직 그들이 철수와 영희라는 건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철수 같은 철수의 눈을 알게 된 영희였다
철수는 철수라서 영희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철수였다
이젠 악몽도 찾아오지 않는 빈방에서, ‘내가 살고 있는데
왜 이곳은 빈방이지?’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찾으려던 철수 너를 이제 너도 찾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는 영희였다
절대 기억 안 한다는 영희의 말을 영희가 잘 지키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철수였다
고락푸르행 따깔 티켓
“미안해, 이제 너에 대한 아무런 상상이 없어”
그리던 ■■■를 다 칠하지도 않고 영희는 철수를 떠났지
고락푸르로
그때, 처음으로 철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곤
십 년 동안 영희를 글로 쓴 적 없지
영희가 악몽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지
언제는, 피 흘리는 둥근 조약돌이 되어 등장했고
포크로 자신의 목젖을 찌르는 천사가 되기도 했다
(전지적 철수 시점으로 다시 기억해보자면…… 다시 써야겠지)
조약돌을 주워 올렸는데 피를 흘리고 있길래
천사를 만났는데 포크로 목을 찌르길래 넌영희인 줄 알았지
피 흘리는 돌을 어디서나 자꾸 낳게 되는 거위가 되거나
천사의 목을 가르고 꺼낸 보라성게가 되기도 했지
그러면 나철수는 그 꿈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도망쳤지
완벽하게 도망쳐서 철수는 철수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 잊을 만큼
도망치고 그래서 여기는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라는 질문에선 어떻게 도망가지?
한 톨의 빛점이라도 있었다면 이 꿈의 어둠을 무언가의 그림자라 말해볼 수 있었겠지만…… 시를 쓸수록 악몽이 진화하는걸, 이제 악몽이 아니면 울지도 못하니깐. 이 악몽 속에선 아무 상상이 없어. 이 악몽 속에선 아무 악몽이 없어. 이 철수 속에는 아무도 없어. 이 상상 속에는 철수가 없어. 철수에 대한 아무 철수도 없어……
그리고 언젠가 철수는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미안해, 너에 대한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이런 편지를 쓴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아주 긴 편지를
그러나 이제 철수는 거위의 슬픔을 가지게 되었고
보라성게의 목소리를 가졌으므로
첫 문장 뒤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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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자리뿐이다
신호 대기
눈 내리는 한밤이었고, 싱거운 술자리였다. 철수는 오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따뜻한 사케를 마셨다. 친구의 이야기를 견디다 철수는 깜빡 졸았다. 한참 취한 친구는 철수가 조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춥죠? 들어가는 길인데 같은 동네네요.” 택시 기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철수는 어떤 이야기도 더 견디고 싶지 않았고,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았다. 노이즈 캔슬링. 눈 내리는 도시의 장면들에 마음을 걸어두고 싶지 않았고, 사거리의 정지신호는 끔찍하게 길었으며
강변북로를 지나며 기사의 운전이 점차 거칠어졌다. 철수는 일부러 크게 몸을 움직여 안전벨트를 맸지만, 기사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쨌거나 철수는 생각이라고는 더는 싫었고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모라베츠의 녹턴은 예민하고 철수는 피로했다. 휴대폰을 꺼내 인기 차트에 있는 노래들을 랜덤 재생했고
순식간이었고, 눈 내리는 강변북로였고
전복된 차 안이었고, 무슨 일인지 철수는 내가 되었고,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어째서 내가 쓰던 시시한 글 속의 시시한 철수가 되어 있는 거지
푹 꺼진 나의 고개, 터져버린 복부에 고정된 나의 시선. 이런 게 이야기의 끝인가, 이런 게 나의 내장인가, 깜빡이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생각한다. 철수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이어폰은 여전히 양쪽 귀에 꽂혀 있고,
