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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독 스크랩 불교임상심리학-제5장 의식과 5감의 세계
곽내혁흐름 추천 0 조회 40 08.09.21 19: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임상심리학


제5장 의식과 5감의 세계



⊙ 제8송

[한역원문]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우리말 새김]
다음은 제삼능변(第三能變)으로 육종(六種)의 차별(差別)이 있으니
경계를 요별(了別)함으로써 성상(性相)을 삼고 선(善)도 불선(不善)도 아님이라.

[현대적 의미]
마음의 제3층은 6종류로 구별된다. 외계를 인식하는 것이 그 본질적인 기능이다. 선, 불선과 함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다.



의식과 5감


제8송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식(意識)과 5감(五感) 부분은 일단 알고나면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잘 알고 있었던 부분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잘 알고 있었던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마음의 제3층은 6종류로 구별된다' 즉, 5감과 의식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외계를 인식하는 것이 본질적 기능이며 형태적 기능이다'라고 한다. 마나식이 아라야식을 대상으로 봄으로써 마음의 심층에 자아의 존재가 구상(構想)되어 있기 때문에 '외계(外界)' 즉 자기내부의 바깥세계가 자기와는 대립해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이 의식과 5감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이다.

이처럼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끊임없이 분별한다. 분별이라고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리분별을 할 줄 안다는 식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분별은 처음부터 망분별(妄分別), 망상(妄想)의 의미로 쓰여졌다. '선(善), 불선(不善)과 함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고 했듯이 현상으로서는 선(善)인 경우도 있고 선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망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지[分別知, 이성]의 세계에서는 선과 선 아닌 것이 한데 뒤엉켜서 끝내 해결이 안 될 뿐이다. 안[內]과 바깥[外]을 분별하는 데 인간의 근본문제가 있다고 불교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는 모양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굳게 믿고 의식의 분별작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자신에 관한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다.


⊙ 제9~10송

[한역원문]
此心所變行 別境善煩惱 受煩惱不定 皆三受相應

初遍行觸等 差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우리말 새김]
이 심소(心所)는 변행(遍行)과 별경(別境)과 선(善)과 번뇌(煩惱)와 수번뇌(隨煩惱)와 부정(不定)이니 다 삼수(三受)와 상응(相應)함이라.

처음의 변행(遍行)은 촉등(觸等)이고 차별경(差別境)은 이른바 욕(欲)과 승해(勝解)와 염(念)과 정(定)과 혜(慧)니 연(緣)하는 바가 같지 않음이라.

[현대적 의미]
이 층에 속하는 작용은 변행, 별경, 선, 번뇌, 수번뇌, 부정이며 모두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을 감수한다.
변행은 모든 층에 공통된 지각작용과 같은 것이며 대상에 따라 상대적인 별경은 욕구, 이해, 기억, 주의, 판단 등이다.




의식의 작용(1)


제9송에서는 의식에 속한 작용으로서 '모든 층에 공통된 변행, 별도의 대상에 대응하는 별경, 선, 번뇌, 수번뇌, 부정'이다.
여기서 유식·불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응하는 것을 '악(惡)'이라고 하지 않고 '번뇌'라고 부르는 점이다. 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도 자신은 선이고 악은 상대편에 객체로서 있다고 하는 느낌이 강해진다. 거기에 비해서 번뇌에는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 걱정과 괴로움을 끼치는 존재라고 하는 뉘앙스가 있으며 실제로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선 악(善 惡)이라고 하면 대립개념으로 있게 되며 대립적으로 파악하면 자신은 어떻게 하든지 선이고 악은 자신 이외의 대상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자기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을 정신분석에서는 투사(投射)라고 부르지만 자기 안에도 있는 악이 다른 대상에게 투사되어 있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인간문제를 '번뇌'로 파악하면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문제로 바뀌며 자신의 마음의 병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부수적인 번뇌와 근본적인 번뇌의 차이를 아는 것은 병의 증상과 원인의 차이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뇌에 대한 근본적 치료, 원인치료 요법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아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하나 날카로운 점은 '모두 괴로움[苦], 즐거움[樂],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捨], 이 세 종류를 감수(感受)한다'고 하는 통찰이다. 근본적인 성질은 번뇌지만 우선은 즐거움도 선도 괴로움도 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어느 쪽으로도 작용하지 않는 평정한 감각도 있다. 삼루에 대한 중요성이 반드시 의식이나 감각적으로 즐거운가 괴로운가에 의해 판단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분별을 근거로 자신의 감각을 중요시하는 분별을 작용시킴으로써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해도 결국은 자신도 타인도 번뇌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일체는 모두 고통이다'라고 하는 것에 이르게 되며 따라서 인생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번뇌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통찰과 일치하게 된다.

유식은 근본적인 번뇌·무명의 구조를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의식[분별지]-마나식[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아라야식(분리된 생명의 종자)이라고 하는 식으로, 심층심리학적으로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층에 공통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므로 생략하지만 그 외 의식과 5감의 작용으로서 '개개의 대상에 상대적인 사물…'을 들고 있다. '그 대상이 각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별경(別境)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처럼 의식의 작용은 어쨌든 일체의 사물을 전체[우주]로서 보지 않고 개별적인 사물로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뭔가 실체로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 욕구, 이해, 기억, 주의, 판단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실체라고 해도 대상으로서 이해되거나 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번뇌, 즉 보리(菩提)로 있기 때문에 번뇌와는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깨달음을 번뇌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욕구, 이해, 기억, 주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면 수행할 것도 없으므로 깨닫는다고 하는 사실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해서 언어와 분별을 습득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문제와는 거리가 먼 교육을 받으면서 그 사회의 상식[분별구조]을 배우고 행복하게 되는 법, 잘 사는 법, 이익을 보는 법, 출세하는 법, 자존감을 살리고 자기답게 사는 법, 열심히 해서 사회를 위하는 법 등, 흔히 당연하다고 하는 정도의 것을 목표로 교육받아 가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평균적인 교육을 받고 저절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번뇌투성이인 범부밖에 되지 못한다. 먼저 의식의 세계로부터 상식을 초월한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원하고 이해하고 기억하고 주의하고 판단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깨달음에는 도달할 수 없다.


⊙ 제11~14송

[한역원문]
善謂信慙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煩惱謂貪瞋 癡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 

광諂與害교 無慙及無愧 掉擧與昏沈 不信幷懈怠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우리말 새김]
선(善)은 이른바 신(信)과 참괴(慙愧)와 무탐등(無貪等) 삼근(三根)과 근(勤)과 안(安)과 불방일(不放逸)과 행사(行捨) 및 불해(不害)라.

번뇌(煩惱)는 이른바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이며 수번뇌(隨煩惱)는 이른바 분(忿)·한(恨)·부(覆)·뇌(惱)·질(嫉)·간(간)이며,

광(광)·첨(諂)과 해(害)와 교(교)와 무참(無慙) 및 무괴(無愧)이고, 도거(掉擧)와 혼침(昏沈)과 불신(不信)과 아울러 해태(懈怠)니라.

放逸과 아울러 失念과 散亂과 不正知며 不定은 이를테면 회(悔)와 면(眠)과 심(尋)과 사(伺)이니 두 가지가 각각 두 종류(선과 악의 성질)니라.

[현대적 의미]
선은 진실한 마음, 내적 반성, 외적 반성이며 탐욕하거나 분노하거나 어리석지 않으며, 노력하며 상쾌하고 침착하며 게으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번뇌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며 뽐내고 의심하며 잘못된 견해다.

또 속이고 아첨하고 피해를 주며 교만하고 내외적으로 무반성하며 우쭐거리고 침체되며 진심이 결여되어 있고 태만하다.

