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선생집 서(澤堂先生集序)
우리 동방에 있어 문헌(文獻)의 성대함으로 말하면 본조(本朝)와 같은 때가 없었다. 굉유(宏儒)와 석사(碩士)들이 계속 줄을 잇고 나오면서, 그들의 시문을 담은 문집이 모두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졌으니, 이를 모두 합친다면 장차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의리가 정밀하고 논의가 정대하여, 사문(斯文)의 발전을 돕고 세도(世道)가 올바르게 되도록 이끌어 준 것을 찾는다면, 아직까지 택당공(澤堂公)의 문고(文稿)와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대체로 듣건대, 공은 유년 시절부터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비롯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전서(全書) 및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에 전심(專心)하는 한편, 틈이 나는 대로 제가(諸家)의 설을 두루 섭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이 박통(博通)한 지식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공의 주안점(主眼點)이 다시 《주자어류(朱子語類)》쪽으로 향해졌다. 그리하여 그 속에 들어가서 온 정력을 쏟은 결과,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성대한 광경을 모두 살펴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저울이나 잣대처럼 표준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이 비록 제가(諸家)의 설을 섭렵하여 지식을 넓혀 왔다 하더라도, 가려 뽑는 것이 정밀하였고 분변(分辨)하는 것이 상세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문장으로 표현된 것 모두가 의리와 관계된 내용 아닌 것이 없었으니, 화려하게 꾸미려고만 하여 얽어낸 것들과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것이 바로 공이 평생토록 공력을 쏟은 부분이요, 또한 실제로 결실을 맺은 분야라고 하겠다. 그리고 내가 또 언젠가 공의 문고(文稿) 전질(全帙)을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아이에게 보여 준다.[示兒]’는 글 한 편을 통해서도, 공의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점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가 있었다.
공의 계자(季子 막내아들)인 단하(端夏) 계주(季周 이단하의 자(字)임)와는 내가 두터운 정의(情誼)를 맺고 지내는 사이인데, 어째서 공의 문고를 간행하여 세상에 유행되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아, 그것은 선인(先人)의 유계(遺戒) 때문이다. 선인께서는 일찍이 당신의 문고를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세상에 전해서 후세에까지 보여 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상자 속에서 꺼내지 말고 그저 자손들을 위해 간수하라고만 하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를 통해서도 공을 또 알 수가 있겠다. 대체로 사람들이 전체(全體)나 대체(大體)를 보지 못하게 되면, 그 한 부분에만 집착하여 우쭐대고 뻐기면서, ‘그것은 이런 것일 뿐이다.’라고 단정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키나 공이를 손으로 더듬어 보고는 코끼리라고 하는 것[暗中手摸箕杵爲象]과도 같으니, 애처로울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 공으로 말하면, 이미 주자(朱子)의 글 속에서 그 흐름에 몸을 잠그고 그 물결과 함께 노닐었으니, 그야말로 바다 구경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식견이 더욱 커지고 그 체험이 더욱 깊어졌을 텐데도 그 마음은 더욱더 겸손해지기만 하였으니, 공을 알 수 있는 것이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한편 생각건대, 정주(程朱) 이후로는 의리가 크게 밝아져서, 크게는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깊은 것으로부터 작게는 잠사(蠶絲)와 우모(牛毛)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고 보면, 이단(異端) 사설(邪說)이 또한 종식될 법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조(皇朝 명(明) 나라) 이후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과 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 같은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개구리처럼 울어 대면서 각자 사람들을 현혹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서책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의리는 더더욱 어두워지기만 하였으니, 산릉(山陵) 위에까지 범람하는 흉용(洶涌)한 홍수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택당공의 의논과 문장이야 어찌 오늘날은 물론이요 후세에까지 끝내 전해지지 않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편집에 착수하여 집성(集成)해 보니 모두 34편(編)이 되었다.
