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 나무과 교목 쪽동백나무가 있다.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서~~ 꽃말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 자란다. 5월에 피며 향기가 그윽한 교목 꽃이다. 흰색 꽃으로 아카시아 꽃처럼 20여 송이 꽃이 모여 꽃줄기를 이루며 피는 꽃이다. 그래서 쪽동백이란 이름을 얻은 것 같다. 특히 계곡 주변에서 잘 자란다. 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잎과 꽃을 짓찧어서 계곡물에 풀어놓으면 물고기들이 뜬다. 성분이 물고기 아가미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생기는 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9월 열리는 종자는 기름을 짜서 여인들의 비누로 사용하거나 머리 기름으로 사용하였다. 여인과 관련된 교목이다.
꽃 집에 갈 일이 생겨 모처럼 들렀다. 화원 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사시사철 다 좋은 환경을 대할 수 있어 좋지만 특히 겨울철에 방문하는 것이 제일 좋다. 겨울 숲은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계절이다. 오로지 상록수 계열만 숨 쉬고 활엽수 둘은 깊은 동면에 자취를 감춘다. 그 자리를 눈 꽃이 대신하고 있다. 눈꽃은 빛의 영향으로 자취를 감추면서 주변을 질퍽거리고 만들고 풍경도 사라져 겨울의 본색으로 바로 돌아가기 때문에 계절의 향기가 없는 무미건조한 편이다. 그럴 즈음 화원을 찾는 일은 나도 모르게 생기를 재발견하며 봄을 기다리게 만들어 준다. 화분에 심어 놓은 동백꽃이 탐스럽게 피었고 제라늄도 각각 색으로 피어 시각적으로 활기를 찾으며 식물을 통해 생기를 얻고 꽃화분을 하나를 챙겨 나올 수 있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도 제라늄과 몇종류의 화초가 꽃을 피우고 있어 좋지만 꽃 온실을 통해 얻는 꽃기운과 식물을 통해 얻는 에너지만큼은 아니다. 화원 온실에 마주친 금낭화를 보는 순간 내심 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5월에서 6월까지 피는 쪽동백이 떠오른 것이다. 산목련이나 쪽동백은 잊지 못하는 깊은 추억이 있는 꽃들이다. 특히 산목련은 나에게 있어 꽃 중에 꽃(花中花)이다. 그만큼 마음에 둔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목련, 함박꽃나무 나무라 부르고 간혹 천녀목란(天女木蘭)이라 부르며 귀히 여기었지만 북한에서 목란이라 부른다. 산목련의 꽃말은 수즙음이다. 일반 목련은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지만 산목련은 잎이 다 나오고 성장 후 꽃이 피는 것이 일반 목련과 다르다. 쪽 동백이 봄이 무르익으면서 만개됨으로 5-6월에 피고 그 뒤를 이어서 7월과 8월에 산목련이 뒤를 따른다.
암벽등반가들에게 겨울은 암흑기다. 겨울이 시작되면 암벽등반을 멈춘다. 대신 설산을 오르거나 빙벽등반에 심취한다. 그러다 봄이 오면 꽃마중 산행을 목적으로 한라나, 소백, 태백을 오른다. 그러다 기온이 오르는 4월 중순이나 5월에 들어서면 다시 암벽등반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초겨울에 정비한 암벽장비는 주머니에 담아 등반 장비 창고 선반에 곱게 모셔 놓고 자일은 빙벽등반에 도 필수장비이기 때문에 사용하고 설산등반 시에도 확보용으로 안전벨트와 카라비너, 아이스 스크루 하켄은 사용하게 된다
동계 원정등반으로 한라산을 다녀 온 후 설산등반 장비와 관련된 산악장비를 정비한 후 주머니에 담아 창고선반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봄에 사용할 암벽장비를 꺼내 종류별로 분류한 후 상태를 점검하고 폐기할 것은 하고 정비가 필요한 장비들은 전부 손을 보고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암벽등반 전용 배낭에 담아 침대밑에 가지런히 밀어 놓았다. 이런 일은 대부분 겨울방학과 봄 방학을 이용하여 부원 또는 개인적으로 하는 년례행사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시는 어머니는 늘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초기 몇 년을 보시더니 그 이후로는 등짐을 지고 산으로 떠날 적마다 잘 다녀오라 하시며 경비를 주시곤 하셨다.
분명 봄이 오는 길목에 들어서면 문안을 떠나 온 가족이 이사를 온 집 문화주택 마루겸 거실 안쪽으로 봄 빛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즈음이면 어머니는 대대적인 집안 청소를 이끌어내셨다. 대가족을 손수 집안 살림을 이끌어 오실 수 있었던 것은 친정어머니이신 외할머니께서 막내딸을 도우시려 상주해 주셨다. 대신 외삼촌들께서 자주 왕래해 주셔서 집안은 늘 오후가 되면 더더욱 북적 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문안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졌지만 돌아가신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문화주택 대단지로 이사를 하면서 외가와 너무 먼 거리 때문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사 후 살림은 어머님 단독으로 하시게 되었지만 어머니의 살림 솜씨는 늘 시원시원하셨다. 자식들 중 누군가 도움을 드려야 하였지만 딸이 없어 곤란하였다. 할 수 없이 큰 형님과 나는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돕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성장하면서 각자 의류나 이불 등은 직접 세탁하여 입는 것을 불문율이었지만 목화솜이불에서 전부 인조 솜으로 바꿔 주셔서 세탁에도 어렵지 않았다. 각자 사용하는 방청소는 스스로해야 하고 다른 청소는 형제들끼리 교대로 일정을 잡아 어머님을 돕는 형태로 바뀌어 어머니에게 도움을 드리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