또 무책임, 건망증, 산란함이 있고 옳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후회하는 것, 잠자는 것, 알려고 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다.



의식의 작용(2)


11송에서 14송까지는 의식의 작용으로서 선과 번뇌의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유식에는 선이 먼저 제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반성의 자료로서 먼저 번뇌, 특히 부수적 번뇌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분노, 한(恨), 속임, 고민, 시기심


유식에서는 번뇌에도 부수적, 현상적인 번뇌와 근본적인 번뇌가 있다고 한다. 부수적 현상적인 번뇌를 수번뇌(隨煩惱)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특히 분노, 한(恨), 속임수, 고민, 시기심이 두드러진다.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뭔가가 있으면 '누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화내고 '기대를 저벼렸다'고 한탄하고 속았다고 괴로워하고 시기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은 '그런 대로 괜찮은 인간이다'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을 버리고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마치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번뇌는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때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흥분도 하고 한을 품기도 하고 고민도 하고 시기질투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인간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닌가, 또는 이러한 감정이 없다면 인생은 지루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마음이 병들어 있어서 그렇다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인색함[간]


다음은 아까워서 남에게 주기를 꺼린다는 의미의 인색함[간]이 제시되어 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색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것은 정말로 자연스러운 감정일까?

예를 들면 비교적 지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가난한 이웃에게 만원 정도는 송금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달에는 보너스도 나왔으니까 3만원, 5만원 정도는 … 그러나 자식 옷을 사거나 술을 마신다면….

물론 술을 마시고 싶다면 마셔도 좋다. 자식은 부처고 나도 부처니까 부처가 부처에게 비싼 옷을 사 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모금을 하고 싶다면 모금을 해도 좋다. 그때가 노는 때라면 될 수 있는 한 놀아도 좋다. 그때가 일하는 때라면 될 수 있는 한 일해도 좋다. 그때가 주는 때라면 주어버리면 좋다. 그때가 받는 때라면 받으면 좋다.

노자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는 말이 있다. 진정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그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물은 저쪽에서 흘러오고 이쪽에 웅덩이가 있다면 잠시 머물러 있는다. 오래지 않아 물이 고여서 넘치면 다시 흐를 수 있으며 잠깐이면 저쪽편으로 흘러간다. 이처럼 자연의 내발적(內發的)인 행동은 주려고 하고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인색한 마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존재방식은 의식수준에서 타율적인 저차원의 윤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의식적, 타율적인 윤리에서는 말하자면 '여기에 고여 있으면 안된다. 빨리 이쪽으로 흘러달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마나식은 '탐난다, 아깝다'고 반응하면서 흐르지 않고 머무르려고 한다. 거기서 마음의 내부에 갈등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처럼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서 좋은 일을 할까 나쁜 일을 할까 망설일 경우, 좋은 일을 해도 하지 않아도 같은 것이다. 마음의 흐름에 찌꺼기가 생기고 오래지 않아서 부패되어 간다. 물론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편이 당장은 좋지만 본질적으로는 인생의 공허함이나 세계의 비참함을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윤리나 이성은 마나식을 억압, 또는 기껏해야 통제하는 일은 가능해도 '평등성지'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속임, 아첨, 상처줌, 교만


자신의 마음을 잘 주시해 보면 의식작용의 밑바닥에는 틀림없이 마나식이 있으며, 자아, 이성으로 작용하고 있다기보다 마나식·심층자아식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무의식중에, 어느덧, 무심결에'하고 마는 행동을 '마나식 반응'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들의 일상행동은 모두 마나식 반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러한 문제를 얼버무린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도 배운 일이 없기 때문에 마나식 반응으로서의 일상생활을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나는 자녀를 사랑한다.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 따라서 이것으로 족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프라이드·교만이 되었다.

그리고 의식이 통제를 상실하고 마나식 반응이 심해지면 사람을 기만하고 상처를 입히고 아첨을 해서라도 뭐랄까,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는 재산이나 명예, 권력 등을 많이 가지면 교만해지고 우쭐댄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나, 나의 프라이드가 상처받으면 필사적으로 되며 적을 해치워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여기에 모든 분잭의 원천이 있다. 따라서 마나식이 인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한 분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정신적이든 사회적이든 육체적이든 지킬 만한 것이 있는 한,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


마나식과 마나식의 이해관계가 균형을 이루어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즉 일반적인 연인, 동료, 부부,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다. 남편이 항상 '당신을 사랑한다. 아름답다'는 식으로 아내의 마나식을 어루만진다. 우쭐해짐을 받는 것이다. '당신이 열심히 한 덕이다. 사랑한다'는 반응이 온다. 그렇게 하면 마나식이 기뻐진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나눌 때까지는 잘돼간다.

그런데 그것으로 아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사랑한다고 하면 "시끄러워요. 그것이 어떻다는 거죠"라는 식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조금도 상대해 주지 않고 게다가 월급이 작다는 불평이 더해진다면 바로 그 순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일반적으로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부모, 자식, 부부, 친구 등 다양한 이해관계에서 마나식이 종종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사이좋은 부자지간이라든지 궁합이 맞는 부부라고 부른다.

그런 우연의 일치가 전인류적으로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역사상 그런 일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利害)'는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욕구와는 달리 인간이 마나식 반응으로 만들어 낸 망상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끝이 없다. 이익이 되면 될 수록 더 많은 욕심이 생긴다. 균형을 취하고 있는 생태계와는 달리 반드시 균형이 붕괴된다.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손해를 입은 개인이나 집단이 그냥 계속해서 참고 있을 수는 없다.


내적 무반성, 외적 무반성


그런데 번뇌 가운데서도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내적으로 스스로를 향한 반성도 없고 남이 볼 때 어떨까 하는 외적 반성도 없는, 즉, 자기 부끄러움[慙], 남 부끄러움[愧]이 없는 것이다. '자기 부끄러움 남부끄러움에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변명을 자주 듣지만 대개는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부끄러움은 내적인 반성이며, 남부끄러움은 외적인 반성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분노하고 원망, 기만, 고민, 질투, 아첨하고 상처를 주면서 내심으로는 항상 자신은 그런 대로 괜찮은 인간이라는 교만됨과 내적 무반성 상태로 지내며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할 성질이 아니라는 식의 외적 무반성의 태도를 고수한다.

물론 처음부터 전혀 반성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소의 반성은 누구나 가능했겠지만 그러한 내·외적 반성을 한 다음에도 어제와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반성하면 할수록 자신은 번뇌로 가득차기 때문에 약간의 이성으로 통제하는 정도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따라서 한두 번 반성하다가도 결국은 그 마음이 둔감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 부끄러움 남부끄러움에 못 견디겠다고 생각한다면 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은 어설픈 반성이 아닌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마음으로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거(掉擧), 혼침(혼沈)


우리들은 자아가 만족되면 우쭐거린다[掉擧]. 조금이라도 뭔가 자기에게 좋은 이링 있으면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남은 불행하든지, 자신은 들떠서 좋아한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 인정받았기 때문에 무슨 장으로 승진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좋아한다. 부인은 남편의 봉급이 올라가서 지금까지 못 부리던 멋을 부릴 수 있고 몇 십 만 원짜리 옷도 사 입고 옆집에 자랑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것들이 만족되지 않으면, 대단한 일도 아닌데 맥이 풀리고 풀이 죽어서 우거지상을 한다[혼침(昏沈)]. 혹시 자식이 대학시험에라도 떨어지면 어떤 열성적인 부모는 마치 하늘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충격을 받고 자랑하고 싶은 자아는 상처를 입는다.


