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강어大學講語 서문序文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중국의 경략(經略)인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동강(桐江) 송공 응창(宋公應昌)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오면서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인즉 자신의 막중(幕中)에 와서 함께 도학(道學)을 강론할 서연(書筵)의 강관(講官)으로서 문학(文學)하는 선비 두세 사람을 뽑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서(司書) 황신(黃愼)과 문학(文學) 유몽인(柳夢寅) 및 내가 모두 춘방(春坊)의 강관으로서 실로 이 선발에 들어서 가게 되었다. 경략은 우리를 매우 융숭하게 예우하였으며 군무(軍務)를 보는 여가에 하루 건너 우리와 접견하고 그때마다 《대학(大學)》의 뜻을 강론하였다. 중국에서는 당시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숭상하는 경향이 많았고 경략이 왕양명(王陽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터라 우리나라 학문의 경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략이 강론할 때마다 정자(程子)가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친 것은 잘못이라고 힘써 주장하였으며, 심지어 《대학》 한 편(編)의 대의(大義)가 모두 친민에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에 우리가 주자(朱子)와 육상산의 차이점을 극론(極論)하여 말하였더니, 경략이 우리에게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짓되 경(經) 1장(章)부터 전(傳) 10장에 이르기까지 장마다 《대학연의(大學衍義)》처럼 주(註)를 지으라고 하였다. 우리가 “우리나라는 정주(程朱)를 존숭하여 비록 처음 공부하는 어린아이들일지라도 다른 길로 가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대학》의 오묘한 뜻은 정자(程子)와 주자 두 부자(夫子)께서 이미 남김없이 밝혀서 정론(定論)을 세워 놓았으며 여타 선유(先儒)의 설들도 《집주(集註)》에 모두 실려 있으니, 이 밖에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인들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경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귀국(貴國)의 학문 경향이 그와 같다면 제공(諸公)은 굳이 종전에 해 오던 학문을 바꿀 필요는 없소. 다만 공부한 대로 설(說)을 지어 나의 강마(講磨)에 도움이 되도록 해 주면 될 것이오. 그렇지만 고루한 선비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말고,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써 따로 책 한 권을 짓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우리가 제1장에 대한 강어(講語)를 지어 바쳤더니, 경략이 손수 1편(篇)을 지어 종사참모관(從事參謀官)인 하간부 통판(河間府通判) 왕군영(王君榮)을 시켜서 받아 적어 보여 주게 하였다. 그 뒤에도 일이 바쁘면 언제나 통판(通判)을 시켜서 받아 적어 보여 주게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반드시 향교(鄕校)의 명륜당(明倫堂)에 모여서 주자와 왕양명 학설의 동이(同異)에 대해 토론하여 주고받은 설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문학 유공(柳公)은 지평(持平)에 제수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먼저 조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는 설서(說書)로 왔다가 사서(司書)로 승진되어 사서 황사숙(黃思叔 황신(黃愼))과 3월부터 9월까지 경략의 막하(幕下)에 함께 있었다.
경략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왔을 때 지은 각 장구(章句)에 따른 강어(講語)를 1부(部)의 책으로 간행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고 우리에게도 한 권씩 나누어 보내 주었는데, 정유년의 난리 때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원래의 초본(草本)으로 우연히 모아 두었던 원고 뭉치 속에서 발견하였으니, 또한 옛날에 쓴 것이다.
경략이 이 책을 중국 조정에 바치면서 우리 왕세자로 하여금 전라도와 경상도의 군무(軍務)를 맡게 해 달라고 청하여, 특사전칙권총절제순안(特賜專勅權摠節制巡按) 주유한(周維翰)이 감군 어사(監軍御史)로 우리나라에 왔다. 경략이 통군정(統軍亭)에서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우리 두 사람을 불러 감군 어사에게 말하기를, “성(姓)이 황씨(黃氏)이고 성이 이씨(李氏)인데, 모두 세자를 모시는 춘방(春坊)의 학사들입니다. 내가 경학(經學)을 토론하고 싶어서 초청해 막중에 와 있은 지 이제 일곱 달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감군 어사가 묻기를, “동국(東國)의 학문 경향이 어떠하오?” 하니, 경략이 “정주(程朱)를 존숭합니다.” 하였다. 이에 감군 어사가 “좋고 좋도다.” 하고는 연회를 마칠 즈음에 우리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동국이 부흥하는 것은 세자에게 달렸는데 세자가 어진 덕을 갖추는 것은 공들에게 달렸으니, 부디 힘쓰십시오.” 하였다. 경략이 또 차자(箚子)를 꺼내어 우리 두 사람에게 한 편씩 주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세자를 찬양하는 한편 명덕(明德)ㆍ친민(親民)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의 도를 가지고 세자를 보도(輔導)하기를 더욱 권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에 모두 세자께 아뢰었던 것이나 혹 산일(散逸)되어 징험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되어 그 전말을 대략 기록해 둔다.
[序]
癸巳春。天朝經略兵部左侍郞右僉都御史桐江宋公應昌。按節東來。移咨本國。令選書筵講官文學之士數三人。來候幕中。講論道學。司書黃愼,文學柳夢寅及余。皆以春坊講官。實膺是選而往。經略禮遇甚隆。軍務之暇。間日相接。輒講大學旨義。蓋天朝多尙陸氏之學。經略學於王陽明之門。欲觀我國學尙。每於講時。力詆程子以親民作新民之誤。至曰大學一篇大義。都在親民上。余等極陳朱,陸之辨。經略令余等製大學講語。自經一章至十章。逐章作註。如大學衍義。余等曰。我國尊尙程朱。雖新學少兒。絶無他岐。曾書妙旨。程朱兩夫子。講定發揮。靡有餘蘊。而先儒諸說。俱載集註。此外何敢贅一語云。則經略笑曰。貴國學尙如此。則諸公雖不必變易前學。但可從所學而著說。資我講劘耳。第不宜蹈襲固儒陳言腐語。以流出胸中者。別成一書爲當。余等製第一章講語以呈。則經略自製一篇。令從事參謀官河間府通判王君榮。書而示之。厥後多事。每令通判書示。到處必會於鄕校明倫堂。辨講異同。辭說甚多。未幾。文學柳公以持平承召先還。余始以說書來。陞拜司書。與黃司書思叔。同在幕下。自三月至九月。經略始渡鴨綠。所著逐章講語。經略刊刻爲一部書。送于行在。亦分送一件於余等。而丁酉之亂。淪失無存。此其原草也。偶於亂帙中見之。亦舊跡也。經略上本題請王世子經理全慶軍務。特賜專勑權摠節制巡按周維翰以監軍御史出來。經略會讌於統軍亭。招余兩人謂御史曰。姓黃姓李。俱是伴世子的春坊學士也。俺欲論經學。呼置幕中。今七朔矣。御史問東國學尙如何。經略曰。尊尙程朱。御史曰。也好也好。臨罷。執余等手曰。東國興復。在世子。世子賢德。在公等。千萬勉旃。經略又出箚付各一道於吾兩人。皆贊揚世子。而以明德親民齊家治國之道。益勉其導迪者也。其時俱已啓知。而或恐散軼無徵。略記顚末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