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祖父(조부) 柳公綽(유공작) 묘 소재지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 산10
[서애 유성룡의 조부 유공작 묘 전경]
柳公綽(유공작)은 본관 豊山(풍산) 자 裕裁(유재) 이조판서에 증직된 子溫(자온)의 아들이며, 서애 유성룡의 조부이다. 李亨禮(1448-1507)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랫쪽에서 담은 유공작 묘 전경]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蔭職(음직)으로 예빈시 주부, 사헌부감찰 등의 직을 거쳐 간성군수로 부임하여 전임 군수들이 어민들을 수탈해 피해가 극심하였는데, 류공작은 애민정신으로 어려움을 하나하나 해결해 칭송을 받았다 한다.
[서애 유성룡의 조부 유공작 묘]
공은 사람됨이 근신하고 순박하여 간략하고 부지런해서 어머니를 섬겨 사사로운 뜻을 두지않고 여러 아우들과 함께 의복을 같이 하였다.
[墓碑(묘비)]
아들 중영에게 가르치기를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이르렀거늘 다시 두터운 이를 경영하는 일은 내가 능히 하지 못하겠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네가 하지 말것이니라'하였다.
[墓碑(묘비) 뒤면]
서애선생 祖母(조모)가 젊은 30대의 나이세 세상을 뜨자 친정 아버지 묘자리였던 이곳에 장사를 지낸 후, 뒤에 柳公綽(유공작)이 뭍혀 오늘의 풍산류씨 묘자리가 되었다.
[구 묘비와 묘전비]
묘역에는 망주석, 문인석,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손자인 겸암 류운동이 퇴계에게 묘갈명을 청했다. 옛 묘전비는 퇴락해 다시 세운 묘비가 묘소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묘전비]
퇴계는 류공작의 묘갈명에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들이 모두 공과 같이 성실하다면 국왕의 은택이 막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썼다 한다.
[묘전비 뒤면]
류공작의 아들 중영은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를 역임, 맏손자 운룡은 인동현괌과 원주목사 손자 성룡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니 이 묘터가 명당이라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서애 유성룡의 조부 유공작 묘]
묘자리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서애선생의 조모는 어느 풍수의 전하는 말이 친정의 산소자리가 정승이 나올 명당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때마침 친정 아버지(李亨禮)의 죽음을 당해 그 묏자리에 가서 밤새도록 물을 길러 부었다 한다.
다음날 묏자리를 쓰려고 한 곳에 물이 흥건하여 흉하다 해서 그 옆자리로 묏자리를 쓰니 이곳이 연안이씨의 문중 묘가 되고. 그뒤 친정 오라비한테 부탁하여 그 물이 나오는 산소를 얻어 자신들의 山所(산소)자리를 마련하였다.
서애선생 祖母(조모)가 젊은 30대의 나이세 세상을 뜨자 그자리에 묻고, 뒤에 柳公綽(류공작)이 뭍혀 오늘의 풍산류씨 묘자리가 되었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좌측 文人石(문인석)]
그후 '딸년은 도둑년' 이라는 전설이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전해지게 되었다 한다. [우측 文人石(문인석)]
이 내용은 대구 MBC2006년 11월 18일 경상도愛발견이라는 프로에도 방송된 이야기라 합니다.
[서애 유성룡의 조부 유공작 묘]
북쪽에 보이는 산이 五指山(오지산) 또는 오지봉이라 부르며, 오지산이란 산 모양이 마치 다섯 손가락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다섯 손가락마다 명당자리가 있어 五指穴(오지혈)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터는 둘째 손가락에 속하는 검지라 한다. 이곳이 바로 그 검지 자리의 묘터라 하네요.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류공작의 아들 중영은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를 역임, 맏손자 운룡은 인동현괌과 원주목사 손자 성룡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니 이 묘터가 명당이라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참꽃]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담은 참꽃(진달래) 올라갈때 보이지 않았던 꽃이 내려올 땐 보이네요. 아마도 묘를 찾지 못할까 조마심에 총총걸음하느라 못보았지만, 내려올 땐 답사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꽃도 눈에 보였나봅니다.^^
柳公綽(유공작) 묘소 답사 소개를 마칩니다.
2019.03.30 05:43 참조링크 : 草阿(초아)의 삶과 문화산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