일장춘몽(一場春夢)


유식에 의하면 우쭐대거나 침체되는 것은 '번뇌'다. 기가 죽거나 침체되는 기분이 번뇌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만 우쭐하고 으스대는 것이 왜 번뇌인가? 그것은 결국 심층자아식·마나식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들 가운데는 미인, 미남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그 미(美)는 100년을 지속할 수 없다. 세계의 미녀 오드리햅번도 나이를 먹는다. 나는 '로마의 휴일'을 보고 굉장히 동경했기 때문에 최근 주름잡힌 얼굴을 TV에서 보고 맥이 풀렸었다. '아아 이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구나'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을 뿐이다. 비비안 리도 잉그리드 버그만도 주름살이 생기고 늙어서 죽고, 그레이스 켈리도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았다. 우쭐해봐도 우쭐거림은 잠시일 뿐, 그 우쭐거리는 종자가 없어지면 실망만 그만큼 깊어질 뿐이다.

인간은 일생을 우쭐거리면서 뻥뻥거리고 살 수 있거나 또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착각하면서 우리들은 안간힘을 다하지만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고 뻥뻥거리고 싶어서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과정을 잘 주시하면 오히려 고생하고 있고 고통 받고 있으며 조금도 산뜻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도 뻥뻥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대화해 보고 싶다. 대개는 부모덕에 그런 대로 편리한 삶을 누리거나 흥청거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능할까. 자력으로 누릴 수 없는 편리를 부인이나 남편이나 자녀로부터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아치(我痴), 아견, 아만, 아애에 사로잡혀서 뻥뻥거리고 사는 사람은 결코 좋은 느낌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자신만을 위해서 밖에 살 줄 모르는 인간을 타인이 사랑해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점점 심해진 심층자아식·마나식은 언젠가는 타인의 마나식과 충돌하고 만다.

물론 우연히 잠시잠깐 미인, 미남으로 있다든지, 잠시잠깐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면 그 사람 전체가 아니라 미모나 돈이나 권력을 보고 사랑한다는 연극들을 토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일생을 마쳐도 좋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환락에 빠지고 비애가 깊어지고, 교만해질 수 있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마치 일장춘몽과 같다."

종종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이를테면 돈을 끊어지지 않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나식과 균형을 이룸으로써 죽을 때까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자신도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착각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마음의 어느 한 구석엔가는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 돈이 없어진다면 이제 그들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돈이나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에고이즘에 집단 에고이즘이 더해져서 지구가 병들어도 자기나라만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온갖 전쟁을 일삼는다. 고통 받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그냥 죽도록 내버려둔다. 고통 받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원망은 누적되어서 오래지 않아 폭발한다. 어느 집단이든 일시적으로 에고이즘이 균형을 이룰 수 있지만 에고이즘과 에고이즘은 필연적으로 분쟁을 낳는다. 즉 자신들만이 떵떵거리고 싶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분쟁의 종자를 싹틔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분쟁이 시작되면 자신도 타인도 괴로워진다. 결단코 떵떵거리는 시대는 영속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쭐댐은 번뇌인 것이다.

그런데 한역원어로 도거(掉擧), 혼침( 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마음이 들뜨거나 그 반대로 침체되어 빠져들면 명상에 방해가 된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나는 일상생활의 심리분석에 까지 확대해석해 보았다.


진심의 부재, 태만, 무책임


이러한 정태(情態)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진실을 주시하는 마음은 없다[진심의 부재-불신(不信), 유식에서는 뭔가를 믿지 않는다고 하기보다는 진심의 부재라는 의미쪽이 강하다]. 따라서 즐거운 것이라면 선악을 문제삼지 않고 열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귀찮아지고 게을러져서 [해태(懈怠)] 고생스러운 수행이나 성장촉진 훈련은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살자.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기분에 맡기고 적당히[방일(放逸)] 산다. 이것은 많든 적든 우리들의 일상생활이다.


건망증, 산란함, 그릇된 앎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건망증을 번뇌라고 하는 점이다. 모처럼 애써서 본질적인 것을 배워도 곧 건망증 때문에 '소귀에 경읽기, 돼지밭에 진주, 인간에게 유식'이 되면 어쩔 도리가 없다.

수험지식에서부터 사회상식, 심지어는 연예인의 이력에 이르기까지 필요없는 것을 잔뜩 기억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저것도 하고 싶고 이것도 재미있고 온갖 잡다한 정보를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산만하게 가지고 있으면서[산만함] 진지하게 삶의 문제를 생각하면 바보로 여기고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정작 바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부정지(不正知)].

그러한 사람은 결국 지금 아프지 않기 때문에 병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과 같다. 아니면 누군가가 병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계속해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괴롭히고 주변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이러한 부수적인 번뇌는 보다 깊은 근본적인 번뇌로부터 나온 것이다.


유식의 확대해석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처럼 유식은 처음부터 출가자, 전문수행자를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주로 수행중의 심리를 문제로 하고 있으며 보통 사람의 일상의 심리는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들의 일상의 심리분석에 응용하는 것은 다소 확대해석이며 전통적인 교학이나 문헌학상으로 보면 그다지 정확한 해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유식·불교가 현대에도 생생하게 살아 숨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의 시민생활, 재가(在家)안에서의, 말하자면 '번뇌와 깨달음의 임상심리학'의 방향에서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승불교의 발전선상에서도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보통수준의 인간의 일상의 마음의 작용[번뇌]도 부처의 수준에서 보면 병이며 깨달음이 최고의 건강이며 수행은 말하자면 치료(therapy)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식은 본래 수행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이며 '임상유가행심리학·임상불교심리학'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번뇌


유식에서는 흔히 있는 지엽적인 번뇌를 '수번뇌(隨煩惱)'라고 부르고 수번뇌의 원인이 되는 번뇌를 '근본번뇌'라고 한다. 그리고 번뇌를 아라야식[생명정보] 마나식[심층자아식] 의식[분별지]으로 근원으로부터 점차 현상으로 분명하게 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격적이어야 한다고 배우고 있지만 의외로 교활한 짓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배짱을 부리기도 한다. 살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마나식이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작용을 하는 마나식 그대로는 아무리 윤리를 공부해도 인간은 진실로 선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설명해왔다. 현상으로 나타난 번뇌를 보고 나쁘다고 판단하고 제거하려고 해도 너무나 뿌리깊이 살아있기 때문에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마나식의 근본번뇌인 아치, 아견, 아만, 아애를 뿌리로 한 근본번뇌가 의식의 세계에도 있다. 그것은 탐욕[탐(貪)], 분노[진(瞋)], 어리석음[치(癡)], 아만[만(慢)], 의심[의(疑)], 그릇된 견해[악견(惡見)]의 6가지다.


탐욕[貪]


의식의 근본번뇌 중 첫 번째는 탐욕인데 이것은 욕구와는 다르다. 자연적인 욕구에는 시간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러나 배가 불러지면 더 이상 음식물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근처에 얼룩말 등의 먹이가 다녀도 관심이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만해져도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한다. 고대 그리스 귀족은 대접을 받고도 배가 잔뜩 부르지 않으면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음식물을 토해내서 다시 먹었다고 하지만 정말 비열하다. 한번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것이 기억되어서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영양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왜 이런 맛없는 것을 먹게 했으냐'고 배가 나서는 것이다.

오늘 음식을 먹었다면 내일도 모레도 먹을 수 있도록 근처에 굶어죽을 지경에 빠진 사람이 있어도 자신을 위해서 쌀을 창고에 저장해 두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쌓아도 쌓아도 안심할 수 없어서 끝없이 곡식창고를 세우게 된다. 창고가 가득차면 이번에는 도둑이 두려워진다. 높은 벽을 쌓고 보초를 고용하고 싶어진다… 생명이 살고 죽어가는 흐름을 흐름으로 보지 못하고 고정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마나식의 작용을 뿌리로 탐욕이 싹튼다. 탐욕을 위해서 '분별지(分別知)'를 작용시킨다. 그래서 남에게 주기를 꺼려하고 때로는 아첨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다.