그중에 시문(詩文) 10편과 속집(續集)의 시 4편은 모두 공 자신이 추려 놓은 것으로서 대략 표리정조(表裏精粗)의 구별이 되어 있고, 여기에 또 시 2편은 정축년(1637, 인조 15) 이후에 지은 것으로서 문곡(文谷) 김상공 수항(金相公壽恒)이 가려 놓은 것이다. 이밖에 별집(別集)의 글 18편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내가 남아 있는 원고를 정리하여 계속해서 수록해 넣은 것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공에게는 이보다도 더 큰 업적이 있다. 공은 일찍부터 나라의 역사가 잘못 기술되는 데 대해 가슴 아파하였다. 당론(黨論)이 형성된 이후로 사필(史筆)을 잡은 자들이 각자 자기 편에 유리하게 기록을 하는 바람에 사오십 년 동안에 공정하게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없었는데, 급기야 기자헌(奇自獻)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남몰래 옛날 기록을 삭제하고서 제멋대로 무필(誣筆)을 가하는 데에 이르렀고 보면, 더더욱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게 되었다.
이에 공이 인조조(仁祖朝)에 차자(箚子)을 올려 다시 정리할 것을 건의하자, 조정에서 마침내 그 일을 공에게 위촉하였는데, 공 역시 지죄(知罪)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선묘(宣廟 선조(宣祖)) 초년부터 시작해서 정결한 마음가짐으로 촬요(撮要)하고 산정(刪定)하여 일에 맞게 알찬 내용으로 다시 편찬을 하였으니, 그 대공지정(大公至正)한 기록에 대해서는 귀신(鬼神)에게 질정(質正)을 해도 좋을 것이다.
대체로 공은 당론(黨論)이 일어난 뒤에 태어났으면서도, 항상 대과(大過)의 “독자적인 신념을 확립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獨立不懼]”는 정신을 견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쓸 것을 쓰고 지울 것을 지울 즈음에 편벽되거나 삿된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공이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공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의리 정신이 밝고 마음이 공명정대한 군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공은 분명히 후세에 자운(子雲 한 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임)이나 요부(堯夫 송 나라 소옹(邵雍)의 자임)처럼 알아줄 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이에 대한 말을 함께 기록해 두는 바이다.
문집의 간행은 전라도 관찰사인 이공 동직(李公東稷)이 도맡아 주관하였는데, 가제(家弟)인 시걸(時杰)이 남평(南平)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또한 도왔다고 한다.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알봉(閼逢) 섭제격(攝堤格) 양월(陽月) 모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은 서(序)한다.
* 굉유(宏儒) : 뭇사람의 존경(尊敬)을 받는 이름난 유학자(儒學者).
석사(碩士) : 벼슬이 없는 선비를 높여 이르던 말.
[주1] 한우충동(汗牛充棟) : 집안에 쌓아 두면 들보에까지 가득 차고, 수레에 실으면 우마(牛馬)가 땀을 뻘뻘 흘린다는 뜻으로, 책이 엄청나게 많다는 말이다.
[주2] 성리대전(性理大典) : 명(明) 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들어 주돈이(周敦頤)ㆍ장재(張載)ㆍ주희(朱熹) 등 여러 성리학자의 설을 집록(集錄)한 70권의 책.
[주3] 주자어류(朱子語類) : 송(宋) 나라 여정덕(黎靖德)이 주자와 문인들과의 문답을 집성(集成)한 1백 40권의 책.
[주4] 종묘(宗廟)의 …… 되었다 : 유학(儒學) 그중에서도 특히 성리학(性理學)의 세계에 깊은 조예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공부자(孔夫子)의 담장은 그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볼 수가 없다.[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 하였다.
[주5] 어둠 속에서 …… 것 : 인도(印度)의 대왕이 코끼리를 데려와 맹인(盲人)들에게 만져 보게 하니, 귀를 만진 자는 키[箕]와 같다고 하고, 코를 만진 자는 공이[杵]와 같다고 했다는 불교의 이야기가 전한다. 《大般涅槃經 卷32》 본 원문의 기저(箕杵)와 상(象)의 위치를 서로 바꿔, ‘코끼리를 만져 보고는 키와 공이와 같다고 하는 것’으로 해야 뜻이 제대로 통할 듯하다.
