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촌선생집 서(象村先生集序) 張維
내가 젊었을 때 서적 가운데서 옛 명인 거공(名人鉅公)들의 사적을 두루 열람하였는바, 그 가운데 재상 지위에 처하여 공명(功名)이 역사에 드러나기로 당(唐) 나라 때의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ㆍ요숭(姚崇)ㆍ송경(宋璟)과 송(宋) 나라 때의 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여이간(呂夷簡)ㆍ범중엄(范仲淹) 같은 이들이야말로 어찌 탁월하고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문사(文詞)의 광채는 겨우 한 시대에만 스스로 드러나기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직 장곡강(張曲江 당나라 장구령(張九齡)의 호)ㆍ육경여(陸敬輿 당나라 육지(陸贄)의 자)ㆍ구양수(毆陽脩)ㆍ사마광(司馬光) 등 제공은 몸이 재상 지위에 있어 천하 창생들의 인망을 받으면서도 문장의 훌륭하기가 또한 문단(文壇)에 광휘를 발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백대를 통틀어 이런 이가 겨우 몇몇 사람 밖에 없으니, 어쩌면 그리도 적막한가. 하늘이 인재를 탄생시키기가 실로 어려워서 혹자에게는 경제(經濟)의 재주를 내리고 혹자에게는 문사(文詞)의 재주를 내리는 것이니, 능히 두 가지를 겸해서 소유하여 다 훌륭하게 하기란 대체로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 동방의 문학이 중하(中夏)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능했던 이들이 이따금 높은 지위에서 많이 나왔는데, 고려 시대의 이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ㆍ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ㆍ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의 호) 및 우리 조선조의 고령(高靈)ㆍ덕수(德水)ㆍ상령(商嶺) 등 5, 6인은 모두 국사를 주관하여 임금을 도와 백성을 공평하고 밝게 다스리면서도 사단(詞壇)의 맹주(盟主)까지 겸함으로써 그분들의 유풍 여향(遺風餘香)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쳐주고 있으니, 비록 그분들 가운데서도 그 치우치거나 온전하거나 고아하거나 저속함에 대해서는 각각 거론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나, 요컨대 모두가 거의 영원히 전할 만하다 하겠다.
인재를 길러낸 효험이 선묘(宣廟) 때가 가장 성대하여 상촌(象村) 신공(申公)이 바로 이때에 나왔다. 공은 당초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서 겨우 15세 때에 고서(古書)를 널리 섭렵하였고, 약관의 나이로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 현달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조신(朝臣)들의 영수가 되었다. 그런데 중년에 비운을 만나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전리(田里)에서 곤욕을 겪기도 하고 강가에 유배되어 몸이 초췌해지기도 하면서 문장이 더욱 성취되고 덕망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다가 늦게야 중흥 시대를 만나서 으뜸으로 총탁(寵擢)을 입어 대제학ㆍ이조 판서를 거쳐 재상에 이르렀다. 이어서 갑자년(1624, 인조 2)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1627, 인조5)의 호란이 일어나자 공이 몸과 마음을 다해 이를 두루 다스리면서 위로는 임금의 계책을 협찬하고 아래로는 뭇사람의 책략을 수합하여, 끝내 흉적을 주멸하고 환란을 지식시켜 재차 나라의 운명을 안정되게 하였으니, 공은 비록 스스로 그 공훈을 과시하지 않을지라도 재상의 업적을 담론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이를 공의 앞에 꼽을 수 없을 것이다.
공이 문사에 대해서는 천부의 재능을 타고나서, 조정에 있을 때에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이것은 꽤 많이 산실되었다. 그리고 계축년 이후로는 10여 년 이상을 곤궁하게 지내면서 마침내 정신을 오로지하고 깊이 연구하여 천고(千古)를 오르내리어 성대히 일가(一家)의 학설을 이루었다.
공이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한 가지 격식만을 주로 삼지 않아서, 대체로 당인(唐人)에서 나왔으되 중당(中唐)ㆍ만당(晩唐)으로부터 성송(盛宋) 시대 제자(諸子)들의 격식까지를 섞어 취하였는데, 거개가 화려한 것은 버리고 골자만을 취하였다. 오직 고악부(古樂府)는 옛날 융성했던 한(漢)ㆍ위(魏)로부터 수(隋)ㆍ당(唐) 시대의 악부까지를 모두 다 재량한 결과 이따금 옛 것과 아주 비슷한 것도 있어, 세인들이 이미 신라ㆍ고려 시대에도 없었던 것이라고 평론하고 있으니, 이는 곧 전대의 명가(名家)들도 대부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인데 공은 여유작작하게 해낸 것이다.
고문사(古文詞)는 힘차고 뛰어나며 광채가 현란하여 때로는 혹 명(明) 나라의 여러 대가(大家)들을 쫓아가서 자못 그들과 서로 힘을 겨루고 앞을 다투려는 기상이 있기도 하다. 내편(內篇)ㆍ외편(外篇)은, 혹은 도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혹은 당세에 할 일들을 분석하여 설명해 놓았는데, 깊은 조예로 혼자만이 터득한 견해가 많았다. 그리고 선천규관(先天窺管) 1편의 경우는 대체로 소씨(邵氏 소옹(邵雍)을 가리킴)의 문에 들어가 방의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 본 경지이니, 문자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공명과 언론 두 가지를 겸해서 수립할 수 없고 시와 문 두 가지를 다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예로부터 모두 그렇게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 공은 쇠퇴한 세상에 나서 학업을 쌓아 우뚝하게 수립한 것이 있어, 논리(論理)는 사림의 표준이 되고 지위와 명망은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었는데, 게다가 시에 대한 명성과 문의 법도는 각각 문단을 주름잡았고, 깊은 학식과 오묘한 논설은 곧장 도리를 탐득한 것이었으니, 전대의 현인들도 완전히 하지 못했던 것을 공은 완전히 갖추었고, 제가(諸家)들이 한 가지씩만 이루었던 것을 공은 겸하여 이룬 것이다. 그러니 공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완전한 재주를 지닌 뛰어난 인품으로 백대를 고시(高視)한다.’는 그런 이가 아니겠는가.