비바람만 피하면 살 수 있거늘 교외에 주문건축한 별장 정도는 따로 갖고 싶어한다. 게다가 이웃집이 자기집보다 넓고 멋있으면 자기는 조금 더 큰집을 원하게 된다. 우리들은 기껏해야 대충 이 정도에서 체념하지만 더러는 온갖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고 고급 저택, 어전, 궁전을 짓는 인간도 있다.

탐욕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욕구구조가 왜곡된 것이며 음식물이 경우 과식증(過食症)과도 유사한 병으로 되어 버린 욕망정태(慾望情態)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경제활동의 대부분은 '번뇌'의 작용이며 '마나식반응'과 관계된 탐욕일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없는 것이라도 저장해두려고 하고 빼앗아서라도 모으려고 하고, 없어져도 될 물건을 새롭게 만들어서 내놓고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 만들고, 사고 싶어하지 않는데 위협해서라도 사게하고 필요한 자원은 빼앗아서라도 얻으려고 하고 환경이 파괴되어도 나몰라라 한다….


분노[진(瞋)]


자기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생각, 자기사정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뜻대로 안 되면 화가 난다. 이것이 분노다. 우리들은 매일 화를 낸다. 자식 때문에 화가 나고 상사 때문에 화가 나고 부하직원, 동료, 이웃집 아주머니 때문에 화가 난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면, 화를 내고 있을 때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다. 화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괴롭다. 화를 내면 낼수록 자신은 점점 기분이 나빠진다. 그것은 틀림없이 번뇌다. 그러나 알고 있어도 아는 것과는 관계없이 화가 난다. 그것은 쾌·불쾌보다 더 중요한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자도 신경질을 내거나 생각 없이 화를 내는 경우가 가끔 있을 것이다. 생각 없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즉 의식 없이 화가 나는 분노인 것이다. 마나식의 작용이다. 심층자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점잖은 신사, 숙녀 모양을 했으면서도 밑바닥에서부터 통제능력을 상실한 내[我]가 무의식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즉, 의식이 마나식과 연결되어서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나식반응 가운데 하나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밑바닥에서는 화가 치밀어도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분노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정신분석에 의하면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그 억압된 분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으로 바뀌며 일단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면 다양한 증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분노는 억압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통찰


여기에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나는 범부 즉, 소시민적인 사람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거나, 보다 자시을 억압할 수 있는 훌륭한 인간이 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이 나 자신을 포함해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따라서 그냥 솔직하게 '그래 나는 잘못된 인간이다'라는 식으로 자기비판을 하기도 하고 '어차피 인간이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닌가'라든가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소 그런 점도 있지만 그래도 도둑질하거나 사람을 죽인 일은 없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멋을 감상할 줄도 알고 때로는 진실하고 착실한 때도 있다'든가 경우에 따라서는 반발도 하고 자기변호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일체의 변명없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아는 그런 인간이기를 원한다.

또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들이 날마다 시시각각 나타나는 현상들을 인식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도 타인의 것이나 일반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바로 내자신의 것을 비난하지 않고 변호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식은 자기통찰의 도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유식의 정확성에 대한 사전 검증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나의 유식해석이 바른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개념을 단서로 삼고 자기통찰을 해보면 그대로의 자신은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유식은 자기통찰의 단서를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기통찰을 통해서 주관적 경험을 객관적 경험으로 다시 환원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리석음[치(癡)]


우리들은 끊임없이 분노하며 때로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억압해서 무의식이 되기도 한다. 화가 나는 것은 자기마음(즉, 마나식)에 들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에 대한 무지(無智), 어리석음[치(癡)] 때문이다.

어리석음에도 의식수준에서의 어리석음과 마나식의 어리석음이 있다. 의식수준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을 배웠다고 해서 마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의식수준에서 어리석음이 없어지지 않으면 마나식의 아치(我癡)는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무아라고 하는 것을 일단 말로서 배우고 의식수준에서 이해해서 의식적인 치(痴)를 지(智)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배보살의 통찰을 듣고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무아를 체험하는 수행을 의식적으로 실행한다. 그렇게 하면 업[카르마]이 진리의 종자, 깨달음의 종자로 되고 아라야식에 이식되어 축적되면 오래지 않아서 계절이 오면 싹을 틔워 심층자아식을 평등성지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아만[만(慢)]


우리들은 종종 프라이드를 갖는다고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프라이드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최악의 인간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어째서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지 상당히 이상하지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는 교양있는 사람이라든지 지성인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만다.

뭐랄까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나자신도 프라이드가 상당히 강하다. 예를 들면 '나는 유식학을 안다'고 자랑한다. 어쨌든 인간의 어리석음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다. 도대체 프라이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를 가르치고,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은 아직 프라이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꽤 수행했다는 사람도 '나는 이렇게 수행했다' '나는 이렇게 깊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는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어떤 비구승은 단지 비구승이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프라이드를 삼고 어리석음의 표본이 되고 있다. "나는 섹스, 돈, 지위, 명예, 그런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그렇기 때문에 종교가로서 훌륭하다)"고 하는 교만도 있을 정도이니 인간의 프라이드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끈질긴 그 무엇인가보다.

그러나 프라이드가 있는 한은 정말로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없는 나를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我)에 대한 어리석음이 있는 한,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기분은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역으로 프라이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증거다. 프라이드가 있는 한, 프라이드가 상처받으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프라이드를 갖지 말라든지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말해서 열등감을 갖도록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우월감의 또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열등감이든 우월감이든 양쪽 다 '자기가 있고 타인이 있어서 어느 쪽이 우월한가'하는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비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慢)을 일단은 교만, 아만으로 번역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위다, 저것이 위다, 똑같다는 식으로 '비교하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평등하다'든지 '인간은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육받으면 자동적으로 평등성지가 자라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비교하는 마음의 본심 부분과 평등해야 한다고 하는 표면적 부분이 분열하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적 위선이랄까, 사회주의적 위선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표면적인 주장으로 본심을 억압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도 결코 프라이드 없이는 살 수 없다. 훌륭한 인간도 프라이드에 상처를 받으면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는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차원의 윤리, 도덕은 물론 어느 순간까지는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될 수 없다.


의심[의(疑)]


그런데 인간은 이 정도로 명쾌하게 인간의 근본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배워도 아직 '그것은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정말로 깨달을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이 깨달아서 번뇌가 없어진다면 인생은 무료하게 되지 않을까, 자기가 있고 감정이 있고 희(喜), 노(怒), 애(愛), 락(樂), 행(幸), 불행(不幸)이 있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자기[마나식]가 없다면 남는 게 무엇인가' 등 의심하고 판든을 회피, 유보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진리탐구를 위한 철저한 회의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고 자기의견을 바꾸고 싶지도 않다는 의미다.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8식구조의 범부가 보살이 되고 4가지 지혜를 가진 불타가 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무서워하고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초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메슬로는 인간에게는 평균적인 수준을 초월해서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구약성서에서 찾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중 한 사람인 요나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자기로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도피한 것을 그는 '요나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현대인은 소시민으로부터 보살, 불타에 이르는 성장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강한 의심[요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이든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요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는 한 수행의 깊이는 없다. 믿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타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먼저 의심부터 하고 믿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의심 또한 심각한 번뇌다.


