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는 표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20절의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그 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사람이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며 복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 22:14절을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합니다.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택함을 입은 자가 적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귀하고 복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아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나를 택하시고 건져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 피로 말미암아
나를 죄에서 건져 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신자에게는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은 고난인데
신자는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 길을
억지로 인상 쓰면서 가게 되지 않습니다.
신자의 속은
그리스도의 귀하고 복된
은혜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가신 길만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것은
오기도 고집도 아닙니다.
고난을 받고 죽어도 좋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크고 귀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노아 홍수 때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겨우 여덟 명만 구원 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양심의 간구니라”
는 말을 합니다.
노아 때 물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 시대 때 있었던 심판과 구원의 사건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난
구원과 심판의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18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불의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살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즉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은 자이고,
다시 사심과 함께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에서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노아 홍수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은혜가 아니라,
택한 자를 향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얼마나 크냐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물은
노아 홍수 때의 물을 의미합니다.
이 물이 이방인에게는 심판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구원받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존재임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난 자가 되었으니
성령으로 산 자가 가야 할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4:2절에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는 말을 합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
심판에 빠져 죽은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산 자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노아 홍수 때의 물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노아 때 불의한 모든 자가 죽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덟 명만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남은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분명 심판이 있기 전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이제부터 육체의 남은 때는
나를 살리신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을 때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었던 함이
저주를 받습니다.
다른사람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은혜 입은 자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고 성령을 받았다면,
심판에 처할
사람들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성령으로 살아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신자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이고 새로운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살았고
새롭게 된 신자라면,
이제부터는
육체의 더러움도
다 제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
왜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라는 말을 합니까?
이것은
세례나,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나,
새롭게 되었다는 것,
성령을 받았다는 말들이
신자가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면서,
즉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가는 의미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을 받았으면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의 더러움을
자신에게서 잘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고
성령을 입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고
더러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고,
새롭게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선한 양심은
성령이 함께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나같이 불의한 자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고,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죽은 내가 다시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은
나를 살리신 은혜만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은혜가 귀하기에
은혜만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증거이고
그 마음이
노아의 물로써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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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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