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기억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는 것
앞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막막함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다시 기억을 떠올려본다.
걷기만 해도 땀이 흐르던 날,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흘러내리던 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갑작스레 인생에 회의감을 느꼈다. 과거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마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자 그것은 거침없이 커져만 갔다. 울려퍼지는 내 심장소리에 맞춰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내 삶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고. 하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남겨진 것은 고작 초등학교 때 반강제로 쓴 일기장 한권 뿐이었다.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는 말을 그땐 깨닫지 못했다. 안일한 자존심만이 전부였다. 그 결과 내겐 현재라는 시간만 남았다.
아무리 좋은 경험을 했더라도,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 순간은 사라진다. 언젠간 사라질걸 알면서도 느슨한 척 넘겨버리며 지내왔던 나날들이 모여 현재와 과거를 끊어버렸다. 흐릿하고 어두워져가는 기억들만이 내 존재를 비추어주었다. 기억들, 나빴던 좋았던 지난 추억과 감정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려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늦더라도, 조금 느리더라도 모자란 법은 없기에, 나의 이야기는 열아홉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