잘못된 견해[악견(惡見)]


인간은 대개 잘못된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도 구애를 받는다. 일단 형성된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유식에서는 잘못된 견해를 5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신견(身見)이라고 하며 이는 신체가 영구불변하다고 믿는 견해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견해다. 즉, 누구든지 병세가 위독해지면 "인간은 나이를 먹는 존재다. 죽는 존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잊고 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나이를 먹는 것, 죽는다는 사실을 싫어하고 심리적으로 거부하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자기 몸은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즉, 대개의 인간은 논리적 견해와 심정적 견해가 어긋난 채 살고 있다. 생사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것에 대해서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변견(邊見)이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인데 여기에는 2종류가 있다.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며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허무주의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 단견에 빠져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자신만으로 한정시켜서 본, 너무나 좁고 옳지 않은 견해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앞의 신견(身見)과 모순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견(身見)+단견(斷見)이라고 하는 모순된 사고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부정하고 신체에 집착하면서 또한편으로는 결국 인간은 죽으면 완전히 끝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안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것도 잘되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은 상견(常見)이라고 한다. 인간은 육신이 죽어도 본체는 불멸한다고 하는 믿음이다. 이것도 생명을 자기만으로 한정시켜서 본다고 하는 점에서는 단견과 같지만 그 자기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하고 굳게 믿는다는 점이 다르다. 강한 신견(身見)과 상견(常見)이 합쳐지면 잘못된 '육체의 부활' 신앙이 되고, 보다 약한 신견과 상견이 합쳐지면 '영혼의 영원성'의 신앙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신견+상견에 의한 망상적 원망(願望)이 아닌 사실로서의 사후의 생의 가능성을 머리로부터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개인심리학자 가운데서도 규부라(=로스)처럼 확실하게 사후의 생을 인정한다-그러나 '믿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명언을 한 사람도 있다.

세 번째는 사견(邪見)으로서 인관(因果),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도 자신은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착각이다. 자신은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보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우연으로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뿐이다.

다음으로 네 번째는 견취견(見取見)으로서 자신의 잘못된 견해, 특히 신견, 변견, 아견에 구애받는 것이다. 현대적인 말로 바꾸면 '협의의 주체성( Identity)에의 고착'이다. 물론 인간은 뭔가에 대한 의견이나 견해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견해를 갖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정확하든지 부정확하든지 관계없이 그것에 구애받는 것이 문제다. 인간은 자신의 견해에 구애받으면서 절대로 옳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는 하나의 커다란 문제이며 이데올로기로 대립되면 전쟁으로 발전할 위험도 있지만 인간은 지금까지도 자신, 자파(自派), 자국(自國) 등의 이데올로기에 계속해서 구애받아 오고 있다.

다섯 번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 훈계, 금지에 구애받는 경직된 형식적 도덕주의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는 마나식-의식의 작용으로 왜곡되어서 뭔가 이상한 욕망, 번뇌가 된 것 같다.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난다고 믿고 그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 금욕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은 금지시키고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압된 에너지는 무의식에 쌓여서 때로는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폭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욕망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왜곡된 것을 왜곡된 대로 방치하면 반드시 자신과 타인에게 또 다른 형태의 피해를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무조건 억압할 것이 아니라 우선 욕망의 본질과 원인을 의식수준에서 정확히 이해하고 부분적으로는 직접적으로 해방시키면서[현실적으로 무리없는 범위안에서] 서서히 마나식으로 향하도록 함으로써 번뇌를 정화하고 생명의 자연스러운 욕구로 전환해가는 것이다.



메슬로의 욕구계층설


본 내용과는 다소 벗어나지만 유식을 초개인적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참고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성심리학과 초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인 메슬로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생득적, 본능적인 기본욕구가 있으며 그 기본욕구들은 병렬적(竝列的)이 아닌 계층적(階層的)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먼저 기본적으로 가장 강한 욕구는 ① '생리적 욕구'다. 여기에는 거의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메슬로에 의하면, 문제는 인간의 욕구로서 이것밖에 고려하지 않거나 또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상이나 심리학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프로이드의 성욕과 마르크스의 물질].

한편, 불교는 이것을 단순히 부정하는 경향이 있으며[밀교는 다르지만], 또 크리스트교에서도 "사람이 사는 것은 빵에 의해서가 아니다"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금욕주의적으로 오해되어 왔던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메슬로는 정신주의적 금욕도 물질·생리주의적 욕망해방도 아닌 길을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생리적 욕구가 가장 기본적으로 강한 욕구이며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필요불가결한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② 생리적 욕구가 적당한 시기에 적당하게[100%일 필요는 없다] 만족되면 '안전에의 욕구'가 나타난다. 이것도 또한 기본적으로 강한 욕구라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굳이 비교한다면 생리적 욕구가 보다 우선적인 욕구라는 의미에서, 욕구에는 계층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③ 그것들이 적당한 정도로 만족되면 이번에는 '소속과 사랑의 욕구'가 나타난다. 생리적 욕구, 안전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그것이 절실한 경우에는 집단[특히 가족]안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에 비현실적으로 집착하고 불필요하게 취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속과 애정의 욕구보다도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의 욕구가 보다 강하고 우선적인[예를 들면 어린이가 잔혹한 부모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적당하게 충족되면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취해도 만족되지 않는 시시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소속과 사랑의 욕구야말로 절실한 문제라고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가 하는 문제는 있어도 모두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생리나 안전성의 측면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생명에 대한 위험은 없다고 하지만 애정부족은 심각한 심리적 불건강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현재 임상심리학으로는 상식이라 하겠다. 그러면 인간은 생리, 안전성, 애정과 소속감이 만족되면 이제 행복해져서 더 이상은 필요없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④ 인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싶어한다. 인간은 누구든지 존중받고 자존심을 갖고자하는 '인정의 욕구'가 있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인정을 얻지 못한 인간이 성장 후에 어떻게 신경증적으로 지위나 권력, 명성에 집착하게 되는가를 아들러나 프롬이 지적하고 있다. 또 자존심을 잃어버렸다고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지독한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존심이 좌절당하고 인정욕구가 억압되어서 고정화되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병적으로 비굴하게 되고 마는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⑤ 그런데 특히 메슬로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실현의 욕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모든 욕구가 전부 만족되어도 개인이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지 앟으면 곧 새로운 불만이나 불안이 일어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평정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음악가는 음악을 작곡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을 시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능력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욕구를 자기실현의 욕구라고 부른다. 인간에게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뭔가 고유한 삶의 형태를 원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시키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기본적 욕구, 안전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실현에 이르기까지 욕구의 계층구조론은 상당히 설득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리적, 금욕주의적, 청빈주의적 견해에서 보면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세계에는 먹는 음식과 안전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는가? 그런 상태에서 먹는 것 이상의 욕구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고 하는 것은 부르조아적인 사고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불교적으로는 탐욕[탐(貪)이라는 명패를 붙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만족되면 다음은 저것을, 저것이 만족되면 다음에는 또다른 것을….

이런 것을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서 분명하게 이론화한다는 것은 '인간은 철저하게 욕망이 깊은 존재'라는 것을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동서를 막론하고 무조건 금욕, 청빈은 선이고 욕망이나 부(富)는 악이라고 믿는 곳에서는 거의 수용하기 어려운 이론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⑥ 그리고 메슬로는 인간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기실현의 욕구'가 충족되면 '자기초월욕구'에 눈뜨게 된다고 한다. 자기초월욕구는 인간성심리학-초개인심리학과 유식·불교를 결부시킨 중요한 개념이다. 그 중에서도 너무나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은 자기를 초월해야 한다기보다 그와 같은 과정을 따라서 성장을 충분하게 완수하게 되면 자연히 초월하고 싶어진다"고 포착한 사실이다.


