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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同春) 선생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유세차 숭정 계축년(1673, 현종14), 초하루가 경오일인 5월 11일 경진일에 문하생 파평 사람 윤증은 삼가 향불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면서 공경히 동춘 송 선생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고하는 바입니다.
아아, 선생께서 병환이 위중하셨을 때 저는 군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세 가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고 무덤에서 선생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사방에서 모두 와서 참석한 자리에 가지 못하였습니다. 아, 그리하여 제자가 스승을 존모하는 정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하지 못하였고 선생께서 저를 돌보고 보살펴 주신 의리를 유명(幽明) 간에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안에 재앙이 계속해서 찾아드는 것이 근심스럽고 저의 슬픔을 풀 길 없는 것이 애통하여 뒤늦게 선생의 묘소에 찾아와 이렇게 한번 통곡을 해 보지만 고인이 저승에서 다시 살아 올 리는 없으니,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할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시어 온화하면서도 근엄하셨으니, 오직 옥(玉)으로만 그 덕을 비유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도(道)가 남쪽으로 내려와 사계(沙溪)에게 있었는데, 그 문하에 뜻을 같이하는 두 분이 있어 마치 수레의 양 참마(驂馬)처럼 나란히 활동하셨습니다. 경(敬)을 마음의 약석(藥石)으로 삼고 예(禮)를 행실의 지표로 삼아 방에서 마음을 지키고 본성을 함양하였는바, 자연히 그 덕화가 사방으로 미치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이른 심오한 경지를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만, 가만히 그 외양을 보자면 한 줄기 온화한 바람과 같으셨습니다.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실 때에는 신독재(愼獨齋) 선생께서 앞에 서셨고 다시 나아갈 때에는 우암(尤庵)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조정 반열에서의 엄숙한 모습은 주공섬(朱公掞)의 풍도와 같았고, 경연(經筵)에서의 간절한 마음은 범순부(范淳夫)가 아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효종(孝宗)의 10년 대업으로 우리나라 천년의 명성이 수립되게 하였으니, 이는 유자(儒者)들이 훌륭한 성군(聖君)을 만나서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세도(世道)가 형통하고 밝은 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성상(聖上)에게 있어 선생은 은나라 무정(武丁) 때의 감반(甘盤)처럼 세자 시절에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이었습니다. 따라서 빈사(賓師)로서 더욱 융숭하게 대접을 받으셨지만 도리어 진퇴에 있어서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떠나려 해도 성스러운 주군(主君)을 잊기 어렵고 남아 있으려 해도 옛 도리로 볼 때 온당치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진퇴에 연연해한다는 비판을 꺼리겠습니까. 끝내는 성상에 대한 충심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아아, 상하의 교제는 예나 지금이나 온전히 하는 경우가 드물고 한 번 쇠하고 한 번 성하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운명대로 살다가 순리대로 떠났기에 군자의 죽음을 일러 할 일을 마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선생이 돌아가시자 태산이 무너진 듯 사림들이 애통해하니, 아아, 너무나 슬픕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친께서는 선생과 도의(道義)에서 뜻이 맞아 친애하고 인정하는 뜻이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의 의리가 같지 않아 생활의 형편이 자연 다르게 되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말씀하기를, “요즈음 친구 간에 충고해 주는 의리가 미약해져서 오늘날 진퇴에 대한 행적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나라와 운명의 고락을 함께한다는 점에서는 귀결점이 같은 것이다. 응당 충고하고 선도하는 책임을 다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보탬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상호 간에 어찌 하는 말이 반드시 합치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선생께서는 선친의 충고를 가장 잘 받아들이셨습니다.
지난해 봄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을 때 화제가 선친에게 이르자 선생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에 지극한 정리(情理)가 갈수록 더욱 돈독하신 데에 감동하였고 외로운 처지에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저로서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찾아뵙고 문후를 여쭙기를 평생 동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이승과 저승으로 영원히 갈리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음성이 귀에 쟁쟁한데 어찌하여 그 온화하던 모습을 뵐 수 없게 되었단 말입니까. 술을 부어 구천(九泉)에 이르게 하고 향불을 피워 신령(神靈)을 부르는 바이니, 영험하신 신령께서는 부디 왕림하여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합니다. 부디 흠향하소서.
