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옹 선생 묘갈음기(墓碣陰記)
공암 허씨(孔巖許氏)는 본래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먼 후예이다. 신라 말기에 허선문(許宣文)이라는 분이 있어 나이 90여 세에 고려가 처음 나라를 일으킬 때 사행(師行)에 공덕이 있었다 하여 왕이 그를 위해 고을을 주어 공암 촌주(孔巖村主)로 삼았고, 자손들이 그대로 공암을 관향으로 삼았다.
후세에 태위(太尉) 재(載),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 전리 판서(典理判書) 금(錦)이라는 분이 있으니, 《고려사》에 모두 열전이 있다. 우리 공헌왕(恭憲王 명종) 때에 이르러 좌찬성 자(磁)라는 분은 자주 직간(直諫)을 한 것 때문에 간신 이기(李芑)의 참소를 입어 궁벽한 유배지에서 운명하였다. 아들인 별제 강(橿)은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별제공의 손자이다.
만력 16년,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 21년(1588) 11월 19일에 선생은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자 진사(國子進士) 량(亮)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영가 권씨(永嘉權氏)이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자라서는 독서와 수행을 잘하였다. 어려서 시정(寺正) 권용중(權用中)에게 배웠는데, 시정은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 선생의 제자로, 이중호 선생은 소경왕 때에 명성이 난 사람이다.
선생의 휘는 후(厚)이고, 자는 중경(重卿)이다. 배우기를 좋아하여 예능에 박식하였고, 뜻이 통하여 예를 중시하였다. 이정호 영언(李挺豪英彦)과 함께 덕신 공자(德信公子)를 종유하여 《역》의 〈건괘〉, 〈곤괘〉, 〈문언(文言)〉 및 《대학》의 경(經)과 전(傳)을 강학하였다. 남쪽으로 유람하여 신안(新安)으로 가서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만나고, 상주(尙州)로 가서 정 문숙공(鄭文肅公 정경세(鄭經世))을 만난 뒤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삼대의 기상이 여기에 있다.”하였다.
선생은 제자에게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독실하게 하여 인륜의 순서를 다하라고 가르쳤으며, 예절을 존중하여 삼백 가지 위의(威儀)와 삼천 가지 예의(禮儀)를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법칙으로 여겼고, 도덕은 사람에게 있어 예가 아니면 확립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정치를 논하여 말하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너그러움에 있다.”
하였으니, 아랫사람을 부릴 때에는 세밀하게 살펴 따지는 것으로 명철함을 삼지 않았고, 일에 임해서는 작은 이익으로 큰 의리를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사람을 취할 때에는 그 사람의 단점으로 장점을 가리지 않았다.
선생은 여러 번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엄격함을 위주로 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명령한 것이 행해지고 금한 것이 그쳐진 뒤에야 다스림의 본체를 말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금의 군현(郡縣)은 옛날의 열국(列國)으로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다스리는 도는 하나이다. 정교(政敎)를 밝히고 법제를 닦을 것이니,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반드시 와서 법을 취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하나하나가 옛사람의 법도로, 그것을 자신의 몸에 행하고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 한결같이 미루어나갔다.
선생은 인조 1년(1623)에 처음 벼슬하여 각종 관직에 있었으나 어떤 관직에는 출사하고 어떤 관직에는 출사하지 않았다. 효종 7년(1656), 선생의 나이 67세 되는 해에 국상(國相) 원두표(元斗杓)가 선생을 추천해 마지않아 선생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고 장령으로 승진하였으나 끝내 나가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책(言責)을 맡아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말이 큰 것은 그 사안이 큰 것이다. 사귐은 옅은데 말이 깊은 것을 옛사람이 경계하였으니, 무리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행하여 큰 것은 버려두고 작은 것을 말함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박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10년(1659)에 효종이 훙서하니, 선생의 나이는 72세였다. 장악원 정에 제수되어 들어와 사은숙배하였으나 얼마 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현종 2년(1661) 2월 10일에 선생이 운명하니, 향년은 74세이다. 문인으로 수업을 받은 자는 모두 조복을 입고 수질을 둘렀다. 마전군 치소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지점에 장사 지냈고, 11년 경술년(1670)에 같은 군의 분석산 동쪽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숭정(崇禎) 4년(1631, 인조9), 선생의 나이 44세에 장자 황이 18세의 나이로 죽었고, 그해에 시(翨)가 태어났으니, 지금 시의 나이는 50세이다. 또 서출로 둔 아들 승(𦐒)은 선생이 운명할 때에 겨우 8세였다. 선생이 처음에 들인 부인은 종실인 이씨이고, 후에 들인 부인은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두 번 부인을 들여 2남 4녀를 낳았는데, 딸 중에 맏이는 이씨 소생으로 혼인을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조씨 소생인데, 딸 중에 시집을 간 자는 두 사람으로 사위는 신환(申㬊)과 송유징(宋孺徵)이다. 승에게는 또 손위 누이와 손아래 누이가 있으니, 사위 두 사람은 홍상형(洪尙亨)과 김행원(金行遠)이다.