악(惡)의 문제


메슬로는, 인간이 욕구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기주의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신경증적 욕구가 아닌 기본적 욕구를 적당히 만족시키면서 성장하면 심리적으로 보다 건강하게 되며 성장의 고차원 단계인 자기실현의 단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그곳에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통합된다고 주장했다.

신경증적 욕구는 한게가 없으나 인간의 기본욕구는 일정 수준까지는 만족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저차원의 욕구가 만족되어서 욕구구조가 왜곡되지 않으면 보다 높은 욕구가 자연히 발생한다. 모든 욕구가 어느 수준까지 충족되면 인간은 한층 더 건강하게 되며 성장해 가면서 '자기실현적 인간' 수준에 다다르면 이기성과 이타성은 통합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실현을 이룩한 인간은 자기초월[불교적 깨달음도 포괄하는 개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메슬로는 단순히 욕구를 긍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계층성을 발견하고 성장가능성의 최고경지를 볼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업적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인간의 마음의 심층은 어둡고 교활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훌륭한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백지(白紙)고 인간의 욕구는 조건부에 의해서 학습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면 '조건부'를 다시 고치면 될 것이다. 안이한 낙관적 인간론도, 인간의 심층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적 욕망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며 간신히 억압하거나 승화할 수 있을 뿐이라는 비관적인 성악설도 금욕주의적인 인간론도 완전히 뒤집어졌다. 메슬로 심리학의 모토는 "건강하게 있을, 그러면 당신의 충동을 믿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층에 잠재된 것이 악이 아니고, 기본적인 욕구추구가 악을 낳는 것이 아니라면 왜 실제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그점에 대해서 메슬로는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기본적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나중까지도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고 하며 그렇게 병적으로 왜곡된 욕구를 '신경증적 욕구'라고 부른다. 기본적 욕구의 한계를 초월한 불만은 신경증적 성격을 탄생시킨다. 그것은 때로 회복불가능한 상태까지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에라도 충족되면 어느 정도까지 심리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메슬로의 인간성 심리학의 심리요법이다.

즉 메슬로에 의하면, 악은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심리적, 사회적으로 불건강한 상태로부터 나온 것이며 인간이 좀처럼 피하기 어려운 운명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학 이론으로서는 상당히 독특하며 동시에 전통적인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기본이념과도 일치하며 '인간악'에 대한 심리요법의 개발이 가능하다고 하는 점에서도 유식·불교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메슬로의 욕구계층설은 연속적이며 '자기실현에서부터 자기초월에'라고 하는 것도 연속적이며 질적 전환은 고려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낙천성이 있다고 하겠다. 거기에 비해서 유식에서는 '전의(轉依), 전식득지(轉識得智)'로 근본적, 질적 전환을 취하고 있다. 단순히 무의식, 본능, 충동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를테면 집단무의식이나 유전자정보 수준까지에서의 변용이 고려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이론적으로든 임상적으로든 채워 넣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인 것 같다. 어쨌든 현시점에서 나는 금욕주의도 쾌락주의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현상에서 원인으로


이상 굳이 원문과는 반대로 지엽적인 것에서부터 유식에서 언급된 번뇌의 리스트를 간단히 해설했다. 하나씩 짚어 가면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전부 묘사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백은(白隱)은 "중생은 본래 부처고 물과 얼음이 같듯이 물을 떠난 얼음이 없고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번뇌의 얼음이 응고되어 있고 부처로서의 본성이 피어있지 않으므로 오히려 번뇌의 측면이 더 잘 이해되는 듯한 기분이 들 뿐이다.

따라서 먼저 현상으로서 관찰하기 쉬운 지엽적인 번뇌를 보고 그리고 나서 현상의 뿌리인 근본번뇌를 살펴보았다. 지엽과 뿌리의 연결상태에 대해서는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오히려 독자가 번뇌, 괴로움, 허무 등을 체험하는 일상생활 현장에서 유식에서 배운 개념들을 단서로 해서 그것을 번뇌로서 자각하고 그 안에서도 근본번뇌인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작용과 마나식의 반응을 스스로 의식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변호나 자기비난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안에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번뇌가 금방 없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전처럼 번뇌에 질질 끌려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번뇌, 고통, 허무를 느낄 때마다 문제는 타인이나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자기통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수행[영혼의 치료]의 필요성이 보다 구체적으로 납득되어지리라 생각한다.


선(善)에 관해서


이제 간신히 익숙해진 번뇌의 측면이 끝나고 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한번 더 교재의 주요한 부분을 언급해 보면, 8송, 마음의 제3층은 6종류에 구별된다. 이것은 본질로든 형태로든 외계를 인식하는 작용을 한다. 또한 선(善)·불선(不善)과 함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다.

9송, 이 층에 속한 작용은 선(善), 번뇌(煩惱), 수번뇌(隨煩惱), 부정(不定)이며 모두 고(苦), 락(樂), 사(捨)의 3가지를 감수(感受)한다. 11송,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 내적 반성, 외적 반성, 탐욕적이지 않는 것, 분노하지 않는 것, 어리석지 않는 것, 노력하지 않는 것, 산뜻한 기분, 게으르지 않는 것, 평정함,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믿음[信]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의 한역은 신(信)이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교의나 그 교조, 조직 등을 믿거나 절대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단 도(道)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한눈팔지 않고 곧바로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마음이다.

{유식 30송}의 주석서인 {성유식론}에는, "진리[法]의 실재(實在)와 덕(德)과 효력에 대해서 신인(信認)하고 신락(信樂)하며 신욕(信欲)해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성질이며, 불신을 치유하고 선을 원하는 것이 그 작용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개는 인(認)이라고 하며 아무렇게 알거나 모르고 믿는 것이 아니고 확실히 인식하고 인식했으면 그것을 지그시 유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실제적인 작용, '덕(德)'을 맛보고 즐기며 기쁨이 있고 그리고 선(善)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효력이 있다고 믿으면 수행하는 기(氣), 욕(欲)이 일어난다.

이것을 가리켜 신(信)이 마음을 산뜻하게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갈피를 못잡거나 주저앉아 있으면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다. 가야할 방향이 정해져서 똑바르게 걸어가기 시작하면 설사 고통과 수고로움으로 지친다해도 기분은 상쾌해진다. 결론적으로 마음의 성장의 가능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성실, 바른 길을 향한 마음,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이 모든 선의 제1보라고 하겠다.


내적 반성[慙]과 괴[愧]


다음은 참(慙)과 괴(愧)다. 스스로 자신을 진리에 비추어보고 부끄럽게 여기는 내적 반성[慙]과 타인에 비추어서 부끄럽게 여기는 외적 반성[괴(愧)]이 있으며,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텐데… 라든가 욕심많은 사람과 사회를 비난하며 유식한 문구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속임, 자기변호, 자기방어 없이 진심으로부터 참괴(慙愧)하는 것이다. 일상의 자기모습에 대해서 얼마만큼 인정하고 진정으로 반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를 얼마만큼 극복하고 자기능력의 최대치로 살 수 있는가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두고 싶은 것은 참괴는 스스로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자기비난과도 일견 유사하지만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하나의 이상이나 규율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현상의 자신이 합치되지 않으면 비난하는 경우, 비난하는 자신과 비난당하는 자신이 분열된다. 무의식중에 부모나 사회로부터 주입당한 가치기준과 자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식'을 갖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수퍼에고(Superego)와 이드(Id)의 분열로 에고(ego)가 괴로워하는 상태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참괴(慙愧)가 아니다. 참괴는 진리[法]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며,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빌리면, 주객대립(主客對立)적인 분열이 아닌 '자각(awareness)'에 가까운 마음의 자세로 파악할 수 있다.


