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 익의 제자들 중 천주교를 학문에서 점차 믿음으로 가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로 갈린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안 정복, 윤 동규( 尹東奎. 1693-1773)와 신 후담(愼後聃. 1702-1762) 등 나이가 많이 든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서학 서적들을 깊이 탐독하며 깊이를 더해 가면서도 평생 갈고닦아 온 유학을 버리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천주교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돌아 선다. 안 정복은 천학 고와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교를 믿는 이들에게 개심을 꾀하고 나섰다. 신 후담 또한 서양 신부 필방제(Francisus Sambiasi)가 저술한 영언리작을 읽은 후 영혼불멸설과 기독교 철학을 부인하는 서학변(西學辨)을 저술한다. 다른 한편으로 권 철신, 홍 유한 등 젊은 제자들은 서학에 심취한 나머지 신앙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홍 유한은 칠극을 기본으로 수덕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영주 구구리로 이사하여 수덕자의 길로 들어선다.
홍 유한은 인조 때 대사성이라는 벼슬을 지낸 홍 이상(洪履祥)의 후손으로 본관은 풍산으로 한양 아현에서 태어났다. 유한의 조부 홍 중명은 효자로서 나라에서 정려문을 세워 주어 집 대문 앞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 유한은 16살 무렵부터 이 익의 문하에 들어 가 글을 읽으며 정상기 윤 동규, 신 후담, 안 정복, 권 철신 등 당대 걸출한 실학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스승 이 익의 조카 이용휴, 이 병휴, 증손자 이 삼환 들과 사귄다. 홍 유한 태어나면서 오농이라는 독질에 걸려 몸이 약하게 자랐다. 그가 32세 되던 해 부친 홍 창보가 돌아가시자 스승의 권고에 따라 휴양차 서울 집을 청산하고 충남 예산군 여촌으로 이사를 간다. 이때 그는 천주실의와 칠극, 직방외기등을 빌려 보고 1770년부터는 복음서만 정독하며 홀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예산에서 18년을 산 홍 유한은 50세가 되면서 1775년 천주교 신앙을 믿기 위하여 소백산 아래 영주 구구리로 옮겨 살면서 수덕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다. 그는 천주교 축일이 7일마다 있는 것을 알고부터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묵상수덕하며 단식을 하였다. 그는 욕망을 사악으로 보아 이것을 억제하라고 이웃들에게 가르치며 도중애 불쌍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은 말에서 내려 걷고 그 사람을 태워 목적지까지 데랴다 주고 자신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수해를 입으면 그 값을 받지 않았다. 그는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지만 몸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수덕자가 되어 산 것이다. 그가 영주 구구리에 들어와 약 10여 년을 살면서 절친이었던 양근 권 철신과 4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는다. 그는 세례를 포함하여 어떠한 전례를 경험한 바도 없었지만 천주님으로부터 화세(火洗)를 받은듯 하다. 1785년 영주 구구리에서 선종 후 그의 후손들은 지속적으로 신앙심을 갖었으며 한국천주교사의 길을 빛내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