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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 시36:4 -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침상은 침궁이다. 침상은 자기 아내와 관계성을 가지는 곳이다. 다른 의미로는 침상이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분위기를 말한다. 자기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인데, 자기 마음 속에서 세상 요소적인 계획이나 소원 목적을 가졌다면 이게 다 침상이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성으로 말을 하면 진리 되신 주님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말씀을 자꾸 새김질을 하면 이건 주님과 침궁에서 속삭이는 거다. 이러면 구원 쪽으로 자기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런데 이게 아닌 세상 쪽으로 되어있으면 이는 음행이다.
눈으로 보이는 남녀관계는 일종의 비유다.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는 하나의 매개물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남녀관계를 보면서 성도가 영적 사상적인 면에서 주님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행이라는 게 왜 일어나는 거냐?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면 음행은 자동화로 생길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건 자기를 옭아매는 감옥이다. 남녀가 음행을 해서 감옥에 가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거고, 예수 믿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사상적인 면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가 주님과의 음행이 되는가를 깨닫게 되면 눈에 보이는 음행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기도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고 했다. 부부가 기도 외에 분방을 하면 시험이 돼버린다. 부부간에는 서로가 시험이 안 되게 사랑할 권리가 있고 사랑 받을 권리가 있고, 사랑을 줄 권리도 있고 받을 권리도 있다. 줄 책임도 있고 받을 의무도 있다. 이걸 벗어나면 시험에 들어버린다.
그리고 진리신앙 노선에는 자원적 자동화로 되는 거지 쿡쿡 찔러서 억압 강압으로 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게 구원이 더 좋겠다. 구원이 많이 이뤄지겠다’ 할 때는 자원적으로 그것을 하면 되는 거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상벌도 가고 칭찬도 가고 하는 거다. 우리도 구원이면 가기도 하고 구원이면 안 가기도 해야 한다. 옳은 것을 알았다면 그 길을 가고 안 가고 하는 결정은 남이 ‘하라. 마라’ 하기 전에 자기가 하는 거다.
4장 1절-6장 22절.
4장.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와가 아담과 동침을 해서 가인을 낳았는데, 부부간의 동침성에는 구원운동이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들은 부부간에 동침을 피한다거나, 즉 동침을 안 하고자 하는 주의나, 결혼을 하지 않고 처녀로 늙어 죽는다거나 홀아비로 늙어 죽는다고 해서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고 해서 거룩하고, 또는 부부로 살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거룩한 거고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생활만 하면 타락이고 이런 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아이를 낳고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늘로 올라간 성도도 있다.
또 보면 하와가 잉태를 해서 가인을 낳자 아담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을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요, 출생케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자라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인간이 죽은 후에 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가 안 되는 거다. 인간 자기의 존재 여부는 하나님 앞에서 시인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거다.
2절-5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할 때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은 말하자면 최고의 엑기스를, 즉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린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농사를 지은 곡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사상이 땅의 사상으로 드리면 받지 않는다는 걸 말한다.
6절-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음에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은 예배로 통해서도 되는구나’ 이걸 말하는 거다. 즉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고 안 받으시고 하는 것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즐겁고 기쁘거나, 아니면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게 된다는 거다.
‘네가 선을 행하면’ 그랬는데, 이 때는 가인이 아직 동생을 죽이기 전인데도 이 말씀을 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엎드리느니라.’ 하나님의 것을 찾는 게 선이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을 찾았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찾았다면 선악과를 안 따먹었을 거다. 말씀을 생각지 않으니 자기의 주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세상 또는 인간 자기 것을 찾게 된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아까도 말했지만 마음에서 하나님부터 찾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 ‘우리가 저 사람이 모르게 따라가자’ 하고서 뒤를 살살 밟아서 죄를 짓게 한다는 의미냐?
‘문’ 하면 기회를 말하는 거다. 즉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모든 게 항상 죄를 짓는 기회가 되는 거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인데도 악을 행하는 기회로 만들고,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실천하면 좋을 텐데 만나자 마자 싸운다. 그래서 이런 것도 있다. ‘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그래서 내가 주고 싶어도 안 준다.’ 이게 무슨 뜻이냐? 진짜 주고 싶었다는 말이냐, 아니면 주기 싫었던 차에 거짓말하는 걸 핑계로 안 주겠다는 말이냐? 또 줄 마음으로 왔는데 하는 꼴을 보고서 ‘에이, 안 준다’ 이런 것도 있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건 기회를 말하는 건데, 상대가 미워서 기회를 보고 있다가 이 상대가 무슨 말만 하면 한바탕 욕을 하려고 하는 것도 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가인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거다. 그러면 가인 속에 죄가 주격이 된 상태인데, 이런 상태인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면 다스릴 수 있는 거냐?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네가 할 탓이다’ 그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책임은 너에게 있다’ 그 말이다. 죄를 다스리고 안 다스리고가 누구에게 있다? 자기에게 있다는 거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고했다고 하는데,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했는데 내 마음이 왜 이렇지?’ 하는 걸 얘기한 것 같다. 이게 아니라면 뭐라고 고했겠느냐? 그리고 ‘그 후에’ 즉 이 말을 한 후에 동생을 죽인 것을 보니 가인이 동생에게 말은 한 후에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 같다.