선생이 원주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모두 세 번 거처를 바꾸어서 돈계(遯溪), 소암(素庵)이라는 호가 있고, 가장 나중에 관설로 옮겼으니, 관설은 단구(丹丘)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인하여 호로 삼았다. 혹은 설옹이라고도 일컫는다. 선생이 운명하고 지금 21년이 지났으니, 노인은 87세이다. 신유년(1681, 숙종7) 맹하(孟夏) 하현(下弦)에 저술하다.
雪翁先生墓碣陰記
孔巖之許。本駕洛國君首露王之苗裔也。新羅末世。有許宣文。年九十餘。麗氏初興。以有德於師行。王爲之致邑。爲孔巖村主。子孫仍爲孔巖之族。後世有太尉載。僉議中贊珙。典理判書錦。麗史皆有列傳。至我恭憲王時。有左贊成磁。以數直諫。爲諛臣芑所譖。歿於窮厄。男別提橿。終身不出。先生別提公之孫也。萬曆十六年我
昭敬王二十一年十一月十九日。先生生。父國子進士亮。早世。母永嘉權氏。先生幼孤。長則能讀書修行。少學於權寺正用中。寺正。履素李仲虎先生之弟子。昭敬時聞人。先生諱厚。字重卿。好學博藝。志通重禮。與李挺豪英彥。從德信公子。講易乾坤文言。大學經傳。南遊新安。見鄭寒岡先生。尙州。見鄭文肅公。語人曰。三代氣像在此。先生敎弟子。以正心術篤恩義。以盡彝倫之敍。而謹於禮節。以爲威儀三百。禮儀三千。天理流行之則。道德在人。非禮不立。論政曰。爲政
在寬。御下。不以察察爲明。臨事。不以小利害大義。取人。不以其所短。掩其所長。先生累爲郡邑。治郡主嚴曰。必令行禁止。然後治體可言。又曰。今之郡,縣。古之列國。有民人焉。有社稷焉。治道一體。明政敎修法制。有王者作。必來取法焉者是也。先生之學。一一古人法度。其行之於身。推之於家國天下一也。先生始仕仁祖元年。其在庶官。或出或不出。孝宗七年。先生六十七。國相元斗杓推薦之不已。先生爲司憲持平。陞掌令。終不出而仕也。或曰。當言責。可以言而不
言。何也。先生曰。其言大者其事大。交淺言深。古之人戒之。隨行逐隊。舍大而言小。以干名譽。待其身太薄。吾不爲也。十年。孝宗薨。先生七十二。爲掌樂院正。入謝。尋謝病。顯宗二年二月十日。先生歿。年七十四。門人受業者。皆加麻而哭之。葬麻田郡治北二十里。十二年庚戌。改葬同郡分石山東阿。崇禎四年。先生四十四。長子
十八死。其年翨生。今五十年。又有庶出子𦐒。先生死之時。才八歲。先生初娶宗室李氏。後娶漢陽趙氏。再娶而生二男四女。女最長者一人。
李氏出。未笄而死。他皆趙氏出。而女適人者二人。其壻申㬊,宋孺徵。𦐒。又有姊妹。壻二人。洪尙亨,金行遠。先生卜居原州。凡三易居而有遯溪素庵之號。最後。移觀雪。在丹丘南十里。因以爲號。或稱雪翁云。先生歿今二十一年。老人八十七。著辛酉孟夏下弦。
[주1] 설공(雪公) : 원문에는 없으나 전후의 체재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주2] 고려가 …… 있었다 : 《기언》 권67 〈자명비 음기(自銘碑陰記)〉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허선문(許宣文)이 군량을 조달한 공로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주-D002] 11년 : 권44 〈관설 선생 묘지명〉에 의거하여 원문 ‘十二年’의 ‘二’를 ‘一’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