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 김공 묘표〔大司憲金公墓表〕
아, 이는 우리 종숙부(從叔父) 대사헌(大司憲) 수북(水北) 김공(金公)의 묘이다. 공은 휘(諱)가 광현(光炫)이고, 자(字)는 회여(晦汝)이며, 수북은 그의 호(號)이다. 우리 안동(安東) 김문(金門)은 고려(高麗) 태사(太師) 선평(宣平)에서 시작했다. 태사로부터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휘 영수(永銖)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안동에서 살았으며, 그대로 그 곳에 장사 지냈다.
장령(掌令) 영수가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을 지낸 휘 번(璠)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생해(生海)로,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휘가 극효(克孝)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아버지는 휘가 상용(尙容)으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서윤 번 이하 4대는 양주(楊州) 석실(石室)의 선영에 모셨으며, 공에 이르러 비로소 이곳에 따로 장사 지냈다. 공은 문충공의 막내아들이다. 어머니 권 부인(權夫人)은 좌랑(佐郞) 권개(權愷)의 딸로,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계해년(1623, 인조 즉위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또한 병인년(1626)에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경오년(1630)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임신년(1632)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정축년(1637)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처음에 추천을 통해 한림원(翰林院)의 관원이 되고, 홍문관(弘文館)의 남상(南床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 벼슬이 이에 해당함)에 뽑혀 오랫동안 강독(講讀)에 입시(入侍)하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여 맡았다. 차례로 승진하여 동벽(東壁)에 이르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ㆍ사간원(司諫院)ㆍ사헌부(司憲府)의 직임을 역임했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낭청(郎廳)을 지내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승지(承旨)로 뽑히고 여러 조(曹)의 참의(參議)와 참판(參判)을 누차 지냈으며 이어 삼사(三司)의 장관을 지냈다.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을 때 직언(直言)에 걸려 북쪽 변방으로 귀양 갔다가 해를 넘겨 비로소 풀려났다. 강도(江都)의 난리 때 문충공이 순절했으므로, 공은 의리상 오랑캐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어서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홍주(洪州)의 오두촌(鼇頭村)으로 물러가 살았다. 자청해서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즉시 파직되어 돌아왔다. 관직을 제수하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사양했지만, 간혹 국가에 일이 있을 때를 당하면 잠시 나가곤 했다. 일찍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한양에 이르렀는데, 또 사안을 논의했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특별히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공이 정해년(1647, 인조25)에 순천부 관아에서 별세하자, 우리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글로써 곡(哭)하기를 “순수하고 독실했던 널 생각건대, 집안에서 거처할 땐 화락했지. 조정에서 벼슬하며 일 처리할 땐, 바른 도를 지켜 사사로움 없었지. 지난날에 나의 큰형님께서는, 변고 당한 속에서도 도(道) 보전했지. 사람들은 오늘날에 너를 가리켜, 집안에 걸맞은 아이라 했지.”라고 했다. 이미 또 공의 묘비를 지어 공의 충후하고 정직한 실상을 모두 드러냈으니, 공을 알고자 하는 후대의 사람은 이를 증거로 삼을 수 있다.
공의 아내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진사(進士) 심율(沈慄)의 딸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고, 어려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어른처럼 슬퍼하고 사모했다. 공에게 시집가서 매우 부도(婦道)를 잘 지키자, 문충공이 매번 “나를 잘 섬긴다.”라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후사(後嗣) 없이 과부로 지내자 집에서 받들며 효도로 봉양하는 도리를 극진히 했다. 집안 살림을 더욱 잘했는데, 천성 또한 근면하여 팔순의 나이에도 손수 길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녀를 가르치고 종들을 부리는 일도 모두 본보기로 삼을 만했다.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서 공보다 23년 뒤에 별세했다. 공을 처음에 결성(結城) 땅에 장사 지냈다가 이때에 와서 홍주 갈산(葛山)의 갑좌(甲坐) 언덕에 부인과 합장했다.
공은 3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 수인(壽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가 되었고, 수민(壽民)은 현감(縣監)이 되었으며, 수빈(壽賓)은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들은 세마(洗馬) 조석형(趙錫馨), 현감 윤운거(尹雲擧), 대사헌 이정기(李廷夔), 현감 강문명(姜文明), 목사(牧使) 이회(李恢)에게 시집갔다.