가인이 동생과 들에 있을 때 동생을 쳐 죽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그림자가 여기서부터 나오는 거다. 악인이 의인을 죽인다는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모든 악과 선, 모든 의와 불의 이게 에덴동산에서부터 되어진 거다. ‘선악’이란 물질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보고 말하는 거다.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내가 내 아우를 내가 지키는 자니이까.’ 형이 동생을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느냐? 이게 무슨 말이냐? 믿는 자가 믿는 자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느냐 그 말이다.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동포가 동포를 지켜야지, 식구가 식구를 보호하고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느냐?
10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 아우의 핏소리가 호소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듣지 못하는 소리도 다 들으신다. 사건을 겪는 사람의 마음의 소리도 들으신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겪을 때 마음에서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면서 눈물도 흘리고 고통스럽기도 한 게 있는데, 사건을 겪는 본인만 아니라 하나님도 그것을 다 아시고 들으신다.
예수 믿는 자기에게 사건이 왔을 때 ‘이 사건이 무슨 뜻으로 나에게 왔지?’ 라고 하면서 세상기준이 먼저 나가면 세상 사람들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먼저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게 되고 자기의 위치를 믿음에 세우게 된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죄를 지으면 자기 마음 속으로 하는 소리가 있는 건데 이걸 무시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면 이건 더 악한 거다. 여기에는 용서가 없다. 지금도 보면 이런 일이 세상 법정 앞에서 참으로 많다. 왜 그렇게 변명이 많은지?
11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그 입을 벌려’ 라고 하는 것은 무덤을 말한다. 땅이 아우의 피를 받았다는 거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동족의 피를 흘리면 저주를 받는다.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하나님을 떠난 말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까 저주가 죄 지은 자기를 항상 따르는 거다.
12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밭을 갈아도 생산이 없다. ‘이 땅에서는 농사가 잘 될까?’ 하고 밭을 갈아도 생산이 없다. 열매가 없다. 그러니 땅에서 계속 유리하게 된다. 정착이 없고 정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놓으면 그 사람의 마음은 정착이 안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회개가 되면 좋겠는데 회개가 안 된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면 마음이 정착이 되고 은혜를 받는 건데 회개가 되지를 않으니 인간에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고 가는 곳곳마다에서 저주를 받게 되는 거다. 지금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거다. 정착이 없다. 창조의 목적에 정착이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것이 죄 지은 사람의 심적 작용이다. 죄벌이 너무 중해서 심적으로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미쳐버린다는 거다.
14절: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서 자기 걱정을 하고 있다. 그 말인즉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면 죽일까봐 사람이 두렵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보면 ‘저 놈은 동생을 죽인 놈이다. 저런 놈은 죽여 버려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며 자기를 죽일 거라는 거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표를 줬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표를 줄 때는 얼굴에 줘야지 다른 곳에 주면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일 게 아니냐? 그렇다면 가인의 인상을 험악해서 만들어서 이걸 보는 사람들이 가인에게서 도망을 가게 한 건가? 이것보다는 가인이 동생을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이 가인을 피하게 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새김질을 하면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을 거스리니 자기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며 서로 덮어씌우게 되었고, 이렇게 되니 그 영향을 받은 자식이 동생을 죽이는 일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 저주 받고 생명권 밖으로, 진리 생명권 은혜권 사랑권 밖으로 쫓겨나는구나. 이게 지금의 우리에게도 다 해당이 되는 거다.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은혜를 받지 못한 마음으로 드리게 되니 시험에 들게 되고, 이로 인해 믿음 있는 동생을 광야에서 죽이는구나. 이건 생명사냥이다.