[주6] 바다 …… 사람 : 견식(見識)이 광대한 자라는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는 웬만한 물은 되지 못한다.[觀於海者 難爲水]”라는 말이 있다.
[주7] 지죄(知罪) : 자신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이 평가하는 근거를 뜻하는 말이다. 공자가 “나를 알아주는 이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요, 나를 죄주는 이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孟子 滕文公下》
[주8] 독자적인 …… 않는다 :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 상사(象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9] 알봉(閼逢) …… 양월(陽月) : 고갑자(古甲子)에서 알봉은 갑(甲), 섭제격은 인(寅)으로, 갑인년 즉 숙종 즉위년(1674)을 가리킨다. 양월(陽月)은 10월을 가리키는 말로, 10월이 순음(純陰)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혐의하여 일부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澤堂先生集序[宋時烈]
我東文獻之盛。莫如本朝。宏儒碩士。步武相接。其篇章辭命。皆登梓傳布。摠而計之。則將至於充棟宇汗牛馬矣。然求其義理之精。論議之正。可以羽翼斯文。裨補世道者。則未有若澤堂公文稿者也。蓋聞公自幼專意於四子六經程朱全書性理大全等書。以其餘暇。泛濫諸家。博極無餘。然晩年所主。又在於朱子語類。入其中而盡其精力。悉見其宗廟之美百官之富。此旣爲在我之權衡尺度。故雖博極泛濫。而擇之也精。辨之也詳。而其發爲文章者。無非義理之實。而非藻繪纂組者之可比也。此其平生用力之地與收功之實也。余又嘗遍觀其全帙。而其示兒一編。尤信其源委之有在矣。公季子端夏季周。猥以事契相從矣。余問此稿何不剞劂而行於世耶。曰噫。此遺戒也。先人嘗自以爲不滿於意而不足以傳世而示後也。故使之不出巾笥。但爲子孫之守而已。余曰。此亦可以知公者也。夫人不見其全體大致。則得其一端沾沾自足。 便謂其如此而止已。此如暗中手摸箕杵爲象。是可哀已。今公旣於朱子書。涉其流而游其波。則眞所謂觀於海者也。是以其識見愈大。體驗愈深。而其意則愈謙。其可以知公者。實在於此矣。然程朱以後。義理大明。 大而天地高深。微而蠶牛絲毛。無不闡發。則詖辭異說。亦可以止矣。而自皇朝以後如陽明,白沙輩。蜂起蛙鳴。各自眩售。故書益多而理益晦。雖洪水懷襄。而其害蔑以加矣。然則公之議論文章。其可以終不傳於今與後
歟。遂編摩成帙。摠三十四編。其詩文十編。續集詩四編。則竝公所自選而略有精粗之別者也。又詩二編。則丁丑後所作。而文谷金相公壽恒所選也。別集文十八編。卽余就餘裔而所續選者也。抑公有大焉者。公嘗病國史自有黨論以來。載筆者。各任己私。四五十年之間。無公是非。而卒之奇自獻,李爾瞻陰削舊錄。肆加誣筆。則尤有所不忍言者矣。公於仁祖朝。上箚請加整理。朝廷遂以屬公。公亦自以爲知罪在此。起自宣廟之初年。梳洗要刪。事核而 辭實。大公至正。可質神鬼。蓋公生於黨論之後。常以大過之獨立不懼存心。故筆削之際。無一毫偏詖之辭。此公之最有功於斯世者。然非理明心公之君子。孰能知之。公必遇後世之子雲堯夫。故竝附見其說焉。文集之刊。全羅 按使李公東稷實尸之。而家弟時杰爲宰南平。亦相其役云。崇禎紀元之閼逢攝提格陽月 日。恩津宋時烈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