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 선생(重峯先生)을 개장(改葬)하고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는 통문(通文) 병자년 9월
적이 생각건대 군자(君子)가 한 일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 때문에 그가 남긴 교훈과 여운은 세상이 바뀌어도 가시지 않는다. 그가 살았을 땐 영광이요 죽고 나면 슬프니, 추모의 제사를 올려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혹시 불행하게도 사정이 남다르거나 형세상 불편한 점이 있어 장지를 옮겨야 한다거나 사우에 손댈 일이 있으면, 그의 유덕을 사모하는 무리들이 돌보고 돕고 하는 일 역시 당연한 것으로 옛사람이나 새사람에 관계 없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힘을 다 써야 할 것이다.
생각하면 선생은 높고 깊은 도덕으로 보거나 남달리 특이한 사업으로 보거나, 어느 한 가지만을 딱 들어 말할 수 없는 그야말로 백세지사(百世之師)이다. 살아서는 비록 그 포부를 한 시대에 펴보이지 못했으나 죽어서는 후세에 도의를 붙들어 세웠으니, 군자는 그를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고 나약한 자는 그의 영향으로 입지(立志)를 하고 있다. 심지어 성상까지도 선생을 존경하고 신임하여 사랑의 은전을 내렸으니, 그의 영역(塋域)임을 표하여 그의 교육적인 면을 들추어내고 영원히 혈식(血食)을 하게 하면서 액호(額號)까지 내림으로써 후인들로 하여금 이것이 누구의 묘역이요 누구의 사우임을 알게 하여 모두가 다 경의를 일으키고 감회에 젖도록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큰 군자라면 그 유택이 당시 사람들의 몸에만 배어든 것이 아니라 멀고 가까움에 관계 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그 당시는 너무도 어수선해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산도 남의 산인 데다 자리마저 좋지 못하였으니, 한 조각 낮은 산기슭이 영령을 편안히 잠들게 하고 후손들을 복되게 할 곳은 못 되었다. 게다가 지대까지 궁벽하고 인적도 드물기 때문에 봄가을의 묘향(墓享) 때면 언제나 사람이 모자랐으니, 오르내리며 예를 치르는 과정에 너무 구간(苟簡)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우리 임금께서 충절을 포양하신 곳을 조금이라도 쓸쓸한 감이 들지 않도록 하지 못했다. 이는 사문(斯文)으로서 하나의 큰 흠이 아닐 수 없고 선생의 자손들로서도 대단히 민망한 일이기에, 묘소 옮길 것을 두고두고 계획한 끝에 이번에 사우까지 함께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본가는 힘이 약해 그 일을 다 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 몸에 천성을 지니고 선생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일을 자손들에게만 맡겨 두고 나몰라라 해서야 될 일이겠는가. 더구나 호서(湖西) 사람들이라면 선생에게서 받은 혜택이 그 얼마인가. 나를 낳으신 이가 부모라면 나를 살린 이는 선생이라는 것을 그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다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니 지금까지도 모든 것이 다 선생의 힘을 입고 있으니, 만약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다들 재난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의 이 일을 서로 도와 끝까지 잘 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일이요 또 우리 책임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처음 장지는 옥천(沃川) 안읍현(安邑縣)이었는데, 이번에 옮겨 모실 곳은 같은 군내의 멀지 않은 곳이다. 이장 날짜는 11월 20일이고, 구묘는 같은 달 3일에 파묘하기로 했다. 각기 그때를 맞추어 추모의 정성을 편다는 의미에서 혹은 물력으로 돕기도 하고 혹은 이장할 때 참례하기도 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을 통해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 도(道)이니, 그 사람은 갔어도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도인 것이고, 도를 지녔음을 알고 그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도이다. 도가 하늘이라면 사람은 바로 도이다. 이러한 도는 단 하루도 없을 수가 없으니,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아, 상사(喪事)는 뒤로 물릴 수가 없는 것이고, 선정(先正)은 오래될수록 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아, 우리 도를 지키고 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여, 이 일을 서두를 자가 왜 없겠는가. 우리 서로 노력하세나.
重峯先生改葬祠宇移建通文 丙子九月
竊以君子之道入人者深。故流風餘韻歷世而不斬。 其生榮死哀。俎豆而尊尙之者。固其宜也。若或不幸而事異於常。勢有不便。衣履之藏將遷。尸祝之所隨改。則凡慕義醉德之徒所以顧護而輔相之者。亦宜盡其力之所至。顧何間於新舊也哉。仰惟先生道德之隆深。事業之超卓。眞所謂百世之師。而非可以一節名也。生而雖不能展布於一時。死而終有所扶樹於後世。君子而仰高山。懦夫而有立志。以至聖上敬信。寵典有加。表厥塋域而樹之風聲。血食永世而錫以額號。俾後人咸知某之墓某之祠。作起敬興感之地。夫然後益信大君子餘澤。不但淪浹於時人。而邇可遠者在茲也。顧以當時搶攘。葬具有闕。寄托他山。宅兆不利。一片短麓。未可爲妥靈裕後計也。兼以地居僻奧。人士罕接。春秋廟享。每患乏人。登降揖遜。未免有苟簡之歎。使吾君褒忠之盛。擧不能無萬分一落莫之意。豈非斯文之一大欠。而後嗣之所切悶者乎。此改厝之計。久而後決。欲幷祠宇而移建者也。然而本家力綿。不可以爲悅。凡有秉彝之天而不外於先生之道者。其可任其後嗣而莫爲之所乎。況湖西士民。受惠爲如何。生我者父母。活我者先生。乃祖乃父。旣見而知之矣。曁乎今秋毫皆先生力。微先生吾知其魚矣。若克相玆役。與終始成就者。詎非吾黨事也耶。吾黨責也歟。先生初葬沃川安邑縣。今改卜于同郡不遠地。十一月二十日。是葬吉也。啓舊墓則同月初三日也。趁此從事。以伸傾慕之誠。或出力相救。或臨時會葬。不勝幸甚。寓於人而行於世者。道也。人已亡而使之不忘者。亦道也。知有道而欲衛之者。亦無非道也。道是天也。人卽道也。道何嘗一日無也。惟在人衛之如何耳。嗚呼。喪事有進而無退。先正愈久而難諼。嗟我衛道嚮德之士。寧無爲之急者。尙亦勉之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