가인은 광야에서 자기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이 일을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지만 이걸 누가 보셨느냐?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께서 아시고 가인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못 받으면 얼굴이 달라진다. 변색이 된다. 마음이 달라진다. 남 죽이는 일을 하게 된다. 사랑의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미워한다 그 말이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자칫 잘못해서 인간기준을 두고 말을 하면 듣는 사람도 인간기준으로 듣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들을 때 한 사람이 말을 하던, 여러 사람이 말을 하던, 종교인들이 말을 하던,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말을 하던 항상 하나님의 기준을 염두에 두고 들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 앞에 옳은 거다. 안 그러면 무리화 되어 돌아가게 되고, 잘못된 생각이 이리 저리 꼬리를 물게 되고, ‘이랬다네, 저랬다네’ 하게 된다. 이건 시험에 들 생각이고 옳지 못한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해도 항상 하나님 기준, 구원기준이라야 한다. 인간끼리 아무리 친해도 구원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 좋던 밉던, 어찌 생겼던 하나님 앞에 복음으로 생각하는 게 옳다. 의로운 생각이다.
5장.
1절: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 창조성이 하나님의 형상대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지으심에는 키다리도 만들었고, 난쟁이도 만들었고, 뚱뚱한 사람도 있고, 야윈 사람도 있고, 얼굴도 가지각색인데, 하나님께서 지어놓고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는데, 나무나 꽃이나 동물이나 새들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놓고도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거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양새가 어떻게 생겼든지 누가 지으신 거냐?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지어놓고 ‘보시기에 좋았다라’ 라고 하신 거다. 따라서 인간들이 사람을 각각 진선미로 구분을 하면서 ‘누구는 더 예쁘고 누구는 덜 예쁘고’ 하는 건 죄 된 소리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보고 ‘참 예쁘다. 곱다’ 라고 해야 한다. 이게 아닌 자기 기준에서 사람의 외모나 껍데기를 보고 상대를 택했다면 사는 동안에 얼마나 고통일까? 그래서 교인들끼리 결혼을 하더라도 각자가 사람을 보는 눈이 열림을 받아서 선택을 해야 옳다. 남자던 여자던 상대를 택할 때는 반드시 진리를 가진 쪽으로 와야 한다. 이게 아브라함의 며느리고, 그리고 룻이다. 룻의 기업이 어디에 있었느냐? 진리를 가진 보아스 집에 있었다. 이 보아스는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를 자였다. 그래서 룻이 이 보아스를 택했다.
2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의 마음은 저주가 아니라 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을 시집장가 보내면서 복을 비는 마음이 있다. 결혼을 시킨 그날부터 ‘빌어먹어라’ 하는 부모는 없다. 부모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3절: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러니까 아담이 가인을 몇 살 때 낳은 것 같으냐? 그리고 셋을 일백삼십 세에 낳았는데 요즘 나이라면 죽었을 나이에 셋을 나은 거다.
6절-14절: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오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 세에 아기를 낳았는데 아담은 일백삼십 세에 첫 아기를 낳았다. 이 때는 홍수 전이기 때문에 아직 죄악이 관영하기 전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정신도 건전하고, 몸도 생리적으로 많은 나이임에도 얼마든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전자파니 뭐니 하는 것도 있고, 음식도 공기도 전부 오염이 되었고, 정신 면도 바르지 못하니 젊은 사람일지라도 2세가 생기면 큰일 나겠다는 느낌이 든다. 이게 다 죄로 인한 거다.
4:26절로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했으니까 5장에서 장수를 한 셋의 후손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5장 23절에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 했는데, 이 노아가 20대 때 결혼을 했으나 자식이 없다가 거의 오백 세가 될 때 자식을 낳기 시작한 건가? 어쨌든 이들 역시도 셋의 후손으로서 믿음의 자식들이다.
6장.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셋의 후손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런데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라고 했는데, 딸을 낳으면 얼마나 귀엽느냐? 그런데 여기서는 좋은 의미가 아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들은 믿음 있는 셋의 후손들인데도 자기 누림성으로 살았다는 거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소원 목적하는 것을 취했다는 말이다. 사람을 취할 때도 육모의 미모성을 따라 취한 거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에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영의 눈으로 보면 신앙인들이 불신자들이 아름답고 좋다고 하는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영모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람의 영모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 사상 목적을 가지고 살면 성령님이 같이 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은 사람들이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선악과 쪽으로 기준이 돼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이런 자들과는 같이 할 수가 없는 거다. 이 말은 그 전까지는 성령님께서 같이 했지만 지금의 이 사람들에게는 노아 외에는 가인의 사상이 들어와서 세상정신으로 살았다는 거다.
벧전3:19-20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라고 하는 구절을 들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사흘 동안 노아시대에 심판받아 죽은 자들에게 가서 전도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이단소리고 미신 우상을 섬기는 식이다. 즉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는 사상과 통하는 거다.