부사 수인의 두 아들은 성우(盛遇)와 성운(盛運)으로, 모두 진사에 입격했다. 두 딸은 승지 조윤석(趙胤錫)과 사인(士人) 이창근(李昌根)에게 시집갔다. 현감 수민의 세 아들은 현감 성달(盛達), 정언(正言) 성적(盛廸), 성도(盛道)이다. 세 딸은 장시현(張始顯)ㆍ여필관(呂必寬)ㆍ이조원(李肇源)에게 시집갔는데, 여필관과 이조원 또한 진사에 입격했다. 군수 수빈의 아들은 하나이니, 성익(盛益)이다. 딸은 다섯이니, 이유수(李有壽)ㆍ유건기(兪建基)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외손자는 8명으로, 군수 조경망(趙景望), 조경창(趙景昌), 인의(引儀) 윤섬(尹掞), 봉사(封事)인 이자(李澬)와 이행(李涬), 이항(李沆), 강구망(姜久望), 강후망(姜後望)이다. 성우의 두 아들은 정자(正字) 시걸(時傑), 시보(時保)이다. 성달의 다섯 아들은 시택(時澤)ㆍ시윤(時潤)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100여 명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거의 40년이나 되는데 묘비를 아직껏 세우지 못했다. 이번에 공의 여러 손자들이 묘도(墓道)에 빗돌을 세우려고 하면서 또한 부인의 행적과 자손들의 이름자가 미처 비문에 실리지 못한 경우가 있기에 나에게 빗돌 뒷면에 기록할 글을 부탁하였다. 이에 삼가 위와 같이 대략 썼다.
[주1] 부제학(副提學)이 …… 풀려났다 : 부제학 김광현은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들이는 일에 대해 예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공론을 유백증(兪伯曾)이 자신의 편견을 가지고 억제하려 했다고 논핵하면서 그를 파직시키라고 직언한 죄로 삼수군(三水郡)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7월 14일 석방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12년 윤8월 11일ㆍ13일ㆍ14일, 13년 7월 14일》
[주2] 강도(江都)의 …… 순절했으므로 :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김상용(金尙容)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嬪宮)ㆍ원손(元孫)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일을 말한다.
大司憲金公墓表
嗚呼。此吾從叔父大司憲水北金公之藏也。公諱光炫。字晦汝。水北其號也。惟我安東之金肇于高麗太師宣平。自太師至司憲府掌令諱永銖。世居安東。仍葬焉。掌令生諱璠。平壤府庶尹。寔公高祖。曾祖諱生海。信川郡守。祖諱克孝。敦寧府都正。考諱尙容。右議政。諡文忠公。庶尹以下四世。族位于楊州之石室。至公始別葬干此。公文忠公季子也。妣權夫人。佐郞愷之女。以萬曆甲申生公。中壬子司馬。癸亥文科。又登內寅重試。庚午陞通政。壬申加嘉善。丁丑進嘉義。始薦爲內翰。選玉堂南床。久侍講讀。兼掌制誥。序陞至東壁。歷踐春坊,諫垣,柏府。郞于兩銓。舍人于相府。擢喉舌。屢貳諸曹。仍長三司。其爲副學。坐直言竄北。踰年始釋。江都之難。文忠公殉節。公義不與虜共天。上章陳情。退居洪州之鼇頭村。求爲淸州牧使。卽罷歸。有除命輒辭。間値國家有事。暫出恩謝。嘗以都憲至京。又論事忤旨。特授順天府使。丁亥。卒于官。我王考文正公哭之以文曰。念爾純篤。居處怡怡。立朝遇事。秉直無私。昔我伯氏蹈變全彝。人今謂汝稱家之兒。旣又銘公墓碑。具著其忠厚正直之實。後之欲知公者。此可徵也。公之配靑松沈氏。進士慄之女。生有懿行。幼喪父。哀慕如成人。及歸公。得婦道甚。文忠公每曰善事我。母氏嫠居無嗣。奉于家以盡孝養。尤善於理家。性且勤。大耋之年。手女紅不懈。訓子女御臧獲。擧可爲法式。先公一年生。後公二十三年卒。公初葬結城地。至是與夫人合窆于洪州葛山坐甲之原。有三男五女。男壽仁通政府使。壽民縣監。壽賓郡守。女適洗馬趙錫馨,縣監尹雲擧,大司憲李廷夔,縣監姜文明,牧使李恢。府使二男。盛遇,盛運。俱進士。二女適承旨趙胤錫,士人李昌根。縣監三男。盛達縣監。盛迪正言。盛道。三女適張始顯,呂必寬,李肇源。呂,李亦進士。郡守一男盛益。五女適李有壽,兪建基。餘幼。外孫男八人。趙景望郡守。景昌。尹掞引儀。李澬,涬。皆奉事。沆。姜久望,後望。盛遇二男。時傑正字。時保。盛達五男。時澤,時潤。餘幼。內外孫曾玄共百餘人。公歿幾四十年。墓碑猶未建。今其諸孫將樹石以表阡隧。且以夫入事行子姓名字。有未及載碑文者。屬余記其背。謹書槩略如右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