<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
祭同春先生文
維崇禎歲次癸丑五月庚午朔十一日庚辰。門下生坡平尹拯。謹以甁酒辨香之奠。敬告于同春宋先生之墓。嗚呼。先生之疾也。小子不得聞三貴之誨。先生之窆也。小子不及與四方之觀。嗟小子宗慕之誠。闕廢於始終之際。而先生眷余之義。孤負於幽明之間。慼家禍之並臻。痛吾哀之莫洩。尋荒阡而一哭。已九原之難作。嗚呼哀哉。恭惟先生天賦絶俗。溫如栗如。惟玉比德。沙溪之上。吾道其南。爰有同人。翶翔兩驂。敬以爲藥。禮以爲服。一室存存。輝光四達。要其造奧。我敢僭論。竊觀其外。和風一團。一出也。愼老爲之先再出也。尤翁爲之後。班行肅穆。朱公掞之風裁。經席懇惻。范淳夫之敷奏。俾先朝十年之業。樹大東千載之聲。匪直儒者之遭遇。允亦世道之亨明。逮我當宁。有若甘盤。雖賓師之益隆。反進退之多艱。欲去則聖主難忘。欲留則古義未安。寧屑屑之憚譏。竟炳炳之如丹。嘻噫上下之交。古今鮮全。一消一長。孰非在天。任運觀化。君子曰終。惟其山頹。士林之恫。嗚呼哀哉。念我先人。契以道義。親與之意。晩而益至。惟出處之不齊。蓋飢飽之自異。先人嘗言。諍友道微。縱 今日動靜之殊迹。繄吾人休戚之同歸。當盡忠善之責。庶有公私之補。豈所言之必合。最夫子之能受。昨歲之春。床下之拜。語及先人。爲之出涕。感至情之愈篤。慰孤露之深悲。願源源而來候。指百年而爲期。曾日月之幾何。奄今古之永隔。尙金聲之在耳。詎春容之可覿。酒酹徹泉。香達一炷。尊靈洋洋。倘垂臨顧。嗚呼哀哉。尙饗。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조부는 군수를 지낸 송응서(宋應瑞)이고, 부친은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 모친은 김은휘(金殷輝)의 딸 광산김씨이다. 외조부 김은휘는 김장생(金長生)의 부친인 김계휘(金繼輝)와 종형제간이다.
송이창은 김장생과 같이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배웠다. 어려서부터 부친 송이창의 엄격한 훈도를 받았고,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자 · 주자 · 이이(李珥)로 이어지는 학문을 정통으로 삼고 주자학과 성리학의 정맥을 잇고자 하였다. 이이(李珥)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이(理)와 기(氣)에 대해 서로 선후(先後)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는 것이며 호발(互發)하지 않는 묘합의 관계로 보았다.
11촌 숙질간인 송시열 · 이유태와 함께 김장생과 김집의 삼대고제(三大高弟)로 학문경향을 같이 하였다. 사계학파(沙溪學派)인 유시(兪柴) · 윤문거 등은 물론 김상헌 · 조석윤 · 김경여 · 조익 등 반청 경향의 인물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또한 그의 문인 중에는 정승에 오른 권상하 · 민정중 · 조상우 등이 있고, 부원군에 오른 민유중 · 김만기 등이 있다.