4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이란 육체가 아주 큰 장사를 말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즉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들이 용사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걸 영적 활동적으로 보면 오늘날 교회가 물질적인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여서 물질로 큰 업적을 남겨놓는다는 말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 큰 예배당을 누가 지었느냐?’ ‘아, 이 건물은 아무개 목사가 지었다.’ ‘이 큰 교회의 교인이 몇 명이냐?’ ‘아, 이 교회의 교인은 몇 명이다’ 라고 하면서 그 교회 목사를 높이는 걸 말한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이 육체가 된 것을 말하는 거다. 사람들의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을 말하는 거다.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람을 지은 것이 실수라는 말이냐? 즉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인간을 지었는데 가만 보니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물들고 하니까 ‘아차, 내가 지은 인간들이 저렇게 죄를 지을 줄 몰랐구나. 내가 괜히 인간을 지었구나’ 이 말이냐?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를 당신의 피로 샀으니 우리는 주님의 것인데, 이 교회들이 그만 자기 자유를 가지고 세상문물에 대한 것을 소원 목적하고 마음과 정신이 다 그 쪽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악한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행동을 가지고 ‘악하다. 선하다’ 라고 하지만 믿는 우리는 행동 이전에 ‘정신과 소원 목적과 마음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악하다. 선하다’ 라고 하는 거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노아가 볼 때는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것이기 때문에 히:에 있듯이 노아가 그들에게 전도를 하게 되는 거다.
9절: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것은 노아가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데 비해 이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면에서의 말이다.
10절: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해서 낳은 아들이 셈 함 야벳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이 아들들도 노아와 함께 방주를 짓게 된다. 그리고 노아의 며느리들도 방주를 지을 목적으로 시집을 온 거다.
11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현 현상과 같다.
12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건 그 때만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서 심판을 하신다는 건데, 우리는 세상의 죄악성을 보면서 불신세상은 모르는 교회 안의 죄를 봐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방주를 말씀의 이치대로 지을 수 있다. 우리가 이룰구원을 이루는 게 믿음의 방주다. 이룰구원은 하나님의 설계의 치수대로 사상대로 이치대로 짓는 거다.
14절: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방주 안을 간들로 막으라고 했는데, 이는 뒤에 보면 짐승들을 구별해서 각 간에 넣기 위해서다. 만일 방주 안을 간으로 막지 않고 모든 짐승들을 한꺼번에 방주 안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코끼리와 병아리와 쥐와 누에를 한 곳에 같이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했는데, 이 잣나무는 물을 잘 안 타고 단단하다.
15절-16절: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문을 왜 상 중 하 삼층으로 내라고 한 걸까? 짐승들 중에 키가 제일 큰 게 뭘까? 기린이다. 이 기린은 삼층으로 된 문 쪽에 놔야 할 거다.
17절-20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방주 안에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넣으라고 했는데, 모든 생물을 이 방주에 다 넣을 수 있을까? 방주의 크기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성경에는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되어있다. 더더군다나 방주에 들어있는 생물들이 방주 안에서 40일 동안 먹을 식량까지 방주 안에 넣는다면 어떻게 모든 생물을 방주에 넣겠느냐? 그러니까 성경은 다 비유이니 인간의 생각으로 보고 깨닫는 게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신앙 면으로 생각을 하고 영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거다.
베드로에게 네 귀퉁이 보자기 같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음성이 들리기를 이 보자기 안에 땅 위의 각종 기는 짐승이 다 들어있다고 했다. 그러면 땅의 기는 모든 짐승이 보자기 안에 다 들어가려면 그 보자기가 얼마나 커야 하겠느냐? 세상에 이런 보자기는 없다. 그렇지만 신앙의 보자기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다. 이게 신앙 정신세계의 범위성이다. 이런 것은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것이라서 불신세계에서는 감을 못 잡는다. 우리는 신앙의 세계에서 이런 감을 잡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표현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가슴 속에 들어있고, 이성은 머릿속에 들어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의 가슴은 하늘보다 더 크고 높으냐? 이런 것은 사람만 생각할 수 있는 거다. 짐승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거다. 더더군다나 영적인 면은 예수 믿는 사람만이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지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봐라. 그래서 인간 자기 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있는 게 아니냐? 우리가 이런 존재다.
21절-22절: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을 했는데, 고집 센 염소를 방주에 집어넣으려고 할 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리고 짐승들 중에 뱀이 제일 간교했다고 했는데 방주 속에 들어간 뱀이 아담 하와를 속인 그 뱀의 후손일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