무탐(無貪), 무진(無瞋)


다음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어떤 때에는 취(取)하고 어떤 때에는 놓는 것이다[무탐(無貪)].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자신이라면 고통을 공감하는 일은 있어도 화를 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무진(無瞋)].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탐욕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반성하고 참괴해 가지만 그것이 점차 익숙해지면 자연히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소위 윤리적인 무탐(無貪), 무진(無瞋)은 마음의 깊은 부분으로부터 자연히 욕구도 일어나지 않고 화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아무런 감정도 없어진다고 오해하는 경향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탐(貪)은 자연적인 욕구로, 진(瞋)은 자신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것이며, 부자연한 상태를 자연적인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는 정열이며, 증오와 원한을 초월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분(義憤)으로 질적인 전환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무치(無癡)


근본적인 무치(無癡), 역으로 말해서 지혜가 없다면 번뇌는 극복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알고 이성적으로 통제한다고 하는 지혜가 아니고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아라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 마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그리고 의식은 분리, 분열적 사고가 아니고 가장 미세한 모든 존재의 관련성을 관찰하고 통찰하는 지혜[묘관찰지(妙觀察智)]로, 5감은 만들어야 할 것을 자연스럽게 완성시키는 지혜[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하는 것이다.

즉, 인격의 전부가 질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의도적으로 의식적인 지혜에 기초한 신체, 언어, 사고에 의한 행위[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를 행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지혜에 의한 업(業)의 잔존 영향력[종자(種子)]이 아라야식에 이식되어서 오래지 않아 무르익어 싹을 틔우고 마나식, 의식, 5감, 그리고 아라야식까지 변용시켜 간다. 그것의 출발이 의식수준에서의 무치(無癡)인 것이다.


정진(精進)


현재 우리들은 전인격적 전환을 실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精進).
만일 정진(精進)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기본자세로서 확립될 수 있다면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인생을 전식득지(轉識得智)로 향한 정진의 기회로 파악할 때 고락(苦樂), 행불행(幸不幸)은 인생의 최대의 문제가 되지 못한다. 이제 고락, 행불행은 어느 쪽도 정진, 자기성장 또는 자기초월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확실히 프랭클이 대단히 중요시한 니이체의 말처럼 "인간은 의미있는 고통에는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정진을 계속하고 있으면 마음안에는 상쾌한 기분이 생겨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실로 사는 보람이나 행복이 아니고 상쾌한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일과 죽는 일 앞에서 모두 경쾌하고 편안하면 된다. 아파도 상쾌한 기분으로 있으면 좋다. 괴로워도 상쾌한 기분이면 좋다. 아픔이나 괴로움을 이 세상으로부터 없앨 수는 없지만 아파도 괴로워도 상쾌하게 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게으름 피우고 무책임한 생활을 하면 상쾌한 기분은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생의 철칙이다. 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변덕스럽고 방종하고 동시에 게으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최악의 태도이며 그런 태도로 인생이 상쾌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평정[行捨]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애(我愛)에 이끌려서 자신의 일시적인 감정의 색안경으로 세계를 보면 흥분하기도 하고 사치하기도 하고 기쁘고, 슬프고, 좋아한다든가, 미워하는 충돌 투성이의 세계로 되고 만다. 먼저 마음의 평정이 필요하다.

선(善)이라고 하면 우리들은 곧 뭔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마음의 평정이 선이라고 하면 뭔가 마음에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결이 심한 수면에는 사물의 모양을 정확히 비출 수 없다. 포착되는 순간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모양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좋을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선의 기본은 마음의 평정이며 그 마음에서 생겨난 지혜라고 하겠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사고주의에 빠지고 말지만 원칙으로서는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다. 마음의 거울이 평정하고 맑디맑음으로부터 시작할 때 자신도 타인도 소생시킬 수 있는 진정한 선이 행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상으로서의 우리들의 마음의 거울은 울퉁불퉁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흐리고 탁하다. 종종 자신의 일시적인 동정이나 사는 보람이나 명예심이나 과시를 위해서 좋은 일을 무턱대고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해도해도 좀처럼 인생은 산뜻한 기분으로 되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를 환기시켜 두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가벼운 기분이 아닐 때에는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99%는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식 30송}에서 번뇌의 리스트를 보면서 '지금 상당히 불유쾌한데 무엇에 부딪쳤을 것이다'고 생각해보면 반드시 대상이 있다. 조용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의 마나식-의식이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은 자신의 마나식-의식을 시끄럽게 하는 동기를 만든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 자기 생각대로 되는가 안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마나식이 안정되어 있는가 어떤가이다. 마나식이 안정되면 의식도 안정되며 거기서 문제는 끝나고 생동하는 삶이 시작된다.

"마음의 제3층은 6종류로 구별된다. 외계를 인식하는 일이 본질로도 형태로도 있다… 이 층에 속하는 작용은… 선(善), 번뇌(煩惱), 수번뇌(隨煩惱), 부정(不定)이며 모두 고(苦), 락(樂), 사(捨)를 감수(感受)한다"고 되어 있다. 외계에 이끌려서 고락에 날뛰는 인생을 일단 자신의 마음, 내계(內界)로 되돌려서 모든 것이 자신의 내계다. 즉, 외계도 내계도 아닌 분열이 없는 세계로부터 다시 보는 것이 유식을 공부하는 의미라고 하겠다.


피해주지 않는 것[불해(不害)]


이상, 설명해온 것과 같은 '선(善)'에 의해서 진정한 평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불해(不害)]이 가능하게 된다. 불해(不害)라고 하면 상당히 소극적으로 들릴 수 있다. 또 확실히 사회사업 등은 불교에 비해 그리스도교쪽이 압도적으로 열심히 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애(愛)는 종종 강압적으로 쓸데없는 참견이 되기도 했다. 즉 선(善)이 오염된 자선보다는 오히려 불해(不害)쪽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해(不害)의 원어는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과도 같은 '아힘사(ahimsa)'이다. 불해라고 하는 말은 언뜻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강인한 동양적, 불교적 예지가 숨겨져 있다.

이상 선과 번뇌의 리스트를 보아오면서 독자는 정말로 훌륭한 분석이라고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유식의 이와 같은 분석의 의미가 이해되었을 때, 이미 천 몇 백년 전에 인간의 근본문제가 이론으로서는 철저하게 해명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 유식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유식이 왜 불교의 지극히 전문적인, 그것도 어느 쪽이냐 하면 수행·임상실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禪)으로부터 떨어져서 수행과는 무관한 학문으로 머무르고 말았는가 하는 의문과 안타까움이 한층 더 깊어진다.

유식이야말로 좌선에 앞서 반드시 이해되어야만 하는 선결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유식을 모르고 좌선을 한다는 것은 마치 길을 모르고 걷는 것, 즉 목적지를 모르는 채 걷는 것과 같지 않을까. 물론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도 보고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겠지만 궁극에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질 뿐이다.