모르는 노래가 재생되고 있다
이런 끔찍한 멜로디에 갇혀 마지막일 리 없는 마지막이라니. 꿈틀거리는 붉은 내장을 보며 잊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OH 눈이 오는 이 겨울이 너무나도 특별해서 OH 눈처럼 맑은 너의 눈과 깨끗한 네 맘이 좋아 이 세상에 주어진 전부라는 듯 노래는 멈추지 않고
이런 터무니없는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지막 장면을 고를 동안만이라도 침묵이 내게 주어진다면
노랫말에 먹혀들어가는 기억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한 마디의 멜로디 안에 시작된 적 없는 사랑의 시작과 끝난 적 없는 사랑의 끝을 구겨 넣어야 한다니, 한 꺼풀의 악절 속에 나를 벗고 걸어나간 사람들의 생몰을, 하나의 음표에 내게로 걸어와 사라진 얼굴들을 하나씩 채워넣어야 한다니
믿을 수 없는 가사 속에서
눈과 귀와 코와 입으로
끝없는 시간이 흘러내렸다
종말을 빠져나온 철수는
또 다른 종말로 갔을까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견디며
소복소복 졸음을 쌓는 철수가 있었고
끔찍한 첫 문장이 있었으며
최후까지 번복되지 않았고
시작노트
: “시를 쓰느라 시작노트를 쓰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시작 노트를 써야 할 때마다 지면에 해왔던 변명입니다. (시작노트 부끄럽잖아요.) 시작 노트는 8년째 네이버 메모장에 하고 있는데요, 언제든 메모할 수 있고, 자동으로 백업이 되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가끔 시 쓰는 친구들과 네이버 메모장을 켜고 아래로 힘껏 스크롤 한 뒤, 멈추었을 때 화면에 있는 그 임의의 메모를 소리 내어 읽는 놀이를 합니다. 일종의 술게임인 것이지요. 그것을 용기 내어 읽을 수 있으면 통과인 것이고, 차마 읽을 수 없는 메모가 걸리면 벌주를 마시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한번 아래로 힘껏 내려보겠습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어떤 메모가 나올까요. (두구두구두구두구) 아, 이 메모는 좀 깁니다. 여기에 굵은 글씨로 옮겨둘 게요. 2022년 1월 26일 오전 7시 07분의 메모입니다. (이것이 술게임이었다면 저는 단언코 이것을 공개하지 않고 벌주를 마셨을 것입니다.)
매모 내용:
"이 방의 어둠을 해치지 않고 창밖의 새들은 어떻게 노래 부르는가?” 새에 대해 생각하며 새에 대해 취약해지던, 이야기를 허물기 전엔 나갈 수 없는 방이었지. 너를 기도하겠단 말은 정말로 기도하겠다는 말이야. 다만 이제 말로인 기도로는 스스로 믿지도, 울지도 못해. 잠으로 잠을 지우려 이제 마저 자려구. 우린 그렇게 많은 노래를 함께 들었는데, 몇 번이나 함께인 노래로 더 울 수 있을까, 네가 우리를 기도한다면. 너의 기도 속에서 우리를 만들어 도로 지워줘. 벽에 눈 맞춘 모든 초점을 눈으로 더듬어 지워줘. 그때 너의 말로 종말을 환히 밝혀주었듯, 기억을 방생해줘. 살려주란 말이 살아달라는 말이겠어요. 어둠 속에서 벽을 살피는 눈길이 도로 기도가 될 때까지. 사람의 울음을 아주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때까지. 질문이기를 멈춘 질문들이 이대로의 밤을 멈추게 해. 처음보다 더 순수하게 끝이고 싶어. 침묵에 대한 두려움으로 침묵이던 밤, 깨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많은 노래를 함께 들었는데. 모든 걸 그만두고 모든 걸 함께하고 싶었지. 이제 너의 악몽은 너를 가장 진실하게 사랑할 거야. 기도가 욕망이라면 기도도 그만둘 거야. 가장 솔직한 고백의 문장들이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켜 주었듯, 남은 나의 기도는 네가 지켜주겠지. 그곳에서 너의 말 말고는 지키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이런 말만 하고픈 맘도 너는 알 거야.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마음이라 여전히 떠나지 않아. 달릴수록 멀어지던 터널의 끝, 그다음처럼. 서로가 서로의 끝을 뱃속에 감춰둔 것처럼 우리는 가까워지면서 끝으로만 가는 것 같았지. 세상의 끝에서 끝을 반으로 나눠 갖고 돌아왔던 어떤 바다, 세상의 바닥을 도로 긁어가던 파도의 손결처럼. 베개 위엔 악몽의 물자국들. 이런 새벽 이런 베개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야 할 것 같고
육호수 | 2016년 대산문학상 시 부문,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