공이 작고하자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공의 큰아들 동양공(東陽公)이 공의 여러 가지 초고(草稿) 63권을 합하여 간행하려고 나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명하였다. 나는 어려서 미련하였는데, 공이 내 선인(先人) 때문에 욕되게 나를 받아들여 가르쳐 주었으므로, 공의 감화를 받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공이 유배되어 있을 적에는 내가 일찍이 공을 위해 여암기(旅庵記)를 지었고, 공이 60세가 되었을 적에는 내가 또 글을 지어 공에게 헌수하였었다. 그래서 공의 평생 사적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 그 대강을 조금 안다고 여기므로, 지금 공의 문집에 서문 쓰는 일을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지 못하는 바이니, 작고한 공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또한 공의 뜻에 맞을는지 모르겠다. 아. 숭정기사년(1629, 인조7) 윤4월에 분충찬모 입기정사공신(奮忠贊謀立紀靖社功臣) 자헌대부 행 사헌부 대사헌 겸 홍문관 대제학ㆍ예문관 대제학ㆍ지성균관사ㆍ동지경연관사ㆍ동지춘추관사ㆍ세자우부빈객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는 삼가 서(序)한다.
[주1] 고령(高靈) …… 상령(商嶺) : 고령은 본관이 고령인 신숙주(申叔舟)를 가리키고, 덕수(德水)는 역시 본관이 덕수인 이행(李荇)을 가리키키며, 상령은 상주(尙州)의 고호로서 본관이 상주인 김귀영(金貴榮)을 가리킨다.
[주2] 고시(高視) : 높은 곳을 쳐다봄. 또는 높은 데서 내려다 본다는 뜻이기도 한데, 즉 기상이 비범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象村先生集序[張維]
維少從載籍中。歷觀古之名人鉅公。處宰輔之地。功名著於春秋。若唐之房杜姚宋。宋之韓富呂范。詎不卓犖閎偉哉。乃其詞華文采。厪足以自見於一時而已。唯張曲江陸敬輿歐陽司馬諸公。身都廊廟。佩天下蒼生之望。而文章之美。燀赫藝苑。蓋歷百伐而厪有若而人。何其寥寥也。天之降材實難。或命以經濟。或界以文詞。其能兼有而盡美者。蓋益難矣。我東文學。不如中夏固也。然其能者。往往多出於顯位。若麗之李文順益齋牧隱及我朝之高靈德水商嶺五六公。皆斡鼎軸贊辨章。而兼主詞壇之盟。殘膏賸馥。沾丐至今。雖其偏全雅俗。各有可議。要之皆庶幾不朽哉。作人之效。莫盛於宣廟。而故相象村申公出焉。公生稟絶異之才。甫成童。博綜墳典。弱冠釋褐。歷敭華膴。爲薦紳領袖。中遘否運。厄於縲絏。困於田里。瘁於江潭。而文章益成。德譽益尊。晩際中興。首膺寵擢。握文衡掌統均。以至大拜。繼而有甲子丁卯之變。公彌綸盡瘁。上贊睿謨。下收群策。卒能夷兇弭難。再奠國步。則公雖不自尸其功。而譚相業者。指故無得先公屈也。公於文詞。蓋得之天授。其在朝時。著述甚富而頗放失。自癸丑來。居困處約者踰十稔。遂專精覃思。上下千古。蔚然成一家言。其爲詩。不主一格。大抵出於唐人而雜取中晩。以及盛宋諸子。擧皆割榮而攘羭焉。唯古樂府。自隆古漢魏以至隋唐。無不擬議。往往有酷肖者已。論羅麗所未有。卽前代名家多所未遑。而公爲之綽然有餘地。古文詞遒逸俊發。光芒絢爛。時或步驟皇明諸大家。殆欲與之角壯而爭驅。內外篇。或譚道妙。或析世務。多精詣獨到之見。至先天窺管一編。蓋入邵氏之門而窺其宎奧。非可以文字論也。夫功言之不能兼樹 也。詩文之不能兩至也。自古昔以然。而公身生衰季。種學居業。卓然有立。名理爲士林之標準。位望繫國家之安危。而詩聲文軌。各擅詞場。邃識微言。直探理窟。往喆之所未全。公則備焉。諸家之所偏造。公則兼焉。若公非所謂全才大雅高視百代者耶。公沒旣葬。胤子東陽公合公諸稿六十三卷而鋟行之。命維爲之序。維少而顓蒙。公以先人之故。辱進而敎之。得於薰染者多矣。公之在謫。維嘗爲公記旅庵。及公旣耆。維又爲文以壽公。其於公之生平。自謂粗得梗槪。今而序公之集。不敢以不文辭。九原可作。無 亦有以當公意否。噫。崇禎己巳閏四月。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資憲大夫,行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新豐君張維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