정함이 없는 것[부정(不定)]


인간의 마음의 작용에는 선과 번뇌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방향에 따라서 어느 쪽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부정(不定)]. 유식에서는 뉘우치는 일, 잠자는 일, 알려고 하는 것, 생각하는 것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먼저 '뉘우치는 것[회(悔)]'인데 인간은 나쁜 일을 하고 나서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만이 아니라 '저렇게 해도 잘 되는데…'라고 나쁜 일을 하지 않은 사실을 후회한다든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들통나지 않았을 텐데…'하고 나쁜 일에 실패한 사실을 반성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반드시 반성하는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다음은 잠자는 일[수면(睡眠)]이다. {성유식론}에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멍청하게 만드는 성질이며 관조를 방해하는 작용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면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명상을 방해하며 가볍고 편안한 기분을 방해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수면도 선악의 두 방향이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알려고 하는 것[심(尋)]과 생각하는 것[사(伺)]'이다. 마음의 분별작용으로부터 나온 말이 가리키는 외계를 대충 어림짐작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심(尋)이고 자세히 하려고 하는 것이 사(伺)다. 이것도 경우에 따라서 어느 쪽이라도 될 수 있다. 지성의 작용은 그것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물론 과학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되풀이되지만 마나식에 오염된 그대로의 '심사(尋伺)'는 발달하면 할수록 새로 만들어지는 악(惡)도 많아진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제15-16송

[한역원문]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우리말 새김]
근본식(根本識)을 의지(依止)함이니 오식(五識)은 연(緣)을 수(隨)하여 나타남에 혹은 구(俱)하고 혹은 부구(不俱)하나니 파도가 물을 의지함과 같다.

의식(意識)은 항시 현기(現起)함이니 무상천(無想天)과 무심(無心) 이정(二定)에 생(生)함과 수면(睡眠)과 민절(泯絶)은 제외한다.

[현대적 의미]
5식은 바깥 사물과의 관계에 의해서 일어난다. 때로는 함께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다. 5식은 파도가 물에 의해서 일어나듯이 아라야식에 의해서 일어난다[변혁되면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된다].

의식은 항시 나타나 있다. 무상천(無想天),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하는 두 무심(無心), 수면(睡眠), 기절의 경우는 아니다[변혁되면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된다].



육식(六識)과 아라야식


"의식도 5감도 근본적으로 아라야식에서 발생한다"고 했듯이 자아의식은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정보로부터 발생한 것뿐이지만 그것이 마나식·심층자아식의 왜곡에 의해서 다양한 번뇌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평균적 수준의 인간[범부]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바뀌고 마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뀌는 것처럼 의식도 5감도 질적인 변환을 한다고 한다.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5감은 바깥 사물과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때는 서로 짜맞추어서 나타나고 어떤 때는 단독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말해지고 나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지만 의외로 거의 자각하고 있지 않다. '보는 것, 듣는 것' 등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심리학의 감각차단 실험에 의하면 인간은 특별한 실험장치 안에서 며칠만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 채 있으면 정상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즉 외부 사물과의 관계[緣]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감각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감각이 없는 곳에서는 의식도 붕괴되어 간다는 것이다. 즉, 고립된 실체, 그 자체만으로 자기존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단 말로 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5식은, 파도가 물에 의해서 일어나듯이 아라야식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는가?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가 어떤가는 인생관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들이 대충 알면서 살아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한다고 하는 것의 저 밑바닥에는 부사의한 생명정보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인생을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장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막상 이러한 진리를 깊이 자각하고 깨달으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8식이 사지(四智)로 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아라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바뀌고 마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뀐다. 나아가서 5감은 변혁되어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되고 의식은 변혁되어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지혜로 되는 것이다[이 부분은 30송의 원문에는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충했다].

예를 들면 독자들 가운데서는 잘생긴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좋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돈이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차이와 다름에 눈을 돌리면 마음은 어떻게 해도 질투하거나[嫉], 교만하거나[교( )], 들뜨거나[도거(掉擧)], 침체되거나[혼침(昏沈)], 번뇌의 작용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차이성이 의식과도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이 무의식에서까지 작용하는 한, 인생은 상쾌하지 않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것이다. 그 사람의 생명은 단 한번만이 존재하며 누구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인간은 살아있는 한, 때가 되면 생명을 꽃피울 수 있으며 동시에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할 책임이 있다. 비록 상대적 가치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한 인생의 기본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에 눈이 쏠려서 묘관찰지가 작용하면 그때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하는가는 자연히 알아진다. 그것이 성소작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식득지(轉識得智)는 단순한 이념도 이상도 아니다. 우리들은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상당히 훌륭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상상할지 모르지만 훌륭한 것을 하는 것만이 지혜의 작용이 아니다. 선(禪)에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것이 바로 신통이다[운수반시시신통(運水搬柴是神通)]'라고 하는 말이 있다. 또 '입고 먹고 화장실 가고 피곤하면 눕는다[착의끽반아뇨송시곤와(着衣喫飯阿尿送屎困臥)]'는 말도 있다. 여기에 깨달음의 자세가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해야할 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지혜로 우리들의 눈, 귀, 코, 혀, 전신의 감각이 변하는 것이다. 의식은 인생의 일상 안에 숨어있는 훌륭한 아름다움이나 의미, 나아가서 의미와 가치를 넘어선 자연을 관찰하는 지혜로 변화한다고 한다.



두 개의 무심(無心)


우리들은 자고 있을 때와 기절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의식이 있다. "의식은 항상 드러나 있다." 거기에만 눈을 돌리면, 파스칼이라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할 것이고 데카르트라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수면, 기절의 경우에는 없다"고 하지만 인간이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유식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생명의 차원·아라야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식·불교는 명상을 통해서 의식보다도, 심층의식보다도 더 깊은 차원인 무심(無心)을 발견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한층 더 놀라운 것은 무심에도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하는 2종류의 무심이 구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상의 깊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는 상당히 상세한 단게설[九次第定]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무심을 무상정과 멸진정의 두 가지 구별만으로도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중요한 시사다.

어쨌든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대상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생각이 없어진 禪定]으로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인식하는 의식과 5감은 작용하지 않지만 마나식은 아직 작용하고 있다. 즉 번뇌가 모두 극복된 정태(情態)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서 멸진정(滅盡定)은 의식과 5감에 대한 번뇌와 마나식에 대한 번뇌가 어느 수준까지는 없어진 선정이다. 그러나 아직 전식득지(轉識得智)는 아니다.

개인적인 명상체험에서 보면, 한 2-3년 계속해서 하다보면 상태가 좋을 때는 마음안에 더 이상 언어도 이미지도 작용하지 않는 일종의 무념무상정태(無念無想情態)에 들어가게 된다. 대개 그 상태로 계속해 가면 제법 선정력[禪定力, 배짱이랄까, 일종의 정신+신체의 박력]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 정도 좌선으로는 마나식의 작용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이 그대로 마나식 반응이며 번뇌의 리스트는 자신의 일상생활과 같았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지만 유식을 공부해서 안 것은 '무상정(無想定)', 그것도 초보적인 무상정에 들어가게 된 것뿐이다. 선정에는 여러 단계의 깊이가 있으며 적어도 멸진정(滅盡定)까지 가지 않으면 마나식의 작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뒤에 설명되지만 마나식에 잠재하는 번뇌까지 극복하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한다.

지독할 정도로 뿌리깊이 박힌 무명(無明)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수행을 끝까지 계속할 것이라는 각오는,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원죄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안이하게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 하는 것에 비해서 우리들의 수행자세로는 훨씬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한편, 약간의 수행으로 무상정(無想定)을 체험하기도 하고 선정력(禪定力)이나 아라야식에 잠재된 신통력, 초능력이 개발된 정도로는 가장 중요한 번뇌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자랑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 어딘가 자신의 경지를 자랑할 기분이 남아있는 한은 아라야식과 마나식 어딘가에 번뇌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수행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임을 엄중히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맑디맑은 세계에도 오를 수 있다고 하는, 아득하지만 그러나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준다. 선에서는 일단 깨달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태장양(聖胎長養)'이라든가 '불향상(佛向上)'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이 무상정과 멸진정의 구별과 뒤에 설명할 수행의 5단계설[5위설]에 의해서 그 의미를 특별한 각도에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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