1624년에 진사가 된 뒤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았다. 1630년 세마에 제수된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동몽교관 · 한성부 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업을 닦았다. 이후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이 이조 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집의에 올랐고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 · 원두표 등 반정공신(反正功臣)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키는 한편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의 중심에 서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입장을 가졌으며, 북벌 준비과정에서 선양민후양병론(先養民後養兵論)을 주장하여 먼저 양민을 중시하는 주장을 하였고, 또한 군주가 모든 정치를 현신에게 위임한다는 현민위임론(賢臣委任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反淸政策)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효종의 북벌계획이 좌절됨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이조참의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1658년 대사헌과 이조참판 겸 좨주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 · 지중추원사 · 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이에 송준길은 송시열의 기년제(朞年制)를 지지하여 허목 · 윤선도 등 남인의 3년제 주장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 · 대사헌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탄핵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1665년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죽은 뒤 1673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듬해 인선대비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들의 주장이 관철되어 1675년 허적(許積) 등의 공격으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가 1680년에 복구되었다. 1681년 시호로 문정(文正)이 내려지고, 이 해에 김장생과 함께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되었다. 그 이래로 여러 차례의 상소가 이어져 175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좋아하였으며 뛰어난 자품을 바탕으로 노력을 하여 10세가 안되었을 때 당시 명필이었던 이시직(李時稷)이 보고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스승인 김집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영향으로 석봉체(石峯體)를 주로 연마하였다. 김집은 "다만 글씨를 쓸 때 자체가 짧고 작으니 크기를 조금 키우면 좋겠다. 획을 크고 작게 쓰는 것만 신경 쓰지 말고 획을 정밀하고 굳세게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평하였다. 이 말은 서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으로 조선 성리학자들이 추구하였던 서예의식과 일관한다. 또한 "만약 자형을 길게 쓰는데 힘쓰고 힘을 다해 정밀하게 쓴다면 결코 당세의 명필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고칠 점을 지적하였다.
김집 외에도 홍명하(洪命夏) · 이정(李霆) ·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의 서첩을 통해 글씨를 폭넓게 섭렵하였다. 독특한 서풍의 송준길의 글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렸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문장은 우암(文章尤庵)이요, 명필은 동춘(名筆同春)'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또한 '우암찬(尤庵撰), 동춘필(同春筆), 문곡전(文谷篆)'이라는 말에서 당시에 주로 송시열이 문장을 짓고, 송준길이 비문 글씨를 쓰고, 김수항이 전액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송준길은 왕실의 시책(諡冊)이나 병풍 등을 쓰라는 하명을 받을 정도로 왕실과 공경대부들 간에 명필로 인정받았다.
대표적인 글씨 중에 <송이창묘비(宋爾昌墓碑)>(1628), <이시직묘갈(李時稷墓碣)>(1653), <송갑조신도비(宋甲祚神道碑)>(1665), <박팽년유허비(朴彭年遺墟碑)>(1668), <돈암서원비(遯巖書院碑)>(1669), <김성휘묘비명(金成輝墓碑銘)>(1690) 등이 있는데 필획이 다소 비후하면서, 원숙하고 엄정한 필의를 보여준다. 대전 계족산 남쪽 기슭에 있는 비래암(飛來庵) 입구의 바위에 각석한 <초연물외(超然物外)>나 현전하는 대자(大字)를 보면 석봉체와 안진경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해서와 행서가 섞인 해행서(楷行書)에 능하였고 주로 비문 글씨를 많이 썼으며 비후하고 굳센 필의가 특징이다. 초서는 한석봉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일부는 당시 유행하던 황기로와 양사언 등이 즐겨 쓴 연면초(連綿草)를 썼다. 당시 초서를 잘 쓴 윤순거와도 친하게 교유하여 영향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비갈에 쓴 전서(篆書)가 있는데 단아하고 근엄한 소전을 주로 썼다. 일부 비문에서 볼 수 있는 예서는 해서와 예서 필의가 섞인 것으로 전절(轉折)이 과장되고 자형이 긴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예서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묵적 중에는 드물지만 한글작품도 있다. 후손이 선조(先祖)의 한글편지만 모은 《선세언독(先世諺牘)》에 한글 간찰 3점이 전하는데 당시 선비들의 한글 편지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송시열의 글씨와 함께 일컬어지는 양송체(兩宋體)는 17세기 조선 서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남구만 · 송규렴 · 박태유 · 박태보 · 권상하 · 이의현 · 송요좌 · 이재 · 민우수 · 송병원 · 송상기 · 김진옥 · 이간 · 민진원 · 이양신 · 김진상 · 민백남 · 홍계희 · 김묵행 · 이채 · 송명흠 · 송래희 등이다. 양송체의 성행은 18세기에 안진경체가 일시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가 송시열의 묘표와 이순신의 신도비를 안진경 글씨로 집자(集字)하도록 명한 것이 그 예이다.